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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세계대전 종전, 20년의 막간극

제1차세계대전은 1918년 혁명으로 독일 제국이 무너지며 끝이 났다. 승전국들은 독일의 해외 식민지를 모두 나눠 가졌다. 이와 더불어 독일은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랑스에 이양하고, 신생 국가들에 영토 일부를 양보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됐다. 오스만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현재의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에 해당하는 영토를 빼앗겼다.

전쟁에 반대해 러시아와 독일 등지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에서 보듯이, 전쟁은 극도의 혐오 대상이 됐다. 또한 전쟁을 치른 강대국들의 지배자들도 서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므로, 전쟁을 방지할 필요를 느꼈다.

1920년 국제연맹이 창설되고, 1921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이 체결되고, 1928년 부전조약이 체결되고,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이 체결되는 등 평화 수립을 위한 각종 국제 조약이 나왔다. 부전조약은 “각 국가가 국민의 이름으로 전쟁 포기를 선언”하고 “국제 분쟁을 평화적 수단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해결하지 않을 것”임을 규정했다.

1918년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 바야흐로 인류가 지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아마 황금기는 아닐지라도 점차 밝아오는 시대를, 그리고 인류가 진심으로 갈망하는 바를 볼 수 있는 고지에 이르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1920년대 자본주의는 (특히 미국에서) 잠깐 “황금기”를 맞았다. 극소수 부자의 전유물이었던 라디오, 영화관, 냉장고, 전화기가 대중적으로 보급됐다. 헨리 포드의 자동차 공장에서 최초의 대량 생산 모델 자동차가 생산되며 중간계급과 심지어 노동계급 일부도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게 됐다. 제너럴모터스의 이사 존 J 라스콥은 매주 15달러씩 주식에 투자하면 누구든지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들 간 조약을 근거로 한 평화와 번영이 막간극이었을 뿐이었음은 금세 드러났다.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던 제1차세계대전의 종전 후 겨우 20년 만에 더 큰 세계 전쟁이 일어났다.

사실 제1차세계대전은 정치인들의 오판과 우연이 연쇄적으로 일어나 벌어진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경제적 경쟁이 원료와 시장 확보를 위한 영토 경쟁으로 이어진 제국주의 간 전쟁이었다. 독일이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며 잠시 물러섰지만, 강대국들 사이의 이 갈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 사이의 평화 협정은 근본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봅은 이렇게 지적했다. 파리강화회의의 결과물이고 세계 전쟁이 또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창설된 국제연맹은 “통계 자료를 모으는 기구로서의 역할을 제외하면 거의 완전한 실패작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 파리강화회의에서 체결된 가장 유명한 조약인 베르사유 조약은 “처음부터 파산할 운명이었고, 따라서 전쟁이 또다시 터질 것은 거의 확실했다.”

베르사유 조약을 두고 한 프랑스 장군은 냉소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기껏해야 20년짜리 휴전 협정에 불과하다.”

같은 동역학으로 일어난 점을 보아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을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전쟁으로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도 있었다. 전쟁이 낳은 위기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유럽 곳곳에서, 또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들에서 혁명적 투쟁의 물결이 일었기 때문이다. 승전국들도 이 물결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지배자들의 인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1차세계대전 종전 무렵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는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유럽 전역이 혁명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 유럽 전역의 인민 대중이 정치·사회·경제의 측면에서 기존 질서 전체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므로 혁명의 국제적 확산을 바란 레닌과 트로츠키의 전망과 전략은 전혀 공상이 아니었다.

한편, 전쟁이 낳은 사회적 위기와 정치적 양극화는 다른 한편으로는 파시즘 탄생의 토양이 되기도 했다. 인생의 “낙오자”로 살다가 전쟁에 참가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한 히틀러 같은 사람들이 파시즘의 초기 ‘자본’이었다.

