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주 낙태’ 사건 항소심 — 여성에게 살인죄 적용한 원심은 파기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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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36주 낙태’ 사건의 항소심이 시작됐다. 살인죄로 기소된 여성 권 씨(26세)는 1심에서 징역3년에 집행유예 5년, 병원장과 집도의는 각각 징역 6년과 징역 4년 등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모두 항소했다.
지난 5월 12일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서 권 씨 측은 무죄를 주장했다. 의료진 측도 “산모의 자기결정권”에 의한 사건임을 고려하면 형량이 과하다며 항소 이유를 밝혔다.
6월 23일 열리는 2차 공판에서는 임신중지권 운동을 하는 산부인과 전문의가 후기 임신중지의 의료 현실 등에 대해 증언할 예정이다.
1심 재판부는 태아가 태내에서 사산하지 않고, 몸 밖으로 배출된 후 사망에 이르게 한 행위를 특정해 살인죄를 적용했다.
다만, 1심 판결은 낙태를 모두 범죄로 판단한 것은 아님을 분명히 했다. “낙태 허용 여부에 대한 각자의 생각과 결론은 그 자체가 신념으로서 존중받아야 하므로, 이 판결이 이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 둔다.” 또, 임신중지권 공백 상태와 권 씨의 열악한 처지를 참작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살인과 같은 형사 범죄가 아니라 여성의 임신중지 권리의 문제이므로 1심 판결은 부당하다. 병원에 가서 임신중지 수술을 받은 여성 당사자에게 살인죄를 적용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고, 이는 앞으로 여성의 임신중지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1심 재판부는 권 씨가 “어떤 방법으로든 피해자[출생아]를 사망케 할 수 있다는 것을 예견할 수 있었다”고 보아 ‘미필적 고의’를 인정했다. 권 씨가 병원에서 태아 사산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이 핵심 근거로 제시됐다.
판결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권 씨는 의사에게 직접 태아 사산 방법을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살인죄가 인정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권 씨는 “의사가 적법한 방법을 통해 낙태를 시행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진술했다.
권 씨는 국가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었고, 해당 병원의 의료진에게 의지한 채 “지옥 같은 시간”(권 씨의 표현)을 견디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거의 없었다.
권 씨는 내과 병원에 갔다가 뒤늦게야 임신 후기임을 알게 됐다. 25살의 여성이 하루아침에 임신 36주 산모가 됐으니 눈 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권 씨는 즉시 임신중지를 결정했다. 당시 권 씨는 실직 상태였고 가족과 연락도 단절된 채 홀로 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출산과 양육은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여러 병원에서 임신 후기를 이유로 수술을 거절당했다. 당시 교제하던 남성이 수술 가능한 병원을 겨우 찾아 냈고, 권 씨는 해당 병원에서 짧게 상담을 하고 당일에 바로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다. 소득이 없던 권 씨는 수술비 900만 원을 교제하던 남성의 지원을 받아 겨우 마련했다.
임신 사실을 확인한 뒤 수술에 이르기까지는 불과 나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권 씨의 상황은 촉박했고 절박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을 임신중지 권리의 문제로 본다면 태아 사산 여부로 유무죄를 가릴 수 없다.
애초 출산이 아니라 임신 중지를 선택한 이상, 태아를 자궁 안에서 심장이 멎게 한 뒤 ‘배출’되도록 할 것인지, 자궁에서 빠져나온 뒤 심장이 멎도록 할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산모의 안전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누구도 그 과정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신중지 방법에 있어서 산모의 선택보다 의료진의 판단이 우선될 개연성도 크다.
1심 재판부의 판단은, 임신중지권이 공백인 현실을 외면한 채 임신중지의 시기, 방법, 과정을 여성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는 그에 따른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임신중지 권리에 미칠 나쁜 효과
법원의 살인죄 유죄 판결은 여성의 임신중지권에 나쁜 효과를 미칠 것이다.
당장 후기 임신중지를 시행했던 병원들이 더욱 위축될 것이다. 현재 임신중지 권리에 대한 법제도적 공백 탓에 적합한 의료 가이드도 없고 의료 보험도 안 된다. 이번 판결은 후기 임신중지 수술에 대한 의료진과 병원의 부담을 키울 것이고, 병원이 거절하면 여성들은 속수무책이다.
게다가 고주수·고위험 산모를 진료할 수 있는 의료시설과 숙련된 의료진이 갖춰진 전문 병원은 매우 적은 실정이다.
또한, “낙태는 살인”이라는 우파의 낙인이 강화될 수 있고, 그러면 여성의 정신적 부담과 고통이 가중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후기 임신중지 권리에 대한 문제만도 아니다. 우파는 후기 임신중지에 대한 규탄을 고리로 여성의 임신중지권 전반을 공격하고자 한다.
이렇듯 ‘36주 낙태’ 사건의 유죄 판결이 지닌 부당함과 여성의 삶과 건강에 미칠 해악적 효과를 고려해 볼 때, 원심은 파기돼야 한다.
이 비극적 사건의 책임은 여성이 아니라 7년간 임신중지권을 방치한 국회와 정부에 있다. 의료진 또한 제도적 공백 속에서 여성의 요청에 따라 수술을 시행했다는 점이 고려돼야 한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2024년에 극우화한 윤석열 정부가 직접 수사를 의뢰하며 시작됐다. 해당 사건을 본보기 삼아 후기 임신중지를 공격하려 한 것인데, 그 시도가 유죄 판결로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는 임신중지를 비난해 온 극우를 고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 정부의 침묵은 무책임하다.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은 불처벌 탄원서라도 제출해 여성을 범죄자가 아닌 권리의 주체로 방어해야 하지 않겠는가.
후기 임신중지는 신체적·정신적·경제적 부담이 크다. 그럼에도 여성이 임신중지를 선택했다면 그만큼 절박하고 불가피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규제와 처벌은 여성들을 위태롭게 만들 뿐이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후기 임신중지에도 일관되게 보장돼야 한다.
모성을 이유로 임신중지 공격 말라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들을 냉혹하고 나쁜 어머니로 묘사하는 것은 임신중지 반대론의 전형적인 수사다.
‘36주 낙태’ 사건에서 1심 재판부는 권 씨를 자신의 자녀에 관심이 별로 없는 비정한 어머니로 여긴 듯하다. 권 씨가 아이를 출산해 입양 보내는 등의 노력을 하지 않았고, 수술을 받기 위해 비용을 협상했으며, 자신의 몸에 수술 흔적이 남을지를 걱정했을 뿐이라고 질타했다.
지난 5월에는 화장실에서 아이를 출산한 뒤 변기에 방치해 숨지게 한 17세 고등학생에게 법원은 “어머니로서 양육과 보호의 의무가 있는데도 최소한의 조처를 하지 않았다”며 살인죄로 실형을 선고한 일도 있었다. 그 학생은 가족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지 못했고,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상태였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모성은 여성의 타고난 본능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여성차별적 관념이다. (엘리자베트 바댕테르의 《만들어진 모성》과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 잘 나온다.)
만약 모성이 여성의 자연적 본성이라면, 시대가 변할수록 왜 더 많은 여성들이 출산을 미루거나 거부하는 선택을 하겠는가.
모성이 강조되는 것은 여성에게 양육과 돌봄의 책임을 떠넘기고 성차를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어 여성 차별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한다.
여성에게 희생과 돌봄을 강요하는 모성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여성들을 옥죄고 임신중지권을 제한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