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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하라는 유엔 권고안 거부한 문재인 정부

최근 문재인 정부가 낙태죄 폐지 유엔 권고안 수용을 거부했다. ‘사회적 합의’를 이유로 낙태죄 폐지 염원을 또다시 외면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23만 명이 낙태죄 폐지 청원에 서명했는데, 이에 답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부는 헌법재판소(이하 헌재) 핑계를 댔다.

많은 여성들이 ‘내 자궁에서 벌어지는 일에 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냐’며 문재인 정부의 유엔 권고안 거부에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러다 낙태죄 폐지 청원이 물거품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와 불만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헌재가 낙태죄를 위헌으로 판결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재판관 다수가 초기 낙태 허용에 우호적이라는 일부 언론의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국가기관인 헌재가 낙태 반대론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낙태죄 위헌 판결을 내릴지는 장담할 수 없다.

헌재는 저출산으로 미래 노동력 공급 부족을 걱정하는 자본가들의 이해관계에 공감한다. 반면 낙태권 운동은 취약한 상태이다. 헌재가 ‘사회적 갈등’을 거론하며 현상 유지를 결정할 공산이 크다.

낙태죄 폐지는 만만치 않은 싸움이다. 그만큼 대중적 투쟁이 필요하다.

낙태죄 헌법소원 공개변론

헌재가 4월 24일 낙태죄 헌법소원 사건의 공개변론을 연다. 낙태한 여성과 이를 도운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269조 1항, 270조 1항)이 헌법소원 대상이다.

그리스도교 우파들은 지난해 12월부터 낙태죄 폐지 반대 운동에 한층 더 적극 나섰다. 천주교 주교회의는 낙태죄 폐지 반대 서명운동을 벌여 받은 100만여 명의 서명지와 낙태죄 헌법소원을 기각하라는 탄원서를 3월 22일에 헌재에 제출했다.

천주교 주교회의는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 보호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태아는 인간이 될 잠재력이 있을 뿐 독립적인 인간이 아니다. 태아는 모체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어 모체 밖에서는 독립적 신진대사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독립적인 인격체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생명권”을 태아에 적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낙태 반대 진영은 낙태한 여성을 ‘살인자’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태아를 위해 엄연히 살아 있는 인격체인 여성의 결정권을 짓밟는 것이야말로 냉혹하고 비인간적이다.

천주교 주교회의는 “낙태가 여성의 정서적,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인간 성의 본질적 의미를 왜곡”시킨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 주장이야말로 과장이고 왜곡이다. 낙태로 여성의 건강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경우는 안전하지 못한 낙태를 받을 때이다. 안전한 낙태를 하면 산모 사망이나 합병증이 매우 드물다. 영국의학협회(BMA)는 임신 초기 3개월 내에 낙태를 하는 여성은 임신 기간을 다 채우고 출산을 하는 여성보다 건강상 위험이 더 적다고 보고한다.

낙태가 아니라 낙태죄 유지가 여성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심각하게 침해한다. 낙태가 불법화돼 있으면 사회적 낙인과 비싼 시술비 등으로 여성들이 조기에 낙태할 기회를 놓치기 쉽다. 시술이 음성화돼 수술이 잘못돼도 피해를 호소하기 어렵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기 힘들다. ‘살인자’라는 사회적 낙인과 비난도 여성을 괴롭힌다.

성의 목적은 단지 생식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낙태 반대 주장은 보수적 성 관념을 깔고 있고, 이런 보수적 성관념을 여성과 사회 전반에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억압적이다.

여성의 몸은 그저 출산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임신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출산은 여성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낙태 여부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으로 보장돼야 한다.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의 요청에 따라 낙태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지난해 12월 ‘2017 검은 시위 ― 그러니까 낙태죄 폐지’가 광화문 세종로공원에서 열리고 있다. ⓒ조승진

미혼모 지원 등 출산·양육 지원을 대폭 확대하라

낙태 반대 진영은 아이를 낳는 것만이 “고귀한 생명을 보호”하고 책임지는 자세라고 주장한다. 지배자들은 ‘저출산 대란’이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출산과 양육이 여성의 의무라며 강요해 왔다.

문재인 정부의 "저출산 대책"도 이전 정부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권리나 삶의 질을 개선하기보다 출산율 향상을 목표로 상정해 왔다.

지배자들은 낙태한 여성을 죄인 취급하면서 출산과 양육에 필요한 복지 정책은 외면해 왔다. 그래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어도 어마어마한 경제적 부담에 짓눌려 출산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5년 발표한 실태조사를 보면, 자녀가 없어도 된다고 답한 기혼 여성의 50.8퍼센트가 경제적 문제를 가장 큰 이유로 들었다. 출산 계획이 없는 기혼 여성의 21.8퍼센트는 그 이유로 자녀 교육비 부담을 1순위로 꼽았다.

오늘날 아이 1명을 대학 졸업 때까지 키우려면 3억 원 이상이 필요하다. 국공립 어린이집은 전체 보육 시설의 5퍼센트로 턱없이 부족하다. 서울 국공립 어린이집 입소 경쟁률이 무려 442대 1이다! 양육 부담은 여성을 ‘경력 단절’자로 만들어 저임금과 비정규직으로 내몬다. ‘헬조선’에서 노동계급에게 양육은 끝없는 ‘고난의 행군’이다.

낙태 반대 진영은 출산과 양육을 선택한 미혼모를 추켜세우며 낙태 비난의 지렛대로만 이용할 뿐 미혼모의 처지는 나 몰라라 한다.

‘한국 미혼모지원 네트워크’에 따르면, 전체 미혼모 약 16만 명 중 출산과 양육을 결정한 사람은 약 3만 5000명이다. 그런 미혼모들의 월평균 소득은 기초생활수급 지원금을 다 합쳐 고작 117만 원 수준이다.

그나마 정부 지원금을 받는 미혼모는 2000명 정도에 불과하고 액수도 보잘것없다. 24세 이하 미혼모가 월 15만 원, 24세 이상 미혼모가 월 7만 원을 지원받는다. 기저귀 값도 분유 값도 안 된다.

게다가 미혼모는 “헤프고 문란한 여자”라는 사회적 낙인과 냉대도 받는다. 경제적 어려움과 천대 때문에 여성이 결혼하지 않고 홀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여전히 매우 어렵다.

이렇다 보니, 한국은 해외 입양이 가장 많은 나라다. 지난 65년간 전 세계 해외 입양 아동 50만 명 중 약 20만 명이 한국 아이들이다.

한국의 아동보호시설에서 살게 된 아이들은 만 18세가 넘어 겨우 300만 원을 받고 퇴소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퇴소한 아이 5명 중 1명이 월 100만 원이 안 되는 생활비로 살아 가고 있다.

미혼모의 영아 유기나 살해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보수 언론들과 우익들은 “엽기적이다, 패륜이다”며 여성을 비난해 왔다.

그러나 우익들이 미혼모의 처지와 해외 아동 입양 문제, 취약한 아동 복지 문제는 외면하면서 “태아 생명권”을 내세워 여성의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낙태와 출산 여부는 모두 여성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 내리는 책임 있는 선택이다. 따라서 정부는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하고 출산과 양육 지원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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