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교사의 연대 호소:
이란 난민 소년 김민혁 군 부자를 지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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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난민이 됐어요?”
“굳이 한국에서 난민을 신청한 이유가 뭔가요?”
평소 궁금하던 것을 거침없이 풀어놓는 학생들. 혹여 ‘상처가 되지 않을까?’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난 6월 4일, 인권동아리 학생들과 한국 사회의 난민을 주제로 활동을 하려고 국가인권위원회에 가서 또래 난민 학생을 만났을 때 일이다.
“한국말을 잘 하시네요?”
“한국에 온 지 10년이 됐으니까요. 제가 어릴 때 왔거든요.”
지난해 10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이란 청소년 김민혁 학생(한국 활동명, 16세)이 유창한 한국어로 대답했다. 이란에서 태어난 민혁 군은 2010년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낯선 한국으로 왔다. 함께 놀던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이후 아버지 지인과 성당에 다니면서 2013년 천주교로 개종했다. 본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다. 그런데 그 선택이 ‘화근’이 돼 버렸다.
“종교를 바꿨는데, 왜 사형을 당해요?”
이슬람 국가인 이란에서 기독교로의 개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배교, 즉 종교를 ‘배신’한 것은 사형을 당할 수 있는 중죄에 속한다. 이란에 사는 민혁 군의 가족들은 종교를 바꿨으니 ‘사람도 아니다’ 하며 아예 연을 끊어버렸다. 숫제 연락을 받지도, 하지도 않는다. 어린 민혁 군이 ‘교회에 나갔다’는 말을 한 뒤부터.
민혁 군과 아버지는 난민 지위를 신청했지만 돌아온 건 불인정 처분이었다. 항의 소송에서도 두 차례 패소했다. 사연을 알게 된 학교 친구들과 교사들이 그의 난민 인정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덕분에 난민 지위 재신청(정부의 난민 불인정 결정에 대해 법원에서 패소한 뒤 다시 난민 신청을 해 같은 절차를 밟는 것)을 하고 민혁 군은 지난해 10월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끝난 게 아니었다.
같은 해 11월 민혁 군의 아버지는 난민 불인정 판결을 받았다. 이란으로 강제 송환될 처지가 된 것이다. 의지할 가족이라곤 아버지뿐인 민혁 군을 아버지와의 생이별로 몰아넣는 아주 잔인한 판결이었다.
신앙심 ‘입증하기’
“개종한 걸 후회하진 않았나요?”
“개종할 때 모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란 생각은 못했나요?”
동아리 학생들의 아찔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저는 당시 어려서 이런 사실을 몰랐어요. 제가 교회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는 많이 난감하셨죠. 이란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원래 기독교인이면 차별받는 정도인데, 무슬림이었다가 다른 종교로 개종하면 사형까지 당할 수 있어요. 용납이 안 되는 거죠. 하지만 제 선택에 대해선 후회하지 않습니다.”
민혁 학생의 아버지는 아들의 개종 사실을 알고도 ‘믿고 싶은 종교를 믿으라’며 응원해 줬고, 몇 년에 걸친 고뇌 끝에 아버지도 천주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선택은 인정받지 못했다.
“‘사제 시험’ 보는 것 같았어요.”
난민 심사에서 목숨이 걸린 박해 위험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된 것은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외울 수 있는지, 찬송가를 부를 수 있는지였다. 민혁 군의 난민 심사에 따라간 어느 사제도 “어떻게 외국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난민인지 가려내겠다는 것인가”라며 놀랄 정도였다. 종교 지식을 묻는 것이 과연 종교적 신념을 검증하는 방법인지 ‘사제 시험’인지 의문을 가질 법하다. 정부는 가혹했다. 한국어가 서툰 민혁 군 아버지가 제대로 대답을 못하자 기독교 교리를 모른다며 이를 난민 불인정의 근거로 삼았다.
