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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는 맑시즘 2007 ②:
사랑, 결혼, 그리고 가족

[편집자] 맑시즘 2007에서 존 리즈와 린지 저먼이 한 연설들을 4주에 1번씩, 네 차례에 걸쳐 싣고 있다.
이 글은 그 두 번째 순서로 린지 저먼이 연설한 ‘사랑, 결혼, 그리고 가족’을 녹취한 것이다.

① 사회 변혁의 전략과 전술(존 리즈)
② 사랑, 결혼, 그리고 가족(린지 저먼)
③ 현대 제국주의의 정치와 경제(존 리즈)
④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린지 저먼)

린지 저먼은 영국 ‘전쟁저지연합’ 사무총장이며 영국 ‘리스펙트’ 런던시장 후보이다


혹시라도 사랑, 결혼, 그리고 가족 문제에 관한 개인적인 조언을 구하러 오신 분들이 계시다면 제 강연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제 강연의 목적은 사회주의자들이 왜 사랑, 결혼, 가족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며, 우리 모두에게 그 주제가 왜 그토록 중요한지에 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선 매우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차별과 불평등에 내맡겨진 채로 사회주의를 달성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불가결한 일부분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역사상 모든 위대한 사회 운동은 평등을 추구하는 여성 운동, 자유연애를 지향하거나 사랑과 성관계에 관한 새로운 관념들을 실험하는 운동을 그 속에 잉태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모든 위대한 혁명에서 이러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평등과 여성의 권리를 성취하는 데서 다른 어떤 혁명보다 멀리 나아간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경우 특히 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심지어 그보다 더 전에, 1880년대에도 칼 마르크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자유연애가 모든 위대한 사회운동의 일부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째서 그러한지 우리는 자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혁명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엄청나게 바빠진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들이 자유연애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시간이 남아 돌아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이유는 대격변기에 사람들의 생각이 더 개방적으로 바뀌고, 삶과 연애에 관한 태도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배적 이데올로기

평등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용어들 역시 이 점을 보여 줍니다. 19세기에 사용된 여성 해방(emancipation)이라는 용어는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우는 카리브해 연안 지역과 아메리카 노예들의 해방(emancipation) 운동에서 단어를 차용했습니다.

그리고 1960년대에 등장한 여성 해방(liberation) 운동 역시 당시에 아프리카와, 더 중요하게는 베트남에서 일고 있던 반식민지 민족 해방(liberation) 투쟁에서 단어를 차용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관념들은 어느 시대에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는 위협적이었지만, 한편 여성들에게는 다른 경로로는 접할 수 없는 대안적 사상들을 제시해 주는 통로였습니다.

물론 여태껏 수백 년 동안 우세했고 지금도 우세한 관념은, 여성은 자신이 겪는 불평등과 억압에 맞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성의 지위가 열등한 것은 자연의 순리라는 것이지요.

[이런 관념이 우세할 수 있는 것은] 오랫동안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족 내에서 생활해 왔기 때문입니다. 비록 각각의 사회마다 가족의 형태는 달랐지만, 여성이 가족에서 떨어져 나와 가족 밖에서 살아가는 것은 종종 법률에 위배됐고, 대부분의 종교와 대다수 사회의 관습과 전통도 이를 금지했습니다.

사실 인류 역사 대부분에 걸쳐 인간은 남녀노소 공히 어떠한 형태이든 가족에 소속돼 살아왔습니다. 비록 그들이 속한 사회의 성격, 즉 사회 구성원들이 부를 생산하는 방식에 따라 가족의 형태도 천차만별이었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가족의 존재와 여성의 불평등을 영원 불변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고인돌 가족〉이라는 미국 만화를 보신 분이라면 제 말 뜻을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고인돌 가족〉에는 1950년대 미국 가정을 쏙 빼닮은 석기시대 가족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석기시대 볼링장에서 여가를 보내고, 석기시대 진공 청소기로 집을 청소하며, 아이들의 어머니는 1950년대의 어머니와 똑같은 방식으로 아이들을 돌봅니다. 모든 것이 1950년대 미국 가정의 모습을 빼다 박은 듯합니다.

