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8호 기사에 대한 독자 반응 모음
〈노동자 연대〉 구독
‘이명박은 “깨끗이 물러나야 옳다”’ 기사에 대해
민주당을 경계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민주당에 대한 비판의 비중이 너무 크다.
김세란
‘“확장 억지”는 핵 공포로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억지’ 기사에 대해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핵우산을 제공해 주기로 한 이유가 한국의 독자적인 핵 개발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다른 언론에서 볼 수 없는 분석이어서 매우 신선했다. 〈조선일보〉가 사설에서 계속 남한도 핵무장을 하거나 (미사일 사거리를 제한하고 있는) 한미미사일협정을 어길 “각오로” 북핵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설득력이 있었다.
임준형
‘꼴라주’ 만평에 대해
〈레프트21〉 ‘일루젼’ 님의 ‘꼴라주’ 만평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이번 만평에서는 이명박의 민주주의 탄압을 폭로하며 반이명박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림에서 박정희·전두환·노태우보다 더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한꺼번에 무너뜨리려 한다는 메시지는 자칫 이명박 정부가 87년 이전의 독재 수준으로 돌아간 것이라는 다수 진보 진영의 잘못된 분석을 반영하는 듯한 오해를 줄 수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을 보며 과거 군사독재 정권을 떠올리는 것도 너무나 이해할 만 한다.
그러나 진보개혁세력 다수가 이명박 정부를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민주당 같은 사이비 개혁 세력들과의 ‘국민전선’ 전략을 추구하려는 만큼 이명박 정부의 ‘독재’스러운 행위와 실제로 ‘독재’정권인지는 구분해서 표현할 필요가 있다.
‘폭로’와 ‘풍자’에 주안점을 둔 만평에 너무 많은 정치적 메시지를 기대하는 것이 다소 경직된 태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레프트21〉이 이명박에 반대하는 활동가들의 신문인 만큼 정치적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조금 더 신경 쓰길 바란다.
전주현
‘민주주의 수호와 한국 사회의 변혁’ 기사에 대해
기사의 전반적인 내용은 좋았고 동의되는 바도 많았다.
기사의 내용 중 “이명박이 민주당이 지지하는 수준의 민주적 권리조차 공격하고 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반이명박 운동의 적극적 동참자인 상황에서 민주주의 후퇴 문제를 둘러싼 민주당과의 공동행동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부분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의 공동행동은 제한적이고 일시적이며 전략이 아닌 전술적 동맹이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돼야 했다.
아래로부터 운동을 강화해 노동계급이 헤게모니를 장악해야 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정치적 조직적 독립성과 완전한 비판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는 점을 함께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김기철
‘쌍용차 점거 파업 지지와 연대가 확산되고 있다’ 기사에 대해
현대차·기아차가 파업 안 하기로 했는데 과제와 논란이 없다. 잘못한 것을 지적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장이 없다. 그런데 현대차에서 연대가 건설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듯하다.
류민희
연대가 확산되는 것은 맞으나 부족하다. 진정한 연대 파업이 핵심이다.
류정렬
‘대중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이란 지배자들이 분열하고 있다’ 기사에 대해
6월 25일 한국의 시민사회정당단체들은 이란 정부가 민주화를 위해 거리로 나선 시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살해하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 주한이란대사관 앞에 모였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대사관측은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시간 동안 문을 닫아걸고 방문자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한국 경찰은 우리가 대사관측에 항의서한을 전달하지 못하도록 출입구를 막아섰다. 결국 그들이 이번 사태에 대해 결코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항의서한을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이란 민중의 저항에 연대하고 이 같은 탄압과 살인이 계속될 경우 더 높은 수준의 항의가 계속될 것을 약속하며 기자회견을 끝냈다. 이렇듯 이란 민중의 투쟁에 대한 국제적 연대는 더욱 확산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김기철
무사비는 전혀 지지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혁 분파의 상징 노릇을 하고 있다보니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 시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30년 만에 이런 항의 시위가 생긴 것은 억눌린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이에 대한 지지가 흠뻑 나와 있지 않다.
류정렬
무사비는 신자유주의자라서 서방 세계가 개거품 물고 지지하고 “일부 국제 좌파”들은 지지 안 하는 거 아닌가요? 이 시위라는 게 무사비 지지를 넘어서 ‘진보’개혁운동으로 번진다면 그 땐 지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짭짭짭
현재의 이란을 둘러싸고 지배자들의 태도도 불분명하다. 오바마가 아흐마디네자드의 시위 진압을 비판하면서도 무사비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중 저항이 선거라는 쟁점을 벗어나 반미 정서와 배치돼 나타난다는 보장이 없다.
