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탄핵 위협이 미국 지배계급의 위기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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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권의 아귀다툼이 점입가경이다.
9월 24일 민주당 소속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탄핵소추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발표했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4억 달러 상당의 군사 원조를 대가로 조 바이든 부자(父子) 수사를 요청했다는 것이 그 사유다. 미국 중앙정보부 CIA 소속으로 알려진 내부고발자는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의 권한을 이용해 타국이 2020년 미국 대선에 개입하도록 했다”고 폭로했다. 하원 상임위 여섯 곳이 조사에 나섰고,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 루돌프 줄리아니에 이어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도 조사 대상에 올랐다.
트럼프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뻗대지만, 통화 녹취록을 보면 트럼프가 거듭 적극적으로 조 바이든 부자에 대한 수사를 요청했음을 알 수 있다. 통화 며칠 전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원조 집행을 일시 중단했다. 그런 정황은 의혹이 사실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앞서 조 바이든은 부통령이던 2016년에 1억 달러 상당의 투자를 중단하겠다고 협박하여 아들 헌터 바이든이 이사진에 있는 우크라이나 최대 에너지 기업 부리스마홀딩스에 대한 우크라이나 검찰 수사를 막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요청한 “수사”는 이 혐의와 관련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 ‘맞불’ 폭로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내놓지 않고 있다. 바이든에 대한 혐의 제기가 선거용이라는 관측도 있는 까닭이다.
세계 최대 위험 인물 트럼프가 실제로 권좌에서 끌려 내려온다면 몇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일 것이다. 그는 이주민 아이들을 우리에 가두고 낙태권을 공격하는 등 추악한 차별을 일삼았고, 노동자의 호주머니를 털면서 기업들에게는 법인세를 대폭 감면해줬으며, 군비 증강에 막대한 돈을 퍼부은 자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트럼프가 탄핵 또는 파면될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탄핵에서 파면까지 가는 길 자체가 쉽지 않다. 역대 미국 하원에서 탄핵된 대통령 중 실제로 파면된 경우는 하나도 없다. 상원에서도 3분의 2 이상 찬성표를 받아야 탄핵(파면)이 최종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상원 과반인 공화당의 상원의원 상당수가 사상 최초로 자당 대통령을 끌어내리기로 결심해야 가능한 것이다.
탄핵 절차 자체도 얼마든지 지리하게 늘어질 수 있다. 그동안 트럼프는 계속 권좌에 앉아 “극단주의 좌파들의 ‘가짜 뉴스’” 운운하며 강경 우익적 캠페인을 벌일 것이다. 백에 하나 어찌어찌 트럼프 탄핵이 성사되더라도, 그의 자리에는 성소수자 혐오자이자 호전적 우파인 부통령 마이크 펜스가 앉을 것이다.
제국주의 지배자로서의 ‘통치 정당성’
그래서 트럼프 탄핵은 민주당이 대선을 앞두고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선거 쇼’일 뿐이라는 의견이 있다.
선거적 계산은 있을 것이다. 민주당(뿐 아니라 공화당도) 주류는 미국에서 점점 심화하는 정치적 양극화 때문에 좌우 양쪽에서 도전받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오른쪽에서는 티파티·트럼프 등 강경 우파가 부상했다. 반면에 왼쪽에서는 ‘민주사회주의’를 자처하는 버니 샌더스가 인기를 끌면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등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하원의원들이 등장했다.
이에 민주당 주류는 트럼프 탄핵소추를 이용해 좌우 양쪽으로 쏠리는 대중의 시선을 의회 내 쟁투로 모으고자 한 것이다. 바이든에 대한 외압을 부각해 ‘바이든이야말로 상대도 경계하는 (당선 가능성 있는) 유일한 후보’라는 생각을 강화함으로써, ‘내세울 이력이라곤 오바마의 부통령이었던 것뿐’이라는 세평을 불식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갈등에는 더 근본적인 요인이 작용하는 듯하다. 이번 탄핵소추로까지 이어진 미국 정치권 내 갈등은 미국의 세계 패권 유지와 연관이 있다.
미국 지배자들이 대개 공유하는 패권 전략은 이렇다. 중국·러시아 등 성장하는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어하기 위해 동맹(대표적으로 일본과 유럽)과 공조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중동 석유를 통제하고 역내 영향력을 확고히 해 둔다.
