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팬데믹의 현재적 기원》(롭 월러스, 너머북스):
감염병 위기를 낳는 자본주의 농축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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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의 현재적 기원》(너머북스)은 2016년 출판된 롭 월러스의 책 《거대 농장이 거대 독감을 낳는다》를 번역한 것이다. 올해 초 중국 우한에서 이름 모를 바이러스가 발견되고 두 달 만에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이 선언되자 이 책과 저자인 롭 월러스는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 이후 새로운 바이러스의 변이와 등장을 다룬 서적은 넘쳐난다. 하지만 감염병 유행을 사회·경제적 맥락 속에서 조명하는 책은 매우 드물다.
롭 월러스는 새로운 바이러스의 변이가 생겨나고 확산되는 원인을 자본주의적 농축산업의 발전과 확산에서 찾는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만약 새로운 바이러스의 등장이 단지 자연 현상일 뿐이라면 코로나19 같은 신종 감염병을 예방하는 것은 근본에서 불가능할 것이다. 이는 앞으로 우리가 코로나23, 코로나32 등에 끊임없이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반면, 저자의 지적처럼 그것이 특정 생산방식의 문제라면 인류는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다.
이는 마치 기후변화가 단지 자연적 순환의 일부일 뿐이라는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의 주장과 비교해 볼 만하다. 기후변화 회의론자는 기후변화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 원인이 화석연료 이용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세계적 화석연료 기업들의 이익을 지키려 한다. 화석연료 기업들은 이런 회의론자들을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히 지원한다. 제국주의 열강은 이런 기업들의 이윤을 지키려고 기후변화 해결 노력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무력화한다.
감염병의 자본주의적 기원을 찾아내려는 롭 월러스의 노력도 비슷한 벽에 부딪혔다.
“한때 나는 인플루엔자를 연구하는 촉망받는 진화생물학도였고 유엔 식량농업기구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고문을 지냈으나 지금은 내 분야에서 추방당해 ‘국가의 적’이라는 딱지를 달고 벼랑 끝에 선 처지다 … 나는 2001년 테러범들의 공격을 받았던 이 신자유주의의 제국에 동의하지 않았고, 이 제국을 향한 충성심을 의심케 하는 견해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 결국은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됐다.”
롭 월러스의 연구에 처음 제동을 건 것은 미국 정부가 아니었다. 롭 월러스는 조류인플루엔자 연구를 위한 계통지리학 연구를 통해 그 바이러스가 중국 남부 광둥성과 홍콩에서 출현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중국 광둥성 관리들은 즉각 롭 월러스 등의 연구 내용을 부정했고, 신뢰성 문제를 제기하며 더 이상의 연구를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정치적 압력이 과학을 왜곡한다는 사실에 눈을 뜨고 이에 도전하기 시작하자, 사실상 학계 전체가 “이 보조금에서 저 보조금으로 옮겨 가며 묵묵히 연구만 하는” 부패한 현실에도 눈떴다. “정치적 동력학이 감염병 자체와 감염병 연구를 모두 결정짓고 있었다.”
저자는 거대 농식품 기업들이 제국주의 열강의 지원을 받으며 사실상 감염병 위기를 악용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 기업들을 ‘바이러스 비시 정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비시 정권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 정부였다.)
7부 33개 장의 내용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1부 4장 ‘역외 농업의 바이러스 정치학’이다. 이 글은 롭 월러스의 인생에 커다란 변곡점이 된 조류인플루엔자 연구 결과를 대중용으로 풀어 쓴 것으로 바이러스 진화의 배경이 된 중국 광둥성 일대의 역사적 변화 과정에 대한 설명이 탁월하다.
7부 1장 ‘숲과 에볼라’는 자본주의적 농축산업이 그 내부에서 독성 바이러스를 키워 낼 뿐 아니라 ‘미개척지’로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감염병을 ‘발굴’해 내는 과정을 설명한다. 이는 현재 코로나19의 기원으로 알려진 박쥐에서 어떻게 천산갑을 거쳐 인간에게 이 감염병이 전달됐는지 단서를 제공한다. 조만간 출판될 롭 월러스의 신간 《죽은 역학자들》(먼슬리 리뷰)에서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길 기대한다.
