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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치동맹은 1990년대에 어떻게 나치 영국국민당을 격퇴했는가

영국의 공동전선 반나치동맹(ANL)은 1970년대 후반에 파시스트 조직 국민전선을 격퇴한 대중 운동을 이끌었다. 1990년대에 파시스트 정당 영국국민당(BNP)이 다시 고개를 들자, 반나치동맹이 재결성돼 대규모 항의 운동을 건설했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활동가 유리 프라사드가 당시 반나치 운동을 건설한 활동가들과 얘기를 나눴다.

“영국국민당 박살내자” 1993년 10월 16일 영국 웰링에서 열린 대규모 반나치동맹 시위에 참가한 런던 북부 학생들 ⓒ출처 Mark Campbell

불과 30여 년 전에 영국국민당(BNP)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이 권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당시 영국 곳곳에 불만과 인종차별이 그득했고, BNP가 이를 성공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듯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BNP는 보수당 정부와 기성 정치권 전체에게 “천대”받고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백인 유권자들을 노렸다.

흑인·유색인종 이민자들이 “진짜 문제”라는 BNP의 메시지가 갈수록 호응을 얻었고 인종차별 공격이 연이어 벌어졌다.

BNP가 사상 처음으로 1993년에 지방의회 의석을 얻은 후, 그 열성 당원들은 자신들이 나치 제복을 입고 수천 명의 지지자들과 나치식 행진으로 이주 배경 주민들이 많은 지역을 휘저으며 그들의 슬로건인 “백인의 권리”를 외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의 그런 환상은 곧 산산조각 났다. 런던 남동부 출신의 고참 사회주의자이자 인종차별 반대 활동가인 해럴드는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해럴드는 BNP의 부상과 흑인 청소년들에 대한 증오 살인 사건(1991년 롤란 애덤스, 1992년 로힛 두갈, 1993년 스티븐 로렌스)이 전국의 인종차별 반대 활동가들에게 충격을 줬다고 회고했다.

“흑인들은 이런 살인 사건과 나치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였어요.

“첫째 반응은 공포심에 사로잡히는 것이었습니다. 언제, 어디를 돌아다닐 수 있을지 더 조심하게 된 겁니다. 그렇게 공포심에 젖으면 무력감을 느끼게 될 수 있어요.

“둘째 반응은 격분하는 것이었죠. ‘아니야, 이렇게 살 수는 없어’ 하고 말이에요.”

해럴드는 나치에 직접 맞서 행동하기를 원했던 많은 사람들(흑인·백인·아시아인 등) 중 한 명이었다. 그즈음 막 부활한 반나치동맹(ANL)이 주로 주도한 대규모 인종차별 반대 운동 덕분에 인종차별주의자들은 고개를 드는 곳마다 저항에 부닥쳤다.

영국 전역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집회, 시위, 리플릿 배포,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해럴드는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BNP는 런던 동부에서 스톨을 차리고 대놓고 신문을 팔곤 했어요.

“그래서 저는 다른 반나치동맹 활동가들과 함께 그자들을 쫓아내러 갔어요. 우리는 먼저 그들에게 소리지르고 야유를 퍼부은 다음 주먹을 치켜들고 달려들어 그들을 거리에서 몰아냈죠.”

영국의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인종차별 반대 활동가들이 같은 식으로 행동했다. 그렇게 해서 BNP가 “정상적인 당”처럼 행세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강력함을 가장 돋보이게 한 것은 대규모 시위였다.

1993년 10월 런던 남동부 웰링에 있는 BNP 당사 앞에서 6만 명이 참가한 ‘일치단결’ 반나치 시위대는 인종차별 반대 운동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를 만방에 보여 줬다.

분노가 고조되면서 저항이 건설됐다. 수많은 노동조합 지부, 세입자 단체들, 입시생들, 모스크, 사원, 학생회들이 저항을 지지했다.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글래스고에서 심야버스 열 대를 조직한 데이브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 노동자·학생들이 운동 건설에 결정적 구실을 했어요.

“글래스고를 포스터로 도배하며 분위기를 조성했고 술집을 모조리 돌며 [웰링으로 가는] 차비 모금 활동을 벌였지요.

