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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퇴진 운동 극우 팔레스타인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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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영국 반나치동맹과 오늘날의 교훈

영국의 반나치동맹이 1970년대 후반에 일으킨 대중 운동은 영국의 혁명적 좌파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이룬 가장 큰 업적의 하나다. 그 경험은 국제적으로 극우가 성장하는 오늘날 특히 중요하다.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 활동가이자 1977~1980년에 반나치동맹 간사였고 현재 ‘인종차별에 맞서자’에서 활동하는 폴 홀보로우를 알렉스 캘리니코스와 에스미 추나라가 인터뷰했다. 이 인터뷰는 2019년에 이뤄졌다.

캘리니코스: 반나치동맹은 1977년 11월 출범했습니다. 출범 당시 상황에 관해 말씀해 주세요.

세 가지 측면이 있었습니다. 첫째, 파시스트 정당인 국민전선의 당면 위협입니다. 둘째, 반나치동맹 창립 전 5년 동안 ‘국제사회주의자들’IS이 ─ 1977년부터는 사회주의노동자당SWP으로서 ─ 한 활동입니다. 셋째, 다른 논평가들이 항상 간과하는 것인데, SWP의 노동쟁의 전략과, 영국 공산당과의 관계 변화입니다.

첫째 측면을 살펴보죠. 국민전선은 당시 광범한 인종차별 분위기에서 득을 봤습니다. 1976년 1월 보수당 국회의원 이넉 파월은 “인종 간 내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위협하는 악랄하기 이를 데 없는 연설을 했습니다. 노동당 원내총무 밥 멜리시는 1976년 5월 국회에서 파월의 메시지를 되풀이하며 “더는 못 참겠다, 인도인들을 인도로 돌려보내어 재활시키자”고 제안해 양당 의원 모두의 박수를 받았습니다.1

국민전선이 거둔 선거 성적은 매우 심각한 경고였습니다. 국민전선은 1977년 런던 광역시의회GLC 선거에서 5퍼센트(11만 9063표)를 득표했습니다. 4년 전 같은 선거에서 얻은 0.5퍼센트에서 급증한 것입니다. 1977년 선거에서 국민전선은 런던 선거구 92곳 중 85곳에 후보를 출마시켰고 그중 3분의 1에서 자유당을 3위로 밀어냈습니다. 이런 성과에 기반해 국민전선의 두 지도자 마틴 웹스터와 존 틴들은 1978년 가을로 예상되던 차기 총선(실제로는 1979년 5월에 치러졌죠)에 후보를 320명 출마시키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숫자는 상징적이었는데, 그 320명이 모두 당선하면 의회 다수당이 된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미 1976년 국민전선은 레스터에서 무려 18.5퍼센트(4만 4000표)를 득표했습니다. 국민전선과 그 당에서 갈라져 나온 국민당은 1976년 7월 뎃퍼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도합 48퍼센트를 득표했고, 블랙번 지방의회 선거에서는 도합 38퍼센트를 득표하는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그 선거로 국민당은 국민전선 전 대표 존 킹슬리 리드를 포함해 두 명의 지방의원을 배출했습니다.2

선거 성적 면에서 이는 1930년대에 영국 나치를 이끈 오스월드 모슬리보다 더 큰 위협이었습니다. 이것이 반나치동맹이 출범한 배경이었습니다. 물론 1977년 봄과 여름에 국민전선에 맞서 대규모 맞불 시위가 두 건 일어나기도 했죠. 그중 하나는 ─ 기억되고는 있지만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는 않은데 ─ 1977년의 4월 23일 우드 그린 전투입니다. 제러미 코빈[이 인터뷰 당시 노동당 대표 ─ 역자]이 당시 SWP 런던 북부 지회 조직자인 필립 마플릿과 함께 그날 행동을 조직하는 데에 동참했죠. 코빈은 2017년 우드 그린의 더켓츠 커먼 공원에서 우드 그린 전투 40주년을 기리는 행사에 [노동당 대표로 ─ 역자] 참석했습니다. 우드 그린 전투는 국민전선에 맞선 최초의 대규모 대항 행동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 행동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나치의 행진을 결단코 저지하겠다고 투지를 불태운 3000~4000명이 그 행동에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분위기를 정말로 뒤집은 사건은 1977년 8월 13일 루이셤 전투였습니다. 루이셤 전투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첫째, 루이셤 주민들의 자발적 대응입니다. 당시 루이셤 주민들은 대부분 카리브해 출신 아프리카계였는데, 국민전선 대열이 자기 동네를 가로질러 행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선전과 동원 두 측면 모두에서 그 반발에 초점을 부여한 것은 분명 SWP였습니다. 시위를 앞두고 우리는 그 동네의 한 주택을 조직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시위 전날인 금요일에 당시 런던 어느 지회 조직자이던 제리 피츠패트릭과 저는 저녁 내내 차를 타고 동네를 돌며 클리프턴 라이즈에 모이자고 확성기로 호소했습니다.

둘째, 오늘날 흔히 간과되는 것인데, 그 행동이 공산당과 노동당의 격렬한 반대를 거슬러서 이뤄졌다는 겁니다. 당시 SWP는 1936년 10월 모슬리에 맞섰던 위대한 케이블 스트리트 전투를 계승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공산당은 우리에게 모험주의자니 초좌파니 하며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두 당의 입장은 토요일에 열린 두 시위를 통해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하나는 이른바 ‘주교 행진’인데, 노동당 소속의 당시 구청장과 그 밖의 노동당원들, 종교단체들 등이 주도하고 약 4000명이 참가한 비교적 대규모 시위였습니다. 우리는 그 행진 대열에서 유인물을 반포해서, 국민전선 시위대가 결집하고 있던 클리프턴 라이즈로 가자고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우리는 ‘주교 행진’ 참가자의 아마도 4분의 3을, 청장년 지역 주민들과 SWP 당원들의 집회로 이끌고 갔습니다.

루이셤 전투는 우리 편의 분위기를 뒤집은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앞서 말한 [국민전선이 거둔 ─ 역자] 선거 성적 때문에 사람들이 정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시 SWP 런던 동부 지회 조직자였는데, 우리는 국민전선과 여러 차례 물리적 충돌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런던 동부의 브릭 레인, 일포드, 뉴햄, 바킹 등지에서 국민전선 기관지를 판매하려 했기 때문이죠. 충돌 과정에서 한 국민전선 여성이 벽돌을 넣은 핸드백을 휘두르는 바람에 한 SWP 여성 당원이 얼굴에 중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다른 곳들에서도 첨예한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편의 우려는 그저 선거 때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국민전선의 영향력 증대가 피부로 느껴지고, 그들이 거리에서도 물리적으로 맞붙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국민전선은 일부러 그런 충돌을 유발하려고 루이셤에서 도발적인 행진을 계획한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맞서 그들을 해산시키자 그 승리는 널리 회자됐습니다. 다시 강조하건대, 노동당 지도자들은 우리를 거세게 비난했습니다. 노동당 사무총장 론 헤이워드는 우리더러 ‘적색 파시스트’라고 했습니다. 당시 노동당 부대표이자 노동당 좌파의 신문 〈트리뷴〉으로 명성이 높았던 마이클 풋은 우리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병을 집어 던지고 경찰을 때리는 식[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 역자]으로는 나치를 저지할 수 없다. 나치에 맞서는 가장 비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저들처럼 하는 것이다.” 이런 비난에도 우리는 파시스트가 행진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 반파시즘 대중 동원이 매우 중요하고 정당하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3