그 밖의 다른 장들에서도 중요한 주제들을 다룬다.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데이비드 콰먼, 꿈꿀자유) 같은 감염병 관련 저작들이 놓치고 있는, 스미스필드·타이슨푸드·CP·카길 등 다국적 농식품 기업들의 만행과 이를 뒷받침해 온 미국 정부에 대한 폭로도 볼 만하다.
코로나19 국면에서도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무능과 친(親)제국주의적 태도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는데, 롭 월러스는 이런 태도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님을 지적한다.
전통
마이크 데이비스의 《조류독감 – 전염병의 사회적 생산》(돌베개)를 읽어 본 독자라면 롭 월러스의 주장이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 자신도 마이크 데이비스에게서 큰 영감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인플루엔자에 대한 책을 서점에서 처음 봤을 때는 ‘이런 책이 나왔구나!’ 하며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 내가 이 책에 담은 내용 중에는 마이크가 제기한 질문들과 그가 말한 요점들을 추적한 것이 적지 않다.”
원서의 표지에는 마이크 데이비스의 추천사도 실려 있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탁월함과 위트가 그립다면 이 책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생물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 롭 월러스에게는 최고의 찬사였을 것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마르크스주의자이고 진화와 고생물학 전문가로 국내에서는 김동광 교수가 여러 권의 책을 번역 소개한 바 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200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늘날 진화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사회생물학 등 기계적 유물론을 날카롭게 비판해 왔다. 이는 자본주의와 자본주의하에서 극도로 실용주의에 경도되고 있는 주류 과학에 대한 비판의 일환이었다. 《풀 하우스》 같은 책들은 어려운 생물학과 진화론을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탁월한 글쓰기 능력을 보여 준다. 미국의 유명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도 그가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로 굴드는 대중적이면서도 권위 있는 과학자였다.
롭 월러스의 책을 출판한 〈먼슬리 리뷰〉의 편집자 존 벨라미 포스터는 여러 저서에서 엥겔스 이후 마르크스주의 과학자들의 전통을 언급하며, 스티븐 제이 굴드와 리처드 르원틴도 그 계승자로 포함시켜 왔다. 롭은 이들의 제자인 셈이다. 롭 월러스도 책의 곳곳에서 마르크스를 비롯해 그 전통에 있었던 이들의 기여를 언급한다.
다만 이 대목에서 너머북스 출판사와 번역자들에게 아쉬움을 표해야겠다. 원서의 핵심 주제와 취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듯하지만 번역서에는 원서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이 누락돼 있다. 역자들이 서문에서 “일반 독자들을 위한 책임을 감안해 의학·병리학을 깊숙히 파고든 설명들은 일부 생략했다” 하고 밝히기는 했다. 일부 장의 내용이 지나치게 전문적이라 일반 독자들에게 어려울 수 있음은 저자 자신이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 번역본에는 의학·병리학과는 별 관계가 없는 부분도 대거 누락됐다. 그 방식도 일부 문장이나 단락을 건너뛰는 방식이다 보니 원저의 취지가 온전히 전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오역된 부분도 있어 보인다.
이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여 — 마르크스, 레닌, 데이비드 하비, 이스트반 메자로스 등에 대한 언급들 — 가 상당부분 누락되거나 압축된 것은 특히 유감이다. 분명히 저자인 롭 월러스는 이런 식의 번역을 반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원서의 4부에 있는 ‘붉은 백조’라는 장이 별 설명 없이 빠진 것도 의아하다. 이 장에서 롭 월러스는 나심 탈레브의 《블랙 스완》을 비판하며, 탈레브의 역사 이론 비판에 맞서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을 방어한다. 너머북스 출판사 측이 너무 늦지 않게 완역 개정판을 출판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그럼에도 이 책은 감염병 위기의 원인과 근본적 대안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읽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코로나 위기 속에서 자본주의를 끝장내야 할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는 효과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