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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 청와대 청원 23만여 명:
낙태죄 없애고 낙태 권리 보장하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도입’을 청원한 사람이 30일 만에 23만 명이 넘었다. 청와대는 11월에 공식 답변을 내놓겠다고 한다.

낙태죄 폐지 대규모 청원은 성에 대한 대중의 태도가 크게 바뀌었음을 보여 준다. 11월 2일 여론조사에서 낙태죄 폐지 의견은 51.9퍼센트로, 절반을 넘었다. 낙태죄 유지 의견은 36.2퍼센트에 그쳤다. 7년 전 조사 때는 낙태 허용 반대(53.1퍼센트)가 찬성(33.6퍼센트)보다 많았다.

낙태죄 폐지 청원은 특히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에 많은 여성이 참가하면서 자신감이 높아졌음을 보여 준다. 물론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건 기대도 엿보인다.

그러나 청와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하나 마나 한 답변을 내놓을 것 같다. 사실,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낙태죄 폐지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라며 답변을 회피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와 성평등 정책 어디에도 낙태죄 폐지는 언급돼 있지 않다. 심지어 9월 중순 총리 이낙연은 낙태를 금지한 현행법 개정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물론 문재인 정부에는 낙태죄 폐지를 지지할 법한 인사들도 있다. 민정수석 조국은 2013년에 쓴 논문 ‘낙태 비범죄화론’에서 사회경제적 사유로 인한 낙태 허용 또는 임신 12주 이내 낙태 비범죄화 방안을 제안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출신인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도 11월 6일 국정감사에서 “여성 건강과 안전, 보호를 위해 낙태 허용 범위, 상담 등 제도 전반에 대한 검토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며 현행법 개정 필요성을 암시하는 듯했다.

그러나 조국과 정현백 등 개혁파 인사들이 문재인 정부 안팎의 보수적 반발에 맞서면서까지 낙태죄 폐지를 추진하려 들 것 같지는 않다. 정현백 장관은 국정감사에서 “낙태가 합법이냐 불법이냐의 이분법으로 논쟁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회피하며 낙태죄 폐지와 낙태 합법화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낙태는 죄가 아니라 여성이 선택할 권리 낙태죄 폐지 여론을 느낄 수 있었던 대학가 홍보전 ⓒ조승진

헌법소원

한편, 낙태죄 폐지 여부는 다시 헌재 심의에 오르게 된다. 올해 2월 한 여성이 낙태죄 269조 제1항(자기낙태죄) 헌법소원을 제기해 앞으로 헌재 심리가 예정돼 있다. 헌재 결정은 내년에 나올 듯하다.

2012년 헌재는 자기낙태죄에 합헌 결정을 내렸고, 이에 따라 의사, 조산사 등을 처벌하는 업무상 동의낙태죄(형법 제270조 제1항)에도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는 위헌 결정이 내려질 수 있다고 일부 언론은 전망한다. 〈프레시안〉은 헌재 재판관의 구성에서 자유주의적 성향 인사가 2012년보다 더 많아졌다며 위헌 결정 가능성을 점치기도 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형법상 낙태를 금지하고 모자보건법상 매우 제한된 조건에서만 낙태를 허용하는 현행법은 현실과 크게 괴리돼 있다. 법을 개정해 법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 권력자들이 일부 있다. 대중의 의식도 크게 바뀌었음이 확인됐다.

그러나 1988년 처음으로 토론되고 네 차례나 헌법소원이 제기됐던 간통죄가 2015년에야 폐지된 데서 보듯 헌재는 매우 보수적인 국가기관이다. 낙태죄 위헌 결정은 헌재 재판관 9명 중 6명이 찬성해야 가능하다. 헌재가 낙태죄 위헌 결정을 내리리라 섣불리 낙관할 수 없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낙태가 합법화된 서구 나라들에서도 낙태를 완전히 비범죄화하지 않은 나라들이 많다.

오늘날 한국 지배계급은 저출산으로 미래에 착취할 수 있는 노동인구와 징집 대상자가 감소해 ‘국가경쟁력’이 약화될까 봐 크게 우려한다. 경제 위기와 지정학적 위기에 처한 한국의 지배계급이 아래로부터 커다란 압력 없이 순순히 낙태죄를 폐지할 리가 없다. 낙태를 합법화한 나라들에서는 합법화하자마자 이를 뒤집으려는 정치적 공격이 일어나 수십 년째 논쟁과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여성들이 합법적이고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으려면 문재인 정부나 헌재를 신뢰하지 말고 아래로부터 대중 운동을 벌여야 한다. 낙태죄 폐지운동은 여성의 낙태 선택권을 일관되게 옹호해야 하고, 특히 노동계급 대중 운동의 지지를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낙태 금지는 부유한 여성이 아니라 노동계급 여성들이 가장 흔하게 피해를 보기에(높은 비용을 부담하고, 수술 뒤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출근하는 등), 낙태 합법화는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요구다. 역사적으로 성공적인 낙태권 운동은 노동자 운동에서 힘을 얻었다.

독일 모델?

