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는 ‘비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여성이 선택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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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문을 제작하는 도중, 보건복지부가 8월 17일 기습 공포한 낙태 수술 처벌 강화 규칙 개정안을 헌법재판소 결정 전까지 시행 유보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이 계획을 철회한 것은 아니다. 정부의 기습 시행과 시행 유보가 생겨난 배경은 다음 번 기사에서 다루겠다.
8월 17일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는 불법 낙태 수술을 ‘비도덕적 의료행위’로 명시하고 불법 낙태 수술을 한 의료인에게 1개월 자격정지 처분을 내리는 의료관계 행정규칙 개정안을 기습적으로 공포했다.
이에 많은 여성들이 크게 분노했다. 8월 25일 비웨이브 주최의 16차 임신 중단 전면 합법화 시위에 약 2500명의 여성들이 모여 “여성 인권 탄압하는 행정부와 그 수반인 문재인 대통령”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8월 28일 직선제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낙태 수술을 한 의사를 범죄자 취급하는 정부의 행태를 비판하며 낙태 수술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29일 보건복지부는 헌법재판소 판결 전까지 시행을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유예일 뿐, 철회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낙태 합법화 여부를 또 다시 헌재 결정으로 떠넘긴 것이다. 그리고 헌재는 어제 낙태죄 위헌 심판 여부를 차기 재판부로 연기한다고 최종 확정해 발표했다.
떠넘기기
복지부가 행정처분 규칙 개정안을 ‘날치기’ 시행한다는 비판이 커지자, 복지부는 어제 “2016년 9월 23일 입법예고 하고, 사회적 논의를 거친 뒤” 시행한 것이며 “낙태 처벌 강화가 아니”라고 우기는 해명을 내놨다.
터무니 없는 얘기다. 2016년 복지부의 입법예고 당시 거센 반발이 일어났고, 박근혜 퇴진운동의 여파로 개정이 무산됐었다.
게다가 지난해 11월 2일 한 여론조사 결과는 낙태죄 폐지가 51.9퍼센트로 유지(36.2퍼센트)보다 훨씬 높았다. 하지만 복지부는 이를 무시하고 올해 헌법재판소 낙태죄 위헌 여부 심리 과정에서 ‘의견 없음’을 피력했다.
도대체 언제 “사회적 논의”를 거쳤다는 것인가? 복지부가 날치기 시행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뻔뻔한 거짓말을 한 것이다.
복지부는 이번 개정안이 불법 낙태 수술을 한 의료인의 자격정지 기간을 최장 12개월로 늘리려 했던 박근혜 정부의 2016년 행정규칙 개정안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비도덕적 행위를 세분화해 진료 중 성범죄는 12개월로, 낙태는 예전처럼 1개월로 한 것”이니 낙태 처벌 강화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역시 참말이 아니다. 기존에는 법원에서 낙태죄(형법 270조)로 실형을 받은 의료인에게만 자격정지 처분이 내려졌는데, 이번 개정으로 불법 낙태 수술을 한 의료진에게 복지부가 법원 판결 없이 1개월 자격정지 처분을 내릴 수 있게 됐다.
결국 여성과 의사들의 항의, 특히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의 부상으로 무산됐던 낙태 처벌 강화 계획을 문재인 정부가 되살리려 한 것이다.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
직선제 대한산부인과의사회가 8월 28일 기자회견에서 ‘낙태 수술 전면 거부’를 선언하자 많은 여성들이 불안감에 떨었다.
SNS에서는 신뢰하기 힘든 낙태약 홍보가 활개를 쳤다. 이런 약의 성분을 확인할 수 없고 가짜약도 많아 온라인 여성 커뮤니티에서 그 위험성을 알리는 체크 리스트가 퍼졌다.
2010년의 악몽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었다. 2010년 이명박 정부의 낙태 단속 강화 방침 발표 뒤 우익 의사들(‘프로라이프 의사회’)이 낙태 시술 병원을 고발하면서 병원이 낙태 시술을 거부하는 일이 크게 늘어났다. 여성들은 병원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당시 낙태 비용은 20배까지 치솟았고, 일부 여성들은 원정 낙태, 가짜 낙태약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낙태를 미루다가 임신 후기에야 수술을 받은 여고생이 사망하는 가슴 아픈 일도 벌어졌다.