루이셤 전투는 토요일이었습니다. 그 다음 주 월요일 아침 SWP 중앙당사에 갔더니 전화통에 불이 나더군요. 런던 전역과 전국 곳곳에서 한결같은 메시지가 왔습니다. SWP의 정치 전반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SWP가 토요일에 한 일은 정말 훌륭했고 전적으로 지지한다고요. 거기에 기초해 당시 SWP 사무총장 짐 니콜이 반나치동맹을 결성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캘리니코스: 당시 저는 막 중앙위원이 됐는데요[그의 나이는 당시 27살이었다 ─ 역자], 루이셤 전투 전인 7월 초에 ‘마르크시즘 1977’을 개최한 기억이 납니다. 그 포럼에서도 광범한 연합체를 출범시키자는 논의가 있었어요. 루이셤 전투를 준비하던 시점이었지만, 당시 짐 니콜과 크리스 하먼이 광범한 반파시즘 운동 건설에 관해 주장했던 게 기억납니다. 반나치동맹을 결성한다는 아이디어는 루이셤 전투 전부터 논의된 것이죠.

전혀 몰랐는데, 매우 흥미롭군요.

캘리니코스: 루이셤 전투는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계기가 된 것이죠.

네, 루이셤 전투는 계기였군요. 말씀하신 내용이 흥미로운 이유는 당시 몇몇 SWP 중앙위원들은 반나치동맹에 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SWP 창립자 토니 클리프가 1978년 초 이래로 한 주장, 즉 노동자 투쟁이 하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주장을 두고 당 내에 형성된 긴장을 더 키웠습니다.4

캘리니코스: 제가 기억하기에 반나치동맹의 활동은 적어도 초창기에는 우리가 루이셤에서 한 활동과 약간 달랐습니다. 루이셤에서는 혁명적 좌파와 카리브해 출신 아프리카계 청년 주민들의 성공적인 동맹으로 나치를 저지했습니다. 반면, 초창기 반나치동맹의 주요 활동 하나는 대중 운동 창출을 위한 훨씬 광범한 홍보 활동이었습니다. 제 기억에, 동지가 말씀하신 [SWP 내부 ─ 역자] 논쟁은 부분적으로 그런 매우 광범한 운동과 거리 동원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저는 그걸 말하려 했던 게 아닙니다. 당시 반나치동맹 활동이 노동자 투쟁 지향에서 후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뚜렷하게 제기됐습니다. 저는 이걸 말했습니다. 그러나 동지의 지적도 옳습니다. 반나치동맹은 운동을 확대하려는 시도였고, 대항 동원과 홍보 활동의 관계 문제는 반나치동맹 회의에서 늘 고민거리였습니다. 그 고민은 1979년 레스터 전투와 사우스올 전투를 벌일 때에야 비로소 해소됐습니다.

캘리니코스: 그렇죠. 하지만 제가 기억하기에 몇몇 중앙위원의 우려를 자아낸 것은 그 긴장이었습니다. 노동자 투쟁 전략이 아니라요.(물론 그 출발은 클리프의 노동자 투쟁 하강 국면 주장에 대한 이견이었을 수 있지만 말입니다.)

추나라: 반나치동맹의 성공에 모든 자원을 집중시키는 것은 SWP에게 중대한 전환이었을 듯합니다. 그런 중대한 전환은 어느 정도 긴장을 낳기 마련입니다. 반나치동맹으로의 전환이 당내 논쟁을 촉발하지는 않았나요?

그런 예상과 달리 SWP 내 긴장이 크게 불거지지는 않았는데,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전환이 놀라우리만치 빨랐고 금세 성공을 거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너 달 만에 전환을 완료했습니다. 둘째, 반나치동맹은 처음부터 재정을 자체 조달했습니다. 일례로, 루이셤 전투로부터 이삼일 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런던 동부의 몇몇 지업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런 뒤 스트랫퍼드에서 그 업자들을 만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업자들은 우리가 광범한 운동을 일으키면 총선 전까지 신문 인쇄 용지를 전부 대주겠다고 하더군요. 그 후, 당시 SWP가 이용하던 인쇄소 ‘코브리지 웍스’로 신문 인쇄 용지가 대량 배송됐습니다. 신문 인쇄 용지는 반나치동맹 활동에서 가장 많은 비용이 드는 물품이었는데, 그 덕분에 유인물과 포스터를 수백만 부 인쇄할 수 있었습니다.

여느 좌파 운동과 달리 반나치동맹은 한 번도 재정난에 시달리지 않았어요. 이를 보여 주는 일화가 있는데, 몇 년 전 작고한 훌륭한 디자이너 고 데이비드 킹에 관한 일화입니다. 완벽주의자인 킹은 붉은색에 갈색을 겹쳐 찍어서 검은색을 내는 특수한 오버프린트 기법을 고집했어요. 그런데 한 번은 유인물 10만 부 정도가 제가 보기에는 두 판이 2.5밀리미터 정도 어긋나서 인쇄됐는데, 킹이 인쇄소에 와서는 “이거 다 버리세요” 했죠. 우리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지업사에 전화를 걸어서 ‘안타깝게도 종이가 더 필요해요’ 하기만 하면 종이가 더 왔기 때문이죠.

그즈음 우리는 반나치동맹 창립 선언문을 작성했습니다. 어니 로버츠가 1977년 가을 노동당 연례 당대회에 가서, 그다지 기대를 품지 않았던 우리의 예상을 깨고 그 선언문에 국회의원 약 45명의 서명을 받아와 중요한 돌파구를 열었습니다. 로버츠는 반나치동맹의 보배였어요.

캘리니코스: 어니 로버츠는 영국 노동조합 운동의 전성기이던 그 당시에 활약한 주요 노조의 하나인 통합엔지니어링노동조합AEU의 사무부총장이었죠.

그렇습니다. 흥미롭게도 어니 로버츠는 공산당 동조자였습니다. 하지만 로버츠는 제2차세계대전 시기에 코번트리에서 견습공 파업을 이끌었을 때 트로츠키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오직 트로츠키주의자들만이 전시戰時 파업을 지지했기 때문이죠. 로버츠는 언제나 반나치동맹의 모든 활동을 전적으로 지지했고 반나치동맹의 재정 담당자를 맡았습니다.

