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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극우 팔레스타인 이재명 정부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긴 글

쿠데타 세력 일소 과제에 비추어 반민특위 경험 돌아보기:
왜 친일파 청산은 이루어지지 못했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하자 윤석열의 12·3쿠데타를 지원·동참한 세력에 대한 청산 요구가 커지고 있다. 다행히 쿠데타 우두머리 윤석열은 재구속됐지만, 아직도 검찰과 경찰, 군부 등 국기기관 내 쿠데타 세력 척결 과제는 남아 있다.

윤석열의 쿠데타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불안정 심화, 경제 위기, 이로 인한 정치적 양극화 확대라는 다중의 위기 속에서 권위주의적 통치를 획책한 것이었다. 윤석열은 쿠데타로 정적을 일거에 제거하고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해 대중의 불만을 억누르고자 했다.

1948년 이승만도 갈수록 첨예해지는 냉전 속에서 정부를 수립했다.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4.3항쟁 등 민중 저항을 잔인하게 짓밟고 수립된 이승만 정부는 그 정통성이 취약했다. 이승만은 친일 세력에 더욱 의존했고 국가보안법과 같은 권위주의 통치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에 대한 전 국민적 기대와 관심 속에 출범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이승만과 극우들의 방해와 국가기구 내 포진한 친일파 세력들에 의해 흐지부지 돼 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이승만은 “친일청산은 국론분열을 조장”하고 “지난날에 구애되어 앞날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대중의 열망을 거슬러 반민특위를 해체시켰다.

그 핵심에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미군정이 설립되자 친일파들은 미군정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기사회생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승만 정부하에서 주요 요직을 차지했다.

미군정이 친일파를 기사회생시키다

오는 8월 15일은 해방 80주년이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 통치하에서 고통 받은 민중의 가장 큰 열망은 토지 개혁, 중요 산업 국유화 등을 통한 사회 변혁과 이를 위한 친일파 청산이었다. 해방 후 친일파의 규모는 부일협력자 10만~20만 명, 민족반역자 1,000명 내외, 전범자 200~300명 정도였다.

일제 항복 선언 후 전국 곳곳에서 민중들이 억압과 수탈의 상징인 관공서를 공격했고, 친일 관리를 비롯한 친일파의 집을 습격했다. 민중들은 눈에 띄는 친일파를 응징했고, 겁에 질린 친일파는 자취를 감췄다.

그리하여 해방 공간에서 한국인 경찰의 90퍼센트가 이탈해 일제 강점기의 국가기구는 와해 수준이었다. 그 권력의 공백을 민중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건국준비위원회가 수립되고 지역에서 인민위원회가 우후죽순 건설됐다.

철도, 전기를 포함한 공공시설과 주요 산업 자본의 93퍼센트가 일본인 소유였고, 그들이 떠난 산업에서 노동자들의 공장 자주관리 운동이 펼쳐졌다. 농민들은 토지 개혁을 요구하며 3.7제 소작료(소작료 부담 완화) 투쟁을 벌였다.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여운형)는 1945년 8월 28일 “친일파 및 일본인 재산을 몰수하여 공공시설·광산·대산업시설·공장들을 국유”로 할 것을 발표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의 상황을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수 있는 화약고”라고 봤다. 따라서 미국의 최대 관심은 혁명적 분위기를 잠재우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통치 구조를 고스란히 활용했다. 1945년 9월 9일 미군정은 ‘포고 제1호’(“조선 인민에게 고함”)를 통해 기존 통치 기구의 존속과 식민지 관리의 유임을 선언했다.

미군정은 경무국이 갖고 있었던 (일제 통치하 범죄 또는 음모에 관여됐던) 70만 명의 지문 기록을 활용했는데, 이는 대부분 저항했던 독립 투사들이었다.

미군정은 쫓겨난 일본인 관리 자리에 친일파를 고스란히 앉혔다. 그 결과 친일 관료들이 경찰, 사법부 및 행정 분야에 국가권력의 주요 요직을 장악했다.