‘박해받을 우려가 있음에도 기독교로 개종할 수밖에 없는 동기나 신념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했고 ‘기독교 기초 이해와 상식이 부족해 진정성이 의문’이라는 정부의 배척 논리는 꿈쩍없었다.
한국 정부가 난민 인정을 하지 않아, 민혁 군 아버지가 1년간 ‘미등록’으로 체류한 사실이 난민 불인정의 또 다른 근거가 되는 대목에서는 극한의 분통이 터진다.
생사가 걸린 문제
“돌아가면 죽을지도 모르고 비자는 만료됐는데,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민혁 군 부자를 돕고 있는 오현록 교사는 동아리 활동 당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주관한 혐오차별 예방 ‘마주’ 캠페인에서 난민 신청의 어려움과 답답함, 출입국청의 ‘갑질’을 생생하게 폭로했다.
“난민 신청을 하면 심사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릅니다. 비자가 만료되면 연장해야 하는데, 출입국청에서는 연장 기간을 자의적으로 줍니다. 6개월, 3개월, 2개월. 신청인이 마음에 안 들면 1개월. 매달 한 번씩 출입국청에 오라는 거죠. 그날 하루는 일을 할 수도 없고, 연장 처리하는 데도 6~7시간 걸립니다. 왔다갔다하는 시간 빼고요. 보완 서류를 추가로 요구받으면, 이걸 준비하려고 동사무소, 보건소 등을 다녀야 하죠. 문의할 게 생겨 출입국청에 전화를 걸면 연결이 참 어렵습니다. 직통 번호도 안 알려주고요. 기껏 연결돼도 필요한 내용을 확인해 주지 않고 다음 날로 미루기도 하죠. 그러고는 연락 안 오기 일쑤입니다. 수틀리면 본국 대사관에 갔다 오라고 합니다. 본국의 핍박을 피해 다른 나라로 피신 온 난민이, 어떻게 서류를 떼러 대사관에 갈 수 있겠어요? 갑질이죠.”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칸 영화제에서, 같은 상을 받았던 켄 로치 감독의 명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전화 장면이 연상되는 현실이다. 공공기관에 문의하거나 민원을 넣을 때 느껴야 하는 ‘고구마 만 개 정도 먹은’ 듯한 그 답답함을, 평범한 노동계급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다.
난민법은 난민 신청일로부터 6개월간 취업을 금지한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정한 체류 자격과 여러 제약 때문에 난민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고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내몰린다.
“아버지는 수당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주말까지 일을 했어요. 일할 시간도 부족한데 어떻게 한국어 공부를 하실수 있었겠어요? 그런데 [면접에서] 용어도 어려운 기도문을 외우라고 하니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던 거예요.”
민혁 군 아버지는 패소 후 난민 재신청을 했고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났다. 6월 11일에 난민 심사 면접이 잡혔다. 생이별은 물론이고 아버지의 생사가 걸릴 수도 있는 문제다. 불인정 처분을 받으면, 아버지는 이제 이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겠다’는 서명을 해야만 재심사를 받게 하는 가혹하고 비정한 시스템 때문에 공포와 두려움을 안고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서명을 한 것이다.
오현록 교사와 함께 민혁 군을 도운 중학교 친구 김지유 학생은 다시 싸움을 시작했음을 알렸다. 지난해 함께 싸웠던 아주중학교 졸업생들은 민혁 군 아버지의 면접 하루 전인 6월 10일 법무부 앞에서 ‘인도적이고 공정한 난민심사’를 촉구하는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인다. 학생들은 각자의 학교에 체험학습을 신청하고 결석해 1인 시위에 참가한다. 난민 심사 면접이 있는 6월 11일 당일, 민혁 군은 아버지를 응원하며 12시 50분부터 심사가 끝날 때까지 서울출입국외국인청별관(서울 양천구) 마당에서 돗자리를 깔고 자리를 지킬 예정이다. 난민과함께공동행동은 지지 인증샷을 모으며 연대를 표했다.