싹을 틔우기 시작한 파시즘과 노동계급 혁명의 물결, 둘 중 무엇이 승리하느냐가 이후 역사를 가르는 데 매우 중요했다. 제1차세계대전 종전과 제2차세계대전 발발 사이 20년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투쟁의 시기였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일어난 투쟁이 결정적이었다.

무솔리니(왼쪽)와 히틀러(오른쪽)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즘이 집권한 것은 노동계급의 커다란 패배였다. 그러나 그 패배가 불가피했던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의 ‘붉은 2년’과 ‘검은 2년’

제1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탈리아는 정치적으로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실업이 급증했고, 식료품과 물자가 크게 부족했다. 전쟁 끝나면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징집됐던 농민들은 전쟁이 끝나도 처지가 나아지지 않았다. 토지 재분배를 요구하는 격렬한 농민 행동이 급증했다.

노동자들도 단체행동을 벌였다. 특히 토리노 지역의 노동자들은 투쟁 전통이 아주 강했다.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사회당이 성장했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승전국 편이었는데도 전리품으로 얻은 영토가 지배자들과 민족주의자들에겐 너무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 일부 지배자들은 의회민주주의에 점차 큰 불만을 느꼈고, 의회민주주의를 무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쪽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붉은 2년’(비엔뇨 로소)이라고 불린 1919~1920년의 대격변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일어났다.

1919년 토리노 지역 노동자들은 공장평의회를 설립했다. 공장평의회는 공장 운영을 담당했다. 자연히 기업주의 경영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투쟁은 엎치락뒤치락하며 노동자 100만 명이 공장을 점거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공장평의회는 러시아의 소비에트처럼 성장할 잠재력이 있었다.

이즈음 이탈리아 노동운동을 대표한 정당은 사회당이었다. 사회당은 의석을 가장 많이 차지한 제1당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기세에 밀린 사회당의 개혁주의파 지도자들과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은 말로는 혁명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위한 실질적 노력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 운동은 그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하고 얼마간의 양보만 얻어 내고 끝이 났다. 노동자들은 실망감을 맛봤다.

공장 점거 운동의 기세에 눌려 기를 못 펴던 파시스트당은 1920년 말부터 날뛰기 시작했다. 농민 조합, 농업 노동자 조합, 좌파 계열 신문사, 사회당이 집행권을 행사하는 지방자치단체의 건물 등을 불태우고 활동가들을 살해하는 테러와 린치를 가했다. ‘붉은 2년’의 패배 뒤에 찾아온 ‘검은 2년’이었다.

노동계급은 실망감에 사기는 저하됐지만 여전히 강력했다. 기업주들은 노동계급을 두려워했고,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의 성장에 질겁했다. 파시스트들은 정부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냄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했다.

파시스트의 성장 앞에 사회당은 완전히 무기력했다. 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노동자들에게 자제를 촉구하기만 했다. 그들은 합법성이 복구되면 파시스트 같은 극단적 무리들이 설 곳이 없어질 것이고, 노동자들이 자제하면 ‘여론’이 파시스트에 등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국왕의 도움을 강하게 기대했다.

1921년 사회당에서 좌파가 떨어져 나와 공산당을 설립했다. 그러나 공산당을 주도한 세력은 초좌파였고, 그들은 비혁명적인 조직들과 협력해 봐야 혁명적 순수성만 해친다며 파시스트에 맞서기 위한 협력을 모두 기각했다. 더 나아가 파시스트가 의회를 장악하면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환상이 제거될 테니 나쁠 것 없다고 봤다.

다행히 ‘아르디티 델 포폴로’(민중의 돌격대)라는 반파시즘 무장 행동단체가 결성돼 파시스트들에 맞서 싸웠다. 기층의 사회당원들과 공산당원들은 민중의 돌격대에 참가하며 파시스트에 맞섰다. 민중의 돌격대는 초기에는 큰 성공을 거뒀다. 그래서 1921년 중엽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운동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였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사회당도 공산당도 민중의 돌격대와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고립된 민중의 돌격대는 정부와 파시스트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결국 마지막 순간 겁에 질린 사회당과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은 총파업을 호소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준비시키지도 않고 졸속으로 지시한 총파업은 공허한 호소로 끝났다.