이러한 설정은 남녀의 역할 분담이 언제나 지금과 같았으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임을, 즉 여성은 언제나 가정과 아이들을 돌보는 존재로, 남성은 석기시대의 차를 몰고 직장에 나가는(실제의 석기시대라면 여성들이 집에 있는 동안 사냥을 나가는) 존재로 남을 것임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두 말할 것도 없이 당시의 실제 생활 양식과 가족 형태는 오늘날과 많이 달랐습니다.

사실 자본주의는 가족이 조직되는 방식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고, 그 결과로 나타난 자본주의 가족은 과거의 어떤 가족과도 모습이 다릅니다.

유사 이래 대부분의 기간 동안 가족은 농경이 이뤄지는 토지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가족 구성원들이 직장에 나가거나 등교하거나 영화 보러 가느라 잦은 이동을 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당시의 가족 구성원들은 집을 둘러싼 좁은 토지 내에서 거의 모든 것을 해결했습니다. 따라서 각종 음식과 의복을 비롯한 많은 재화가 가내(家內)에서 생산됐고 일부는 다른 가족의 생산물과 교환됐습니다.

자본주의는 이 모든 것을 근본부터 바꿔 놓았습니다. 가내와 토지에서 생산되던 재화는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상품으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농지를 떠나 도시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자본주의는 또한 각각의 가족 구성원을 독자적 임금 노동자로 만들었습니다. 자본주의 초기의 영국에서는 가족 중 가장 어린 아이도 임금노동에 투입됐습니다. 네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아이들이 공장이나 탄광에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더는 이런 일이 없지만 그럼에도 가족의 모든 구성원은 언젠가는 노동 시장에 나가 자본가 계급에게 노동력을 팔도록 기대됩니다.

이것은 가족 내의 관계뿐 아니라 가족이 바깥 세상과 맺는 관계도 변화시킵니다. 특히 이는 가부장인 남성의 지배에 기초한 전(前)자본주의적 가족을 파괴합니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관념을 낳습니다. 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은 자신이 더는 남성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상 처음으로 그들에게 독자적인 수입이 생기면서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됩니다.

또한 자본주의는 “개인”이라는 관념을 처음으로 탄생시킵니다. 독자적인 의식과 개성을 지닌 개인이라는 관념을 낳고, 특히 개인 간의 낭만적 사랑,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통한 개인의 자아실현이라는 관념을 낳았습니다. 이 모든 사상은 17세기와 18세기 자본주의 사상의 태동기에 나타났습니다.

성평등

19세기 유럽 문학을 보면 여성 작가가 여성의 연애관과 로맨스에 관해 쓴 소설이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 놀라울 정도로 많습니다. 후자에 해당하는 소설을 쓴 작가에는 톨스토이, 플로베르 등 19세기 소설가 대부분이 포함됩니다.

이 모든 것은 여성 해방과 성평등의 토대를 마련해 줬습니다. 하지만 잘 아시다시피 여성 해방은 아직 요원합니다. 영국과 한국을 포함해 대다수의 선진국에서 지난 수십 년 간 여성의 삶에 전례 없는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여성의 삶에 일어난 첫 번째 커다란 변화는 가외(家外) 노동의 증대였습니다. 물론 여성은 그 전에도 계속 노동을 해왔지만 대개 부불(不拂) 노동이었고 인정도 받지 못했을 뿐더러, 설령 탁아소 같은 곳에서 유급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여성들이 있었다 해도 똑같은 일을 무급으로 하는 여성 노동력이 워낙 광범한 탓에 최저 수준의 임금을 받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도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면서] 크게 변했습니다. 〈이코노미스트〉도 인정했듯이 지난 20~30년 간 여성 노동이 세계 부의 창조에 기여한 몫이 신기술 기여분보다 크고 양대 신흥공업국인 중국과 인도의 기여분보다도 컸기 때문입니다(물론 그렇다 해도 여성의 ‘경제 기적’을 칭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더욱이, 노동은 여성의 자의식과 남성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여성들은 아이를 더 적게 갖거나 아예 갖지 않습니다. 결혼하는 여성 비율은 줄어드는 반면 이혼율은 늘고 있습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독자적인 수입을 갖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대하는 여성의 태도가 바뀐 것입니다.

