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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 여성이 선택할 권리

매년 전세계에서 약 5천만 명의 여성들이 낙태를 한다. 이중 절반은 불법 낙태다. 매년 2500만의 여성들이 낙태 시술을 받기 위해 무허가 시술소를 찾거나 아무런 의료적 도움 없이 스스로 낙태를 한다. 낙태는 종종 마취제도 없이 비위생적으로 이루어지며, 그렇기 때문에 상해, 질병, 죽음의 위험도 훨씬 크다.

세계보건기구는 오늘날 안전하지 못한 불법 낙태로 매년 최고 20만 명의 여성들이 사망한다고 추정한다. 중남미에서 낙태는 출산 연령 여성의 두번째 사망 요인이다.

여성들은 처벌이 두려워 의료적 조언 구하기를 망설이며, 원하지 않는 임신을 끝내기 위해 화학약품, 뜨개바늘, 옷걸이, 날카롭고 소독이 안 된 물건 들을 이용해 낙태하려다 상해를 입곤 한다.

우리 나라 여성들은 어떨까? 우리 나라에서 한해 동안 이루어지는 낙태는 공식적으로 150만 건(1991년), 비공식적으로는 200만 건이 넘는다. 1년에 60여만 명의 아기가 태어난다고 하니 이보다 세 배 많은 것이다.

그런데 국내 산부인과 병·의원에서 벌어지는 낙태의 99%는 불법이다.(〈한겨레〉 1996년 10월 30일자) ‘모자보건법’ 제14조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를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①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이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②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이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③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④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간에 임신된 경우 ⑤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뒤집어 말하면, 위와 같은 경우가 아닌 낙태는 모두 불법이며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버젓이 이루어지지만 사실상 음성적인, 이런 현실이 여성들에게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비록 오늘날 우리 나라의 많은 여성들이 낙태로 인해 피를 흘리며 죽거나 무허가 시술소에서 위험에 직면해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안전한 낙태를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여전히 낙태하는 여성들은 죄인 취급당하며, 의료혜택(지원금)도 전혀 받지 못한 채 비싼 병원비를 감당해야 하고, 제대로 된 의료시설에서 안전한 수술을 받고 휴식을 충분히 취하지 못한 채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부자 여성들에게 이것은 별 문제가 아니겠지만 노동계급 여성들과 10대들에게 낙태 비용은 매우 큰 돈이다.)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과 생명을 스스로 통제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정신적 육체적 대가를 치르는 것은 여성 개인이며, 따라서 그들이 낙태를 할지 말지를 결정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여성은 출산을 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성(性)을 스스로 통제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주요한 부분이다.

반낙태주의자들의 논리

반낙태주의자들은 생명의 신성함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통일교 등 종교단체들은 학교를 돌아다니며 낙태 반대 캠페인을 펴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매년 무허가 낙태로 죽어가는 20만 여성들의 생명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영국과 미국에서 반낙태주의자들은 대체로 핵무기와 사형제도를 지지한다. 1984년 미국의 반낙태주의자들이 주도한 폭탄세례 캠페인 당시 낙태 시술병원들은 소이탄 공격을 받았으며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영국에서도 반낙태 광신자들이 여성들이 수술대 위에 있는데도 수술용기를 부수고 의료진을 공격했다.

생명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부류는 종종 태아의 생존능력에 대해 부정직하게 주장한다. 때로는 태아의 발 등을 보여주며 정서에 호소하려 한다. 그러나 폐가 호흡이 가능할 만큼 발달할 때까지는 어떤 태아도 자궁 밖에서 생존할 수 없다. 24∼25주 된 태아의 80%는 사망하며, 27주 된 태아도 62%가 사망한다.

또, 반낙태주의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후기 낙태’(3개월 이후의 낙태)만 반대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들은 초기에 안전한 낙태가 가능한 신종 피임약 RU486에도 반대했다. 후기 낙태는 여성의 건강에 위해하다. 여성들이 일부러 후기 낙태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안전한 초기 낙태를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질 때만 후기 낙태는 줄어들 것이다.

필요시 낙태를 합법화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후기 낙태의 비율은 매우 낮다.(덴마크나 스웨덴은 5% 이하다.) 후기 낙태를 반대한다며 낙태를 불법화·음성화시킨다면 후기 낙태는 더욱 늘어날 뿐이다. 불법시술소를 찾아 헤매느라 시간을 낭비하면서 말이다.

여성이 부주의해서 생기는 문제 아니냐며 여성을 탓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피임의 성공률이 그만큼 낮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특히 어린 여성들은 적절한 성교육이나 피임법을 배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낙태를 여성의 죄로 여기려는 온갖 우익적 공격에 맞서 우리는 여성의 권리를 방어해야 한다. 다른 한편, 낙태를 남성의 잘못으로 ‘원망’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왜곡된 성의식을 가진 남성들이 가해자요, 여성들은 피해자라는 것이다.

요즘 많이 읽히는 책인 《섹슈얼리티 강의》(동녁 출판사)는 낙태가 “여성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성행동에 의해서 일어나는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남성들을 “여성들의 억압자요 적”이라고 한다면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사이의 연대는 가능하지 않다.

노동계급이 자신감에 차 있을 때 노조가 여성의 요구를 내걸고 함께 싸운 예는 많다. 1976년 영국의 낙태법과 이 법을 방어하기 위해 남녀 노동자들이 연대해 투쟁했다.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

20세기 후반기 동안 여성의 처지는 놀랍게 변했다. 여성의 3분의 2 가량이 취업하고, 직장을 위해 점점 더 적은 수의 아이를 낳게 됐다. 더 많은 여성들이 출산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피임을 한다.

그러나 여성 노동에 대한 이런 전례 없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성 억압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한 특징으로 남아 있다. 이 억압의 심장부에 가족 제도가 놓여 있다. 주부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여성의 가장 자연스럽고 중요한 역할이라는 관념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이것은 여성이 집안에서는 아무런 보상 없이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일하고 집 밖에서는 노동자로서 싼 값(남성 노동자의 2/3)에 고용되게끔 한다.

신체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을 뺏으려는 것도 여성 억압의 일부다. 옛부터 여성이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도록 클리토리스를 자르거나, 성관계를 출산의 수단으로만 여기게끔 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이 있었다.

여성은 성에 대해 알아서는 안 되며 성관계에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게 정상이라는 생각, 아이를 낳을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것 등은 여성을 가사 노동과 육아에 안성맞춤인 종속적 존재로 취급하려는 것이다.

여성의 지위는 “사회를 평가하는 가장 생생하고 뚜렷한 지표”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위해 투쟁하고자 하는 것은 곧 여성해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을 이룰 수 있는 길은 남성과 여성 노동계급의 단결된 투쟁이다.

노동계급 여성의 처지는 호화 옷을 입는 재벌과 장관 부인, 국회의원과는 다르다. 모든 계급의 여성들과 연대감을 호소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생각과는 달리, 여성해방을 이룰 수 있는 길은 노동계급이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통해 여성 억압의 물질적 뿌리를 제거하기 시작할 때만 여성들은 여성의 몸과 삶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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