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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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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전쟁과 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1 그런데 이러한 분쟁들에 연루된 당사자들은 계급의 관점이 아니라 민족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보통이다. 단일한 형태로는 가장 중요한 지배 이데올로기라 할 종교를 민족주의가 대체해 온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옛 제국주의 국가들의 민족주의가 있는가 하면, 그 내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의 민족주의도 있다. 예컨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 바스크 민족주의 등이 후자의 경우이다. 또한 아일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엘살바도르2 등지에서처럼 반제국주의 해방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의 민족주의가 있는가 하면, 이란이 그러하듯 입으로는 반(反)제국주의를 외쳐 대면서도 국내적으로는 지독히 억압적인 지배자들의 민족주의도 있다. 또한 인도의 시크교도처럼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자치운동 성격의 민족주의도 있다.
이렇듯 혼란스러울 만큼 다양한 민족주의에 대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마르크스주의는 과연 민족 문제가 제기하는 여러 문제들에 관한 적절한 길잡이가 되고 있는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기초는 그 어떠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갖고 있는 이론적 기초와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역사의 원동력은 계급투쟁이다. 따라서 현대 사회의 주된 갈등은 국제 노동계급과 국제 자본가 계급 사이의 갈등이며, 민족 분규는 계급투쟁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으로서, 단지 계급투쟁이 취하는 독특한 형태일 뿐이다. 《공산당 선언》은 이렇게 선언한다. “노동자에겐 조국이 없다.”
민족주의는 이와 정반대로 본다. 세계가 계급으로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 민족으로 나뉘어 있다고 본다. 파시즘부터 오늘날 “제3세계”의 여러 정권이 내세우는 ‘좌파적’ 민족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 입장의 사람들은 계급투쟁이 민족주의를 크게 위협한다고 여긴다. 계급투쟁이 민족의 통합을 저해할 뿐 아니라 일부 민족 구성원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 고결한 ‘국익’을 희생시키려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익’을 위협하는 계급을 누구로 규정하느냐에 따라(‘독점자본가 계급’이냐, ‘탐욕스러운 노동계급’이냐에 따라), 민족주의는 급진적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반동적인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계급보다 민족을 앞세우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임에는 변함이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적 기초만 민족주의와 다른 게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그 혁명적 전략 자체가 국제주의적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역할이 세계 경제를 창출하고 각국의 민족 경제는 그 구성 요소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각국 생산력의 국제화야말로 공산주의 수립을 위한 객관적 전제 조건이 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주의가 한 나라에서 건설될 수 있다는 명제를 다음과 같이 명백히 부정하고 있다.
[세계적 규모의 ― 필자] 이러한 생산력 발전은 꼭 필요한 실제적 전제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발전이 없으면 빈곤과 결핍이 보편적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결핍 때문에 필수품들을 얻기 위한 투쟁이 재연되면서 예전의 그 모든 추악한 일들이 필연적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은 성공하려면 반드시 국제적이어야 한다. 1917년 10월 러시아 노동계급을 권력 장악으로 이끌었던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국가가 살아남으려면 혁명이 반드시 서유럽으로 확산돼야 한다고 봤던 것도 이 점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가 1919년 코민테른 창립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코민테른 규약(1920년 제2차 대회에서 채택됐다)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 새로운 국제노동자협회를 창립한 것은 상이한 나라의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목표를 위해 공동 행동에 나서도록 조직하기 위함이다. 그 목표는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국제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모든 계급을 완전히 폐지하고 공산주의 사회의 첫 단계인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제사회주의자들은 여러 민족국가로 나뉘어 있는 이 세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몇몇 저작들에서는 민족 문제를 자본주의가 장차 발전하면 사라져버릴 현상으로 여기는 부분적인 경향이 있었다.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민족국가의 형성이 국내 시장의 창출을 위해 꼭 필요하며 그것 없이는 자본주의가 경제를 지배할 수 없다고 봤다. 그러나 그들은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민족들이 국가로 분리돼 대립하는 현상은 부르주아지의 발전, 교역의 자유, 세계 시장, 생산양식의 균일화와 그에 따른 생활 조건의 균일화 때문에 나날이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에서 이런 견해는 하나의 경향성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이런 조짐들을 하나의 이론으로 일반화한 것은 카우츠키였다. 그의 이론은 자본주의가 세계 체제로서 발전할수록 개별 민족국가들이 설 자리는 점차 좁아지리라는 것이었다.3 그러나 실제로는 전 세계에 걸친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민족 문제가 약화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첨예해졌다. 19세기 후반에 처음 등장하는 세계 시장은 제국주의라는 형태를 띠었다. 다시 말해, 몇몇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세계를 지배했다. 그리고 이 제국주의는 민족 문제라는 견지에서 볼 때 몇 가지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제국주의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국가자본주의적 경향, 즉 국가와 대자본이 단일한 경제 복합체로 통합되는 경향을 수반했다. 그러한 경향의 결과로서, 서로 경쟁하는 자본들 사이의 갈등이 종종 관련 민족국가들 사이의 대결이라는 양상을 띠게 됐다. 189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의 ‘고전적’ 제국주의 시기에는 제국주의 열강이 저마다 더 유리하게 영토를 분할하려고 벌인 경제적 투쟁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원인이 됐다.
