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의 직무급제 추진:
‘동일임금’ 탈을 쓴 차별 고착화·임금 억제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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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근로기준법에 명문화하고 그 실현을 위해 직무급제를 추진하려 한다. 고용노동부는 올해 12월까지 관련 로드맵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동일노동 동일임금” 구호 아래 여성과 비정규직 등에 대한 임금 차별 철폐를 요구해 왔다. 남녀고용평등법에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명문화된 것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가 일부 반영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37년이 지났어도 성별 임금격차는 여전히 커 OECD 국가들 중 최악이다. 이는 ‘동일임금’ 조항이 얼마나 무력한지 보여 준다. 이런 경험은 근로기준법에 같은 문구를 넣어도 그것만으로는 차별이 실질적으로 개선되지 않을 것임을 보여 준다.
이재명 정부가 정말로 임금 차별을 없애고자 한다면, 비정규직·여성·청년 노동자들의 임금을 대폭 올려 차별을 없애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면 된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는 이런 일은 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이 정부 들어 비정규직이 역대 최대로 늘어났다. 게다가 정부·여당은 메가프로젝트를 명분으로 노동 개악을 밀어붙이려 한다. 최근 민주당은 기간제 사용기한 연장, 파견근로 허용 특례 등을 포함하는 ‘메가특구법’을 발의했다.
또 주목할 것은, 정부가 ‘동일임금’ 법제화의 전제조건으로 직무급제를 추진하려 한다는 점이다. 동일임금을 주려면 직무 분석을 통해 직무급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등하고 공정한 임금체계?
성별·고용형태·나이 등과 관계없이 같은 직무를 수행하면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설명은 일견 공정한 것처럼 들린다.
역대 정부들은 모두 “차별 해소”, “공정”, “동일임금”이라는 미명 하에 직무급제를 도입하려 했다. 우파 정부뿐 아니라, 중도 정부인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민주당 정부에는 직무급제에 진보적 색깔을 입혀 홍보해 줄 진보계 인사들이 있었고, 그만큼 노조의 수용을 압박할 수단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노조 지도자들을 노정 협의나 공공기관 운영 참여 등에 끌어들이는 방안은 또 다른 당근책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노동조합 상층 간부 일부는 직무급제를 임금 차별의 대안으로 검토하며 정부와의 협상 대상으로 여겨 왔다. 특히, 산업 또는 전 사회적으로 합의된 직무 가치에 따라 임금을 정하는 ‘사회적 직무급’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현 정부 들어 민주당 주도로 구성된 정년연장 TF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참가해 왔고, 지난해 이 TF에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정년 연장을 대가로 “업종별 직무급제”를 노사자율로 도입할 수 있다는 양보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진보적 포장을 벗기고 보면, 직무급제 추진의 본질은 한국 임금체계의 근간인 호봉제(연공급제)를 허물어 임금을 억제하려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오랫동안 근속 연수에 따라 임금이 자동으로 오르는 호봉제를 무너뜨리고 싶어 했다. 호봉제(연공급제)는 산업화 초기 한국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이 낮았던 시절에는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임금체계였다. 당장은 임금을 적게 주면서도 미래 보장과 승진을 미끼로 노동자들의 충성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이 높아진 데다 정년 연장마저 되면 사용자들의 임금 부담이 커지므로, 이를 억제하고자 직무급제를 도입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여성이나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에게는 이로운가? 그렇지 않다. 이미 직무급제가 도입된 곳들의 경험을 보면, 오히려 직무급제가 저임금을 정당화하고 차별을 고착화하는 구실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직무급제가 정착된 서유럽과 미국에서 임금 격차와 소득 불평등은 지난 수십 년간 더 심화됐다.
한국의 금융기관 등에서 주로 여성 직원들에게 적용된 분리직군제, 문재인 정부 때 공공부문 무기계약직 전환자에게 적용된 직무급제를 봐도, 그것의 목적과 효과가 임금 상승을 억제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직무급제 하에서는 주로 청소, 경비, 시설관리, 조리, 돌봄, 사무보조 등의 직무 가치가 낮게 평가되고, 상위 직무 등급에 오르기도 힘들다. 그래서 아무리 오래 일해도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는다.
성차별적 인식이 개입된 탓에, 낮게 평가된 직무에 여성들이 많다. 이는 직무급제가 성별 임금격차를 줄일 대안이 못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문재인 정부 때 공공부문 무기계약직 전환자들에게 적용된 직무급제도 사실상 정규직 임금을 넘보지 못하게 하고 계속 낮은 임금에 묶어두는 구실을 했다. 이런 제도를 직무 가치에 걸맞는 “공정한 임금”이라고 정당화하기까지 하니, 당사자 노동자들은 더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다.
임금 평등의 진정한 동력
이런 비판을 의식해 직무 평가에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대안이 제시돼 왔다.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노동자들의 직무에 등급을 매기고 임금 차등을 수용해야 한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직무 평가 자체가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과 분열을 부추겨 사용자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노동자의 단결력과 임금 협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여기에 노조가 참여하는 것은, 사용자 측의 각개격파를 통한 임금 억제에 “노조 동의”라는 명분만 제공해 줄 위험이 있다.
임금 차별 해소에 노동조합이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것은 필요하다. 문제는 그 방향과 방식이다. 노조 상층 간부들이 정부, 사용자들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임금체계 개편을 협의한다 해서 임금 평등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격차 해소의 진정한 동력은 이윤을 위해 노동자들을 이간·분열시키려고 일부 노동자를 차별하는 사용자들에 맞서 연대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이때, 상대적으로 임금 수준이 높고 잘 조직된 노동자들이 자신의 조건을 잘 지키고 더 나아가 임금 인상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다른 노동자들이 그것을 기준 삼아 싸우기에도 유리하다(상향평준화). 또한 잘 조직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차별받는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 투쟁에 함께해야 한다.
노동운동의 역사를 보면, 임금 격차 좁히기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가능했다.
노조 지도자들이 실질적인 투쟁을 조직해 보지도 않고, 하나를 얻겠다고 다른 하나를 양보하며 노동조건 후퇴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 가령, 정년 연장을 얻는 대가로 (임금 수준 하향평준화를 불러 올) 직무급제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파 정부가 추진한 노동 개악을 노동자들이 맞서 싸워 저지해 놓으면, 민주당 정부가 집권해 똑같은 개악에 진보적 색깔을 칠해 야금야금 밀어붙이는 문제가 반복되도록 해선 안 된다.
이 글은 노동자연대 김하영 운영위원이 쓴 《임금, 임금격차, 연대》(2026년 개정증보판)의 큰 도움을 받아 작성했다. 소책자 전문 파일은 온라인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