결국 무솔리니는 큰 저항에 직면하지 않고 단 2년 만인 1922년 10월 집권했다. 파시스트들이 ‘로마 진군’으로 도시를 장악해 무솔리니가 집권했다는 흔한 설명은 근거 없는 신화다. 파시스트 돌격대가 로마 외곽에 집결하긴 했지만, 무장은 미미한 수준이었고 보급도 형편없었다. 무솔리니는 일이 잘못되면 재빨리 도망가려고 로마가 아니라 밀라노에 있었다. 그런데도 국왕이 그를 총리로 임명해 줬다.

처음에 무솔리니는 헌법도 바꾸지 않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4년이 지난 1926년쯤엔 모든 진보 단체와 개인, 심지어 모든 자유주의 단체와 개인에게도 파시즘의 탄압이 미치게 된다.

1918~1923년 독일 혁명

1918년 러시아와의 강화로 독일은 동부 전선에서 한숨 돌렸다. 그러나 프랑스로의 진격 작전이 수차례 실패로 돌아가고 미국의 참전으로 병력과 장비에서 열세에 놓이면서 패색이 짙어졌다.

자멸적 진격 작전을 수행하기를 거부한 키일 군항 병사들의 반란은 독일 혁명의 시작이었다. 키일 군항 병사들은 무장을 풀지 않은 채로, 파업 중이던 부두 노동자들과 함께 거리를 행진하고 진압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병사평의회를 세웠다.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독일 전역으로 확산됐다. 그 물결이 11월 9일 수도 베를린에 도착하자 황제(카이저)는 네덜란드로 도망쳤다.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독일의 실질적 정치 권력 기구가 됐다. 그러나 독일의 평의회들은 권력을 혁명적 목적에 사용하지 않으려는 세력, 곧 사회민주당이 중심이 돼 구성한 정부에게 권력을 넘겨줬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졌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었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필리프 샤이데만, 구스타프 노스케는 제1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하기를 지지한 인물들이다. 이제 새 정부의 총리가 된 에베르트는 취임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군 사령부에 연락해 군대의 질서를 회복하고 군대를 이용해 사회 전체의 질서를 다시 세우자고 했다.(그의 이름을 따 1925년 창립된 기구가 ‘에버트 재단’이다.)

사회민주당 정부의 질서 수복 노력은 매우 비도덕적인 행태를 수반했다. 내무장관이 된 노스케는 전쟁에서 돌격부대로 복무한 퇴역 군인들을 모아 프라이코어(자유군단)를 창설했다. 프라이코어는 원칙 있는 반전 투사이자 독일 노동자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던 혁명가인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했다.

프라이코어는 철저히 반동적이었다. 프라이코어가 깃발 문양으로 사용한 무늬는 나중에 나치가 쓰는 상징이 되고, 프라이코어의 대다수 구성원은 나중에 나치의 핵심 간부가 된다.

그러나 독일 자본주의는 바로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혁명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수년간 지속됐다.

1923년 혁명에 마지막 결정적 순간이 왔다. 독일은 외채 상환 불능 사태에 봉착했다. 이에 대응해 프랑스가 독일의 라인 지역을 점령했다. 그러자 독일의 물가는 천정부지로 폭등했다. 1923년 1월에 1달러에 1만 8000마르크였던 환율이 6월에는 10만 마르크로, 12월에는 4조 마르크로 폭등했다. 이 초인플레이션으로 중간계급은 저축을 날렸다. 중간계급 대중은 분노하고 절망하고 자포자기했다. 이 살인적 인플레와 노사관계 불안의 결과로 10월에 공산당은 매우 유리한 상황에서 봉기의 기회를 맞았지만 그냥 주저앉았다.