둘째, 선진국들의 이런 국가자본주의화 경향에 발맞추어 선진국 노동자 운동 안에서 개혁주의적 노조 관료들이 성장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과 자국 자본주의 국가의 이익이 긴밀하게 관련돼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국익 이데올로기가 선진국 노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셋째, 제국주의 국가의 착취와 억압을 받는 제3세계 저개발국들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됨에 따라 그들 나라에서 대규모 민족 운동이 일어난다. 이들 제3세계 노동자·농민이 제국주의에 맞서 일으킨 반란은 거의 예외 없이 민족주의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난 한 세대 동안 몇몇 지역에서 새로운 자본 축적 중심지들이 등장했다. 브라질·남한 등 제3세계 신흥공업국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나라의 지배계급은 서방 제국주의의 ‘앞잡이’나 ‘매판’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라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지니며, ‘본국’에 맞서, 또 같은 처지의 다른 나라에 맞서 자신의 이익을 지킬 능력도 갖추고 있다. 이런 경제적 변화로 ‘아제국주의’가 나타났는데, 이 신흥공업국들은 특정 지역에서 지배적 세력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다 할 경쟁국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그리스와 터키의 관계처럼 군사적 경쟁 상태를 초래하고, 이란과 이라크가 그랬듯이 때때로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낳았던 제국주의 열강의 대립 양상이 오늘날 세계 여러 지역에서 소규모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방식으로 민족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풍토병처럼 만연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현상에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
민족 문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논쟁은 제1차세계대전 전에 동부와 중부 유럽을 지배하던 두 다민족 대제국(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이 사회주의자들에게 제기한 문제들을 둘러싸고 시작됐다.
“민족들의 감옥”이라 불렸고 대러시아인들이 소수 특권층을 이루고 있던 제정 러시아의 경우 가장 중요한 민족 문제는 폴란드 문제였다. 폴란드는 18세기에 주변국들(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됐다. 이 나라의 최대 지역인 폴란드 왕국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외세 지배에 항거하는 일련의 영웅적 봉기들이 일었고 19세기 유럽의 사회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에게 폴란드는 마치 20세기 중반 미국에 맞선 베트남과 같은 존재였다.
폴란드에서 산업이 발전하고 그에 따라 도시 노동계급이 출현하게 되자 민족 운동의 주도권은 세습 귀족과 부르주아 급진주의자들의 수중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됐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정치적 차이점들이 제기됐다.
폴란드 사회당은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적인 입장을 채택해 민족 독립 투쟁이 최우선이라고 주장했다. 폴란드 노동자들이 자력 해방을 위한 투쟁에 나서는 것은 민족 독립 투쟁에 힘을 집중해야 할 때 이를 저해하고 폴란드 민족의 단결을 위협한다고 간주됐다. 폴란드 사회당은 심지어 1905년 러시아 혁명기에 폴란드 노동자들이 대중 파업에 참가하는 것에도 반대했다.
폴란드 사회당의 이런 애국적 사회주의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레오 요기헤스가 이끄는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인 폴란드·리투아니아왕국 사회민주당의 도전을 받았다.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사회당의 민족주의가 폴란드 노동자들과 러시아 노동자들의 단결을 어떻게 위협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폴란드의 민족 독립 요구는 시대착오요 반동이라고 주장했다.
룩셈부르크 주장의 출발점은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개진된 폴란드 사회 분석이었다. 룩셈부르크는 그 논문에서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산업 자본주의 발전으로 양국을 통합하는 단일한 경제 조직이 생겨나고 있음을 보였다. 그 결과 폴란드 부르주아지도, 폴란드 노동계급도 민족 독립으로부터 얻을 득이 없다고 주장했다. 폴란드 부르주아지의 경우는 그들이 러시아 시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며, 폴란드 노동계급의 경우는 그들과 러시아 노동자들이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폴란드 사회당의 주된 사회적 기반인 프티부르주아지만이 민족 독립이라는 환상을 계속 품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논문을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끝마쳤다.
