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낙태,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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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윤 동지가 〈맞불〉66호에 실린 '낙태는 왜 합법화돼야 하는가' 기사에 대한 반론 편지를 보내왔다. 이에 대해 승주 기자가 김도윤 동지의 주장을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 독자들의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두 기사를 한꺼번에 싣는다.
태아의 생명이 여성의 결정권보다 우선이다
〈맞불〉 66호 ‘낙태는 왜 합법화돼야 하는가’ 기사는 “태아의 생존 가능성이 얼마든 간에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삶이 충돌한다면, 당연히 여성의 삶이 우선이어야 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당연히 여성의 삶이 우선시돼야 하는가? 이는 태아의 생명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논증이다.
물론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에 따르는 희생을 모두 감내하는 것은 여성이겠지만 생명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는 태아는 어떤가? 미국의 부시를 비롯한 기득권의 낙태 금지 주장에 여성의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 반면, 〈맞불〉 기사에는 태아의 생명권이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낙태는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운명결정권 충돌 문제다. 생명권이 자기운명결정권보다 우월한 가치임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태아를 완전한 생명이라고 여길 수 있느냐가 문제될 뿐이다. 생명에 대한 정의는 현대 의학으로 굉장히 모호하다. 그러나 모호할 경우에는 비록 체외 생존가능성이 얼마되지 않는 태아라도 생명권을 인정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낙태는 인류 역사에서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지금은 수위가 정도를 넘고 있다. 낙태권을 인정한다면 산업화와 물질주의로 빚어진 가치관의 부재와 인명 경시 풍조만 늘어갈 것이다.
양육 등의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여성에게 낙태는 단기적으로 사회에 긍정적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과 동물의 생명이 중요하듯, 인간이 될 예정인 생명도 중요하다.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풍토와, 분위기, 사회 체계를 비판하고 바꿔 나간다면 굳이 낙태가 필요할까?
김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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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자신의 몸과 삶을 통제할 수 있어야
출산은 일과 학업 등 여성들이 계획했던 미래에 종종 단절을 가져 온다. 산전후 휴가가 없는 직장이 태반이고 그나마 산전후 휴가를 사용한 여성 노동자 셋 중 한 명은 회사의 압력이나 양육 문제로 퇴사한다. 청소년 등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임신은 사회적 냉대까지 받는다.
이처럼 아이를 낳고 싶어도 낳을 수 없게 하는 사회는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가 바뀌더라도 원치 않는 임신 또는 출산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출산에 따르는 육체적 고통도 그대로다.
이렇게 여성의 몸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출산은 당연히 여성이 결정할 몫이다. 몸의 일부인 태아 때문에 여성이 선택을 강요당해선 안 된다.
낙태가 불법인 상황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때로는 ‘생명권’까지 빼앗는다. 영화 〈더 월〉에서 혼외정사로 임신한 여성(데미 무어 분)은 자기 집 식탁 위에서 무면허 시술을 받고 피범벅이 된 채 죽어 간다. 낙태가 불법이자 죄악시되던 1950년대 미국의 모습이다.
지금도 매년 전 세계 1천9백만 명의 여성이 불안전한 낙태 시술을 받고 있고 이중 60만 명이 합병증으로 사망(세계보건기구)한다.
한국에서 낙태 시술은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30만 원에서 1백50만 원이 든다. 죄의식과 비용 때문에 망설이다 후기 낙태를 하게 되는 경우에는 심한 출혈과 고통까지 수반한다.
낙태가 합법인 영국의 낙태율이 한국보다 낮은 것을 보면, 낙태 합법화가 낙태를 부추긴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생명 존중이라는 낙태 반대 논리는 사후피임조차 방해해 여성들이 더 힘든 낙태 시술을 택하게 하는 모순을 빚고 있다. 성관계 후 50일 안에 복용하면 착상을 막아 주는 사후피임약 RU486은 ‘수정란도 생명’이라는 우익들의 반발 때문에 한국 시판이 불허됐다. 3일 안에 먹으면 수정을 막아주는 약도 의사처방이 있어야 구할 수 있다.
여성들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사후피임약과 낙태는 전면 합법화돼야 한다.
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