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회 선거 결과로 드러난 유럽 좌파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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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회원 최일붕이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이하 SWP)의 크리스 하먼과 알렉스 캘리니코스,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이하 SEK)의 파노스 가르가나스, 캐나다 국제사회주의자들의 미셸 로비두한테서 유럽의회 선거 결과에 대해 들어봤다. 녹취와 번역은 국제연대 활동가들인 천경록과 박준규가 했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최일붕이 삽입한 것이다. 본문에서 ‘급진좌파’라는 용어는 주류(우파) 사회민주주의자들보다 왼쪽에 있는 정치 경향을 두루 아우르는 유럽 좌파 특유의 표현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 유럽의회 선거 결과에 대해 먼저 크리스 하먼이 말문을 열어 달라.
크리스 하먼 : 독일과 프랑스 동지들이 빠진 상황에서 유럽 상황을 논하는 것이 어째 덴마크 왕자가 없는 햄릿 같다. [참석자 웃음] 경제 위기의 여파로 그리스와 아일랜드를 제외한 모든 유럽 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 정부가 유럽의회 선거에서 패배했다. 특히 영국 노동당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보수당과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인 영국독립당에 이어 3위로 추락했다. 나치[영국국민당]도 유럽의회에서 2석, 잉글랜드 북부에서도 2석을 차지했다. 이런 모습은 외견상 마치 전반적인 우경화인 양 사람들 눈에 비쳐진다.
급진좌파의 경우, 프랑스의 반자본주의 신당(이하 NPA)과 독일의 디링케[독일의 좌파당으로, 프랑스 좌파당 창립에 영감이 된 원본]는 기대 이하의 득표를 했다. NPA의 경우 공산당과 좌파당[사회당 좌파가 사회당에서 분리해 나와 만든 정당]의 연합보다 낮은 득표를 했다. 심지어 지난 대선에서 브장스노의 득표에 한참 못 미치는 득표를 했던 조제 보베[유럽생태운동연합 후보로 나옴]보다도 낮은 득표를 했다.
영국·그리스·동유럽 같은 경우 위기의 대가를 누가 치르느냐가 뜨거운 쟁점이었다. 실업 문제뿐 아니라 공공부문 관련 다양한 쟁점들이 논란이 분분한 난제였다. 혁명적 좌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가 중요한 과제로 남게 됐다.
파노스 가르가나스 : 사회민주주의 정당도 대거 패배했지만 우파도 별로 지지가 증가한 것은 아니다. 신민주주의당[그리스의 주류 우파 정당]의 득표는 추락했고(43퍼센트에서 32.3퍼센트로), 프랑스의 사르코지도, 독일의 메르켈도 마찬가지였다.
투표 불참률이 높았고 정치 양극화가 과거 어느 때보다 높았다. 지난해 12월의 대규모 항쟁은 양극화를 초래했고, 그 결과로 [신민주주의당의 왼쪽에서] 사회당(36.6퍼센트)은 자신이 신민주주의당의 대안임을 내세우며 약진했고, 녹색당도 3.5퍼센트 득표했다. 그리고 [사회당의 오른쪽에서는] 극우파 LAOS[국민정교회대회]가 양극화의 수혜를 입으면서 기존의 5퍼센트 득표율을 7.2퍼센트로 끌어올렸다.
그러므로 주류 정치권 내 양대 정당 모두에게 우려스러운 일이다. 급진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급진좌파들이 그 수혜를 보지 못했을 뿐인데, 급진좌파연합, 즉 시리자[SYRIZA]는 1년 전 여론조사에서 15~17퍼센트 지지율을 보였다가 이번에 4.7퍼센트 득표율로 지지가 크게 줄었다. 이는 분명 커다란 위기로, 시리자 내에서 좌우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연합 내 우파는 선거 실패가 ‘초좌파들’ 때문이라며 시리자가 사회당이나 녹색당의 길을 가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그리스는 우경화하고 있는 게 아니다. 공산당과 시리자의 소심함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 어쨌든 급진화의 흐름은 있는데, 파편화된 급진화라고 할 수 있다.
크리스 하먼 : 그리스 극좌파의 성적이 궁금하다.