폴란드와 러시아의 자본주의적 융합이 가져오는 최종 결과 하나는 폴란드 부르주아지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뿐 아니라 러시아 정부의 의도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그것은 바로 폴란드 프롤레타리아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동맹으로 ‘무덤을 파는 사람들’이 장차 형성돼 처음에는 러시아 전제군주정을, 다음에는 폴란드-러시아 자본주의를 타도할 것이다.
그 후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민족주의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확장해 민족 독립 요구를 일반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으로 발전시켰다. 일련의 논문들에서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형성 때문에 민족 독립을 위한 물질적 기초가 파괴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모든 기존 국가들을 민족 단위로 분할하고 그 민족들의 관계를 소규모 민족국가들 간의 관계로 제한하고자 하는 복고적 기도는 가망이 전혀 없는, 역사적으로 반동적인 모험에 불과하다.”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활동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룩셈부르크와는 아주 다른 입장을 발전시켰다. 붕괴 직전의 이 다민족 국가는 오늘날의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의 상당한 지역을 영토로 삼고 있었는데, 지배 민족들(독일 민족과 마자르족)과 여러 피억압 슬라브계 민족들 사이의 민족 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이 노동자 운동 자체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을 지도하던 이론가들은 룩셈부르크와 마찬가지로 노동자 운동의 단결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합스부르크 국가[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분열을 막음으로써 그런 단결을 유지하려 했다. 그들은 몇몇 개혁 조처를 통해 그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제국 내의 여러 민족 집단들에게 정치·문화적 자치권을 양보할 것을 강조했지만, 민족자결권에는 반대했다.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입장을 떠받치는 이론적 지주를 제공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지도적 사상가 가운데 하나인 오토 바우어였다. 그는 《사회민주주의와 민족 문제》라는 중요한 저작에서 민족주의가 무엇보다도 문화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민족은 공동 운명에 의해 하나의 문자 공동체 속에 한데 묶인 사람들의 총체이다.” 바우어는 민족 문제 자체를 사회주의의 승리를 통해 어떻게 참된 문화 공동체를 창출할 수 있느냐는 문제, 즉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문화를 노동계급이 어떻게 인수해야 하느냐는 문제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민족적 억압에 대한 투쟁이라는 정치적 문제는 무시됐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라이문트 뢰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입장은 합스부르크 왕정과 [그 치하에서 벗어나려 했던] 민족주의적 경향에 양다리를 걸치는 이중적 기회주의를 보여 준다. 합스부르크 왕가 자체를 제외하고는 제국 안에서 사회민주당 사람들만이 민족의 경계를 넘는 유일한 정치적 행위자였다. 그런 그들이 평화적 사회·정치 개혁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민족주의의 원심력 경향에 반대한 탓에 그들의 이해관계는 객관적으로 정부와 상당 부분 수렴하게 됐다.” 아울러,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 “문화적·민족적 자치권”을 지지한 탓에 점차 “국제주의는 각 민족에 속한 노동자들이 민족주의를 따르더라도 문제 삼지 않고 그저 다른 민족 노동자들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라고만 요구하는 것이 돼 버렸다. … 그 결과 오스트리아 각지의 노동자들 사이에 민족적 차이를 더욱 조장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정치적 통일성을 해칠 수밖에 없게 됐다.” 제1차세계대전 개전 무렵(오스트리아 사회당은 자국을 편들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체코계 사회민주당과 독일계 사회민주당 그리고 관련 노조 운동 단체들이 따로따로 활동하고 있었다.
민족 문제에 대한 논쟁은 제1차세계대전 개전으로 더욱 첨예화됐다. 한편으로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노스케, 에베르트, 샤이데만 같은 노골적인 애국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독일 지배계급의 민족주의를 공공연히 지지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하게 반대함과 동시에 민족 독립이라는 슬로건을 역사적 반동으로 여겨 거부한 로자 룩셈부르크를 지지하는 급진 좌파가 있었다.
레닌은 앞의 입장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을 채택했다. 그는 민족자결권에 대한 요구를 지지하되 반(反)제국주의 투쟁의 일부로서만 그것을 지지했다.