반나치동맹 창립의 또 다른 주역은 피터 헤인이었습니다. 당시 헤인은 자유당 청년 조직을 막 탈퇴했을 때였고, ‘1970년 투어 저지’ 운동으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 운동은 영국 크리켓 협회를 압박하여, 아파르트헤이트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원 백인 크리켓 대표팀의 원정 경기를 취소시킨 운동이었습니다. 헤인은 직접행동 활동가들, 자유당 일부, 노동당 좌파 3자를 잇는 가교 구실을 했습니다. 중요한 성과로서, 헤인은 닐 키녹 당시 노동당 의원의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당시 키녹은 1974~1979년 의회에서 가장 저항적인 좌파 국회의원으로 이름을 날렸고 훌륭한 연설가였습니다.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효과적이고 끈질기게 운동을 벌인 경험이 있는 헤인은 반나치동맹 건설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습니다. 헤인이 반나치동맹의 언론 담당자를 맡은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죠.

반나치동맹은 순조롭게 출범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세간의 이목을 끄는 행동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례 하나는 독일의 네오나치이자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인 만프레드 뢰더가 나치 친위대의 역사를 우호적으로 다룬 책을 쓰고는 출판기념회를 하러 영국에 왔을 때였습니다. 그 무렵 [앞서 언급한] 데이비드 킹은 〈선데이 타임스〉 컬러 별책 부록의 초대 디자인 총괄자였는데, 우리를 위해 멋진 포스터 5종을 디자인해 줬습니다.(얼마 후 킹은 반나치동맹을 상징하게 된 원형 배지와 노란 원형 팻말도 디자인해 줬습니다.) 영국의 양대 TV 방송국과 여러 신문사가 취재하러 온 뢰더의 기자회견에서 저는 킹이 디자인해 준 포스터 하나를 뢰더의 머리 뒤에서 들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사건은 반나치동맹이 어떤 단체인지를 널리 알렸다는 점에서 의미 있었습니다.

반나치동맹을 더 널리 알린 계기는 대법원 판사 닐 매키넌이 국민당 대표 킹슬리 리드에 대한 무죄 평결을 배심원단에 지시했을 때였습니다. 리드는 어느 아시아계[주로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를 일컬었다 ─ 역자] 소년이 살해된 사건을 두고 “한 명 죽었고 100만 명 남았다”는 인종 혐오 발언을 했다가 재판을 받았는데요, 매키넌이 판결 요지를 다 밝혔을 때 저는 법원에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 일로 반나치동맹의 인지도는 더 높아졌습니다.

캘리니코스: 영국의 네오나치를 다룬 데이비드 에드거의 연극 ‘운명’이 1978년 1월 BBC에서 방영되기도 했죠.

데이비드 에드거는 반나치동맹 창립 선언문에 일찌감치 연명했고 반나치동맹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그 후 저희는 1978년 4월 30일 첫 번째 반나치동맹 축제를 여는 데 매진했습니다. 아마 그해 1월 말까지도 우리는 축제 개최를 결정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결정이 꽤 늦었죠. 창립 선언문과 함께 우리는 반나치동맹 운영위원회도 구성해서 가지각색의 사람들을 끌어들였습니다. 그중에는 유대인 공동체와의 연계 때문에 매우 중요했던 배우 미리암 칼린, 두 노동당 국회의원, 인도노동자협회의 양대 조직이 있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이와 비슷한 위원회를 지역 수준에서도 결성하고 축제 건설을 당면 과제로 삼으라고 SWP 지회들에 촉구했어요.

선언문에서 밝힌 반나치동맹의 창립 취지는 나치에 관해 우려하는 사람들이 모두 힘을 모아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나치에 맞서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목표, 특히 첫 번째 축제 이후 우리의 목표는 일터나 지역사회의 어떠한 모임에서든 모든 인종차별적 발언을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각인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거든요. 축제는 상황을 변화시킨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

그 점은 예컨대 축제 이후 제4인터내셔널 조직의 간행물 〈소셜리스트 챌린지〉에 실린 편집자 타리크 알리의 사설 “SWP에 경의를 표한다”에서도 인정한 바입니다. 우리는 축제 규모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5000~6000명, 기껏해야 1만 명쯤 오겠거니 했죠. 실제로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8만 명이 참가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정확한 수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성대했어요. 수만 명이 빅토리아 공원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전까지 반나치동맹 아이디어를 마뜩찮아했던 어느 지도적 SWP 당원이 제게 “와, 이거 정말 대박인데” 했던 기억이 납니다.

캘리니코스: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점을 짚고 싶습니다. 첫째, 매우 놀라운 점은 SWP가 꽤 심각한 내분을 겪고 있을 때 반나치동맹을 창립했다는 겁니다. 당시 SWP는 선거 전략과 노동자 투쟁 전략을 두고 첨예한 논쟁 중이었는데도 그 과업을 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논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연대체를 이끌어야 했던 것도 반나치동맹 간사로서 동지가 겪은 어려움의 하나였습니다.

둘째, 반나치동맹은 노동당원뿐 아니라 출범 이후에는 공산당도 참여시킨 만만찮은 공동전선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공산당은 여전히 일터에 상당한 기반이 있는 만만찮은 조직이었고,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파시즘에 맞서 SWP와 사뭇 다른 전략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강력한 좌파 개혁주의 세력들이 참여하는 진정한 공동전선이라는 측면에서 반나치동맹을 이끄는 것이 어땠는지 듣고 싶습니다.

반나치동맹을 결성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은 짐 니콜이었지만, SWP에서 저와 줄곧 협력한 사람은 다름 아닌 토니 클리프[당시 60세였던 SWP 창립자 ─ 역자]였습니다. 매주 서너번씩 클리프와 가장 세밀한 전술적 측면들을 토론했는데, 클리프는 무엇보다 공동전선의 의미에 한결같이 충실했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반나치동맹을 SWP와 약간 거리를 두고 운영했습니다. 저는 SWP 중앙위원회에 출석한 적도 없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활동에 투신하기 시작한 1970년대 초에 공산당은 일터 전반, 더 넓게는 좌파들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공산당원들과 협력하고 그들을 끌어들이고자 했죠. 그럴 기회는 첫 번째 축제를 치른 후에 왔습니다. 공산당의 런던 지역 산업 조직자 빌 던이 반나치동맹 운영위원회에 합류했죠. 이후 던은 공산당 전국 조직자 데이브 쿡으로 교체됐지만, 저는 둘 모두와 협력적 관계를 맺었습니다. 우리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합의에 기반해 ─ 종종 긴 전화 통화로 대화하며 ─ 반나치동맹을 운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활동을 할지 뜻이 모이면 그것을 반나치동맹 운영위원회에 가져가서 공식 승인받았습니다. 이견이 제기되고 때로는 날카로운 긴장이 생길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운영위원회는 언제나 매우 협조적이었고 저는 그 점이 매우 감사했습니다. 급속한 사태 전개 때문이기도 했어요. 전국 곳곳의 훌륭한 지지자들이 보인 열정적이고 활력 있고 창발적인 호응 덕분에 반나치동맹은 마치 급행열차처럼 운영됐어요. SWP 당원들이 중심적 구실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면에서도 혼자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어요.