파노스 가르가나스 : 그리스 극좌파 연합인 에난티아[ENANTIA, 즉 반자본주의좌파연합]는 두 세력이 주축을 이루는데, 하나는 공산당에서 왼쪽으로 떨어져나온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SEK]다. 이 둘의 득표를 합치면 2년 전 총선에서는 2만 3천 표였는데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2만 2천 표였다. 그러나 투표율이 낮아 득표율은 더 올랐다. 그래서 좋은 결과라고 평가받는다. 이를 계기로 ENANTIA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지낼 수 없을 거라던 양대 세력이 함께한 것만으로도 성과였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 유럽의회 선거 결과의 하나는 급진좌파의 위기라 할 만하다. 쉬나스피스모스·디링케·NPA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들 중 쉬나스피스모스[SYNASPISMOS, 즉 좌파운동·생태운동연합 유러코뮤니스트들로 시리자의 압도 다수파를 이룸]가 가장 오른쪽에 있고, 디링케는 기껏해야 사회민주주의의 좌파이고, NPA가 가장 급진적이다. NPA는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브장스노가 기록한 것과 비슷한 득표율을 기록했다. 리스펙트[Respect영국 SWP와 조지 갤러웨이 의원이 연합해 만든 급진좌파 연합체로, 2007년 가을 좌우로 분열했다]의 재앙을 경험한 우리 영국 SWP 당원들에게는 급진좌파의 이 같은 상황이 새삼스러울 것이 없긴 하다. 비록 보수당도 2004년에 비해 득표율에 별반 진전이 없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포르투갈의 좌파블록이 이번에 10퍼센트를 득표했고 아일랜드에서는 사회당이 유럽의회 의석을 얻었고, 아일랜드 SWP[영국 SWP의 아일랜드 자매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선거연합인 ‘인간이 이윤보다 우선’은 더블린 근교의 지자체 선거에서 5명의 당선자를 냈다.
△6월 10일 유럽의회 선거에서 10퍼센트를 얻어 약진한 포르투갈 좌파블록 당원들
따라서 우파의 승리라고 단순하게 볼 수는 없다. 결집체들의 형성 방식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졌다. NPA의 경우 [공산당과 좌파당에 대한] 최후통첩적 태도 때문에 실패했다고 스타씨스 쿠벨라키스[Stathis KouvelakisNPA 당원으로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자]는 평했다. 공산당과 좌파당은 좌파전선[Left Front]으로 연합함으로써 단결을 과시했는데 말이다. 공산당과 좌파당이 단결을 이루는 데서 선수를 친 반면, NPA는 “초강경주의” 태도를 고수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우리는 나치에 맞선 급진좌파의 단결을 호소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단결 호소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쿠벨라키스에 따르면, NPA가 LO[뤼뜨 우브리에르, 즉 노동자투쟁당]의 실수를 반복한 것, 즉 노동 현장 투쟁 문제에만 집중한 것도 문제였다.
디링케의 경우는 내 직감일 뿐이지만 오히려 너무 오른쪽으로 기울어 실패한 게 아닌가 싶다. 독일의 경우는 패러독스다. 경제 위기의 타격을 가장 많이 받았고 디링케에는 라폰텐 같은 유명 인사가 있는데도 선거 결과가 부진했다. 경제 문제가 심각한데도 이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대안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경우 공산당 후신들끼리 서로 경쟁한 탓에 결과가 좋지 않았다.
유럽 급진좌파의 상황 문제는 중요한 주제로, 영국의 우리도 중요하게 다룰 계획이다. 이에 대해 ‘진솔한’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NPA의 경우 5년 전에 LO와 연합했을 때 얻었던 2.5퍼센트 득표보다 이번에 갑절을 득표했으므로 선거 결과에 대단히 만족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진솔한 평가가 아니다.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유럽의 다양한 급진좌파 프로젝트에 대해 혁명가들이 어떻게 관계 맺느냐는 것이다. 핵심은 혁명적 정치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한[한국] 상황이 재미있던데 얘기해 달라.
최일붕 : 아시다시피 한국은 서구와 비슷한 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이곳도 경제 위기 때문에 양극화가 심각하고, 특히 이명박 정부의 위기가 심각하다. 그는 갈수록 사면초가 상황에 처하고 있는데, 고집불통으로 스스로 정치 위기를 악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를 둘러싸고 오른쪽으로는 옛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딸이 집권 한나라당의 우익으로 세를 얻고 있고, 왼쪽으로는 중도좌파 계열 정치세력들이 세를 신장시켜 나아가고 있다. 최근에는 전임 대통령의 자살로 민주당의 개혁파가 급속히 지지를 회복해, 양극화의 이 좌측 방향을 선도하고 있다. 그러니까, 박근혜와 민주당 사이에서 이명박은 박근혜처럼 행동하지만, 그래 봤자 박근혜에게만 유리할 뿐이다.
최근 한국 정치는 3대 쟁점이 지배하고 있다. 첫째는 민주주의 문제다. 집회도 불허하고 연행과 체포를 일삼는 등 이명박 정권의 탄압이 혹심하고, 심지어 다가올 국회 회기에서 법률 개악으로 제반 민주적 권리마저 악화시키려 들고 있기 때문에, 이달 하순이나 내달 초쯤에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다.
둘째, 북한 핵무기 문제다. 이것은 한반도 주변정세를 점점 긴장시키고 있고, 이명박은 이를 이용해 광범한 대중의 민주주의 수호 염원을 제압하려 한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이명박이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해, 이 문제가 이명박에게 크게 유리하게 작용하지는 않는 듯하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셋째, 경제 위기 책임 전가에 반대하는 노동자 저항이다. 이 운동 분야는 아직 본격적인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몇 달 뒤에야 가장 잘 조직된 노동자 부분에게도 대량 해고 선풍이 불 것이므로 그때는 기대해 볼 만하다.