레닌이 그런 입장을 취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제국주의 국가들의 노동자들이 피억압 민족들의 분리권을 포함한 자결권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마음속 깊이 배어 있는 애국 사회주의와 국수주의 사상을 타파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억압 민족의 노동자들에게 국제주의를 교육할 때는 피억압 민족들의 분리 자유를 옹호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할 것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주장은 본질적으로 제1인터내셔널이 아일랜드의 독립을 지지하도록 하기 위해 마르크스가 제시했던 근거들을 일반화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1870년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 영국의 모든 상공업 중심지들에서는 노동계급이 서로 적대하는 두 진영으로 분열돼 있다. 영국 프롤레타리아와 아일랜드 프롤레타리아로 나뉘어 있는 것이다. 보통의 영국 노동자는 아일랜드 노동자를 혐오한다. 자기 생활수준을 깎아내리는 경쟁자로 여기기 때문이다. 영국 노동자는 아일랜드 노동자를 대할 때 자신이 지배 민족의 일원인 양 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아일랜드를 억압하는 자국 귀족들과 자본가들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그리하여 자신에 대한 그들의 지배를 더욱 강화시킨다. 그는 아일랜드 노동자에 대한 종교적·사회적·민족적 편견에 매달린다. 아일랜드 노동자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예전에 노예를 부렸던 미국의 주(州)들에서 “가난뱅이 백인”들이 흑인을 대하던 태도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아일랜드 노동자도 영국 노동자에게 이자까지 붙여서 앙갚음한다. 그는 영국 노동자만 봤다 하면 ‘저 녀석도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의 공모자요 어리석은 도구겠거니’ 하고 생각한다.
이 적대는 언론과 설교와 만화 등에 의해서, 요컨대 지배계급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계속 유지되고 증폭된다. 이 적대야말로 영국 노동계급이 조직을 갖추고 있음에도 왜 그리 무기력한지를 설명해 주는 열쇠다. 또한 이 적대야말로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그리고 자본가 계급은 이 점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영국 자체의 노동계급을 단결시키기 위한 투쟁의 일부로서 아일랜드의 독립을 지지해야 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그로부터 50년 후, 마르크스가 영국의 상황을 보면서 분석한 노동자들의 분열이 제국주의 탓에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번지자, 레닌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확장해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에 대한 일반적 옹호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민족자결권 지지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애국 사회주의와 투쟁하기 위한 수단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레닌은 민족자결권 지지가 식민지 대중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고무한다는 자신의 전략의 한 요소라고 봤다.
바로 이 점에서 레닌의 입장은 과거의 입장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초기 논쟁에서는 민족 문제가 본질적으로 유럽의 문제로 취급됐다. 식민지 문제는 완전히 별개 문제로 다뤄졌고 일각에서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승리를 거둔 후에도 아프리카·아시아·라틴아메리카의 “미개인들”을 “문명”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식민 제국 지배가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레닌 이후, 모든 것이 일변했다. 러시아 혁명 자체가 이전 이론가들이 제시했던 점진주의 사고에 중대한 도전이었다. 독일이나 영국의 노동자들이 그들 나라 자본가들을 타도하기 전에 비교적 후진적인 나라[러시아]에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음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레닌에겐 식민지 대중이 더는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을 지지하도록 포섭해야 할 세력이었다. 민족 문제는 반제국주의 투쟁과 떼려야 뗄 수 없게 결합됐다. 레온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민족 문제에서 볼셰비즘의 특징은 피억압 민족을 대하는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볼셰비즘은 가장 후진적인 민족도 정치의 대상일 뿐 아니라 정치의 주체라고 본다.”
민족 투쟁은 계급투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혁명가들에 반대하여, (1916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부활절 봉기가 일어났을 때)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식민지와 유럽의 약소 민족들의 반란 없이도, 편견 투성이인 소부르주아지 일부의 혁명적 봉기 없이도, 정치적으로 각성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와 준-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지주·교회·왕정·민족적 압제에 대항해서 벌이는 운동 없이도 사회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 모든 생각은 사회 혁명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한 쪽 군대가 한 곳에 정렬해 “우리는 사회주의 편이다”라고 말하고 다른 쪽 군대가 다른 곳에 정렬해 “우리는 제국주의 편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사회 혁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순수한’ 사회 혁명을 기대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생전에 그것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의 함의는, 제국주의 시대에는 강력한 사회 봉기들이 민족주의적 형태를 띠면서 반자본주의적 방향으로 발전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레닌의 입장에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타협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민족자결권 지지를 국제 노동계급의 단결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봤지, 그것을 파괴하는 수단으로 본 것이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레닌은 억압 민족의 혁명가들의 임무와 피억압 민족의 혁명가들의 임무를 조심스럽게 구별했다. 