저와 가장 긴밀히 협력한 핵심 인물 두 명은 토니 클리프와 피터 헤인이었는데, 헤인과 저는 그야말로 모든 사안을 상의했어요. 여기서 다시 홍보 활동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되는데요, 국민전선이 1978년 3월 런던 동부의 일포드 노스 보궐선거에 출마했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나치가 조직화를 시도하는 곳 어디서나 나치에 맞선다는 결의를 보여 주기 위해 활동가 수백 명을 동원해 선거구 가가호호에 유인물을 배포했어요. 국민전선이 일정한 세력을 구축한 지역임을 감안하면 꽤 위험한 활동이었죠. 이해할 만하게도 헤인은 SWP 당원들이 나치와 드잡이할까 봐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활동은 [시위가 아니라 ─ 역자] 홍보를 목적으로 한다고 헤인을 안심시켰습니다. 이후 헤인은 SWP 당원들의 규율 있는 행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공동전선을 운영한 방식입니다. 우리는 줄곧 유대인 대표자 회의의 비난을 받았는데, 연극계·영화계 모두에서 저명한 배우였던 미리암 칼린이 이에 대처하는 데 큰 힘이 됐습니다. 칼린은 이스라엘 국가를 충심으로 지지했지만, 나치의 위협에 맞서 정견의 차이를 넘어 단결할 필요성을 이해했습니다. 그 점에서 저와 함께 반나치동맹 운영위원으로 활동한 또 다른 SWP 당원 나이절 해리스도 중요했습니다. 클리프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는데요, “나이절은 박사다.(나이절은 박사 학위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를 존중할 것이다.” 해리스는 SWP의 시온주의 반대 입장 때문에 반나치동맹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유대인 대표자 회의의 비난에 매우 잘 대응했습니다.

반나치동맹의 또 다른 중요한 성공 요인은 SWP가 그전 4~5년 동안 반파시즘 투쟁에서 쌓은 명성이었습니다. SWP와 그 전신 조직[국제사회주의자 ─ 역자]은 반파시즘 투쟁이 반드시 대항 행동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오래 전부터 확실히 세워 뒀습니다. 파시즘의 궁극 목표는 민주적 절차를 이용해 민주주의, 특히 노동계급 조직 일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SWP는 1970년대 초부터 그런 입장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1974~1976년 발행된 〈소셜리스트 워커〉를 보면 전국 곳곳에서 나치의 등장을 막아 그들의 행진을 무산시켰다는 소식이 잔뜩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는 때때로 매우 혹독한 대가가 따랐습니다. 1974년 6월 런던 중심부의 레드 라이언 광장에서 열린 국민전선 반대 시위 도중 워릭대학교 학생 케빈 게이틀리가 살해당했습니다. 한편, 이와는 다른 유형의 활동도 있었는데, 예컨대 런던 동부 항만에서 벌인 활동이 그렇습니다. 항만 노동자들에 관해 기억하셔야 할 것은 그들이 이넉 파월의 1968년 “피의 강물” 연설[이민자 증오를 부추긴 연설로 악명이 높다 — 역자]을 지지하는 행진을 한 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1974년 ─ 당시 저는 국제사회주의자[SWP의 전신 ─ 역자] 런던 동부 지회 조직자였는데 ─ 우리는 런던 동부 로열 독스의 세 항만에서 국민전선 반대 성명서가 발표되고 반포되게 하고, 그 성명서를 〈소셜리스트 워커〉에도 실었습니다.

우드 그린 전투와 루이셤 전투를 치를 무렵, SWP는 반나치 투쟁으로 인지도가 높았습니다. 나머지 극좌파들은 수많은 쟁점에서 SWP와 정치적 이견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SWP가 반나치동맹 출범시키는 데서 결정적 구실을 할 자격을 피땀 흘려 얻었음을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했던 이유는 반나치동맹이 실질적 맞불 행동으로부터의 후퇴를 나타낸다는 비판에도 우리가 끄떡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나치동맹이 매우 광범한 기층 조직을 매우 신속하게 건설하는 데에 가장 중요했던 요인 하나는, SWP와 그 전신인 국제사회주의자들이 1972년 광원 파업과 그 전부터 일터에서 한 활동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SWP는 22종의 기층 조합원 신문을 냈습니다. 그 신문들은 노동조합 관료 기구로부터 독립적으로 투쟁하는 기층 조합원 운동을 발전시킨다는 SWP의 노동조합 전략의 필수 요소였습니다.5 그 신문들 덕에 우리는 소방관, 자동차 노동자, 공무원, 버스 노동자, 항만 노동자, 교사, 기술자, 지자체 공무원 등 여러 생산직·사무직 부문에서 꽤 큰 모임을 매우 신속히 결성할 수 있었습니다. 일터에서 활약한 아마 가장 인상 깊은 사례는 광원노동조합 지도자 아서 스카길과 제가 200명이 모인 노조 대의원대회에서 함께 연설한 것일 것입니다. 그 결과로 그 다음 주 월요일 요크셔 광원 6만 명이 안전모에 노란 반나치동맹 스티커를 붙이고 출근했습니다.

축제를 앞두고 몇 달 만에 ‘나치에 반대하는 공무원들’, ‘나치에 반대하는 지자체 공무원들’ 등이 결성됐는데, 그것은 SWP가 일터에서 구축한 기층 조합원 네트워크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그 네트워크는 우리가 노동조합 활동가들 사이에서 얻은 훌륭한 기층 조합원 활동가라는 평판과, 그 전에 개최한 ‘기층 조합원 대회’를 발판으로 형성한 것이었습니다. 반나치동맹이 무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은 흔히 완전히 간과됩니다. 그러나 반나치동맹은 SWP의 노동자 투쟁 전략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반나치동맹의 활력과 힘은 이처럼 일터와 노동조합에 내린 뿌리에서 온 것인데, 다른 설명들은 그 측면을 거의 무시하죠.

추나라: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묻고 싶습니다. 반나치동맹과 다른 좌파 단체들의 관계에 관해 많이 말씀하셨는데요, 노동당과의 관계에 관해 더 들려 주시겠습니까? 노동당 당원들이 반나치동맹에 참여했나요? 노동당과 협력하는 과정에서 긴장은 없었습니까?

루이셤 전투 때는 긴장이 있었지만 반나치동맹 창립 후 노동당과의 긴장은 없었습니다. 이는 피터 헤인, 어니 로버츠, 닐 키녹이 반나치동맹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노동당이 자신의 선거 기반에 대한 국민전선의 위협을 우려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1978년 노동당은 국민전선을 맹비난하는 정당 유세 광고를 제작했죠. 또, 1978년 1월 마거릿 대처 인터뷰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그 인터뷰에서 대처는 이렇게 말했죠. “영국이 다른 문화권 사람들로 넘쳐나게 될지 모른다고 국민들이 정말 우려하고 있습니다.”6 제 기억에 반나치동맹에 공식적으로 가입한 노동당 지구당이나 노동당 지역 조직들은 많지 않았지만, 당연하게도 많은 개별 노동당원들이 반나치동맹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오늘날 ‘인종차별에 맞서자’SUtR에는 더 많은 노동당 지구당, 국회의원, 유럽의회 의원들이 참여하고 있죠. 사실, 반나치동맹에 대한 지지는 주되게 일터의 기층 조합원 네트워크와, 당연하게도 다양한 이민자·지역사회 단체들에서 왔습니다.