“글래스고 사람들은 특히 스티븐 로렌스의 살인에 큰 충격을 받았었어요. 게다가 BNP가 글래스고에서 [아일랜드 독립에 반대하는 보수파] 영연방주의자들과의 협력을 시도하고 있기도 했죠.

“결국, 우리가 대절한 버스에 다 태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참가 의사를 밝혔어요.”

반나치동맹 활동가들은 셀틱 파크에서 열린 축구 경기장에서 웰링 시위 호소 리플릿을 대량으로 반포했다. 그 자리에서 글래스고 셀틱 축구팀의 어떤 팬은 다른 팬들에게 [웰링으로 가는] 티켓을 40장이나 판매했다.

철도 기관사 노동조합은 런던 킹스크로스발 웰링행 버스 한 대를 대절했다. 노조 활동가 한 명은 시위 1주일 전 본지에 이렇게 전했다. “서른 다섯 명이 시위 참가 의사를 밝혔습니다.”

더럼에 있는 담배 공장 로스만스의 한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포스터를 부착하자마자 한 남자가 다가와 ‘저는 나치가 싫어요. 저도 시위에 가고 싶어요’ 하고 말했어요.”

에컬즈와 랭커셔에서 두 명의 FE칼리지[중등교육 후 보통 16세 이상의 학생들이 다니는 과정] 학생들이 버스를 대절했고, 웨스트 요크셔에서도 일클리칼리지 학생들이 뜻을 모아 버스를 대절했다.

웰링의 반나치 시위가 광범하고 전투적으로 벌어지자, 이에 참을 수 없었던 경찰은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공격하기로 했다.

곤봉을 휘두르는 런던경찰청 소속 폭동 진압 경찰과 기마 경찰의 공격으로, 반나치 행진 대열은 BNP 당사에 도착하기 전에 해산됐다. 경찰은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하고 다치게 했다. 그럼에도 이 시위의 규모가 워낙 커, 영국 각지에서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이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비공인 파업

웰링에서 반나치 시위가 보여 준 전투성의 뿌리는, BNP가 1년 이상 미쳐 날뛰었던 런던 동부 타워햄리츠에서 주민들이 품었던 분노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3년 9월, 타워햄리츠 내 아일오브독스 선거구의 지방의원 보궐 선거에서 BNP 후보 데렉 비컨이 당선했다. 지자체 노동자들은 비공인 파업을 벌여 비컨의 말은 일절 듣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당시 한 파업 노동자는 본지에 이렇게 기고했다.

“(선거) 결과가 나온 뒤 모든 사람이 충격에 빠졌다.

“노동조합원·비조합원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150~200명이 회의실에 모였다.

“한 관리자가 비컨을 지방의원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비치자, 한 흑인 노동자는 노동조합이 자신을 위해 대체 무엇을 할 것인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와서 그를 공격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따져 물었다.

“또 다른 노동자는, 우리가 아일오브독스를 지켜 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징적인 존재가 됐으니 파업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단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그 제안에 찬성했다.”

이 파업 노동자는 자신의 기고문을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우리의 파업은 흑인과 백인이 단결할 수 있음을, 아일오브독스에서 나치는 소수이고 우리가 나치에 저항할 것임을 보여 줬다.”

‘우리의 투쟁이 삶을 변화시켰다’

1990년대에 중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은 인종차별 반대 운동 건설에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했고 웰링 시위에서도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다.

1993년 당시에 17세 학생으로 런던 동부 외곽에 있는 바킹칼리지에 다니던 이브는 그 해가 모든 청소년들에게 “범상치 않은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저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스티븐 로렌스를 살해한 며칠 후 추모 집회에 참가했습니다. 당시 상황은 정말 우려스러웠어요. [스티븐 로렌스가 살해된] 엘섬은 우리 학교에서 템스강 바로 건너편이었어요.

“저는 아일오브독스에서 나치가 활동 중임을 알고 있었고,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롬포드에도 나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뭐라도 해야 했습니다.

“저는 여동생과 함께, 인종차별 공격이 늘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고 학교에서 반나치동맹 모임을 결성했어요.”

