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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낙태논쟁에서 우리가 잊고 있던 것들

지난 11월 1일 산부인과 의사 30여 명이 ‘낙태 근절 캠페인’ 선포식을 강행했다. 이들은 임산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임신중절 이외에는 낙태 시술을 하지 않을 것이며, 불법낙태시술 명단을 공개해 고발하겠다는 엄포도 놓았다. 이후에 이어지는 시나리오는 그 이전의 낙태논쟁 때와 비슷하다. 천주교 윤리위는 두 손 들어 환영했고, 일부 네티즌들은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며 낙태를 하는 것은 살인과 다름없다는 댓글을 달았다. 무수한 단체들이 낙태 반대 목소리를 내지만, 내놓는 근거는 한결같다. 천주교 윤리위든, 산부인과 의사든, 네티즌이든 모두 ‘태아의 생명은 똑같이 소중한 것이니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임신중절을 제한한(전면 금지가 아님)우리 형법에는 상당히 의아한 구절이 있다. 강간을 통해 임신한 아이에 대해서는 임신 중절을 허용한다. 낙태를 반대하는 이들 중 상당수도 이 조문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임신중절이 허용되지 않는 아이와 달리, 당연히 낙태를 해도 되는 아이가 있다면, 결국 같은 생명 사이에 위계를 만드는 꼴이 된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어떤 아이는 꼭 살아야만 한다면, 어떤 아이는 자기 책임도 없이 죽어도 싸게 된다. 게다가 성범죄를 통해 임신된 아이가 그대로 성장했을 경우를 생각해보라, 위의 논리를 그대로 따른다면, 이들은 위계상 아래에 있는 2등 국민이 될 수밖에 없다.

여성의 의지

물론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라는 선언을 그대로 유지하며, 위 사안을 검토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 다른 변수를 도입하는 것이다. 여기서 고려되는 변수는 여성의 의지다. 즉, 성범죄를 통해 포태된 아이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든 태아의 생명은 평등하지만,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에게 출산을 강요하는 것은 반인도적이므로 어쩔 수 없이 낙태를 허용하자는 의견이다. 어쩌면 이 그럴싸한 문장을 두고, 천주교 윤리위에서는 박수를 치며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그럼, 다른 여성은 안 그랬고?’이다. 정상적인 성관계를 맺을 때, 모든 여성이 아이를 갖기를 희망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원치 않은 임신한 것은 똑같은데, 왜 이들이 하는 낙태는 범죄가 되는 것인가?

아이를 가지는 것도 여성이고, 낙태를 하는 것도 여성이다. 그렇다고 모든 담론의 중심이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 담론의 배경이 되는 건 분명 여성의 신체임에도, 논의에서 그들의 문제는 이상할 정도로 빠져 있었다. 강간을 당한 여성은 원치 않는 아이를 낳아야 하므로 유일한 예외적 상황에 놓인다는 말이, 여성이 자신의 몸과 출산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하려면 폭력과 강제를 통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했을 때나 가능하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건, 낙태를 함이 옳다 그르다 이전에, 우리가 담론을 형성함에 있어 너무나도 당연한 사안들을 빼먹고 있다는 점이다.

‘낙태 근절 캠페인’을 선언한 의사들의 오늘자 인터뷰를 보며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이들의 주장으로는 낙태가 근절되면 인구가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는 더 효과적이고 인도적인 방법은 따로 있다. 왜 사람들이 굳이 생긴 아이까지도 버리려는지를 묻는 것이다. 10대 비혼모가 세상에 나왔을 때의 아픔, 20대 직장 여성이 아이를 가졌을 때 걱정해야 할 것들, 여성이 덜컥 아이가 생겼을 때 겪어야 할 난관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묻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이 아이를 없애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하는 것, 더 나아가 아이를 가지겠다고 결심하게 하는 것이, 공적의제로서 인구 문제를 공공연하게 떠드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낙태에서든, 출산에서든 우리는 너무 오래, 그들의 자궁을 들여다 보느라, 그들의 힘든 얼굴을 보는 것을 잊어버린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