여성들의 교육 수준 또한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는데, 이는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진로와 관련해 단지 어머니나 주부가 되는 것 이외의 더 많은 가능성에 눈뜨게 했을 뿐 아니라 가족으로부터 독립된 삶의 기회를 부여했고, 따라서 예전처럼 씨족 촌락이나 가족 내에 머물렀더라면 맺지 못했을 여러 사회적 관계를 맺게 해 주었습니다.

이는 세 번째 그림, 즉 피임이 용이해지고 낙태 시술이 광범하게 보급된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 계신 젊은 분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현재 세대의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안전하게 통제하고 자신이 아이를 가질지 여부와 언제, 몇 명이나 가질지를 결정할 수 있게 된 역사상 최초의 세대입니다. 1930년대에 광부 부인들의 유산 사례를 연구한 어느 보고서는 조사한 유산 사례의 최대 절반 가량이 사실은 부인들 스스로 행한 낙태였다고 추정했습니다. 오늘날에는 합법적인 낙태를 시술 받기가 더 쉬워졌습니다. 명백하게도 낙태에 대한 요구는 항상 있었고, 적어도 오늘날 상당수 국가에서는 낙태 시술이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제공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선택권

이것이 중요한 진일보인 이유는, 아이를 원하고 또 낳을 수 있는 여성들이 1백 년 전이라면 8~10명씩 낳았을 것을 이제는 한두 명만 낳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남자와 맺어진 여성이라도 자신이 그 남자를 더는 사랑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을 때는 원래의 남자를 떠날 수 있게 됐고, 당연히 남자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성의 신체가 더 이상 여성의 운명을 구속하지 않으며, 여성이 이제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영위할지, 아이를 가질지, 가진다면 누가 아이들을 돌볼지, 모유 수유를 할지 여부 등 온갖 문제에 관해 선택권을 갖게 됐다는 것입니다.

많은 우파들이 이 점을 극도로 혐오합니다. 우익 정치는 많은 부분 가족 수호나 가족 강화라는 사상과 결부돼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증거를 종합해 보건대, 여성들은 선택권이 주어지는 한 언제나 이와 같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합니다.

그렇기에 지난 20~30년 간 전세계 수준에서 나타난 일관된 패턴은 결혼 건수 감소·이혼 건수 증대·출산율 저하였습니다.

영국의 통계치를 보면, 10건의 출산 중 평균 4건이 혼외 출산이었고, 18~60세 사이의 여성 중 20퍼센트가 혼인 대신 동거 생활을 하고 있으며, 24퍼센트의 아동이 한부모 가정(보통 어머니 쪽)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가족 관계 바깥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전통적 가족이 완전히 붕괴하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기 쉬운데, 이것은 부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 사이에 가족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구조물이 대부분의 나라에서 심각하게 약화됐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족을 복원하려는 쪽으로 온갖 사회적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단지 우익 이데올로그들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국가 자체가 가족에 개입해 아이들이 제대로 양육되고 교육을 받게끔 강제합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아이들의 양육과 관련한 가지각색의 법령이 존재하며 가족의 중요성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매우 강조됩니다. 한국에는 1자녀 이상 갖기를 장려하는 광고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인구 수 증대뿐 아니라 전통적 가족 형태 유지를 위한 명백한 이데올로기적 시도입니다.

또한 비록 결혼 건수가 줄고는 있어도 결혼식 자체는 더욱 규모와 비용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컨대 영국에서는 화이트 웨딩[결혼식 전체에 하얀색 장식을 사용하는 값비싼 결혼식-옮긴이]이 점점 더 인기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려면 가족의 양면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가족은 자본가 계급에게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칼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족은 노동력 재생산의 도구입니다.