이브는 웰링 시위 참가를 조직하는 것이 이 모임의 시험대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웰링 시위 참가 조직은 우리가 전력으로 힘을 쏟은 첫 번째 사업이었어요. 우리는 학생 식당에서 집회를 벌이기 시작했어요. 쉬는 시간에 우리 중 한 명이 식당 의자에 올라서서 인종차별 반대 투쟁에 대해 짧게 연설하고 사람들에게 동참을 호소하는 식이었죠.

“그런 활동들로 우리는 인종차별에 맞서길 바라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학생들만이 아니라 선생님들도 그런 바람을 표했어요. 마침내 우리는 대형 버스 두 대를 대절해 웰링 시위에 참가했어요.”

이브는 반나치동맹을 건설하는 것이 언제나 순조롭지는 않았다고 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배경이 정말 다양했는데, 복음주의 기독교 학생들도 꽤 있었어요. 그 학생들은 저희와 이견도 꽤 많았지만,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려는 열의만큼은 남다른 친구들이었어요. 그 친구들은 웰링 시위 참가 조직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어요.”

이브는 그때나 지금이나 활동가들은 자신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BNP가 리플릿을 배포하려고 우리 학교 앞에 온 적이 있었어요. 저는 머리털이 곤두서도록 긴장했죠. 교장선생님은 BNP 대응을 경찰에게 맡겨야 한다고 했지만, 저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가 틀렸고 우리가 직접 그들에 맞서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폭동 진압 기마 경찰이 웰링 시위대를 무참히 공격한 것은 우리 모두를 겁주려는 의도로 벌인 일이었어요. 기마 경찰은 제게도 말을 달려 돌격했는데, 제 여동생이 저를 황급히 밀쳐내 제가 짓밟혀 으스러지지 않도록 구해 줬어요.

“국가와 나치는 우리를 위협하고 겁주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서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명심해야 해요. 바로 그 사실에서 우리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치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저는 공동전선에 대해 배웠어요. 공동전선을 통해, 공동의 적에 맞서 함께 싸우기 위해서는 때로 서로에 대한 이견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

“또, 투쟁하기를 주저하거나 미루는 것은 보수적인 사람들의 마음만 편하게 해 준다는 것도 배웠어요. 행동해야 할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거죠.

“당시 투쟁은, 거기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꿔 놓았고 사회의 더 광범한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입장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거기서 더 나아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바로 그래서 저는 2024년 8월 영국 전역에서 벌어진 반나치 시위를 보고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 시위는 사람들이 지금이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줬습니다.”

웰링 반나치 시위는 노동조합들도 행동하게 했다

웰링에서 반나치 행진이 대규모로 벌어진 덕분에, BNP에 맞서는 투쟁에 박차가 가해졌다. 그 시위가 가한 압력으로 인해 이전까지는 대중적 인종차별 반대 투쟁을 멀리했던 노동당과 노동조합 내에서도 일부 변화가 일어났다.

1994년 영국 노총 TUC는 런던 동부를 관통하는 거대한 노동조합 행진을 조직해 스티븐 로렌스에 대한 정의를 요구하는 투쟁에 지지를 표했다.

이 시위는 노동당을 압박했다. 노동당은 자신들이 집권하면 스티븐 로렌스 살인 사건에 대한 공개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공약해야 했다. 당시 런던 사람들 대부분의 관심이 아일오브독스와 데렉 비컨 재선 저지 투쟁에 집중돼 있었다.

반나치동맹이 주도한 캠페인으로 비컨은 보궐 선거로 선출된 지 고작 8개월 뒤에 치러진 선거에서 의석을 잃었다. 이로 인해 나치는 치명타를 입었다. BNP는 이후 10년 동안 런던 동부에서 세를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해럴드가 보기에 이런 성과들은 인종차별 반대 투쟁의 물결이 고조된 결과 중 하나였다. 그러나 투쟁의 흐름은 변하기 마련이라는 사실 또한 너무 잘 알고 있다며 해럴드는 이렇게 당부했다.

“여러분은 그런 전투를 직접 치를 태세를 갖춰야 합니다. 우리가 또 투쟁해야 할 때가 올 겁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먼저 일어난 투쟁들의 교훈을 다음 세대에 온전히 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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