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드 몰락 이후:
새 시리아 정권(HTS)은 어떻게 희망을 짓밟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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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아사드 정권이 붕괴하자 시리아인들은 그 전까지 억눌려 있던 변화 염원을 표현할 기회를 얻었다.
아사드 정권은 2011년 시리아 혁명을 잔혹하게 짓밟고 열강이 개입한 내전으로 살아남았지만, 계속되는 저항과 위기로 지지 기반을 상실했다. 그 결과, 하이아트 타흐리르 알샴(HTS)이 군사 작전을 감행했을 때 아사드 정권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아사드 정권의 몰락은 2011년 시리아 혁명의 정당성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HTS가 혁명이 패배하는 과정에서 부상하며 그 패배에 일조한 세력이었다.
아사드 정권 붕괴 직후 시리아인들은 다양한 정치·사회 활동들을 벌였다. 다양한 정당과 연합이 결성되고 붕괴된 사회의 재건을 위한 다양한 회의, 세미나, 시위, 농성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은 잠시뿐이었고, 자유는 급격히 제한됐다.
HTS는 집권 직후 혁명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동시에, 서둘러 혁명의 종결을 선언했다.
HTS 정권은 신자유주의적으로 경제를 재편하고, 해외 기업들과 시리아의 전략적 자원을 거래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제국주의 강대국이나 이스라엘과 대결하는 것은 일절 피했다.
정권을 잡은 HTS는 시리아인들에게 모든 무기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안보와 평화를 위해 모든 무기를 국가의 수중에 두겠다”는 것이었다. 많은 시리아인들은 이를 받아들이고 무기를 넘겨줬다.
그러나 정권은 무기 색출을 구실로 해안 지방에서 알라위파 사람들의 주택을 습격하고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이런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3월 6일 그 지역에서는 HTS 초소들을 겨냥한 제한적인 수준의 무장 저항이 일어났다. 이것은 HTS의 주장과 달리 “구 정권의 잔당”이 아닌 그 지역의 억압받는 인민의 일부가 벌인 것이었다. 사실, “구 정권의 잔당”은 대부분 새 정권으로 흡수됐다.
HTS는 무장 저항 사건을 알라위파 사람들을 대거 학살하는 구실로 삼았다. 3~4월 동안 1,600명이 넘는 알라위파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이는 체계적으로 시리아인들을 겁박하고 소수 종파와 소수 민족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HTS는 드루즈인들에게로 공격을 확대했다. 7월에는 수웨이다 지역에서 드루즈인 수백 명을 살해하고 그들의 주택을 파괴했다. 그 지역의 베두인인들도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수웨이다 지역에서는 대중적 저항이 정권을 패퇴시키기도 했다.
정권이 광적으로 드루즈인들을 공격하자, 이스라엘은 드루즈인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시리아에 개입하고 점령을 확대했다. 그러나 이것의 책임은 드루즈인이 아닌 HTS 정권에 있다.
권력 집중
집권한 HTS는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1월 29일 HTS는 “승리 대회”를 열어 무장 조직 지도자들을 불러모으고 HTS 지도자 알샤라아를 “과도 대통령”으로 지명했다.
얼마 후 HTS는 “범국민 대화”라는 회의를 열었다. 그 회의는 마치 시리아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듯한 외양을 취했다. 그러나 많은 참석자들은 회의에 오라는 통보를 하루도 안 남은 시점에서 받았고, 회의는 졸속으로 진행됐다. 회의 참석자들은 토의 내용이 전혀 반영되지 않고 사전에 준비된 듯한 결정문을 채택해야 했다.
3월 초 알라위파 학살이 절정에 이를 무렵 HTS 정부는 과도 헌법을 발표했다. 대통령 알샤라아에게 입법·행정·사법에 관한 권한을 모두 집중시키는 내용이었다. 예컨대 국회의원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직접 지명하고 나머지는 대통령이 구성한 위원회가 선출한다. 그리고 HTS 정부는 이러한 ‘과도기’가 5년이나 지속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3월 27일 HTS는 ‘대민 사무총국’을 설치했다. 이것은 명목상 외무부 산하의 기구이지만 사실상 정치·경제·군사의 최종 결정권을 행사한다. 이후 이 기구는 구 정권이 통제하던 학생회나 노동조합 등을 대체하는, 자신들이 통제하는 조직들을 설립했다.
이런 조처들에도 불구하고 시리아에서는 학살과 탄압, 공공부문 임금 체불과 해고 등에 맞선 시위가 계속 벌어졌다. 그러나 그 규모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HTS는 자주적인 사회·정치 조직화를 일절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수련의, 엔지니어, 변호사 등 몇몇 전문 직종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정권은 재빨리 충성파들을 그 지도자들로 지명해 그런 움직임을 길들였다.
자유주의 정치 단체들과 개혁주의 정치 단체들은 새 정권에 대한 두려움, 또는 새 정권의 호의를 얻겠다는 생각으로 대부분 후퇴했다. “시리아 시민 연합”이라는 연합체는 친정권도 반정권도 아님을 표방하며 “당국과의 대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는 HTS의 권력 독점을 정당화하는 것을 돕는 구실을 했다.
과제
혁명의 패배와 오랜 내전으로 시리아인들은 지치고 분열됐다. 사회 조직이 갈가리 찢어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시리아인 300만 명 이상이 열악한 난민촌에 살고 있고 다수의 시리아인이 가난에 짓눌려 있다. 정치 조직과 노동조합이 여전히 성숙하지 않은 가운데 HTS 정권은 종파들과 소수민족을 겨냥한 폭력으로 대중을 이간질하고 있다.
HTS는 제국주의 국가들과 지역 강국들—특히 튀르키예와 걸프 연안국들—에 협조하는 것이 생존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HTS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종파간 분열 부추기기는 많은 시리아인들의 환멸과 분노를 사고 있다.
정권의 통제력은 불균등하다. 일부 지역은 정권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특히, 쿠르드족이 많은 시리아 북동부 지역이 그렇다. 시리아 남부의 수웨이다에서도 HTS 정권은 드루즈인을 공격하다 대중 저항에 밀려 통제력을 잃었다.
정권이 통제하는 지역에도 좌파, 시민사회 단체들의 광범한 네트워크가 있고 갈수록 혹독해지는 조건하에서도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종파적 폭력을 중단시켜 단결을 이뤄 내고, 민주주의적·시민적 권리를 쟁취하고, 이스라엘과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투쟁이 벌어져야 한다. 시리아의 혁명가들은 여러 전선의 투쟁들을 위해 공동전선들을 구축하고, 그 투쟁들을 정권에 맞선 투쟁으로 연결시키려고 분투하고 있다.
2011년 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변화의 진정한 동력은 도시와 농촌의 노동계급·빈민 대중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