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4일제를 둘러싼 쟁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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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에서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주 4일제, 복지국가”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주 4일제 공약이 대선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어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음은 분명하다. 몇몇 여론조사에서 주 4일제를 찬성하는 의견은 80퍼센트 이상으로 높게 나타났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세계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 중 하나다(OECD 국가 중 2위). OECD 조사를 보면, 2020년 한국 노동자의 실제 연평균 노동시간은 풀타임의 경우 1908시간, 한시 계약직의 경우 1927시간으로 나타났다. 독일과 비교하면 무려 576시간(한시 계약직의 경우 643시간)이나 길다.
경제 위기로 일자리 위기가 심각해지고 워라밸 요구가 커지는 상황에서 노동시간 단축 열망은 광범하다. 청년층이 노동시간 문제에 상당히 민감하다는 보고도 많다. 최근에는 청년들이 가장 기피하는 일자리가 ‘정시 근무시간을 안 지키는 회사’라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반면, 기업주들은 어떻게든 장시간 노동 체제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들에게는 1시간, 10분, 단 1분의 노동시간이 모두 이윤의 원천이다.
노동시간 단축을 둘러싸고 자본과 노동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벌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라는 말은 철 지난 옛말이 아닌 것이다.
노동자들이 광범하게 저항해 노동시간 단축을 약속받더라도, 그것을 둘러싸고 또 날카로운 쟁점들이 제기된다. 정부와 사용자들이 기업의 이윤 손실을 만회하려고 여러 공격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법정 노동시간 규제와 실노동시간 사이에 간극이 큰 것도 사실이다.
임금 등 조건 방어가 중요한 이유
지금 주 4일제 논의에서도 이 같은 쟁점이 제기된다. 임금 삭감 문제가 대표적이다.
앞서 언급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3명 중 2명은 ‘임금이 감소하면 주 4일 근무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주 4일제에 찬성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44퍼센트가 임금 감소 시에는 반대한다고 답했다.
이런 여론은 비단 한국만이 아니다. 가령, 지난해부터 주 4일제를 시범 실시해 주목을 끈 스페인에서도 그렇다. 지난해 10월 스페인의 대기업 텔레포니카가 주 4일제를 시작한다고 알렸을 때, 신청자는 직원 18000명 중 고작 153명(0.8퍼센트)뿐이었다. 임금이 16퍼센트나 줄기 때문에 다들 기피한 것이다.
어떤 시기에는 긴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 자체가 중요해서 노동자들은 임금이 좀 줄더라도 노동시간 단축을 일단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은 경제 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속에 조업 단축으로 인한 임금 삭감 고통을 겪은 노동자들이 적지 않다. 요즘은 물가까지 크게 올라 노동자들이 현재의 임금으로도 기존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임금 조건을 방어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해진 것이다.
노동운동 내 일부 사람들은 노동시간 단축 시 소득 감소가 없어야 한다고 옳게 주장하면서도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은 양보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문을 열어 둔다.
그러나 자동차 산업의 주간연속2교대제 도입 경험은 대기업 정규직의 양보가 결코 중소영세·하청 노동자들에게도 이롭지 않다는 점을 보여 준다.
현대·기아차의 주간연속 2교대제 도입은 분명 부품사·하청 노동자들의 노동시간도 줄이는 효과를 냈다. 그런데 현대·기아차 노조 지도자들이 사측의 ‘생산량 보전’ 논리에 타협해 노동강도가 높아지고 임금이 충분히 보전되지 못하는 타협을 한 결과, 부품사·하청 노동자들도 임금 등 조건을 지키기가 어려웠다. 그것이 자동적인 결과는 아니었지만, 부품사·하청 노동자들은 ‘원청 노조도 양보했다’는 사용자 측의 공세 속에 더 힘든 조건에서 싸워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유연근무제 꼼수를 경계해야
또 다른 쟁점은 노동시간 유연화다. 이것은 정부와 사용자들이 말로는 노동시간을 줄이겠다고 하면서(그것을 위한 정책을 부분 시행하면서), 실제로는 유연근무제를 확대해 도로 장시간 노동 체제를 유지하려는 꼼수로 활용된다.