국제 혁명 패배의 산물 1: 스탈린주의의 등장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의 옛 지배계급은 권력을 되찾으려 백군을 조직해 내전을 벌였다. 미국·영국·일본 등 14개국의 지배계급이 백군을 지원해 혁명 러시아를 침공했다. 트로츠키는 혁명적 노동자들을 조직해 적군을 창설했고, 결국 승리했다.

그러나 내전은 러시아에 파괴적 영향을 끼쳤다. 내전 탓에 러시아 전역에서 식료품이 부족해져 일부 지역에서는 인육을 먹는 일마저 벌어지고 각종 질병이 창궐했다. 산업은 붕괴하고 노동계급은 죽거나 식량을 찾아 흩어지면서 거의 해체됐다. 최상의 투사들이었던 공산당원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노동자 국가의 토대인 노동계급이 거의 사라진 상황이었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민주주의는 옛 지배계급의 반동과 제국주의의 개입과 고립으로 목이 졸려 죽어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혁명이 패배로 끝나면서 레닌과 트로츠키 등 볼셰비키당이 그토록 바란 혁명의 확산은 결정적으로 실패했다.

그런데 러시아 노동계급 민주주의의 죽음은 소비에트 정부 타도와 옛 지배계급의 복귀라는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옛 지배계급은 내전에서 패배해 쫓겨난 뒤였다. 권력을 장악한 것은 스탈린이 장악한 공산당과 국가의 관료 집단이었다. 그들은 대중의 통제에서 벗어나 운신의 폭을 넓혔다. 혁명의 국제적 확산이라는 전략을 폐기한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가 그 관료들을 대변한 전망이었다.

이 전망 하에서 사회의 우선순위는 서방 강대국들과의 군사 경쟁에서 소련을 방어하는 것이 됐다. 모든 것이 급속한 공업화에, 그것도 군사력과 연결된 중공업 발전에 종속됐다. 전체 투자에서 소비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줄었다.

외교 정책도 다른 나라로 혁명 운동을 확산시키는 것이 아니게 됐다.

그러나 유일하게 노동자 혁명이 성공한 러시아에 여전히 일체감을 느끼던 해외 공산당들은 스탈린의 잘못된 정책을 따르며 개혁주의 전략의 실패를 극복하지 못하고 혁명적 대안이 되지 못했다. 때로는 패배를 자초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쉽사리 집권한 것이 대표 사례이다.

국제 혁명 패배의 산물 2: 히틀러의 집권

혁명적 위기를 넘긴 독일은 1925년에서 1928년 사이 경제가 일시적으로 안정됐다. 1920년대 호황을 맞은 미국의 원조 덕분이었다. 하지만 1929년 10월 미국 증시가 폭락했다. 그 유명한 대공황이었다. 그 즉시 독일도 심각한 경제 공황에 빠졌다. 6개월 안에 실업자 수가 600만 명이 됐다. 1933년에는 실업자 수가 갑절이 됐다. 실업자 대중은 좌절감과 궁핍을 해소시켜 줄 과감한 처방을 요구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히틀러의 나치가 급속히 성장했다.

1930년 3월 사회민주당 주도 ‘대연정’이 붕괴했다. 경제 공황에 대처하기 위한 대책, 특히 실업수당 삭감 문제를 놓고 연정 파트너들과 합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해 9월 총선이 실시되는데,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나치의 득표가 여덟 배로 증가하며 나치가 군소 정당에서 일약 제2당이자 제1야당이 됐다.

이제 의회민주주의는 완전히 마비돼 버렸고, 총리는 의회의 입법이 아니라 주로 대통령 명령을 통해 통치하면서 임금 삭감, 복지 감축, 의회 권리와 언론 자유 제한 따위를 추진했다.

그럼에도 사회민주당은 우파 대통령 힌덴부르크와 중도계 정당 소속 총리 브뤼닝을 지지했다. 히틀러에 견주면 차악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 차악은 최악으로 가는 과도 체제였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탈리아 사회당의 오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합헌성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민주당이 집권하고 있던 바이에른 주정부를 해산한다는 대통령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회민주당은 사실상 쿠데타인 이 조처가 합헌적 조처라며 순순히 따랐다. 또, 자체의 준군사조직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나치가 헌법을 위배할 경우에만 그 힘을 쓰겠다고 했다.