든든한
인권동아리 학생들과 그를 만나고 돌아온 후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보호자 없이 홀로 한국에 남아야 하는 민혁 군의 모습이, 이란으로 송환돼 탄압을 받게 되는 민혁 군 아버지의 모습이 뇌 속에 소용돌이 쳤다.
‘다 끝난 이야기 아니었나? 난민으로 인정받았다고 해서 안심했었는데 …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돕지?’
지난해 김민혁 군을 돕기 위한 청와대 청원이 시작되고서 전교조 조합원들이 서명을 공유하고 지지·응원을 한 일이 민혁 군과 친구들에게는 든든하고 고마운 일이었다고 한다. 반갑게도, 올해 전교조 본부도 민혁 군 아버님의 난민 인정을 촉구하는 공식 입장문을 냈다. 더 많은 조합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힘을 보태기를 바란다. 6월 11일 일정에 연대 방문을 간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이 싸움은 비단 김민혁 군 부자뿐 아니라, 전쟁, 정치 또는 종교적 박해, 성적 지향, 경제적 빈곤 등 다양한 안타까운 이유로 난민이 된 많은 분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일하는 영종도에는 앙골라에서 온 루렌도 씨 가족을 포함해 난민 수십 명이 인천공항에 억류돼 있다.
공항에서는 난민 신청조차 어려운데, 한국 정부는 난민 심사 기회를 줄지 말지를 두고 사전 심사를 한다. 문재인 정부의 난민법 개악은 이를 확대해 난민 인정을 더 어렵게 만들고, ‘중대한 사정 변경’이 없는 한 난민 재신청을 제한하는 등 난민들을 더 곤란한 처지로 내몰려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는 부자들은 국경을 마음대로 드나든다. 그러나 가난과 전쟁, 종교적 박해 등 목숨의 위협을 피해 어쩔 수 없이 국경을 넘어야 하는 사람들 앞에는 철옹성 같은 장벽이 세워진다.
한국 정부의 태도도 양면적이다. 5억 원을 투자하는 외국인에게는 한국 영주권이 주어지지만 종교적 박해를 피해 난민 신청을 한 민혁 군 아버지와 수많은 난민들은 내쳐졌다.
민혁 군 아버지는 매주 수요일 저녁 2시간씩 성경 공부를 하고, 토요일에 성경 통독을 하며 8개월 동안 꼬박 출석해 정식 사제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 4개월간의 추가 교육으로 ‘견진성사[신앙을 확고히 했음을 증명하는 성사]’도 받았다.(민혁 군은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통역을 맡았다.)
민혁 군을 난민으로 인정한 것이 생색내기가 아니었다면, 정부는 민혁 군의 아버지도 신속히 난민으로 인정해야 한다.
학생들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정부는 왜 난민을 안 받으려고 하나요?”
김지유 학생은 이렇게 호소했다. “다행히 민혁이가 난민 인정을 받았지만 상황은 1년 전과 달라지지 않았어요. 아니 법무부는 난민법 개정으로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려 하고 있어요. 우리는 다시 싸우겠습니다. 우리의 싸움을 지지해 주세요. 민혁이 아버지를 지켜 주세요. 법무부의 난민법 개정 시도를 막아 주세요.”