그러나 명백히 노동계급 의식은 반전되고 있다. 2005년에는 울산 북구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는데, 올해 선거에서는 진보신당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를 크게 눌렀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 노동자 의식의 반등은 노동자 투쟁에 따른 것인가?
최일붕 : 아직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정치의 위기와 격동, 혼돈에서 비롯한 듯하다. 그래서 노동자 의식의 성격은 여전히 중도좌파적 개혁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몇 달 뒤에는 큰 노동자 투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크리스 하먼 : 단언하기는 이르지만, 미국 경제 위기의 감속이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일본과 유럽은 그렇지 않지만). 그러나 경기 반전(反轉), 즉 회복은 아니다. L자형이냐, V자형이냐, W자형이냐를 예측하는 것도 시기상조다.
파노스 가르가나스 : 경제 위기가 감속하는 조짐이 보이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몇 주 전에 독일과 미국 사이에 경제 해법을 놓고 의견 불화가 있었던 것을 보면 경제 위기가 낳는 정치적 파장은 더 커질 것 같다. 따라서 급진좌파는 지난 5년 동안 활동한 방식으로 계속 활동할 수 없다. 이번 위기로 급진좌파의 전진이 가로막혔다. 급진좌파 내에서도 향후 성장 방식에 대한 논쟁이 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 좌파와 녹색당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독자 노선을 갈 것인가 같은 논쟁 말이다.
미셸 로비두(캐나다) : 캐나다에서도 경제 위기 감속 조짐이 보인다. 언론에서는 Stelco[미국철강의 캐나다 주재 기업] 같은 기업이 공장을 재가동하면서 8백 명의 노동자들을 다시 고용했다는 등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 영국에서도 공장들이 재가동된다는 등 경제 위기 감속의 징후가 보인다. 그러나 현상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두 명의 주류 경제학자들이 현재의 위기가 대공황 초기와 같은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몇몇 주요 경제에서 경기부양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기는 한 듯하다. 물론 독일 같은 나라는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정부가 케인스적으로 대처한 것과 일부 공장에서 재고가 바닥나면서 생산이 재개되는 등의 요인이 결합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급속한 경기 하강은 끝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위기의 끝은 아니다. 위기의 여파는 계속 확산될 것이고 라트비아 같은 경우는 심각한 상황이다. GDP[국내총생산]가 5분의 1가량 줄어들 전망이다. 케인스적 부양책을 감당할 수 없는 주변부 나라들은 이토록 취약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기 회복보다는 침체의 장기화가 더 유력하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반전 쟁점이 올해 초에 비해 분명하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올해 초에는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 사태에 대한 항의 시위와 학생들의 캠퍼스 점거로 반전 운동이 부활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후 반전 쟁점은 정치적 가시권에서 사라졌다. 가령 5월 알 나크바[아랍어로 ‘대재앙’을 뜻하는 말로, 이스라엘의 건국 기념일인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국치일] 항의 운동의 규모는 지난해보다 작았다. 비슷한 때 버밍엄에서 노동조합 시위가 있긴 했지만 그것으로 알 나크바 항의 운동 규모 축소가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반전 활동은 우리의 최우선 순위가 아니게 됐다. 오히려 경제 위기 관련 쟁점들이 핵심이 됐다.
미셸 로비두 : 캐나다에서도 반전 시위의 규모는 줄었다. 가자 침공에 대한 항의와 갤러웨이[선명한 반전 입장으로 노동당에서 출당당한 유명한 영국 국회의원]의 캐나다 방문 불허 방침에 대한 항의 시위는 제법 컸지만 전반적으로는 반전 운동이 가라앉는 분위기다.
파노스 가르가나스 : 지난 6~7년간 급진좌파는 반신자유주의·반전 운동을 동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제 반전이 퇴조하고 있고 반신자유주의는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원론적인 얘기뿐 아니라 경제 위기에 대한 구체적 대응을 논해야 한다. 즉, 급진좌파는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 NPA의 경우 과거 투쟁 물결의 산물인 브장스노의 유용성은 끝났다. 디링케는 뒤처지고 있고 새로운 현안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독일 디링케의 선거 유세 모습
적어도 그리스의 경우에는 이상과 같은 분석이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급진좌파가 어떻게 반전·반신자유주의 이상으로 나아가느냐는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 맞는 말이다. 리스펙트의 경우도 반전 운동의 파도를 타고 뜰 수 있었다. 어떤 점에서 갤러웨이는 이 파도가 잦아드는 것을 SWP보다 먼저 간파하고 몸을 뺀 셈이다. SWP는 반전 운동에 가장 열심히 뛰어든 세력이었던 만큼 반전 운동이 여전히 다시 뜰 수 있다는 환상을 갖기 쉬웠고, 따라서 갤러웨이보다 늦게 간파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파노스 가르가나스 말대로 2000년대 초에 그랬던 것처럼 급진좌파들이 손쉽게 약진할 수 있는 조건은 끝났다. 부시의 예전 측근조차 은행 국유화를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신자유주의 반대만을 외치는 것으로 불충분하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 모두 좋은 기여를 해 줘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