캘리니코스: 그런 매우 성공적인 대중 운동을 일으키려 한 시도에 대한 급진 좌파들의 비판을 언급하셨는데, 특히 두 가지 비판이 있었습니다. 첫째 비판은 몇 년 동안 지역 수준에서 다양한 반파시즘·반인종차별 연대체가 성장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입니다. 많은 경우 그런 연대체들은 인종차별 반대가 중요하고 나치와의 대결은 그보다 부차적이라는 견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극작가 데이비드 에드거 등이 그런 비판을 제기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둘째 비판은 폴 길로이가 저서 《영국 국기에는 검은색이 없다》에서 가장 영향력 있게 제기된 것으로, 반나치동맹이 제2차세계대전 시기의 애국주의, 즉 보수당과 노동당이 연립한 전시 처칠 내각의 반나치주의에 영합했다는 것입니다.7 이런 비판들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반나치동맹”이라는 명칭은 나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단결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의식적으로 우리는 모든 이민 통제에 반대한다는 SWP의 입장을 반나치동맹의 전제로 삼지 않았습니다. SWP 당원으로서 저는 1978년 여름 1000명이 모인 반나치동맹 협의회에서 이민 통제에 일절 반대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자고 주장했지만, 이민 통제에 일절 반대하는 것이 반나치동맹 가입의 전제 조건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주장 때문에 우리는 좌우파 모두에게서 비판받았지만, 결의문 채택은 반나치동맹 협의회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공동전선의 성격은 온전한 혁명적 정치를 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혁명가들이 개혁주의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과 공동의 대의를 위해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수단입니다.

반나치동맹이 더 광범한 인종차별 문제로 초점을 넓히는 데에는 또 다른 난점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인종차별에 맞서는 방법을 두고 좌파 내에서 커다란 논쟁이 일었는데, 흑인 민족주의자들과 흑백 간 단결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긴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당시는 노동당 흑인 당원 모임의 맹아가 막 논의되던 때였죠. 우리 SWP는 반나치동맹이 목적을 넓혀서 인종차별 반대 운동 조직이 되면 전략·전술을 둘러싼 온갖 논쟁으로 마비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반나치동맹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반파시즘 투쟁으로 단결시키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는 방향을 고수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반나치동맹이 인종차별이라는 더 넓은 문제에 맞서는 데에도 긍정적 구실을 했다고 확신합니다. 예컨대, 반나치동맹은 이민 문제의 쟁점인 열 가지 허구를 반박하는 유인물을 대량으로 ─ 아마도 200만 부쯤 ─ 발행했습니다. 실업과 과밀 학급, 열악한 주택, 주택 부족 등의 문제가 이민자 탓이 아님을 매우 효과적으로 주장했고, 그 결과 오늘날 ‘인종차별에 맞서자’도 그 주장들을 거의 그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인종차별 문제에서 반나치동맹은 매우 단호하고 비타협적이었습니다.

추나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록 음악’을 주도한 SWP 당원 데이비드 위저리를 추모하는 행사에서 다커스 하우가 반나치동맹에 관해 한 언급도 기억할 만합니다. 하우는 반나치동맹이 인종차별에 관한 문화 전반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지적했는데, 폴 풋은 하우의 연설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훌륭하고 감동적인 추도사에서 … 다커스 하우는 영국에서 기른 다섯 자녀에 관해 이야기했다.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자신의 성장 환경에 만연한 인종차별에 끝없이 싸우며 분노를 품고 자랐지만, 막내딸은 “근심 없이 흑인”으로 자랐다고 했다. 하우는 막내딸이 얻은 “여유”가 반나치동맹, 특히 데이비드 위저리 덕택이라고 감사를 표했다. 이보다 더 훌륭한 묘비명도 없을 것이다.”8

반나치동맹의 성취를 요약한 것이자, 그 성취에 기여한 영국 전역의 수많은 지지자들에 대한 헌사입니다.

캘리니코스: 특히 그것이 당시 SWP의 강경한 비판자였던 다커스 하우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비판자에게서 온 찬사이니 말입니다.

인종차별 문제와 관련하여 지적할 만한 또 다른 사실은, 인도인노동자협회 회장이자 공산당원인 비시누 샤르마가 한 중요한 구실입니다. 샤르마는 반나치동맹을 확고히 지지했고, 인도인노동자협회 더비 지부장 프렘 싱도 그랬습니다. 블레어 피치[1979년 국민전선에 반대하는 행동 중에 경찰에 의해 살해된 SWP 당원 — 역자]의 죽음도 우리가 인종차별에 만만찮게 저항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주장은 매우 편협하고 종파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반나치동맹이 실제로 분위기를 바꿨으니까요.

반나치동맹이 애국심에 영합했다는 폴 길로이의 주장에 관해 말하자면, 저는 도통 그 주장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처칠은 제국주의적·국수주의적 동기에서 제2차세계대전을 수행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싸우는 것을 받아들인 이유는 히틀러와 파시즘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습니다. 국민전선이 파시즘 이데올로기와 그것이 낳은 참상과 관련있다는 사실은 국민전선의 매력에 치명타를 줄 수 있는 약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점을 거듭 강조했고, 그럼으로써 인종 학살의 유산과 결코 엮이고 싶지 않아 했던 ‘연성’ 인종차별주의자들을 강경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나치에게서 분리시킬 수 있었습니다.

캘리니코스: 문화 전선에서 반나치동맹이 한 활약, 특히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록 음악’에 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록 음악’RAR은 반나치 운동의 불가결한 요소였습니다. 사실 RAR은 반나치동맹 출범 한 해 전인 1976년 에릭 클랩턴이 버밍엄 콘서트에서 이녹 파월의 망언에 지지를 표명한 것에 대한 반발의 결과로 등장했습니다.9 RAR이 클래시와 엘비스 코스텔로, 스페셜스 같은 유명 음악가들과 여러 풀뿌리 밴드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SWP 동조자인 레드 손더스, SWP 당원 로저 허들과 데이비드 위저리는 RAR을 움직인 소중한 활동가들이었습니다.

사실 반나치동맹이 없었다면 반나치 축제(페스티발)들이 그토록 성대하게 열릴 수 없었을 겁니다. 맨체스터에서 열린 축제에는 3만 5000명, 카디프·에든버러·리즈·사우샘프턴 축제들에는 각각 수천 명이 참가했습니다. 1978년 9월 24일 런던 브록웰 공원에서 열린 축제에는 10만 명이 참가했죠.

그러나 RAR은 음악을 제공하는 필수적 역할을 했고, 반나치동맹이 펑크 문화와 청년 문화와 관계 맺는 데서도 필수적 구실을 했습니다. RAR의 문화적 영향력은 영국 전역에서 청년들을 동원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펑크록 밴드 섐69의 창립 멤버인 지미 퍼시와 레게 밴드 스틸 펄스가 빅토리아 공원에서 열린 반나치동맹 축제에서 참가자들에게 인사하는 광경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줬습니다. 어떤 층의 사람들에게 이는 매우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데이비드 킹은 RAR의 배지도 디자인해 줬는데요, 그런 문화적 측면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또, 반나치동맹과 RAR이 ‘백화제방’ 식으로 자발적 활동의 만개를 장려한 결과 나치에 반대하는 스케이트보드 동호회, 중고등학생 모임, 채식주의자 모임 등이 등장했습니다.