경찰 책임자였던 윌리암 마그린은 다음과 같은 말로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많은 사람들이 경찰로 다시 복무하고 있다. 그들이 일제를 위해 좋은 일을 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일제 식민지 시절 경찰 중 약 5,000명이 미군정 시기에 재기용됐다. 1946년 10월까지 임명된 서울시 내 10개 경찰서장 중 1명이 일제 시기 군수 출신이었고 9명이 친일 경찰이었다. 당시 경찰 간부직만을 본다면 약 80퍼센트가 일본 경찰 또는 일본군 출신이었다.

또한 미군정은 한민당으로 대표되는 친일·친미·반공주의자들을 하위 파트너로 삼았다. 미군정사령관 하지는 이렇게 말했다. “남조선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방파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개혁을 반대하는 한민당계의 극우파가 가장 믿음직한 동맹세력[이다.]”

우익 지주와 반민족 행위자 중심인 한민당은 기회주의적 화합을 주장하며 친일파를 적극 포섭했다. 한민당의 김준연은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 제정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국내에 대중적 기반이 전혀 없었던 이승만도 귀국 후 청년단체를 비롯한 우익 세력을 조직하고, 한민당과 연합한다. 해방 직후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친일파까지 포함한 단결”을 주장해 좌파들의 비판을 받았다.

일제하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박해하던 악질 고등계 경찰 출신자들도 다시 등용됐다. 미군정 시기 친일 경찰의 억압과 횡포, 관리들의 부패에 대한 대중의 반감은 갈수록 커졌다. 물가 상승과 쌀 부족이 겹쳤다. 대중의 불만과 분노는 1946년 10월 인민항쟁으로 터져나왔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미군정은 해방 후 최초의 계엄령을 선포해야 했다.

국가기구가 반민특위를 집요하게 방해하다

10월 인민항쟁으로 친일파 청산 요구가 터져 나오자, 1946년 12월 미군정의 입법 기관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모리 간상배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했다.

당시 여운형이 주도한 좌우합작위원회는 “친일파 혹은 민족반역자의 규정에 있어 적극적인 친일파와 부득이하게 친일한 자를 구분하자”는 주장을 했다. 그러자,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은 “미군정 경찰에 재직 중인 대부분의 친일 경찰관들을 생계유지를 위해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한 부득이한 친일파일 뿐”이라고 항변했다. 이는 친일파와 우익들에게 자신감만 줄 뿐이었다.

결국 미군정이 “범죄자의 규정이 애매하여 부득이하게 친일한 자들을 구별해 내기가 어려우므로 조선인의 정신적 통합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며 법의 인준을 거부하면서 특별법은 시행되지 못했다.

미국은 해방 이후 냉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친일파 청산이 남한 사회를 흔들고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은 민중의 저항을 진압하고 이승만 정부 수립을 지원했다.

1948월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됐고 이에 반대하는 저항이 커지자, 조병옥의 지시로 향보단이라는 준경찰 조직이 만들어져 경찰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미국은 제주 4.3항쟁 당시,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타 지역과의 해상 교통로를 일절 차단하면서 미군함정을 동원해 해안을 봉쇄했다.

미군정하에서 경찰 규모는 약 3만 명이었는데, 이승만 정권 수립 직후는 3만 5,000명으로 증가했다. 이외에도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조선민족청년단 등 극우 청년단체가 경찰의 하수인 노릇을 해 왔다.

군부도 마찬가지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에 의해 장악됐다. 친일파를 앞세워 만든 한국인부대로 악명이 높던 간도특설대 출신의 백선엽이 육군참모총장이었다. 백선엽은 항일 무장세력에 대한 탄압 활동과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한 악질적인 친일 부역자다. 그런 자를 오늘날에도 국방부는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추켜세우고 있으니 오늘날에도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은 것이다.

이승만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8월까지 현직 대법관 5명, 대검찰청 검사 4명, 고등법원장 5명 전원, 지방법원장 12명 중 11명이 일제 시기 판사 또는 검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1948~52년 행정 부처의 국장과 과장의 경우 55.2퍼센트가 일제 관료 출신이었고, 이 시기 장관 중 4명, 차관 중 15명이 일제 관료 출신이었다.

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 회의 이후 촬영된 기념 사진

1948년 5.10총선거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 좌익은 물론 중도파와 우파의 김구 계열까지도 불참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였으나 이승만과 한민당계가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국회의원 198명 중 무소속이 85명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만큼 남한 대중은 미국과 이승만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컸고,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상황 탓에 7월 17일 공포한 제헌헌법에 “8.15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이후 반민법과 반민특위 구성의 근거가 마련됐다.