낙태 불법화와 단속 강화는 여성들에게 위험천만한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은 어떻게든 낙태를 하려고 한다. 따라서 낙태 금지는 여성들을 안전하지 못한 낙태로 내몰고 여성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할 뿐이다.
임신·출산·양육은 여성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오직 여성만이 낙태 여부를 결정할 자격이 있다. 낙태는 ‘비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여성의 권리다. 낙태 불법화로 고통받는 여성의 현실을 외면한 채, 낙태 처벌 강화를 시도한 문재인 정부야말로 비도덕적이다.
낙태 불법화와 단속 강화는 여성 차별적일 뿐 아니라 계급 차별적이다. 비현실적인 낙태법 때문에 가장 고통받는 여성들은 청소년, 가난한 청년 등 노동계급 여성이다. 최근 원영석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총무이사는 “(불법 낙태 수술의) 90퍼센트가 빈곤층이나 미성년자다. 이들이 지금도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수술할 돈도 없어 힘들어 한다”고 밝혔다.
반면 부자 여성들은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안전하게 낙태하고 충분히 쉴 수 있다. 낙태 합법화는 노동계급에게 절실한 문제인 것이다.
낙태는 사유와 기간 제한 없이 전면 합법화돼야 한다. 여성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병원에서 안전하게 낙태를 할 수 있도록 무상 의료 서비스가 제공돼야 한다. 수술뿐 아니라 사후피임약과 낙태약(미프진)도 무상으로 제공해야 한다.
초기 낙태에 효과가 좋은 미프진을 도입하면 수술이 부담스러운 여성들도 조기에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다.
복지 대폭 확충하라
최근 문재인 정부가 낙태 처벌 강화를 시도한 것은 ‘저출산 현상’에 대한 위기감 때문인 듯하다. 올해 한국 출산율이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며 1.0명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고 한다. 지배자들은 저출산 심화로 미래 ‘생산가능인구’가 급감해서 ‘국가경쟁력’과 국방력이 하락할 것을 크게 우려한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여성이 아이를 낳고 기르기 힘든 현실을 크게 개선하기보다 노동력 재생산 비용과 노력을 개별 가정에 떠넘겨 여성들의 부담을 증가시킨다. 이윤 중심의 자본주의 작동 방식이 여성 차별을 체계적으로 유지·강화하는 것이다.
국가가 아이를 낳고 기르기 힘든 환경은 무시하고, 낙태 금지로 출산율을 높이려는 발상은 여성을 애 낳는 도구로 취급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내년 예산안이 ‘최고 복지 예산’이라고 자화자찬한다. 결혼·출산 유도를 위한 공공임대, 배우자 출산휴가, 돌봄 서비스 예산이 약간 늘어나긴 했다. 한부모 가족 지원액이 2배로 늘어 양육비 지원 대상이 14살에서 18살로 확대되고 지원액도 13만 원에서 20만원으로(청소년 한부모일 경우 35만원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는 노동계급의 필요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쾌적한 주택, 의료·양육·교육 등 복지가 대폭 확충돼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복지 예산은 찔끔 증액했지만 올해 국방예산은 2008년 이후 최고 수준으로 늘렸다. 당분간 국방예산을 계속 늘려 2020년께 50조 원이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국가 간 경쟁이 강화되면서 노동계급과 서민층의 복지가 희생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자본주의 국가의 최고 수장으로서 여성의 건강과 삶을 자본주의 체제의 우선순위에 종속시키고 있다. 따라서 여성이 자신의 몸과 삶을 스스로 통제하려면 문재인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싸워야 한다.
낙태 합법화 운동이 여성들만의 과제는 아니다. 낙태가 여성의 권리임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여성들의 운동이 남녀불문하고 낙태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내려 하고, 노동자 운동도 낙태권 운동을 지지한다면 낙태 합법화 성취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