혁명적 정당을 표방한 공산당은 오히려 사회민주당을 주적으로 삼았다. 이것은 러시아에서 반혁명에 성공하고 권력을 굳힌 스탈린의 ‘사회파시즘론’을 따른 결과였다.

스탈린은 독일이나 영국처럼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강력한 곳에서는 파시즘이 “사회파시즘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취한다”고 주장했다.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는 쌍둥이이고 사회민주주의는 파시즘의 온건파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얄궂게도 1929년 사회민주당 소속 경찰청장이 메이데이 시위를 유혈 진압한 것이 그 입증 근거로 쓰였다.

물론 대자본가들은 시기에 따라 사회민주주의에도 의존할 수 있고, 파시즘에도 의존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고 의회정치 체제를 수호한다. 반면에, 파시즘은 중간계급의 지지를 받고 의회정치 체제를 부정한다.

아무튼, 공산당이 사회민주당을 주적으로 삼는 상황에서 두 정당의 협력은 실천적으로 불가능했다.

거리에서는 준군사적 폭력이 횡행했다. 나치의 ‘돌격대’는 1932년 10만 명에서 1933년 40만 명으로 급성장했다. 돌격대의 가두 행진은 중간계급 대중의 눈에 역동적이고 전능한 운동이라는 인상을 줬다.

이제 1932년이 되면, 나치당은 선거에서도 제1당이 된다. 그러나 흔한 신화와 달리 히틀러가 선거로 총리가 된 것은 아니었다. 제1당이었지만 다수당은 아니었다.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대자본가들의 압력에 밀려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히틀러 연구의 권위자인 이언 커쇼는 이렇게 말했다. “전통적인 권력 집단은 민주주의를 혐오한 나머지 그것을 허물고 깨부수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그들은 반혁명을 추진할 역량이 없었다. 히틀러도 엘리트 집단을 등에 업고서야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엘리트 집단도 자기네가 원하는 반혁명을 이루어 내는 데 필요한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히틀러가 필요했다.”

총리가 된 히틀러는 나치 돌격대와 친위대를 기존 경찰과 군대에 신속히 통합시킨 뒤 더는 헌법에 얽매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곧이어 독일 노동운동의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의 물리적 절멸이 뒤따랐다.

다시 군사주의로

대공황이 히틀러 집권의 중요한 배경이 된 것만은 아니었다. 대공황의 여파로 1929~1932년 세계의 생산고가 38퍼센트, 무역이 66퍼센트 감소했다.

세계 지배자들은 앞다퉈 보호무역주의를 시행했고, 국가의 경제 활동 개입 정도를 획기적으로 확대했다. 미국에서든 영국에서든 독일에서든 일본에서든 마찬가지였다. 스탈린 치하 소련의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이 일반적 과정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였을 뿐이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화는 대공황의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강대국들이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면서 그 사이 갈등만 악화했다. 영토가 넓고 인구와 자원이 풍부한 미국, 식민지가 많은 영국과 프랑스에 견줘 식민지 시장이나 원료를 미처 확보하지 못한 독일과 일본 같은 국가들에게는 국제 자원에서 더 많은 몫을 차지하려고 군사적 수단들을 이용할 강력한 유인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구상과 히틀러의 민족공동체 개념은 그저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더 많은 영토, 시장, 자원을 자국에 통합하는 경제 블록을 구축해 위기를 타개하고자 한 각국 지배계급의 염원과 맞닿아 있던 것이었다.

이제 강대국들은 1939~1945년의 총력전을 위한 동원으로 나아갔다.

이 기사를 마지막으로 제1차세계대전 연재를 마칩니다. 3월 중순부터는 제2차세계대전의 역사를 7~8회에 걸쳐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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