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수호와 한국 사회의 변혁
〈노동자 연대〉 구독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는 한국 사회 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 급속히 퍼지고 있는 각계 반정부 시국선언은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하는 정서가 광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를 ‘독재’, ‘파시즘’ 정부로 묘사하고 있다. 촛불집회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구호가 “독재 타도, 명박 퇴진”이다. “이명박이 독재”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대중 정서에 깊이 공감하며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권위주의적 억압을 강화한 것은 맞지만, 이 나라를 1987년 이전의 독재 수준으로 되돌린 것은 아니다. 지금이 야당 지도자들조차 탄압 받고, 의회·선거 절차가 무시되는 상황은 아니다.(이명박 정부가 모든 노동조합을 분쇄하고 이주노동자들이나 동성애자들을 가스실로 끌고 가는 파시즘 정권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과거 회귀가 쉽지 않은 이유는 바로 1987년 항쟁 이래로 민주화를 지탱해 온 노동계급의 조직력이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이다. 2004년에도 우파들은 노무현 탄핵이라는 반동을 시도했지만, 거대한 저항에 직면해 실패했다.
그런데 진보개혁세력 다수는 이명박 정부를 ‘독재’라고 규정하며 특정한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가령,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은 “민주주의 위기가 오는데 민주당과 정책적 차이를 따지기보다 적어도 이 순간에는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싸우는 게 중요하다”며 1987년 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와 같은 “전 국민적 단결”을 촉구했다.
한편, 이명박 정부를 명백히 독재정권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명박의 권위주의적 억압에 맞서 싸우기 위한 민주당과의 전략적 동맹을 제기하고 있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내년 지방선거까지 내다보는 큰 틀의 ‘민주연대’를 구성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강조했고, 〈프레시안〉, 〈한겨레〉 등도 반MB 연합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물론 이명박이 민주당이 지지하는 수준의 민주적 권리조차 공격하고 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반이명박 운동의 적극적 동참자인 상황에서 민주주의 후퇴 문제를 둘러싼 민주당과의 공동행동을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일부 급진좌파처럼,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됐다며 민주적 권리 옹호를 위해 투쟁의 폭을 넓히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는 경향은 문제다. 그러나 이때조차도 위로부터 계급연합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운동을 강화해 노동계급이 헤게모니를 쥐는 것이 중요하다.
단지 반신자유주의 문제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문제에서도 지난 두 자유주의 정권은 불철저했다. 그들이 표방한 “민주적 시장경제”가 자본의 이해관계가 침해될까 봐 민주적 권리를 억압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 존속, 한미FTA 반대 시위 원천봉쇄 등은 그 예다.
민주당은 집회시위 권리 제약 등 이명박의 민주주의 후퇴 시도에 반대할 수 있지만 국가보안법 완전 폐지, 권위주의 정권 퇴진 등과 같은 더 급진적인 정치적 요구나 한미FTA 반대, 비정규직 차별 철폐, 경제 위기 고통전가 반대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요구에서는 노동계급과 대립하는 편에 설 것이다. 촛불항쟁 때 민주당이 거리에서 가장 먼저 이탈해 의회로 간 전력을 보더라도, 최소한의 민주주의 개혁에서조차 굼뜨고 타협적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민주당과 동맹을 지상과제로 삼고 민주주의 투쟁의 주도권을 그들에게 넘겨줄 경우, 노동계급의 투쟁이 민주당의 요구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있다.
실제로 민주당과 동맹을 추구해 온 운동 내 개혁주의자들은 노동계급 운동이 체제를 위협할 정도로 발전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 한다. 그래서 지난해 촛불항쟁 때 최장집 교수는 “정권 퇴진 운동은 잘못”이라고 했고, 광우병국민대책회의 내 개혁주의자들도 퇴진 요구를 한사코 채택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민주당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데 투쟁의 목표를 제한할 이유는 없다. 지난해 촛불항쟁과 그 연장선에 있는 현재의 반정부 투쟁은 단지 절차적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촛불항쟁에서 많은 사람들은 ‘국민들 다수의 삶에 악영향을 미치는 광우병 의심 쇠고기 수입, 대운하, 의료민영화 등을 왜 국민의 뜻을 거슬러 이명박 마음대로 결정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즉, 정부가 도대체 누구를 대변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재벌천국 서민지옥”, “강(남땅)부자 정권”이라는 말은 바로 이 점을 꼬집는 것이었다.
사실, 자유민주주의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몇 년에 한 번 선거에서 잠깐 투표할 수 있을 뿐, 평상시에는 정부가 우리 뜻을 거슬러도 간섭하기 어렵다. 일터에서 우리는 그저 사장이 시키는 대로 일할 ‘권리’만 있다.
선출된 자들은 자신들을 뽑아 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대기업과 이윤체제를 위해 봉사한다. 삼성 불법승계 무죄 판결은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을 실감나게 했다.
검찰총장, 경찰청장, 대법원장, 군장성, 대기업 임원은 대중의 삶을 망치는 결정들을 주도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선출할 수도 소환할 수도 없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이 사회를 지배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부르주아(자본가) 독재”라고 말한 바 있다.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형용모순
이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진정 민주적인가’ 하는 회의가 발전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완성됐다는 서구에서든, 한국에서든 사람들은 많은 경우 투표에 열의가 없다.
유럽에서는 ‘노동당’, ‘사회민주당’, ‘사회당’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정당들도 체제의 이윤논리를 가장 우선에 두고 노동자들을 공격해 왔기 때문에 노동자·서민이 부르주아 정치 일반에 대해 느끼는 환멸은 더 심해졌다. 한국에서 이명박이 겨우 30퍼센트의 지지만을 얻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소위 ‘개혁정부’ 10년간 진보와 개혁이 전혀 성취되지 않은 것을 보고 투표장에 가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단지 자유민주주의로 환원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민주화를 위한 대중의 투쟁은 자유민주주의 성취에 머무르지 말고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노동자 대중이 실질적 결정권을 가지는 노동자 민주주의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말만큼 형용모순인 말이 없다. 생산수단을 소수가 소유하고 그들의 이윤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시장경제는 진정으로 민주적일 수 없다. 오히려 노동자 대중이 사회의 부를 집단적으로 통제하는 경제체제의 변혁이 있어야 대중의 필요에 따라 생산과 분배를 결정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단초가 마련될 수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힘은 바로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 투쟁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 침해된 민주적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서 노동계급 투쟁을 고무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힘이 자유민주주의를 뛰어 넘는 진정한 민주주의 ― 노동자 민주주의 ― 를 쟁취하는 데까지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