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를 때리는 《화염과 분노》, ‘러시아 스캔들’ …:
추악한 난맥상과 이전투구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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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그 주변 인사들의 난맥상을 폭로한 마이클 울프의 신간 《화염과 분노: 트럼프 백악관의 내부》가 장안의 화제다. 트럼프 측 변호사가 이 책을 출판하면 고소하겠다고 협박하고, 트럼프 자신도 트위터로 비난을 퍼붓는 등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 때문에 오히려 이 책은 주목을 더 끌었다. 예정일을 앞당겨 발간된 이 책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저자가 트럼프 측의 초청을 받아 관련 인사들과 200회 이상 인터뷰한 후 썼다는 이 책은, 트럼프와 그 주변 인사들의 작태를 소상히 폭로해 화제가 됐다.
이 책은 트럼프를 “하겐다즈 바닐라 아이스크림 통을 문지르며 여러 사안들에 아무 말이나 던지는” 덩치 큰 어린애로, 그 주변 인사들을 트럼프가 낙선(!)하면 대선 캠프 경력으로 한밑천 잡아 보려던 협잡꾼들로 묘사했다.
트럼프가 출마한 것은 낙선한 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돼 TV 쇼를 만들 때 광고 효과를 누릴 생각에서였고, 트럼프의 아내 멜라니가 당선 소식에 울음을 터뜨린 것은 “기뻐서가 아니라” 트럼프가 출마 전에 약속했던 낙선과 그 이후의 사치스런 삶이라는 미래가 날아갔기 때문이었다는 식이다.
정말이지 “이 책에 실린 얘기가 절반만 사실이라도, 역대 정부 중 가장 혼돈스러운 트럼프 정부의 작태를 생생히 보여 주는 책”이라는 현지 언론의 평이 전혀 무색하지 않다.
이 책은 트럼프 취임 거의 직후부터 이어진 ‘러시아 스캔들’ 수사 와중에 발간됐다. 선거 운동 시절 트럼프 선거운동본부 주요 인사들이 러시아 정부에게서 자금과 정보 지원을 받았다는 혐의로 시작된 이 수사는, 이미 본부 주요 인사들이 기소되고 트럼프의 장남과 사위 재러드 쿠슈너가 수사선상에 오르내리는 데까지 나아갔다.
심지어 최근 특별검사 로버트 뮬러는 트럼프를 직접 심문하겠다고 나섰다. 《화염과 분노》가 출간돼 트럼프의 장남과 사위가 “반역적”이고 “비애국적”이며 “나쁜 짓”을 했다는 (트럼프의 전 수석 전략관 스티브 배넌의) 말이 퍼진 직후의 일이다.
울프는, 트럼프 선거운동본부의 압도 다수는 트럼프가 낙선할 것이라 믿고 “반역” 문제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 스캔들이 “트럼프를 거꾸러뜨릴 결정적 한 방”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책에 실린 구절 때문에 트럼프에게 맹비난당한 배넌이 출간 나흘 만에 해당 표현은 “[이미 기소된] 폴 매너포트를 두고 한 말”이라며 얼버무렸지만, 사정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화염과 분노》 출간 후 미국 기성 언론들은 트럼프의 정신질환 여부를 초점 삼아 선정적 보도를 쏟아 냈다. 미국 기성 정치에서 추문 폭로는 흔한 일이지만, 초선 대통령 임기 첫해부터 추문 폭로가 이토록 선풍적인 것은 유례가 드물다. 이는 자격 미달의 인물(트럼프)이 러시아와의 ‘내통’으로 대통령이 돼 국내에서 통치 정당성을 훼손하고 세계에서 미국 주도 헤게모니를 위태롭게 한다고 미국 지배계급 상당수가 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통치 정당성?
트럼프는 경제 위기 속에서 광범해진 분노와 기성 정치·대기업 거부 정서에 힘입어 부상했다. 트럼프는 인종차별·성차별을 무기 삼아 기성 정치권 밖에서 지지를 모았다.(노골적인 우익 포퓰리스트 스티브 배넌 같은 자들)
유럽에서 극우의 성장을 불러온 정치적 양극화가 미국에서는 트럼프를 오른쪽 결집점 삼아 벌어졌고(왼쪽 결집점은 버니 샌더스), 마침내 트럼프는 지배계급 다수가 지지한 후보 힐러리 클린턴을 꺾고 당선했다.(물론 투표율은 매우 낮았다.)
이들은 소수자를 희생양 삼아서라도 미국 자본주의를 부흥시키겠다고(“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나섰다. 트럼프는 당선 후 1년 동안 이 말의 참뜻을 보여 줬는데, 그것은 미국이 자국 자본의 승리를 위해 아낌 없이 힘을 쓰고,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잠재적) 경쟁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자체만 놓고 보면 미국 지배계급의 열망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미국 지배계급이 수십 년 동안 주의 깊게 구성해 온 전략의 버팀목 일부를 흔들 수도 있는 방향을 기웃거리기도 했다.(트럼프와 그 이데올로기적 측근들의 기반이 미국 지배층 주류와 이질적인 것이 그런 ‘일탈’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 듯하다.)