전자의 경우 주된 적은 억압 민족의 민족주의이며, 따라서 그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자결권 지지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노동자 운동에 배어든 국수주의에 도전하는 동시에 국제주의를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한편, 피억압 민족 혁명가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단호한 반대와 국제 노동계급의 단결에 대한 분명한 지지를 결합시켜야 한다. 후자[국제 노동계급의 단결]를 위해 그 사회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을 민족 투쟁에 종속시키려 드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에 맞서 사상 투쟁과 정치 투쟁을 벌여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자결권 행사에 반대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폴란드의 민족 독립에 관한 룩셈부르크의 입장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일면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가 폴란드의 한 혁명가로서 폴란드 사회당의 사회애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인 것은 전적으로 옳았다. 그녀의 과오는 억압 민족의 혁명가들이 폴란드 독립이라는 슬로건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데 있다. 독자적인 민족국가 수립을 바라느냐 바라지 않느냐 하는 것은 폴란드 노동계급이 판단할 문제였다. 그리고 러시아 노동자들과 독일 노동자들의 의무는 폴란드 노동계급의 그러한 결정권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닌이 피억압국 혁명가들은 민족자결 운동을 도외시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일은 억압국 혁명가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러하다면, 제임스 코널리 같은 아일랜드 사회주의자들은 대영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피했어야 할 것이다. 민족 독립 요구가 억압에 맞서는 대중 투쟁의 초점이 되는 경우에 혁명가들의 임무는 그 투쟁에 참가해 지도력을 인정받으려고 분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설령 혁명적 민족주의일지라도 말이다.) 오히려 민족자결을 성취하기 위한 독자적인 전략을 제시하고 노동계급 투쟁의 방법들에 기초해서 그럴 수 있어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레닌의 입장에서는 민족 운동 지지 때문에 피억압 민족 노동자 운동의 정치적·조직적 독립성을 타협할 이유가 없었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채택된 ‘민족 문제와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후진국에서 사실은 공산주의적이지 않은 혁명적 해방 운동을 마치 공산주의인 양 치장하려는 시도들에 맞서 단호히 투쟁해야 한다. 코민테른의 임무는 오직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해 식민지 및 후진국들에서 벌어지는 혁명 운동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모든 후진국들에서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정당들(이름뿐 아니라 실제로도)을 이룰 구성원들을 규합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특별한 임무, 즉 자기 민족 안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경향과 투쟁해야 한다는 임무를 자각시키는 것이다. 코민테른은 식민지 및 후진국들의 혁명 운동과 잠정적으로 협력해야 하고, 심지어는 동맹 관계까지도 맺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과 융합해 버리면 안 된다. 코민테른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독립성을 한사코 견지해야 하고 그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걸음마 단계에 있을지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레닌의 입장에는 노동계급을 다계급 기반의 민족 해방 운동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이러저러한 시도들과 공통된 점이 조금도 없었다.
민족 문제에 대한 레닌의 접근법을 완성시킨 사람은 연속혁명론을 발전시킨 트로츠키였다. 연속혁명론은 1925~27년 중국 혁명의 결과로 무르익은 일반 이론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후진국 민족 독립 투쟁은 그 투쟁의 지도권을 노동계급이 얻어 노동자 권력 획득 투쟁으로 전환시키고 사회주의 혁명을 성사시켜 다른 나라들에까지 확산시키려 할 때만 성공을 거둘 수 있다.
트로츠키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상황 인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곧, 제국주의가 발전한 결과 사회주의를 위한 객관적 전제 조건들이 어떤 한 나라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전 세계적 규모로 존재하게 됐다. 또한 국제 자본주의 체제가 존속하는 한 국제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나라들의 참된 국가 독립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룩셈부르크와는 달리) 민족 투쟁이 부적절하다거나 반동적이라고 보지 않고, 민족 투쟁이 성공하려면 그것이 노동자 권력 획득을 위한 국제적 투쟁으로 발전돼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민족 문제에 대한 레닌의 접근법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제국주의의 존재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라는 현실에 조응하는 혁명 전략을 발전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둘째, 그것은 정치 이론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레닌의 입장은 민족 문제에 관한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의 입장들과는 크게 달랐다. 카우츠키와 룩셈부르크는 둘 다 민족국가를 낳은 것이 자본주의 경제가 특정 발전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우츠키는 민족 분쟁은 자본주의가 더 발전하면 평화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개혁주의적 결론을 내리게 됐다.