트럼프는 급격히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견제를 최우선으로 삼았다.(이는 오바마의 ‘아시아 회귀’와 큰 틀에서 같다.) 그러나 트럼프는 한 발 더 나아가 오랜 숙적 러시아에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는 한편 동맹국들을 독촉하고 압박해 패권 유지에 드는 비용을 분담하고자 했다. 트럼프의 대외 정책은 미국 지배자들 상당수의 심기를 건드렸다. 임기 초부터 러시아와의 관계를 두고 쟁투가 벌어진 배경이다.(소위 ‘러시아 스캔들’)
그러나 트럼프 1기 임기가 끝나가는 지금, 미국 지배자들은 안 그래도 꺼려지던 변화가 결과도 시원찮다고 여길 법하다.
트럼프와 미국 지배자들은 미·중 갈등에 집중하고 싶어하지만, 중동 문제가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트럼프는 역내 통제권을 다지겠다며 이란을 강도 높게 압박했지만, 외려 미국의 난처한 처지만 드러냈다. 역내 긴장은 더 심화됐다. 오죽하면 미국의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대로 역내 긴장이 격해지면 “유가가 평생 볼 거라 생각지도 못한 수준으로 뛸 것”(왕세자 무함마드 빈살만)이라고 볼멘소리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트럼프가 제국주의 국가의 수장으로서 ‘통치 정당성’을 잃었다고 본 듯하다. 사사로운 이유 때문에 미국의 대(對)러시아 전략에 피해를 줬다는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트럼프가 철회를 시사한 4억 달러 군비 지원은 미국이 러시아 견제를 위해 1990년대 이래 사반세기 동안 추진해 왔던 정책의 일환으로 유럽연합과 일본도 끌어들인 대규모 프로젝트다.
이것이 하고 많은 사유 중 우크라이나 문제가 부각된 배경이고, 주류 언론들뿐 아니라 공안·정보기구(소위 ‘심층 국가’) 인사들까지도 잇달아 트럼프를 비난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여기서 민주당이 ‘착한 편’인 것은 아니다. 민주당은 그간 트럼프의 군비 증강, 법인세 인하, 이주민 공격을 사실상 거들어 왔다. 트럼프를 탄핵하겠다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는 탄핵소추 추진 선언 직후 “양당정치 질서를 지키자”면서 긴축 법안 통과에는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안녕과 세계 패권이지, 평범한 노동자 대중의 안전과 복리가 아니다.
민주당 지도부가 트럼프에 맞서 내세운 대안인 바이든도 나을 것 없다. 바이든은 신자유주의 무역 협정의 상징인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의 주역이었고, 저 악명 높은 애국자법의 초안 작성에 주도적으로 관여한 자다. 그의 손에는 미국이 코소보 전쟁에서 흘린 피가 묻어 있다. 민주당 주류와 바이든이 뼛속까지 지배 엘리트라는 점 때문에, 우파 일부(예컨대 〈파이낸셜 타임스〉)도 민주당의 탄핵 발의는 환영하면서도 이 때문에 트럼프가 또다시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며 재선에 성공할까 우려하기도 한다.
한반도 평화 때문에 트럼프를 걱정해 줘야 하나?
반면, 국내 일각에서는 트럼프가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트럼프가 처한 곤경을 우려하기도 한다. 트럼프 탄핵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재가동을 위해 노심초사해 온 한국에는 여간한 악재가 아닌 셈”(〈경향신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북한에 “화염과 분노”를 퍼붓겠다고 한 것이 고작 2년 전이었다. 한때 북한 절멸을 주장했던 자를 평화 전도사로 착각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트럼프 개인의 선택이 전적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과 협력(일본)하거나 경쟁(중국·러시아)하는 국가들의 상호작용, 즉 제국주의 경쟁이 근본적 변인이다. 트럼프 역시 그 경쟁에서 미국 제국주의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강경 대응 카드를 다시 꺼내들 것이다. 설령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해도 평화를 보장할 수 없는 까닭이다.
한국 진보·좌파는 트럼프가 국내 쟁투에서 승리해 “자신감을 갖고 북미 협상에 속도를 낼”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 오히려 트럼프와 ‘싸우는 형제들’에 진정으로 맞설 힘인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대중 저항이 확대되길 바라야 한다. 지금도 이어지는 미국 GM 노동자 파업, 인종차별과 이주민 탄압에 맞선 운동 등이 더 강력한 대중 저항을 키울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 트럼프 탄핵 위협을 야기한 진정한 배경인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를 더 면밀히 주시해야 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