이 말의 의미인즉, 가족이 있기에 현존 세대의 노동자들의 의식주가 해결되고 다양한 욕구가 만족됨으로써 사회가 비교적 보수적이고 안정된 상태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하게는 다음 세대의 노동자들, 즉 아동들이 부모들에게는 막대한 비용이 들지만 미래에 그들의 노동력으로부터 혜택을 볼 국가에게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화되고 양육되며 일정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의 양면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가족의 이와 같은 측면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고 입장하는 신부 가운데 누구도 노동력 재생산을 염두에 두고 예식을 올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그들이 결혼을 하는 이유는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결혼식이 자기 생애 최고의 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그리고 결혼 뒤의 고달픈 인생을 생각하면 아마 실제로 생애 최고의 날일 것입니다[웃음]). 혹은 아이를 원해서, 가정을 원해서, 다시 말해 사회가 그들에게 가치 있다고 말하는 일체의 것을 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가족의 다양한 기능들을 보여 줍니다. 한편으로 가족은 자본가 계급에게 경제적 이득을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동계급에게는 비정한 세상의 ‘천국’입니다. 노숙자나 고아 등 가족의 울타리 밖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힘들게 삽니다.

그래서 가족은 계속 유지되지만 가족 구성원들은 가족의 원자화, 가족 내부의 압력, 가정 폭력과 성적 괴롭힘 등 때문에 큰 대가를 치릅니다. 또, 가족 제도가 여성 차별의 원인이기 때문에 특히 여성이 끔찍한 희생을 치릅니다.

여성의 필요는 이윤을 창출하려는 자본가들의 필요에 종속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무상 보육 제도가 존재하지 않고, 35시간 노동제가 도입되지 않고, 여성들이 어머니나 할머니 세대들이 과거에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장시간 교대 근무를 해야 합니다.

지난 30년 간 볼 수 있었던 해방의 가능성들, 1960년대와 70년대 여성 운동의 요구와 희망 들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여성 해방이 계급 사회라는 벽에 부딪쳤기 때문입니다.

여성 해방 운동은 여성이 일할 권리를 요구했고, 그것은 여성이 집에 속박돼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회에서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여성이 일할 권리는 경쟁이 치열해지는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남성과 동등한 자격으로 착취당할 권리였고, 여성은 노동 외에도 가사와 양육의 이중 굴레를 짊어져야 했습니다.

여성 해방 운동의 또 다른 요구는 성의 개방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적 자유는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상품으로 변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포르노 사업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오늘날 여성의 자아상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부정적 측면이 많습니다. 젊은 여성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모습이 되기 위해 다이어트에 집착하고, 이 때문에 식사장애로 고통을 받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을 가정에서 벗어나게 했지만 차별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가 이윤이 아니라 세상의 부를 생산하는 사람의 필요를 위해 조직돼야 합니다. 따라서 계급사회의 종식과 계급사회가 초래한 분열과 차별의 종식만이 여성 해방과 인류 전체의 해방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녹취·번역 천경록

정리 발언

먼저 동성 결혼에 대해 답하겠습니다. 저는 플로어에서 답변하신 분의 의견에 대부분 동의합니다. 저는 결혼하지 않았고 누군가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려는 사람들의 권리도 옹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게이·레즈비언 결혼의 경우처럼 다른 사람들이 반동적 이유에서 그 결혼에 반대한다면 말이죠.

영국에는 “시민 동반자”라는 제도가 있는데, 이는 온전한 결혼과는 다르지만 결혼과 상당히 유사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민 동반자 관계를 서로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결혼이 해방적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이 동성애자이건 이성애자이건 결혼과 일부일처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는 동성 결혼을 옹호하지만 대안적 성을 원한다면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들의 가장 인습적인 측면을 따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으로 낙태 문제에 대해 답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낙태에 반대합니다. 가톨릭 등 종교적 이유에서 낙태에 반대하는 경우가 많지만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상당수가 낙태에 반대합니다. 저는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를 잘 알지만 세 가지 이유에서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낙태

먼저, 거의 모든 여성들이 스스로 원치 않는 임신을 했거나, 그런 경험을 한 여성들을 주변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 심지어 [유산을 유도하기 위해] 자해까지 하는 끔찍한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 사례를 보면서 우리는 최소한 그들이 합법적으로 낙태 시술을 받을 권리를 옹호해야 합니다. 낙태 문제는 언제나 “불법적이고 위험한 낙태 시술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합법적이고 안전한 시술을 받을 것인가?”의 문제로 좁혀집니다. 저는 여성들이 최대한 안전하게 낙태 시술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낙태 때문에 육체적으로, 혹은 금전적으로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낙태는 대부분 임신 초기에 행해집니다. 따라서 태아가 독립된 인간이냐 아니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낙태는 대부분 임신 12주 안에 행해지는데, 영국 관습법은 전통적으로 이 시기에 아직 영혼이 태아에 깃들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에 낙태를 합법으로 여깁니다.

