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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52시간제 무력화해 놓고 ‘주 4일제 도입’ 운운하는 민주당(그리고 박영선)의 위선

고용 위기 해결과 워라밸(일·여가의 양립) 요구 속에 최근 주 4일제 도입 제안이 나오고 있다. 특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주 4일제, 주 4.5일제 공약이 제기되면서 관심이 불거졌다.

노동시간을 대폭 줄여야 한다는 광범한 열망은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다. 최근 한 취업포털 사이트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2.7퍼센트가 주 4일제를 원한다고 답했다. 민주노총은 2015년에 주 35시간제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도 있다.

재계와 보수 언론은 주 4일제 도입이 “시기 상조”라고 핏대를 올리지만, 자본주의 생산력은 이미 노동시간을 대폭 단축해도 모두가 먹고 살기에 충분할 만큼 발전해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전 사회보다 비할 데 없이 막대한 재화와 부를 만들어 냈다. 마르크스는 이미 170여 년 전에 자본주의가 “과거의 모든 세대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거대한 생산력을 창출해 냈다”고 썼다.

그런데 그 엄청난 부와 생산수단을 소수의 지배계급이 독점하면서, 눈부신 생산력 발전이 만들어 낸 진보의 가능성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 인구가 먹고 남을 만큼 충분한 식량 생산이 가능하지만, 자본가들의 이윤 추구 때문에 여전히 수억 명이 기아에 시달린다. 이윤 중심의 코로나19 백신 생산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패권주의 때문에 세계적으로 백신 보급도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사람들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가들이 이윤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좌우된다. 그래서 경제 위기 상황에서 한쪽에서는 대규모 실업이 발생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직장에 남은 노동자들이 더 장시간 일해야 하는 모순이 벌어진다.

약속 파기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현재 한국의 노동시간은 연간 평균 1967시간으로, OECD 국가 중 멕시코에 이어 만년 2위다. 이 통계조차 과소평가됐다는 게 중론이다. 많은 노동자들의 연장 노동시간이 통계에 잡히지 않고 있고, 지난 몇 년간 단시간 저임금 일자리가 대폭 늘어난 것의 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내에 노동시간을 연간 1800시간으로 줄이겠다’고 공약했지만, 역시 말만 요란한 빈 수레였다. 주 52시간제를 도입했지만, 곧바로 이를 무력화 하는 조처를 취했다. 탄력근로제와 선택적 노동시간제를 확대해 장시간·저임금 체제의 고착화를 시도하고, 특별연장근로 인가 사유를 확대해 몇 년 사이 도입 건수를 수백 배나 늘어난 것이 대표적이다. 말로는 노동시간을 줄이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연장 근로시간 한도를 늘리고 임금(수당)을 깎는 정책을 추진해 온 것이다.

한국 정부와 기업주들은 1987년 이래 노동자들의 광범한 노동시간 단축 열망에 직면해 생산성 증대를 대가로 노동시간을 줄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황이 장기화하고 산업 간 격차가 커지는 상황에서, 노동강도를 높이는 것만으로는 떨어지는 이윤율을 회복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정부와 자본가들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노동시간을 늘려 이윤을 뽑아내려 안간힘을 쓴다. 문재인 정부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노동시간 단축을 약속하더니, 결국 주 52시간제 시행조차 말짱 도루묵으로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서울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박영선이 주 4.5일제를 공약한 것은 엄청나게 위선적이다. 정부여당 스스로 노동시간 단축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다가 반성도 없이 선거 때가 되니까 민심 잡기용 립서비스로 내놓은 공약인 것이다.

국내외 역사를 볼 때,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 대 자본의 힘의 관계, 투쟁에 의해 결정돼 왔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노동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임금·조건 악화 없는 노동시간 단축

주 4일제 도입 제안은 일자리 위기가 심각해진 오늘의 현실에서 어느 때보다 호소력이 있다. 지난해 코로나19 충격과 경기 침체로 대략 1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청년 실업률도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택배, 배달, 병원, 요양서비스 등 노동자들이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 고통 받고 있다. 주당 73시간에 이르는 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택배 노동자들이 연이어 과로로 사망하고 있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그만큼 일자리를 대폭 늘려야 한다. 한 분석을 보면, 주당 노동시간을 48시간으로만 제한해도 새로운 일자리 1백만 개를 만들 수 있다(한국노동사회연구소). 노동시간을 찔끔 줄이거나 오랜 기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줄이는 방식은 새로운 일자리를 실질적으로 늘리지 못한다. 단기간 내에 대폭적인 노동시간 단축이 이뤄져야 하고, 법적 강제가 뒷받침돼야 효과가 커진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의 고통을 덜고 일자리도 창출되려면, 임금이 삭감되거나 노동강도가 높아지는 등의 조건 악화가 없어야 한다.

흔히 경기 불황기에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는 정리해고 같은 극단적 방법을 피하는 대신 노동자들끼리 일감을 나누고 임금 삭감 등의 고통전가 수단으로 활용돼 왔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영선 후보가 제시하는 방안도 임금 삭감을 전제한다.

그러나 줄어든 노동시간만큼 임금이 삭감되면 노동자들은 다시 줄어든 임금을 벌충하려고 연장근로나 ‘투잡’에 의존하는 역설적 결과를 빚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어렵게 되고 일자리 창출도 불가능해진다.

노동강도가 더 늘어서도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사용자들은 노동시간을 줄여도 신규채용 없이 기존 인력으로 공장이나 사무실을 돌리게 될 것이다. 또한 고강도 업무에 시달리면 퇴근 후 노동자들이 기진맥진해 질 높은 여가 시간을 보내기도 어렵다.

결국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비용을 누가 치를 것인지를 명확히 하는 게 중요하다. 임금 삭감,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 4일제 시행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