김지현
현재 이란의 모습에 대해서 많은 언론들은 뭐 제2의 혁명이다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전 〈조선일보〉가 이 ‘혁명’을 지지하는 것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 싶더군요. 그리고 ‘민주적’인 서방세계가 개거품 물고 선거부정이라고 난리치는 것도 이상하고. 물론 시위대에 총으로 응수하는 건 미친 거죠. 근데 제가 궁금한 건 이번 시위의 중심부는 그동안 아마디네자드의 반미주의와 대중주의 정책에 반발해 온 이란 중산층과 미국의 하수인 라프산자니, 신자유주의자 무사비가 주축이 되서 “일부 국제 좌파”들이 지지를 표명하지 않는 거 아닌가요? 막 이것저것 보면서 대충 조각들은 모았는데 그게 연결이 잘 안되서.. 자세히 설명부탁드려요.
황준혁
‘반미 VS 친미’의 프레임으로도 이 운동을 완전히 설명할 수가 없다. 지금의 이란의 상황은 알기 어렵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어느 때보다 좌파들의 구실이 중요한 시기인 것 같다. 또한 이를 위해 분석이 중요한 시기다. 아흐마디네자드가 저항 운동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저항이 계속될 때 논쟁도 계속될 수 있다.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문제를 무디게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이란이 아니더라도 어느 나라의 좌파든 이 운동에 지지를 보낼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나라
무엇보다 이란의 지배자들은 저항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란 정부는 저항 운동 소식의 국외 유출을 강력하게 억압하고 있다. 예컨대 지난 한국과 이란의 축구 경기에서 세 명의 이란 선수가 녹색운동을 지지하는 의미에서 녹색 팔찌를 차고 나왔는데 이들을 이유 없이 퇴출시켰다. 이런 시기에 이란 밖에서 이 운동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할 것이다.
전호진
‘유럽의회 선거 결과로 드러나 유럽 좌파의 현황’ 기사에 대해
예전처럼 반전·반신자유주의를 반복하는 것은 끝났다고 본다.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는데 뭐가 필요한지 안 나왔다. 규모가 줄었다고, 반전에 대해서 기권하는 것 아닌가?
류정렬
유럽에서 반전 운동이 가라앉았다는 지적이 의외였다. 그 이유가 뭔지 궁금한데 기사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럽의 이런 상황이 한국의 반전 운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한국은 아프가니스탄 재파병의 움직임이 있고 북핵 문제로 한반도의 긴장도 높아지고 있어 유럽과는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론적인 얘기뿐 아니라 경제 위기에 대한 구체적 대응을 논해야 한다”, “부시의 예전 측근조차 은행 국유화를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신자유주의 반대만을 외치는 것으로 불충분하다”는 지적들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 아직 미국과 같이 큰 규모의 국유화가 실행된 적은 없지만, 지난해 촛불 시위로 신자유주의의 폐해는 어느 정도 입증된 것 같고 대안에 대한 궁금증이 크다. 그런 점에서 ‘경제 위기 대안 논의’ 기획 연재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임준형
유럽의회를 전반적인 우경화로 단정 짓는 인상적 평가를 비판하고 유럽의 급진좌파들의 새로운 정치적 시도의 성과와 과제를 제시해서 흥미롭게 읽었다.
기사를 읽으면서 사소한 궁금증이 들었는데 크리스 하먼의 첫 인터뷰 글에서는 유럽의회 선거에서 프랑스 반자본주의 신당이 기대 이하의 득표를 했다며 지난 대선에서 브장스노의 득표에 한참 못 미치는 득표를 했던 조제 보베보다도 낮은 득표를 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알렉스 캘리니코스 인터뷰 글에서는 NPA가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브장스노가 기록한 것과 비슷한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평가했다.
처음에 볼 때는 같은 선거 결과를 놓고 사실과 분석이 다른 것인가 하고 혼란스러워 했는데 크리스 하먼은 ‘득표’수를 알렉스 켈리니코스는 ‘득표율’을 언급하고 있다는 알게 됐다.