8월 5일 제헌국회에서 반민법이 통과되고, 9월 22일 공포됐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미군정 시기 선출되지 않은 국가기구들에 친일파를 대거 포진시켰기에 이승만 정부는 처음부터 반민법에 만만치 않게 반발했다.

반민법 제정 과정에서 친일파 범위, 처벌 수위 등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이루어졌고, 일부 의원들은 정부 수립 초창기에 많은 사람들을 처단하는 것은 사회 혼란을 조장할 뿐이라는 이유를 들어 신중론을 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48년 10월 23일 반민특위가 발족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 화신 재벌 박흥식을 1호로 하여 대표적인 친일파들을 검거했다. 1월 25일에는 친일 경찰 노덕술을 체포했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8개월 동안 총 682건을 다뤘는데 체포 305건, 검찰 기소 221건, 재판부 판결 40건에 불과했다. 징역 이상의 형을 받은 자는 14명에 불과했고 그중 4명은 집행유예로 석방돼 10명만이 형을 받았는데, 그마저도 1950년 초 대부분 석방됐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최종적으로 반민법이 폐지돼 친일파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조차 사라졌다.

친일파 청산의 좌절과 오늘날의 교훈

친일파 청산의 기대를 안고 출범한 반민특위는 결국 흐지부지 끝났다. 반민특위는 친일파 처벌에 적극적인 인물로만 구성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친일파 처벌을 반대한 인물도 포함했으니 한계가 너무도 분명했다.

이승만은 ‘유능한 인재 등용,’ ‘사회 질서 회복’ 등을 이유로 친일 경찰 노덕술을 정부가 보증해서라도 석방시킬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노덕술 구속은 향후 더 많은 친일 경찰로 확대될 수 있기에 이를 차단하려 한 것이다.

우익들은 1948년 9월 23일 반민법 반대 국민대회를 개최해 국회에서 반민법 제정에 앞장선 의원들을 향해 “민족 분열을 일으키는 공산당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다.

10월 19일 여순 반란 사건은 이승만 정부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가뜩이나 4.3항쟁을 무참히 짓밟고 수립한 이승만 정부였기에 군인들의 항명은 그 위기를 가속시켰다. 당시 이승만은 계엄을 선포하고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탄압을 강화했다.

1949년 5월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했다.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를 주도한 김약수 국회부의장을 비롯한 소장파 의원 10여 명에게 공산당 프락치 혐의를 씌워 탄압했다.

북한을 핑계로 반공 논리를 내세워 친일파 등용과 독재 정부 수립을 정당화한 것이다. 결국 이승만 정부의 경찰이 6월 6일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탄압함으로써 친일파 청산은 용두사미로 끝났다.

아무리 임시 기관이라도 반민특위 자체도 국가기관이었다. 그러나 내각은 물론이고 신생 대한민국의 골간인 경찰·검찰·군 등의 국가기관에 친일파가 포진해 있었고, 그들이 미국과 이승만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반민특위는 힘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국가기관 숙정은 그만큼 어려운 일인 것이다. 지금 특검을 통해 군·검찰·경찰 내 쿠데타 세력을 숙정하는 일이 만만찮은 이유다. 쿠데타 세력 척결을 압박하는 대중 행동이 필수적이다. 반민특위가 설립되는 시점에 이미 국내 대중 항쟁은 모두 패배한 상태였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반공 독재 정부 수립을 위해 친일파들을 대거 기용했고, 이들이 극우가 말하는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 됐다. 우익들이 친일파 청산을 대한민국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반발하는 것도 그 이유다. 아직도 뉴라이트를 비롯한 우익들과의 역사 전쟁이 계속되는 이유다.

청산하지 못한 친일 세력은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등 친일·친미·독재 세력에 뿌리 깊게 박혀서 이어져 왔다. 그들은 한국의 자본 축적을 위해서 미국 제국주의에 빌붙었다. 그런데 윤석열의 쿠데타도 미국 제국주의의 지원을 기대하며 정치적 위기를 무력으로 돌파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친일파 청산과 마찬가지로, 쿠데타 세력 척결도 제국주의와 국가기구에 대한 도전과 연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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