하나 덧붙이자면 오늘날 정치 운동들은 음악을 청중 유치의 열쇠로 여기지만, 음악은 한 요소일 뿐입니다. 첫 축제 때 우리는 트라팔가 광장에 집결하여 런던 동부 빅토리아 공원으로 — 즉 나치의 아성으로 불리는 곳을 관통하여 — 약 9킬로미터를 행진한 뒤 본 행사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 결정에 관해 많은 좌파들은 [사람들이 사전 행진에는 참가하지 않고 본 행사 공연만 보러 올까 봐 — 역자]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만 명이 사전 행진에 참가했습니다(많은 참가자는 청년이었습니다). 그 행진은 그때까지 제가 참가해 본 것 중 가장 즐겁고 활력 있는 행진의 하나였습니다. 행진 대열이 나치 무리를 지나칠 때 그들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니 금상첨화였죠.

당시에 염두에 둔 또 다른 아이디어는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AAM과 대비되는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산당이 주도한 AAM은 공동전선이 아니라 민중전선에 가까웠는데, 매우 신중했고 품격 있게 보이려 애썼습니다. 반나치동맹은 사뭇 달랐는데, 이는 행동·기백·상상력이 넘쳐 흐르는 아래로부터의 방식 덕분이었습니다. 물론 몇몇 기업인들과 연예인들도 반나치동맹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환영받았고 중요한 구실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에너지와 경험을 이끌어 낸다는 정치를 갖고 운동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도 필요하고 중요한 운동일지라도 결국 김이 빠지고 효과가 훨씬 떨어질 것입니다.

캘리니코스: 반나치동맹이 처음에는 홍보와 축제(페스티발) 개최 등에 주력했지만 이후에는 나치에 맞선 대항 동원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을 앞서 잠깐 언급하셨습니다. 한편,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국민전선이 선거에서 품격 있는 세력으로 인정받기 위한 ‘정장 입은 나치’ 전략을 펴는 동시에, 거리를 장악하여 이민자 거주 지역을 관통하는 행진도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리 동원이 지극히 중요했죠. 반나치동맹이 어떻게 몇 차례의 맞불 집회를 벌이게 됐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려면 국민전선이 출범한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국민전선의 출범은 거리 운동과 선거 도전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973년 웨스트브로미치 보궐 선거에서 국민전선은 16.2퍼센트를 득표했습니다. 선거 전략이 성과를 낸 것이죠. [1977년 — 역자] 국민전선은 루이셤과 우드 그린에서 행진을 시도했습니다. 국민전선은 그 시도가 선거에서 역효과를 낳았다고 봤고, 그래서 1979년 총선 국면에서는 사실 행진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품격 있는 공당의 하나로 인정받으려 한 것이죠.

반나치동맹 창립 직후에는 소규모 맞불 행동이 있었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았고 그 필요성이 만만찮게 제기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필요성이 처음 만만찮게 제기된 것은 1979년 4월 21일 레스터에서였습니다. 1979년 5월 총선을 앞둔 주말인 그 시점에 국민전선이 행진을 감행해 매우 폭력적인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맨체스터에서 버스 노동자들이 와서(몇몇은 헬멧을 쓰고) 국민전선 행진을 물리적으로 분쇄하는 데서 커다란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국민전선 행진 대열에 온갖 물건을 집어 던진 사람들도 있었고요. 그러나 그 일의 반향은 작았는데, 언론이 보기에 레스터가 변두리 마을이어서였던 듯합니다.

캘리니코스: 레스터에서 양측의 규모는 어땠나요?

우리 편은 3000~4000명이었고, 국민전선 쪽은 1500명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만만찮은 충돌이 벌어진 겁니다.

한편, 1979년 4월 23일 사우스올에서 일어난 충돌은 사실 경찰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한 것이죠. 그 점은 다른 글에 잘 묘사돼 있습니다.10 그날 전투의 주된 양상은 국민전선과의 충돌이 아니라 경찰과의 충돌이었습니다. 국민전선이 선거 유세를 하려고 사우스올 구의회 청사를 대관했고 경찰이 그 행사를 가차없이 보호하는 과정에서 SWP 당원인 블레어 피치 동지를 살해했죠. 사우스올 전투는 극도로 분산적이었습니다. 몇 시간에 걸쳐 지속됐고, 경찰과의 거듭된 충돌이 주됐습니다.

캘리니코스: 그러나 반나치동맹의 더 큰 궤적 속에서 보면, 사우스올 전투는 반나치동맹이 이제 루이셤 전투 같은 행동을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 줬습니다. 반파시스트들과 지역 주민들이 동맹해 나치와 경찰에 맞서는 행동을 일으킬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때에도 역풍은 불지 않았습니다. 핵심적 이유는 경찰이 블레어 피치를 살해했기 때문이죠. 그 후 대규모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례식이었죠.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블레어 피치의 죽음이 모든 것을 압도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주류 우파 언론들조차 ‘저 [좌익] 폭력배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같은 말을 차마 할 수 없었습니다.

사우스올 전투는 루이셤 전투와 사뭇 달랐습니다. 그러나 블레어 피치의 죽음에 대한 반응은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피치의 시신이 사우스올의 도미니언 극장에 안치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조문이 이어졌습니다. 저는 최근 사우스올에서 열린 블레어 피치 40주기 추모식에서 연설을 했는데요, 피치의 장례식 때 만난 조문객들과도 다시 인사를 주고받았습니다. 당시 우리는 블레어 피치의 영구차를 그가 교사로 일하던 런던 동부를 가로지르게 했습니다. 장례 행렬에 수천 명이 합류해 런던 동부 공동묘지까지 행진했고, 장지에서는 당시 영국 노총 TUC 위원장이자 공산당의 지도적 당원인 켄 길, 노동당 의원 닐 키녹, SWP의 토니 클리프 등이 추도 연설을 했습니다.

그 장례식은 파시즘에 맞선 투쟁에 목숨을 바친 블레어 동지에게 걸맞은 추도였을 뿐 아니라, 반나치동맹이 누리던 광범한 지지를 보여 줬습니다.

추나라: 아까 전에, 반나치동맹에서 SWP보다 온건하고 나치에 맞선 대항 행동에 관해 우려했던 세력들과도 함께 활동했다고 하셨는데요, 사우스올과 레스터에서의 맞불 집회를 준비하면서 반나치동맹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지지는 않았나요?

논쟁은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두 행동 모두를 평화적인 맞불 집회로 제안했기 때문이었죠. 우리는 창립 선언문에 담긴 공식, 즉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치에 맞서자는 공식을 철저히 따랐습니다. 우리는 결코 경직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것이 맞불 집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난관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그 창립 선언문을 쓰느라 며칠이나 끙끙 앓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약 150단어밖에 안 되는 짧은 글이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골랐습니다.