국제 기사들을 읽을 때는 그 나라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번역할 때 구체적 득표율과 득표수를 표기했다면 덜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사소하지만 좀더 세심한 ‘배려’를 부탁한다.
전주현
‘열사의 한을 푼 화물연대 파업의 성과’ 기사에 대해
다른 좌파와 달리 성과를 거둔 것을 잘 얘기했고 좋았다.
류민희
‘경제 위기라는 악령과 대면하고 있는 우고 차베스’ 기사에 대해
얼마 전 뉴스에서 자막으로 얼핏 베네수엘라가 외국계 은행을 국유화했다는 사실을 봤는데 베네수엘라가 최근 더 전진하고 있는 것인지, 그 배경이 뭔지 궁금했는데 그런 궁금증을 해결해 준 기사였다. “난국 수습용”이라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했고 경제 위기로 베네수엘라가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는 생각도 들어 베네수엘라의 앞날이 더 궁금해지기도 했다.
임준형
‘지배계급의 권력 유지 방식을 이해하기’ 기사에 대해
‘맑시즘’이나 포럼 등을 개최하는 것이 무슨 의미와 효과가 있는지 알게 됐다. 반이명박 정서가 광범위하면서도 사람들이 최근 쉽게 행동에 나서지 않는 이유로 공안 탄압과 함께 대안이 무엇인지 찾지 못해서라고 다른 회원들과 이야기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사상 투쟁에서 승리는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도록 고무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임준형
‘논설: 뜨거운 분노를 지속적 대중 행동으로 이끌어야’에 대해
“의회와 선거 대비로 돌리며…”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다. 지금 의회에서 MB악법, 비정규직법 등을 막아내야 해서 의회가 초점이 되고 있기 때문에 사설에서와 같이 표현하면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의회에서 스스로 이런 법안들을 막아낼 리가 없기 때문에 의회에서 막아내려면 거리의 투쟁을 통해 압력을 넣어야 한다는 식으로 서술했어야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김세란
6월 노동자 투쟁 관련 기사들에 대해
〈레디앙〉 등의 평가를 보면 화물연대 투쟁이 가장 근본적인 요구 사항인 노동조합의 인정을 따내지 못하고 깃발을 내린 얻은 것 없는 투쟁인 것처럼 폄하했다. 그러나 〈레프트21〉의 평가가 옳다고 본다. 아쉬움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다시 싸울 수 있는 다짐을 하고(특수노동자 노동권 문제 등) 법적 소송 취하, 주요 활동가가 포함된 노동자들의 복직 등에서 성과가 없다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열사의 한을 푼’ 파업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김지현
사람들은 화물연대에 기대를 너무 많이 했다. 이명박 정부의 억압 때문에 화물연대가 돌파구를 열어주기를 바랬던 사람들에게는 실망이 컸을 것이다. 화물연대의 파업이 위력적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경제 위기 시기라는 조건도 한몫했다. 수출도 많지 않았고, 조직율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주관적인 조건인 지도부의 의지 등만을 문제 삼을 수 없다. 여러 아래로부터 압력에 비추어 봐서 노동자들의 바람을 화물연대 지도부가 단순히 배신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나라
이명박 정부는 화물연대 파업 전 함께 파업이 계획돼 있었던 건설기계노조에 양보하면서 노동자들을 분열시켰다. 어떤 이들은 지도부가 점거와 상경 투쟁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지도부의 전술 오류를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것만을 탓할 순 없다. 운수노조 화물연대의 파업이 훨씬 위력적이려면 민주노총의 구실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단순히 노조 지도부의 결의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최윤진
물론 이 투쟁이 그 기대를 이어가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화물연대 노조 활동가들이 사기저하를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떠올려 보면 화물연대의 파업은 6월 10일 범국민대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결코 좋지 않은 조건 아래서도 파업을 진행할 수 있던 것은 바로 그런 정치적 시기와 맞물려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용기를 고무해 줄 필요가 있다. 그것이 다시 싸울 수 있는 자신감에 무척 중요하다.
소은화
〈레프트21〉에서 지지와 연대 확산에 대한 내용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7월 초로 잡고 있는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행동은 굼뜨다.
전호진
경제 위기 상황의 모순은 극단적 정서로 나타난다. 싸우기도 하지만 위축도 겪게 한다. 쌍용차는 그런 사례를 보여 주는 것 같다. 민주노총은 싸워야 하는 걸 알면서도 겁은 나고, 판돈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