최근 일부 언론이 인상적으로 평가하는 벨기에의 주 4일제에도 비슷한 함정이 있다. 벨기에 정부는 최근 주 4일제를 전면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실내용을 보면 노동시간 단축과는 거리가 멀다. 금요일에는 출근하지 않되, 나머지 월화수목의 하루 노동시간을 10시간까지 2시간 더 늘리고 탄력근무제를 확대 시행하기로 했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문재인 정부의 정책이 바로 그런 위선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는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을 확대하고 그 활용도를 높임으로써 주 52시간제(주 40시간 + 12시간 연장근무)를 무력화하려고 애써 왔다.
지금 기업주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주 52시간제 시행 자체를 되돌리고 싶어 한다. 윤석열도 이런 기업주들의 편에 서서 더한층의 노동 유연화를 주장하고 있다.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정산기간을 현행 1~3개월에서 1년 이내로 확대하고, 연간 단위 근로시간 저축 계좌제를 도입하고, 특별연장근로 대상에 신규 설립된 스타트업을 포함시키고, 전문직·고연봉 노동자들은 연장근로수당 등의 적용에서 제외하자는 공약을 내놨다. 이런 조처는 1년 중에 상당수 기간 동안 장시간 노동을 가능케 하고, 연장근로 수당을 지급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어 임금 삭감 효과를 낸다. 노동운동이 단호히 맞서야 한다.
정부와 사용자들의 이 같은 공격을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온 것은 적잖은 노동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줬다. 일부 좌파는 ‘경제 위기 상황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어차피 노동유연화로 뒤틀릴 수밖에 없다’ 하는 회의적인 견해로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예정된 결과가 아니다. 노동시장은 자본주의 경제 작동 논리나 지배자들의 이해관계만 반영되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투쟁이 전진하도록 이끌려는 적극적 자세가 요구된다.
노동시간 규제와 실노동시간 사이
주 4일제가 도입돼도 곧장 모든 사업장에 일괄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맹점도 있다.
가령, 2004년 법정 노동시간이 주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변경(주 5일제 도입)된 것은 실노동시간을 줄이는 효과를 낸 게 사실이다. 연간 노동시간은 2003년 2424시간에서 2012년 2092시간으로 줄었다. ‘토요일은 쉬는 날’이라는 게 공식화되면서 학교·관공서 등에서 휴일 근무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 효과는 업종, 사업장 규모, 고용 형태, 노동조합의 유무나 조직력 정도 등에 따라 편차도 있었다. 현대차와 같은 대공장에서도 주말 특근이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잔업·특근이 늘기도 했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의 조직력 덕분에 이 노동자들은 연장·휴일 근무에 대한 수당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임금이 인상되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조가 없거나 취약한 사업장, 노동시간 특례 사업장,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5인 미만 사업장 등에서는 노동시간이 줄어들거나 임금이 인상되는 효과가 자동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법이 허점투성이고 노동자들의 압력이 없으면 사용자들은 웬만해선 있는 법도 지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일부 사람들은 주 4일제가 도입돼도 정규직만 이롭게 할 뿐이고, 비정규직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떤 좌파는 공공부문·대기업 사업장의 주 4일제 시행을 “5인 미만 사업장 같은 곳들이 준비되기 전까지는 못 간다고 잡아 놔야 한다”고 주장한다.
5인 미만 사업장의 근로기준법 적용, 특례업종 폐지 등 법·제도상의 사각지대를 없애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직노동운동은 이를 위해 힘껏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런 제도 정비가 다 끝날 때까지 누군가는 자기 요구를 억누르고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선의에서 출발한 제안일지라도, 투쟁의 동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두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 쉽다. 잘 조직된 노동자들이 요구를 억누르면, 사용자들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노동자들에게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반대로 조직노동운동이 잘 싸워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임금 등 조건을 지키면, 미조직·영세사업장·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투쟁할 자신감을 줄 수 있다. 심지어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들에게도 투쟁의 명분을 주고 힘을 줄 수 있다. 한 예로, 건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주 40시간제가 도입된 이후 하루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규제하라고 요구하며 현장 투쟁을 벌여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근래에는 특수고용직인 택배 노동자들이 노동시간 단축과 인력 확충을 위해 싸워 성과를 내고 있는데, 이런 투쟁 승리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또 다른 노동자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법정 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도, 실노동시간과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서도, 법의 사각지대에 있거나 상대적으로 취약한 조건에 처한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투쟁이 관건이다. 노동자들이 광범하게 단결해 투쟁해 정부와 사용자들을 압박할 때 노동시간 단축을 진정으로 쟁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