추나라: 더 온건한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이 대항 행동에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맞불 집회를 제안할 때 걱정했어요. 반나치동맹 창립 과정에서 그 문제로 비난을 많이 받아서 그것이 걸림돌이 될까 봐 긴장했었죠. 그러나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창립 선언문은 나치에 맞서는 방법에 관해 경직되지 않았습니다.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치에 반대하자고만 돼 있었죠.

캘리니코스: 반나치동맹의 성과를 전반적으로 평가해 주시겠습니까?

겸손해야 하겠지만, 반나치동맹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래 가장 성공적인 공동전선의 하나라고 확신합니다. 반나치동맹의 첫째 성과는 실제로 국민전선을 패배시켰다는 것입니다. 국민전선은 서로 싸우는 분파들로 사분오열했습니다. 그들의 득표도 줄었습니다. 1978년 지방선거 때 리즈에서 국민전선 득표는 54퍼센트 줄었고, 브래드퍼드에서는 77퍼센트, 런던 이스트엔드에서는 40퍼센트 줄었습니다. 1979년 총선에서 국민전선 후보들의 평균 득표수는 633표였습니다. 1973년 총선 때 그 수치는 1265표였습니다. 그리고 나치는 그로부터 10년도 넘게 지나고 나서야, 즉 1990년대 초에야 반나치동맹이 입힌 타격에서 회복하게 됩니다. 이는 상당한 성과입니다.

반나치동맹의 둘째 성과는 프랑스 상황과 견줘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모두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의 역겨운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국민전선에 맞서는 것을 사실상 회피했고 그 결과는 오늘날 드러나 있습니다.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전선(오늘날 국민연합의 전신)이 2017년 대선 결선 투표에서 3분의 1을 득표하고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1위를 했죠. 반면 영국에서는 파시스트들이 국민전선, 영국국민당BNP, 영국수호동맹EDL, 토미 로빈슨, 영국독립당UKIP 등으로 다양한 전술을 구사했음에도 돌파구를 내지 못해 왔습니다. 물론 이제 우리는 어느 때보다 커다란 위협을 제기할 수 있는 나이절 퍼라지와 브렉시트당[요즈음의 영국개혁당의 전신 — 역자]을 상대해야 하니 안심해서는 안 되겠죠. 하지만 반나치동맹과 ‘파시즘에 맞서 단결하자’UAF, ‘인종차별에 맞서자’의 경험은 이러한 도전에도 응할 자신감을 줍니다.

반나치동맹의 셋째 성과는 당시 청년 세대 전반에 영향을 줬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많은 수는 지금까지도 활동을 하거나 다양한 수준으로 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반나치동맹은 특히 많은 유색인종 청년에게 큰 영향을 줬는데, 그 청년들은 유색인종과 백인이 단결해 국민전선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데에 크게 고무됐습니다. ‘인종차별에 맞서자’ 공동 의장 웨이먼 베넷은 런던 동부에 사는 카리브계 흑인 학생이던 열여섯 살 때를 회상하며 이 점을 언급하곤 합니다.

캘리니코스: 다루지 않은 것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당대 가장 유명한 축구 감독 브라이언 클러프 같은 사람들이 축구계에서 발휘한 주도력입니다. 그 사례는 반나치동맹이 얼마나 많은 전선에서 활동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네, 브라이언 클러프는 훌륭했습니다. 클러프는 반나치동맹 산하의 ‘나치에 반대하는 축구인들’ 모임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데서 중요한 촉매 구실을 했습니다. 축구계뿐 아니라 문화계 등 수많은 영역에서의 활동 등 시간 관계상 다루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추나라: 반나치동맹이 아니라 마거릿 대처의 우경화가 국민전선을 멈추게 했다는 주장에는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1978년 말에 이르면 반나치동맹은 축제 개최뿐 아니라 일터와 모든 영역에서 대대적인 기층 활동을 벌이는 대중 운동으로, 연성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나치에서 갈라놓았습니다. 대처가 “영국이 다른 문화권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고 발언한 1978년 초에는 이미 국민전선의 득표가 줄기 시작한 상태였죠. 유럽 도처에서 정치인들이 극우 표를 잠식하겠다면서 인종차별적 언사를 받아들일 때 극우의 득표는 느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극우가 주변적 세력이 된 것은 40년 넘게 극우에 맞서 대중 동원을 지속한 결과입니다.

캘리니코스: 그것의 한 측면은 반나치동맹이 국민전선을 공공장소에서 몰아냈다는 것입니다. 공개된 물리적 장소에서 몰아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정치를 표현할 그들의 능력을 크게 제약한 것이죠. 거기서 RAR의 구실이 매우 중요했는데, 나치는 ─ 오늘날의 대안 우파도 어느 정도 그러한데 ─ 젊고 반항적인 체하려 하지만 반나치 축제와 RAR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추나라: 대처 당선 전에 대중 운동이 국민전선을 패배시켰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국민전선 조직자 마틴 웹스터는 1982년 피터 헤인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반나치동맹의 어마어마한 압력 때문에 국민전선이 조직원들을 거리 시위로 불러모으지 못하고 회원 가입 수와 득표가 줄었다고 인정했습니다. 1979년 국민전선의 득표는 크게 추락했습니다. 반나치동맹은 일터에 깊이 뿌리내리고, 또 동지가 묘사하신 것처럼 문화계에 큰 영향을 미친 덕분에 국민전선의 조직을 약화시켰습니다.

캘리니코스: 마지막으로, 오늘날을 위한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 유럽 전체가 배울 만한 것인데, 제가 보기에 반나치동맹은 오늘날 훨씬 심각해진 극우의 위협에 맞서는 데에 유익한 본보기입니다. 오스트리아, 독일, 그리스, 또 어느 정도는 스페인에서도 동지들이 반나치동맹을 본보기 삼아 운동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극우는 나치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 나온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런 식입니다. “그들이 나치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물론 안다. 하지만 그들은 변했다. 선거 제도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안심을 자아내는 것이 바로 국민전선과 영국국민당이 하려 한 일이고, 그들이 또다시 그런 시도를 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캘리니코스: 이 대목에서 〈가디언〉 기자 마틴 워커의 1977년 저서 《국민전선》을 언급할 만합니다. 워커는 꽤 중요한 논객이었는데 국민전선을 장차 주요 정당이 될 세력 또는 오늘날의 우익 포퓰리즘 정당처럼 취급했습니다. 워커는 “국민전선 회원들을 1930년대와 같은 고전적 의미의 파시스트들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국민전선이 “영국의 제4 정당”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11 즉, 오늘날 나치의 자기 포장을 받아들이는 것과 똑같은 견해였던 것입니다.