트럼프 정부 안에는 배넌 같은 극우 포퓰리스트부터 그보다는 전통적 지배층에 가까운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데, 울프는 서로 으르렁거리는 이들 간 공통점은 중국에 대한 적개심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미국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약화하는 상황에서 잠재적 경쟁자로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우려는 지배층 다수가 공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는 때로 다른 경쟁자(특히 러시아)에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예컨대 러시아의 크림 반도 병합을 이유로 오바마와 유럽이 힘을 합쳐 러시아에 가한 경제 제재를 풀어줄 수 있다는 말을 흘리는 식이었다.
이는 서유럽을 규합해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한다는 냉전 이래 미국 지배계급의 전통적 대(對) 유라시아 전략 기조와는 이질적인 것이다. 트럼프의 추문이 (거의 공공연히 시인한 상습 성추행 혐의가 아니라) 다름 아닌 ‘러시아 스캔들’로 터져 나오고, 수십 년 동안 러시아와 겨뤄 온 공안 기구들이 정권 수반의 추문 폭로에 앞장선 배경이다.(전 대통령 빌 클린턴의 스캔들이 외도 혐의를 두고 터진 것과 견줘 보라.)
이런 우려는 트럼프가 당선 직후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중단을 선언하고 최근 이란과의 핵 합의를 불인정하는 등 오바마 정부가 주의 깊게 펼친 전술들을 헤집은 것 때문에도 키워진 듯하다. “멍청이” 트럼프가 가뜩이나 불안정한 유라시아 질서를 흔들어 장기적으로 미국의 영향력 축소를 불러올까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한편 트럼프가 국내에서도 펴는 인종차별적 정책들도 미국 지배자들 모두의 입맛에 꼭 맞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가 특정 국가에서 온 사람들의 입국을 금지하고 (멕시코 정부와 관계를 악화시키면서까지) 멕시코 이주민에 가혹한 차별을 가하는 등의 일부 정책은 해외 노동력 유입으로 이득을 얻는 일부 자본가들에게는 마뜩찮은 일이었다.(세계 최대 규모 기업들이 주도하는 정부 정책 규탄 시위들이 간간이 벌어진 배경이다)
긴장과 동거
이처럼 트럼프 정부 안팎의 이전투구는 미국의 대외정책, 그리고 그와 긴밀히 연결된 국내정책을 놓고 형성된 긴장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갈등을 철천지 원수 사이의 화해 불가능한 적대로 봐서는 안 될 것이다. 이들은 미국 자본주의의 성장과 미국의 세계 패권 유지라는 목표를 공유하는 자들로, 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평범한 노동자 대중의 안전과 복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점도 서로 꼭 마찬가지다.
당장 《화염과 분노》 출간 1주일 전만 해도 트럼프는 30년래 최대폭의 부자 감세안의 상원 통과를 두고 국회의원들과 덕담을 주고받았다. 상·하원협의회가 국방비 대폭 증액을 골자로 하는 국방수권법에 합의한 것, 2017년 말 발표된 새 국가안보전략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함께 주요 경쟁자로 지정한 것 등을 보면, 미국의 세계 패권을 위해서는 주저 없이 경제적·정치적·군사적 힘을 동원할 수 있다는 기조 하에 얼마든지 접점을 찾을 수 있다.
민주당 친화적인 미국 일부 언론들과 정재계 인사들은 트럼프를 정신병자·멍청이라 모욕하며 자신들이 “트럼프에 맞서 저항한다”고 자찬한다. 그러나 위의 법안들이 합의·통과된 것은 민주당 의원들도 동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민주당 일각을 비롯한 미국 자유주의자들이 트럼프 개인을 손가락질하며 그의 당선을 ‘러시아 스캔들’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경제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 서민에 전가했던 기성 정치권에 대한 대중적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날이 새롭게 폭로되는 트럼프와 그 무리들의 추악함을 진정 몰아내려면, 인종차별·성차별·부익부 빈익빈 조장 등 그들이 대변하는 모든 것에 맞선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필요하다.
특히 남한에 사는 우리는, 자칭 ‘촛불 정부’라는 문재인 정부가 저런 자들과 손 잡고 동아시아에서 긴장을 부채질하는 데에도 단호히 반대해야 할 것이다.
《화염과 분노》에서 폭로된 트럼프 무리들의 천태만상
“뭐 이런 멍청이가 다 있어!”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 화가 치밀어 트럼프와의 통화를 끊으며
“트럼프가 자기 공약을 이해하긴 하나?”
우파 언론 〈폭스뉴스〉 CEO 로저 아일스, 트럼프 당선 축하 만찬에서 던진 질문
“트럼프는 기본적으로 심한 응석받이다. 그에게는 매사가 이해하기 힘든 것들 투성이다.”
백악관 비서실 전 부실장 케이티 월시
“그러게요. 그 얘기를 [당선 전에] 미리 해 둘 걸 그랬어요.”
재러드 쿠슈너, 새 정부의 정책적 우선순위를 묻는 월시의 질문에 답하며
“인수위 시절에 배넌은 [백악관 선임보좌관] 스테판 밀러한테 행정명령 초안 쓰는 법을 인터넷 검색으로 배우라고 했다. … [밀러는] 제대로 된 영어 문장을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마틴 울프가 폭로한 트럼프 측근의 실상
“당선 첫날부터 우리는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했다.”
백악관 전 수석 전략가 스티브 배넌
“떨거지들이 공항에 나타나 폭동을 벌이라고.”
스티브 배넌, 임기 시작과 동시에 ‘무슬림 입국 금지 행정명령’을 발표한 이유를 묻자
“혼돈이야말로 배넌의 전략이었다.”
케이티 월시, 배넌을 평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