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의 폭력을 이해하기 위하여: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 부친 장폴 사르트르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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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은 알제리해방전선 지도자 중 한 명이고 1961년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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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식민주의자들이 자행하는 폭력은 단지 식민지 민중과 거리를 두려고 자행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목적은 식민지 민중을 비인간화시키는 것이다. … 농민에게 총구를 들이밀고 외지인들이 들이닥쳐 땅을 빼앗고, 그들을 위해 농사를 지으라고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저항하는 농민은 병사들의 총에 맞아 시체가 될 것이다. 만약 굴복한다면, 그는 전보다 더 낮은 존재로 격하되고 인간이 아닌 것이 된다. 수치심과 두려움이 그의 인격을 분열시키고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있는 자아를 파괴한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자들은 목적을 한참 달성하지 못했다. 콩고에서는 흑인들의 손목을 자르고, 앙골라에서는 불만 분자의 입을 막으려고 입술에 구멍을 뚫어 쇠자물쇠를 달았는데도 말이다. 나는 인간을 결코 짐승으로 만들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을 심각하게 약화시키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알제리와 앙골라에서 유럽인들은 눈에 띄는 즉시 도륙당하고 있다. …
우리 중 가장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들도 인종적 편견을 갖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파농을 읽어야 한다. 파농은 지금의 억제될 수 없는 폭력이 무익한 울부짖음이나 야만적 본능의 부활, 심지어 원한의 결과도 아닌 인간이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과정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는 한때 다음의 진실을 이해했지만 어느 순간 잊고 말았다. 어떠한 신사적인 태도로도 폭력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오직 폭력 그 자체만이 그것을 없앨 수 있다. 정착민들을 무력으로 몰아내면서 토착민들은 식민 지배가 안겨 준 신경증을 치유한다. 끓어넘치는 분노 속에서 그는 잃었던 순수함을 재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스스로 자아를 만드는 것임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토착민들의 전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우리는 그런 과정을 야만의 득세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주체적 행위를 통해 반란자들은 더딜지언정 확실하게 해방을 성취한다. 그런 행위를 통해 식민 지배의 상처를 자신의 내부와 그의 주변에서 한 조각씩 파괴하기 때문이다.
반란자들의 무기 사용은 그들이 인간이라는 증거다. 반란의 첫 시기에 살상은 필수적인 것이다. 유럽인을 죽이는 것은 한 번에 두 가지를 성취한다. 압제자뿐 아니라 그 압제자가 지배하던 인간을 함께 파괴하는 것이다. 한 명은 시체로 남고, 다른 한 명은 해방된 인간으로 남는다. 살아남은 자는 처음으로 자신이 밟고 있는 것이 자기 민족의 땅이라고 느낀다.
이것이 변증법의 귀결이다. 당신은 이 전쟁을 비난하지만 알제리 투사들의 편에 서겠다고는 감히 선언하지 않는다. 걱정 마라, 정착민들과 용병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은 당신이 더는 회피하지 못하도록 해 줄 것이다. 마침내 더는 도망갈 곳이 없는 순간이 닥치면, 낡고 되풀이되던 범죄들이 당신 안에 씨 뿌려 놓은 폭력에 당신도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에 관해 더 자세히 얘기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바로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때가 도래하고 있고, 단언컨대 우리는 역사를 만드는 자들의 대열에 함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