내일은 우리 이란친구 민혁이의 아버님 난민심사가 있는 날입니다. ‘이제 짐을 내려 놓아라.’ 지난해 10월 민혁이가 난민 인정을 받자 어른들께서 저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저희는 재판부에 보내는 민혁이 아버님 탄원서를 쓰는 것을 끝으로 모든 걸 내려 놓고 뿔뿔이 흩어져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생이 됐으며, 학교에서 학원을 오가며 우리의 또 다른 짐인 대학 입시와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민혁이 아버님은 재판에서 지셨고, 눈이 크게 내리던 올해 2월 민혁이처럼 다시 출입국청에 난민재심사를 신청하셨습니다. 아버님의 심사를 위해 얼굴을 세상에 알리고 힘닿는 모든 분께 호소하던 민혁이, 그 외로운 친구의 곁을 지켜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작년엔 민혁이, 올해엔 민혁이 아버님, 한 명 한 명의 목숨을 지켜내기 위해 언제까지 거리에 나서야 하는 걸까요? 저희가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작게는 민혁이 아버님을 위해서고 크게는 이 같은 가혹한 난민심사시스템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1년의 과정이 저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은 민혁이의 아버님을 지켜 드리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우리 몫이었다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시민으로서 국민으로서 우리가 사랑하는 대한민국에 책임지는 자세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저희가 어린 고등학생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민혁이 아버님께 난민인정 처분 외의 결정이 내려진다면 이것은 사건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혹독한 난민인권 수준을 보여 주는 사례가 될 것이고 국제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민혁이 아버님은 마땅히 난민으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첫째, 국제협약인 난민협약과 국내법인 난민법에 의해 규정된 ‘가족재결합’ 원칙에 따라 난민인정자 민혁이의 직계 보호자인 아버님은 당연히 난민으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외국에 거주하는 가족도 가족재결합을 위해 입국을 허가해야 하는 게 협약과 법의 정신인데, 하물며 민혁이가 7살 때부터 1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민혁이와 함께 살았던 아버님의 경우,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둘째, 가족재결합 원칙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민혁이의 아버님은 이란 본국에서 박해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란은 신정국가로 샤리아법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샤리아법에서는 무슬림의 개종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배교죄로 다스립니다. 작년에 민혁이가 종교 난민으로 인정된 것도 이런 이란 상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들 부자의 사연이 한국 언론은 물론 중동, 동남아, 유럽을 비롯한 범아랍사회 언론에 자세히 소개돼 있는 상황입니다. 이란 본국으로 귀국시 아버님의 생명은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 아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소년이 있습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의지할 사람이 필요한 소년. 소년의 아버님은 고국으로 돌아가면 죽습니다. 난민불인정이란 우리 국민을 참혹한 잘못으로 이끄는 결정이 될 것이고, 우리나라를 헝가리 같은 박정한 인권 후진국으로 내모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법무부와 서울출입국외국인청에 촉구합니다. 난민법의 정신에 따라 인도적이고 공정한 심사를 통해 민혁이 아버님을 난민으로 인정해 주십시오.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는 적은 숫자이지만 꺾이지 않겠습니다. 법무부에서 안 되면 국회로 갈 것이고, 재판에서도 안 된다면 국제사회에 호소할 것입니다. 적다고 가볍게 여기고 작다고 쉽게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적은 사람들을 치우는 손, 작은 사람들을 짓밟는 발에, 반드시 쓰러지는 사람들의 흔적이 새겨진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난민에 대한 잘못된 심사와 부당한 판결은 법무부와 사법부에 대한 뜻있는 시민사회의 신뢰를 거둬갈 것입니다. 스스로 심사관과 재판관이 아닌 무지하고 냉정한 편견 덩어리의 집합체임을 고백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리지만 그리고 숫자도 많지 않지만 세상과 맞설 것입니다. 가짜뉴스와 과장된 두려움에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친구를 품고 난민을 품고 사람을 품으려는 길이기에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나라를 떠났기에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 아무런 권리가 없는 사람들, 목숨이 위태로운 가엾은 사람들. 외롭게 서 있는 그들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누가 됐든 이제 짐을 다시 들어 올려야 한다’라고요. 2019.6.10. 아주중학교 졸업생 박지민(잠일고1학년), 윤명근(송파공고1학년), 최현준(잠일고1학년), 추경식(영동일고1학년)[성명] 인도적이고 공정한 난민심사를 촉구합니다
김민혁 군과 그의 아버지를 응원해 주세요
2019년 6월 15일에 일부 문장을 수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