추나라: 그 점이 중요한 이유는, 흔히들 예전에는 국민전선의 나치 본색을 알아채기 쉬웠지만 지금은 훨씬 사정이 복잡하다고 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금 하신 말씀은 1970년대에도 마찬가지 주장이 있었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마크 L 토머스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 기고한 글에서 한 지적이 유익합니다. 그는 마린 르펜이 ─ 그녀의 아버지 장마리 르펜도 그랬는데 ─ 상이한 두 유권자층의 관심을 끌 줄 아는 능수능란한 정치인이라고 지적했죠.12 아시다시피 그들은 두 갈래의 도랑을 파고 있어요. 하나는 득표를 늘리고 여느 공당의 하나로 인정받는 것으로 이어지고, 다른 하나는 거리 군대를 구축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오스트리아의 상황이 이를 잘 보여 주고 있죠. 모두가 예의 주시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파시스트 분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정치인들은 매우 목적의식적입니다. 스스로를 재포장하는 것이죠. 그래서 반나치동맹의 핵심 교훈 하나는 그들이 나치임을 널리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캘리니코스: 오늘날 SWP는 노동당원들과 함께 ‘인종차별에 맞서자’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광범한 인종차별 문제에 맞서고 있는 것이죠. 이전과는 다른 오늘날의 방식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해[2018년 — 역자] 여름 존 맥도널[인터뷰 당시 노동당 예비내각 재무장관이었다 ─ 역자]은 반나치동맹과 같은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그 취지는 완전히 옳지만 오늘날의 상황은 40년 전과 다릅니다. 당시에는 투쟁적인 기층 조합원 운동이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격동에 휩싸여 있었고 지배계급에 맞선 저항이 훨씬 광범하고 정치적으로 예리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판이한 상황에서 운동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쳤고 그것이 노동운동에 온갖 파괴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때문에 반나치동맹 같은 조직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지만, 상황은 더 복잡합니다.

오늘날에는 전방위적인 인종차별적 공격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국가와 주요 정당들, 파시스트들 자신이 그 공격에 가세하고 있습니다. 이민자를 겨냥한 인종차별이라는 점은 1970년대와의 공통점이지만, 오늘날 그 공격은 대개 이슬람 혐오라는 형태를 띱니다. 영국의 양대 주류[보수당과 노동당의 — 역자] 정치인들이 국내에서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는 것은, 미국 등 서방 주요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제국주의 전략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 점은 프랑스에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지만, 영국 상황도 근본적으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양한 형태를 취하는 적과 맞서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중도파는 대부분의 서방 자본주의 나라에서 여전히 우세하고 이슬람 혐오를 인정하고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국가의 인종차별은 경찰관, 교도관, 이민 단속 공무원, 일부 교사, 학자 등에 의한 일상적 편견과 괴롭힘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극우가 세를 키우고 있습니다. 나이절 퍼라지와 이탈리아의 마테오 살비니 같은 정치인들은 득표를 늘리고 신자유주의 중도를 오른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이민자를 겨냥한 인종차별을 부추깁니다. 또, 파시스트들과 비주류 대안 우파들도 있죠. 그들은 더 광범한 정당 안에 똬리를 틀기도 하고 자신들만의 “포스트파시즘” 정당을 결성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전반적 분위기에서 크게 득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1970년대의 반나치동맹과 달리, 파시즘에만 맞서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인종차별에 맞서는 공동전선이 필요합니다. 영국의 ‘인종차별에 맞서자’, 그리스의 ‘인종차별·파시즘 반대 운동’KEERFA, 독일의 ‘인종차별에 맞서자’AgR가 그런 운동입니다. 영국 사회의 주요한 인종차별인 이슬람 혐오에 체계적으로 맞서야 합니다. ‘인종차별에 맞서자’는 그 과업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죠. 물론 우리는 유대인 혐오에도 반대하고 어디서나 그에 맞서지만, 영국독립당과 토미 로빈슨과 그들이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기치인 이슬람 혐오에 맞서는 ‘인종차별에 맞서자’와 같은 운동이 필요합니다. 이슬람 혐오에 맞서는 것은 향후 몇 년에 걸쳐 훨씬 중대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맞서 공동전선도 진화하고 있죠. 그리고 그 공동전선은 브렉시트당[현 영국개혁당. 나이절 퍼라지가 이끌고 있음 ─ 역자]이 준동할 전망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브렉시트당은 유럽의회 선거에서 거둔 성공으로 강화됐고, 영국독립당, 토미 로빈슨 지지자들, 극우로부터 새 당원들이 대거 유입돼 더 성장할 공산이 큽니다. 또, 우려스럽게도 많은 대학에서 극우인 ‘정체성 세대’GI 운동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도전이 닥치든, 우리가 반나치동맹에서 한 활약과 오늘날 새로운 세력들과 함께 ‘인종차별에 맞서자’를 비롯한 유럽 곳곳에서 하고 있는 활동에서 힘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이 대답에 나오는 사실 관계의 출처와 배경 지식에 관해서는 Rosenberg, 1988. 을 보라.↩︎
  2. 존 킹슬리 리드는 블랙번 보수당 청년단체의 전 대표였다. 1973년 리드는 보수당을 탈당해 국민전선에 가입했고 1974~1976년에 국민전선 대표를 지냈다. 이후 리드는 국민전선에서 탈퇴해 영국국민당을 창당했다.↩︎
  3. 예컨대, Callinicos and Hatchett, 1977.↩︎
  4. 1970년대 SWP의 역사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Birchall, 2011., 특히 8장과 9장을 보라.↩︎
  5. 1970년대 SWP의 노동자 투쟁 전략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Callinicos, 1982.를 보라.↩︎
  6. Thatcher, 1978.↩︎
  7. Gilroy, 1987, pp133-134.↩︎
  8. Foot, 1992, p122.↩︎
  9. Huddle and Saunders, 2016.↩︎
  10. Grant and Richardson, 2019.↩︎
  11. Walker, 1977, pp9 and 224.↩︎
  12. Thomas, 2019, pp42-45.↩︎

참고 문헌

  • Birchall, Ian, 2011, Tony Cliff: A Marxist for His Time (Bookmarks).
  • Callinicos, Alex, 1982, “The Rank-and-File Movement Today”, International Socialism 17 (autumn)
  • Callinicos, Alex, and Alastair Hatchett, 1977, “In Defence of Violence”, International Socialism 101 (1st series, September)
  • Foot, Paul, 1992, “David Widgery”, New Left Review, I/196
  • Gilroy, Paul, 1987, There Ain’t No Black in the Union Jack: The Cultural Politics of Race and Nation (Unwin Hyman).
  • Grant, Nick, and Brian Richardson, 2019, Blair Peach: Socialist and Anti-Racist (Socialist Worker).
  • Huddle, Roger, and Red Saunders (eds), 2016, Reminiscences of RAR: Rocking against Racism 1976-1979 (Redwords).
  • Rosenberg, Chanie, 1988, “The Labour Party and the Fight against Fascism”, International Socialism 39 (summer)
  • Thatcher, Margaret, 1978, “TV Interview for Granada World in Action (‘rather swamped’)”, Margaret Thatcher Foundation (27 January)
  • Thomas, Mark L, 2019, “Fascism in Europe Today”, International Socialism 162 (spring) [국역: 마크 L 토마스, ‘오늘날 유럽의 파시즘’, 《마르크스21》 50호]
  • Walker, Martin, 1977, The National Front (Fontana/Coll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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