문재인 정부와 집권당 일각에서는 독일 낙태 관련 법안을 대안으로 검토하는 듯하다.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 출범 준비 TF 위원의 하나인 정재훈 교수는 최근 〈여성신문〉에서 “낙태 찬성이냐 반대냐”라는 “논쟁의 극단화를 피하는 사례”로 독일의 입법안을 긍정적으로 소개했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더민주당 금태섭 의원도 여성가족부 정현백 장관에게 독일의 사례를 들며 정부가 분명한 견해를 밝힐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독일의 법안은 한국의 법안보다 약간 나을 뿐,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여러 문제점이 있다.

첫째, 형법상 낙태죄가 있어 낙태는 기본적으로 불법으로 규정되고 몇 가지 사유에 따라 처벌이 면제될 뿐이다.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면 낙태가 범죄로 규정돼, 낙태에 대한 도덕적 낙인도 사라지지 않는다.

둘째, 낙태 허용 기간도 12주로, 매우 짧다. 많은 경우 초기에 낙태를 하지만 여러 이유로 낙태가 지연되기도 하므로, 이런 제한은 여성의 권리를 침해한다.

셋째, 낙태 전 상담이 의무화돼 있고, 상담 뒤 적어도 사흘이 지나야 낙태가 가능하다. 상담의 내용도 문제다. 단순히 의학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태아가 생명에 대한 독자적 권리를 가진다”며 여성에게 출산을 권하도록 돼 있다. 이런 것은 ‘상담’이 아니라 낙태를 하려는 여성들을 겁주고 모욕하는 것이다.

넷째이자 마지막으로, 합법 낙태로 인정받지 않는 낙태는 의료보험의 적용을 받지 않고 기본적으로 개인 부담이다.(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저소득층 여성의 경우에는 정부가 비용을 부담할 수 있다.)

이런 시혜적이고 통제적인 독일의 낙태 관련 법안은 자신의 몸과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 여성들에게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낙태 합법화가 필요하다

진보적 여성단체·노동단체들이 높은 낙태죄 폐지 여론에 고무돼 낙태죄 폐지와 낙태 허용 목소리를 다시 높이고 있다. 11월 2일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법률 개정안을 서둘러 발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정의당은 사회경제적 사유의 낙태를 허용하라고 요구해 왔다.

정의당뿐 아니라 진보적 여성·노동단체들 대부분이 ‘사회경제적 사유’의 낙태 허용안을 주요 총선 공약으로 제출한 바 있다. 이 안은 매우 제한적인 사유의 낙태만 허용하는 현행 법률보다는 한층 나은 안이다.

그럼에도 이 안은 낙태의 결정권을 여성에게 주는 게 아니라 의사나 국가관료 같은 제3자에게 준다는 약점이 있다. 실제로 독일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에서는 의사 2명이 승인한 뒤에야 낙태가 허용된다. 그렇게 되면 여성은 자신이 낙태를 하려는 이유를 제3자에게 설명해야 하고 그들에게 그 사유가 합당한지 승인받아야 한다.

한편, 여성운동 내에서도 낙태를 줄여야 한다며 상담 의무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낙태 전에 여성이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고 의사와 상담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돼야 한다. 하지만 상담이 의무화돼서는 안 된다.

낙태 반대 운동가들은 흔히 정보 제공이나 상담 문제를 여성의 낙태 선택을 어렵게 만드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영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낙태 수술 전에 상담을 받는 여성은 겨우 9퍼센트에 불과하다. 여성 대다수는 이미 결정을 하고 오는 것이다. 결국 상담 의무화는 여성의 의사를 거스르게 된다.

낙태 선택은 의사도, 국가도, 파트너도 아닌 온전히 여성 자신의 몫이어야 한다. 여성의 요청만으로도 합법적 낙태가 가능해야 한다.

먹는 낙태약(미프진)과 안전한 낙태

낙태죄 폐지 청원자들이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도입을 요구하자 낙태반대운동연합은 미프진이 위험하다며 도입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낙태 금지 관련 법 개정에는 찬성하지만 미프진 도입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프진이 위험하다는 주장은 오류다. 1980년대에 개발된 이 약은 광범한 임상실험 결과 안전하고 효과적이라는 점이 입증돼 수많은 나라에서 시판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임신 9주 이내에 의약품을 통한 낙태가 아주 효과적이고 안전하다고 밝혔다. 낙태약은 보통 9주 이내에 사용되지만(성공률 95퍼센트), 영국 왕립산부인과협회는 13~24주에도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일각에서는 낙태 수술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미프진 도입을 요구하기도 한다. 물론 미프진이 수술보다 더 안전하기는 하다. 하지만 병원에서 숙련된 의사가 시행하는 낙태 수술도 대부분 안전하다. 특히, 초기 낙태 수술은 출산보다 더 안전하다.

미프진은 주로 초기 낙태에 사용된다. 그러므로 여성의 낙태권이 보장되려면 미프진 합법화만으로는 부족하다. 안전한 낙태를 위해서는 전문 의료진이 있는 병원에서 수술이 시행돼야 한다. 그리고 모든 여성에게 안전하게 낙태할 권리가 보장되려면 미프진과 낙태 수술 둘 다에 의료보험을 적용하고 여성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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