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비판은 유대인 혐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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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국가의 건국을 추동한 운동이 시온주의다. 그런데 시온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유대인 혐오(와 배척)라는 오해가 있다. 이 오해를 조장하는 주장은 이스라엘 옹호자들이 휘두르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무기다.
얼마 전 서울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가 성공적으로 열리자,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은 아랍인 시위 참가자들 몇몇이 외친 구호 하나를 빌미로 그 집회를 유대인 혐오 집회로 몰아갔다.
이런 비난은 사실 세계적 현상의 일부다. 예컨대, 영국의 좌파이자 노동당 대표였던 제러미 코빈은 이스라엘을 비판했는데, 당내 우파와 언론에게 “유대인 혐오자”라는 비난을 집요하게 받았다. 이는 그가 2019년 총선에서 패배하는 한 요인이 됐다.
“유대인 혐오”라는 규정은 어마어마한 도덕적 비난을 함축한다. 무엇보다도, 유대인 혐오는 역사에서 결코 되풀이돼서는 안 될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학살)라는 재앙으로 나타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대인 혐오란 무엇인가? 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런 도덕적 ‘규탄’에 명확한 규정이 없다면 무고한 자들을 겨냥한 위험한 무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대인 혐오는 홀로코스트의 악명 때문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공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유대인 혐오란 그저 “유대인이라서” 싫어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유대인이라서”에 담긴 내용은 유대인에 관한 허구적 편견이다. 물론 이 편견은 다른 차별받는 집단에게 씌워지는 편견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일면을 이용해서 만들어지지만(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 결국 현실의 상이한 유대인들을 허구적으로 뭉뚱그린 것에 불과하다. 가령 세계적인 금융 자본가들 가운데 조지 소로스 같은 유대인들이 몇 명 포함돼 있다 해서 신나치는 유대인들이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다는 데마고기 선동을 한다.
그렇다면, 그 편견의 내용을 더 살펴보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이스라엘 비판이 유대인 혐오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현재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유대인 혐오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유대인에 관한 허구적 편견이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가 실제로 벌이고 있는 일 때문에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국가는 무슨 짓을 했는가? 팔레스타인에 살던 수십만 명의 원주민을 내쫓고 학살했으며, 그후에도 남은 사람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해 왔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기본 내용이다.
물론 어떤 행위들은 행위자의 정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가령 이윤에 민감한 것은 기업인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인종 청소가 ‘유대인임’의 필수적 일부인가?
시온주의는 근대 유럽의 유대인 박해에 대한 대응의 하나로 출현한 정치 운동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소수의 대응이었다. 훨씬 많은 유대인들은 사회주의 운동에 열성이었다.
시온주의가 크게 성장한 것은 1930년대에 사회주의 운동이 패배하고 파시즘이 부상하고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였다.
이런 역사적 과정의 결과로 오늘날에는 세계 도처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우호 여론이 결코 극소수라고 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인종 청소가 당신 가치의 핵심적 일부라고 보느냐고 묻는다면 대다수는 분명 아니라고 할 것이다.
실제로는 상당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비판적이다. 노암 촘스키 같은 유수 지식인들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많은 평범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에 공감하고 연대 집회에도 참가한다. 게다가 유대교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를 반대하는 소수 유대교 정통파도 있다.
이스라엘의 해체를 요구하는 것은 유대인의 말살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팔레스타인은 원래 아랍인과 유대인이 공존하던 곳이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똑같은 것으로 보면서 이스라엘에 반대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밖에서 이런 연관 짓기는 팔레스타인의 참상에 분노한 일부 개인들이 때로 유대인을 공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일은 현재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서 전혀 두드러지지 않는다.
또,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똑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는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논리와도 어긋난다. 그런 견해는 오히려 이 운동을 취약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운동이 약화될수록 오히려 그런 동일화가 더 힘을 얻을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지지와 유대인 혐오가 꼭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시온주의자들의 우방들을 봐도 알 수 있다. 트럼프는 대통령 재임 동안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정식 수도로 인정하는 등 시온주의자들을 적극 고무했다. 다른 한편, 지난 4월 트럼프는 자신을 기소한 검사 앨빈 브래그에게 “조지 소로스가 엄선하고 후원한 자”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소로스는 오늘날 극우에게 세계를 조종하는 유대인 음모 집단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금융계의 큰손이다.
2018년 네타냐후가 “이스라엘의 진정한 친구”라고 묘사한 헝가리 총리 오르반 빅토르도 네타냐후의 찬사를 듣기 전 선거 운동에서 소로스를 소재로 유대인 혐오 선동을 했다.
물론 오늘날 파시스트들(신나치)은 자신의 DNA에 각인된 유대인 혐오를 종종 숨긴다. 그러나 이를 무심결에(또는 의도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존재는 매우 사활적이다”고 말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총리 조르자 멜로니가 바로 그렇다. 멜로니는 2019년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소로스는] 좌파를 동맹으로 택하여 주권을 믿는 자들을 적으로 삼았다. ⋯ 우리 이탈리아 형제당은 자랑스럽게 외친다. 그대, 돈 굴릴 생각일랑 하지 마라. 우리의 힘은 이탈리아인들이다.”
시온주의자들과 신나치가 서로를 용인하는 것은 사실 더 역사가 깊다. 히틀러 집권 당시 독일의 시온주의 조직은 히틀러에게 협력을 제안하는 서신을 보냈다. 나치는 사회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의 저항 조직을 분쇄하면서도 시온주의자들의 활동은 계속 용인했다. 주요 시온주의 조직들은 그들대로 독일에 대한 세계 각국의 보이콧을 약화시키려 노력했다.
사실 시온주의는 파시즘과 근본 가정을 공유한다. 유대인 혐오는 극복 불가능한 것이고 유대인은 다른 인종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차별적 편견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지배 질서에서 일정한 기능을 하기 때문에 계속 재생산되고 부추겨지는 것이다. 예컨대, 여성은 돌봄을 맡아야 하는 존재라는 편견은 사회의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개별 가정에 떠넘기는 구실을 한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도 나름의 역사와 독특한 기능이 있었다. 특히, 유대인 혐오는 단지 가난한 이민자들의 존재만으로는 그럴싸하게 설명할 수 없는 세계적인 경제·사회·정치 대위기의 원인을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 유용한 구실을 했다. 소로스가 오늘날 유대인 혐오의 단골 소재가 되는 이유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보기에 유대인 혐오는 이스라엘 반대의 산물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이스라엘도 그 일부다)의 산물이다. 그래서 결국 그 시스템에 도전하는 투쟁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짚을 점이 있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향한 비판에 왜 그런 무지막지한 도덕적 폭탄을 던지는가? 그러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범죄를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팔레스타인 수십만 명을 일거에 난민으로 만들고, 그후 수십 년에 걸쳐 학살하고 고문하고 짓밟은 것을 어떻게 변호할 수 있겠는가.
‘유대인 혐오 말라’는 논리는 거꾸로 시온주의 프로젝트의 범죄성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