카우츠키와는 대조적으로, 룩셈부르크는 일단 자본주의의 지배가 전 세계적으로 확립되고 나면 민족 분쟁은 자본주의에 만성적으로 존재하며 자본주의가 결국 붕괴하는 데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자본 축적》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제국주의의 발전 때문에 민족 독립을 위한 경제적 기초가 잠식된 만큼, 민족 투쟁은 계급투쟁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장애물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 바우어 등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무엇보다 문화와 관련된 문제로 여겼고, 사회주의의 승리를 기다리는 동안 기존 국가 구조를 재편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레닌은 민족주의가 무엇보다 정치적인 문제라고, 즉 선진국에서는 사회애국주의에 대한 투쟁 그리고 후진국에서는 민족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다른 모든 이론들에서는 민족 문제의 경제적 측면이나 이데올로기적(문화적) 측면이 강조된다. 그러나 레닌은 노동계급의 정치 권력 획득 투쟁에 그것이 어떤 효과를 미치느냐는 관점에서 민족 문제에 접근했다.
이 점을 이해하면, 흔히 직접·간접으로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에서 출발해 경제·지리·언어 등을 기준으로 민족을 정의하려 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슬프게도 왜 그렇게들 길을 잃어버리는지 알 수 있게 된다. 트로츠키는 민족 문제에 대한 레닌의 입장을 미국 흑인들이 겪고 있는 인종 차별에 적용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 문제에서 어떤 추상적인 기준[민족에 대한 정의 ― 필자]은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역사 의식, 그들의 감정과 욕구이다.” 트로츠키는 피억압민들에게 민족 의식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특정 국가로부터 당한 억압의 경험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우리는 흑인이 반드시 하나의 민족을 이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일 그들이 민족을 이뤄야겠다고 느낀다면 그것이 그들의 욕망이고 소망일 것이다. … 흑인에 대한 차별이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민족적 단결을 향하도록 몰고 간다.”
이론을 적용하기
민족 문제를 다루는 마르크스주의적 방식(레닌의 기여가 가장 두드러진다)은 20세기 자본주의의 현실과 특히 그것이 배양하는 민족 분쟁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레닌이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 옹호했다는 사실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그의 출발점은 어느 집단이 자신만의 국가를 요구하게 된 구체적 상황이었다. 즉, 제국주의의 직접 지배나 자국 지배계급의 억압으로 고통에 시달리다 못해 그러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피억압 집단의 자결권을 지지하는 것과 민족 독립 요구이기만 하면 덮어놓고 지지하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왜냐하면 다른 집단에 대한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서 자신만의 국가를 세우려는 세력들도 종종 민족 독립 요구를 내세우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이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해 싸우는 집단을 덮어놓고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따른다면 예컨대, 펀잡 지방의 시크교도들도 지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독립 국가 건설 시도는 민족 억압의 결과도 아니고 아니고 오히려 그 지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힌두교도들을 공격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사회주의자들은 보어인[네덜란드계 백인 정착민]들의 자결권을, 팔레스타인 사회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의 자결권을 옹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민족자결권 요구는 국가 권력으로 대다수 피억압 민족(전자의 경우는 남아공 흑인들, 후자의 경우는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을 지배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혁명가들의 자결권 지지는 추상적 원칙을 따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제국주의 투쟁에 힘쓰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다른 인민에 대한 억압을 통해서만 자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민족주의, 그럼으로써 제국주의를 강화하는 민족주의까지 자결권이라는 이유로 지지해서는 안 된다. 자결권 지지는 독립을 요구하며 제국주의와 충돌하는 운동과 승리해서 제국주의에 타격을 가하는 경우로 국한돼야 한다. 그러한 투쟁의 고전적 사례가 바로 베트남인들의 투쟁인데, 베트남인들이 미국 제국주의를 꺾은 덕분에 미국은 오랫동안 ‘제3세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가 어려웠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반제국주의 민족 해방 투쟁들이 전개되고 있다. 그 투쟁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무조건적이지만 무비판적이지는 않은 지지’라는 기치로 요약된다. 우리의 지지가 무조건적인 것은 해당 민족 운동을 우리가 지지하는 이유가 정치적으로 그 이데올로기에 동의해서라기보다는 그 운동이 제국주의와 충돌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트로츠키가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략에 반대해 하일레 셀라시에 정권을 지지했던 것은 에티오피아가 비록 노예제가 존재하는 사회였지만 그 전쟁이 반(半)식민 국가와 이탈리아 제국주의 사이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일랜드공화국군(IRA) 급진파를 지지하는 것은 그들의 정치적 기본 입장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우리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한 형태인 아일랜드 공화주의에 반대한다) 그들이 대영 제국주의에 대항해 투쟁하고 있기 때문이다.4
어떤 민족 운동을 그 강령에 대한 정치적 동의 여부에 따라 지지하는 것에는 기회주의나 초좌파주의로 빠질 소지가 너무나 많다. 서구 좌파들은 저개발국의 이러저러한 민족주의를 “공산주의인 양 빨간칠”하려는 경향을 너무도 자주 보여 왔다. 실제로는 제3세계 민족주의자들이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해 “자기 나라” 노동자·농민 착취의 도구로 사용했는데도 말이다. 또 다른 오류는 어떤 세력이나 조직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조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운동을 지지하기를 거부하는 종파적 태도이다. 그와 달리 우리는 진정한 반제국주의 투쟁은 어느 것이든 그 정치적 기본 입장을 불문하고 지지한다. 이러한 입장 덕분에 우리는 제국주의에 원칙 있게 반대하면서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계급협조주의적 정치(IRA 급진파들이든 아프리카민족회의(ANC)든 아니면 다른 어떤 운동의 정치든)에 대한 단호하고 가차없는 비판을 결합할 수 있다.