어쨌든, 임신 12주 후에 낙태를 행하는 드문 경우에도 산모의 행복·건강과 태어나지 않은 아이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산모를 택하겠습니다.

셋째로, 낙태 반대는 이데올로기적 통제 수단이기도 합니다. 우파들이 낙태권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들이 생명을 소중히 여겨서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지적했듯이 그들은 전쟁광이고, 빈민의 고통에 상관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우파들은 여성이 집에 속박되기를, 여성이 남편이나 아버지 등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 속박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파들이 이 문제를 그토록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가 여성 차별을 설명하는데 부적합한 도구라는 어떤 동지의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그 동지는 사회주의자들이 여성 차별 문제를 자본주의로 환원시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지 자본주의 아래 여성 차별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성 차별이 계급사회 등장 이래 수천 년 간 존재했기 때문에 계급사회를 종식시켜야만 여성 차별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저는 또한 그 동지가 여성 차별 문제에 대한 좌파의 기여를 과소평가했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좌파는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훌륭한 기여를 했습니다.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는 데 필요한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포기한 페미니스트들보다 좌파가 [여성 차별 문제 해결에] 더 많이 기여했습니다.
사실, 맑스와 엥겔스는 1840년대 초에 《공산주의자 선언》 등에서 이미 여성 차별, 가족이 처한 상황 등에 대해 언급했고, 전 생애 동안 여성 평등 문제에 대단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저는 그 동지가 여성 문제에서 공산당을 비판한 데 동의합니다. 공산당들은 오래전에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포기했고 여성 해방에 별로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공산당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지 않았고, 여성을 해방시키지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대안

마지막으로 두 가지 질문이 남았는데요, 먼저 가족의 대안이 무엇이냐는 매우 훌륭한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이 질문은 자본주의의 조직 방식과 밀접히 연관돼 있습니다. 합리적 사회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은 주택이나 아파트에 살면서도 세탁기와 조리기와 자동차를 각자 소유해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을 갖춰야 ‘행복한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반복적으로 주입받습니다. 또한 한 두 명의 부모가 아동의 양육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아동과 부모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회 전체가 아동의 양육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합니다. 저는 이런 원칙 속에서 새로운 가족 형태가 발전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대안적 연애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저는 이런 종류의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웃음]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하면서 그들이 개인적 삶과 정치적 삶, 혹은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먼저 성매매 문제에 대해 짧게 언급하겠습니다. 어떤 여성이나 남성이 자기 몸을 팔아야 생계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매매가 화려하거나 세련된 행위라는 관념이 존재하는 것은 이 자본주의 사회가 얼마나 부패했나를 보여 줍니다.

둘째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남성, 혹은 더 흔하게 여성이 남편[과 부인]의 소유물로 여겨지는 관계는 평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타락한 관계입니다. 그런 문제는 우리의 개인적 태도가 자본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예컨대 질투심을 봅시다. 사람들이 사회를 경쟁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동반자와의 관계를] 일대일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질투심을 느낍니다. 동반자와의 관계를 폭넓은 인간관계 속에서 봐야 하며 미래의 이상적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그럴 것입니다.

엥겔스는 사회주의에서 동반자와의 관계가 “연속적 일부일처제”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즉, 사람들이 일부일처 관계를 맺고, 그것이 끝나면 다른 사람과 일부일처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만큼 그런 관계를 연속적으로 반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러시아 맑스주의자 알렉산드라 꼴론따이는 또 다른 의견을 주장했습니다. 꼴론따이는 모두가 자유연애를 할 것이라 생각했고,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흥미롭고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습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의 제약을 받고 있는 우리 중 누구도 그것에 대해 정확한 상을 그릴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제약에서 해방된 미래 세대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형태로 대안적 성, 대안적 가족, 대안적 생활양식을 만들 것입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앞서 플로어에서 어떤 분이 자신을 성에 관심이 많은 20대로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20대의 특권이겠죠.[웃음] 그래서 사회운동에 청년들이 참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정치 활동 과정에서 성과 사랑의 문제를 제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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