그러나 훨씬 더 복잡한 경우들도 있다. 예컨대, ‘역사가 오랜’ 유럽 국가들 내부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난 경우들로 영국 안의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와 웨일즈 민족주의, 프랑스 안의 브르타뉴 민족주의와 오크 민족주의, 스페인 안의 바스크 민족주의와 카탈루냐 민족주의가 그렇다. 이들 운동의 출현은 가장 오래된 민족국가들조차도 민족국가 자체의 인위적 성격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민족이란 모종의 ‘자연스런’ 동질성이 반영된 결과가 아니라, 소수민족들을 강제로 통합하면서 지배 집단의 이해에 맞춰 그 지방의 문화와 언어를 억압하는, 흔히 폭력을 수반하는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유럽 국가들 내부에 균열을 낳는 요인은 일반적으로 국제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이지만, 주요 분리주의 운동들에서는 특정한 정치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다.(스페인의 경우에는 프랑코 체제의 억압적 성격이, 영국의 경우에는 노동당 개혁주의의 위기가 그런 구실을 했다.)
혁명가들이 이러한 민족 문제들을 다루는 방법은 반제국주의 투쟁 성격을 띤 민족 운동들을 다룰 때보다 훨씬 복잡할 수밖에 없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영국 민족 문제를 분석하면서 세 가지를 주요하게 본다. (1) 그레이트브리튼섬 내부에는 민족 해방을 요구할 만한 것이 없다.(물론 북아일랜드의 6개 카운티의 경우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2) 그럼에도 우리의 주적이 기존 영국 국가와 이를 지지하고 현재 지배적인 영국 민족주의인 만큼, 우리로서는 영국 국가가 하나로 유지되는 것을 지지할 이해관계가 없고 그래서 스코틀랜드 사람들과 웨일스 사람들의 자결권을 (그들이 행사하기를 원하면) 지지한다. (3) 동시에 우리는 스코틀랜드 노동자들이나 웨일스 노동자들이 잉글랜드 노동자들과 구별되는 민족적 이해관계를 갖는다는 생각을 가차없이 비판한다. 그런 생각은 스코틀랜드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스코틀랜드의 보수당, 성직자를 지지하도록 만드는 등 계급 협력을 정당화한다는 문제가 있다.
한편, 1980~88년에 이란과 이라크가 벌인 이란-이라크 전쟁이 제기한 문제들도 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주되게 세 가지를 고려해야 했다. 첫째, 1978~79년 이란 혁명과 그 여파였다. 왕정 타도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결정적인 세력 역할을 했는데도 이란 좌파가 취약한 탓에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비롯한 율법학자들이 정권을 장악했고 혁명의 주요 성과들을 파괴하는 체제를 강요했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여성과 소수민족들을 억압하는 것을 이슬람주의 이데올로기로 정당화했다.
그러나 호메이니 정권은 자기들이 미국 제국주의라는 ‘대악마’에 대항하는 투쟁을 주도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정권의 기반을 어느 정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국내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슬람주의 학생들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자 이란 좌파 가운데 상당수가 정권의 편을 들게 됐다.
중동 전역에 걸쳐서 좌파는 현재 파산 상태에 있다. 그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스탈린주의가 끼친 악영향 때문이다. 예컨대 팔레스타인의 저항 세력들로 하여금 그 지역의 노동자·농민보다 오히려 “진보적” 아랍 정권들을 중시하도록 부추겼다. 그 결과, 이 나라 저 나라에서 혁명적 좌파의 공백을 이슬람주의가 메웠고, 특히 도시 빈민에게 외견상 아주 급진적인 반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서 호소력을 지녔다.
이란의 이슬람주의가 페르시아만 연안국들에 정치적 불안정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1980년 8월의 이란-이라크 전쟁을 부채질한 요인의 하나였다.(이게 둘째 고려 사항이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여러 석유 전제 왕국들은 자기들도 이란 혁명의 여파 속에 제거될지 모른다며 겁을 먹고는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바트 당에게 이란을 공격하라고 부추겼다. 그리고 미국도 비슷한 이유에서 이라크의 이란 공격에 호의적 태도를 취했다.
사정은 그러했지만, 이 전쟁은 급속히 지역 패권 다툼 성격을 띤 전쟁으로 발전했다. 이라크는 이란의 팔레비 왕정이 1960년대에 영국으로부터 물려받은 페르시아만 지역의 헌병 역할을 자신이 맡으려 했던 반면, 호메이니는 후세인 정권을 격파함으로써 페르시아만 지역을 자기 영향력 아래 두려고 했다. 이 유혈 소모전은 100만 명의 사상자를 기록하면서 제1차세계대전을 방불케 했다. 세계 패권이 아니라 지역 패권을 놓고 벌인 두 아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전쟁이었다는 점만 달랐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혁명가들이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 입장을 취해야만 한다. 각 교전국에서 노동자·농민의 이해관계는 ‘자국’ 정부가 패배하는 것 외에는 있을 수 없다고 말이다.
이러한 상황은 셋째 고려 사항 때문에 바뀌게 된다. 바로 1987~88년 미국이 페르시아만 지역에 군사력을 증파한 결과, 이란군과 충돌한 것이다. 이란 혁명은 그전 20년 동안 미국 제국주의가 맛본 가장 심각한 패배들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과 이란의 군사적 대결 상황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의 성격은 달라졌다. 이제 이라크의 이란 공격은 미국 정부가 지도하는 좀 더 광범한 대(對)이란 제국주의 공세의 일부가 됐다. 미국의 일부 정부 관리들은 이란과의 전쟁 가능성을 환영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며 그동안 미국의 대외 군사 개입을 위축시켜 왔던 ‘베트남 증후군’을 일소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가들이 이란의 패배를 환영한다는 것은 미국 제국주의의 편을 드는 행위였다. 이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호메이니 정권이 미국과 그 동맹국(이라크도 포함된다)에 맞서 싸우는 것을 지지해야 했다. 페르시아만 연안 지역에서 이란이 결국 패배한 것은 서방 제국주의가 거둔 중대한 승리였다.
혁명가들이 이란을 지지하는 것이 이슬람 성직자들과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대 입장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스페인 내전 동안 트로츠키는 스페인에 있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공화국 정부를 군사적으로는 지지하되 정치적으로 지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즉, [인민전선 ― 역자] 정부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되 프랑코를 패배시키려면 혁명적 수단들(공장 및 농장 점거, 모로코의 독립 승인 등)을 반드시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는 이란 혁명가들의 주장이, 혁명적 수단들 — 노동자들의 공장 관리, 지배계급의 재산 접수, 소수민족들의 자결권 인정 — 을 동원해야만 대중에게 이롭게 그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호메이니 정권과 전쟁 수행 방법(참호전, 인해전술, 도시 폭격 등)에 대한 노동계급의 불만을 증폭시키려 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런 불만이 전쟁 중단 요구(제국주의 측에만 이로울 것이다)가 아니라 혁명 전쟁 개시 요구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즉, 호메이니 정권에 혁명으로 도전할 때만 달성할 수 있는 요구들로 노동계급을 이끌어야 한다.
예컨대 호메이니 정권이 이란 내의 쿠르드족과 아랍 소수민족들을 탄압하고, 이란 부르주아지의 사치스러운 방종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에, 또 정권 자체가 부패했기 때문에 반제국주의 투쟁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고 대중에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전쟁으로 노동계급이 끔찍한 손실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정권의 전쟁 수행 방식 탓이라고 설명해야 한다. 또한 정권이 대중의 지지를 유도하는 시도 일체(예컨대 전쟁 목적을 위해 무임금 노동을 바치라는 호소)에 분명한 반대 입장을 취해야 한다.
동시에, 즉각적인 전선 붕괴와 제국주의의 승리를 낳을지도 모르는 행동들(예컨대 전선으로 가는 군수품 운송을 중단시키는 파업 등)은 혁명가들이 지지할 수 없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혁명가들이 구체적 상황에서 민족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적용하고자 할 때 그 구체적 상황을 얼마나 세심하게 분석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민족주의에 대한 추상적인 반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레닌이 말했듯이, “‘순수한 혁명’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생전에 그것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피억압 대중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자본주의와 투쟁하게 되고 민족주의도 그 경로 중 하나다. 민족주의의 그런 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민족주의에 굴복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혁명가들의 피억압 민족 자결권 지지는 세계적으로 노동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민족주의의 영향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필수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