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주 낙태’ 여성 살인 혐의 기소:
임신중지권 방치한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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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3일 ‘36주 낙태 사건’의 당사자 여성이 병원장과 집도의와 함께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 지난해 6월, 36주차 태아를 제왕 절개 수술로 출산한 뒤 사각포로 덮고 냉동고에 넣어 살해한 혐의로 이들을 재판에 넘긴다고 한다.
경찰의 혐의가 사실이라면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 의료 행위의 목적은 여성의 요청에 따른 임신중지(낙태)이지, 신생아 살해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또한, 왜 이 여성이 임신 36주차에 들어서야 수술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 과정에서 제대로 된 지원이 있었는지를 우선 살펴야 한다.
의료 접근성이 낮고 사회·경제적 여건이 취약할수록 초기에 임신중지를 하지 못하고 시기만 지연되는 상황을 많이 겪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기 임신중지는 위험 요소가 많아 여성 본인에게 큰 부담이 되는 일이다. 그래서 후기 임신중지는 1~2퍼센트로 매우 적다. 그럼에도 여성이 여러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임신중지를 결정했다면,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지연된 임신중지
해당 사건의 여성(24세)은 임신 6개월쯤(24주차)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자신의 유튜브 동영상에서 당시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냥 모든 게 비참하고 막막했다.”
이렇게 늦게 임신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드물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이 여성은 자신이 다낭성난소증후군과 호르몬불균형을 진단받아 임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했다.
여러 해외 연구를 보면, 스트레스와 트라우마 등으로 임신을 부정하는 심리 상태(소위 ‘임신 거부증’)에 있는 여성은 임신 20주차 이후에도 임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임신 여성 1,000명당 약 2~3명). 이런 상태에서는 임신에 따른 신체 변화도 미미할 수 있다. (해당 사건의 여성이 임신 거부증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여성은 임신 사실을 인지한 후, 바로 임신중지 수술을 시도한 듯하다. 하지만 찾아갔던 병원 2곳에서 모두 거절당했다고 한다. 만약 그때라도 당사자에게 필요한 정보와 상담, 의료기관 지원이 바로 제공됐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임신 36주차에서야 여성은 임신중지 수술을 해 줄 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 수술에 대해 여성은 이렇게 요약했다. “총 수술비용 900만 원, 지옥 같던 120시간.”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해당 병원은 브로커 알선을 통해 여성들에게 비싼 비용을 받고 위험 부담이 큰 임신중지 수술을 하며 수익을 내 왔던 듯하다. 경찰은 그 병원이 2년간 527명의 임신중지 수술을 했다고 밝혔다. 해당 병원은 법적·제도적으로 임신중지권이 공백인 틈을 이용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당 병원을 일방으로 비난하기도 어렵다. 궁지에 내몰린 여성들에게 그 병원은 한줄기 빛이었을 것이다.
보건의료적 견지에 봐야
그럼에도 수사기관들은 여성의 처지와 상태, 불가피성 등을 고려하지 않고서, 오로지 ‘자궁 내 태아 사산이냐 출산 후 사망이냐’ 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 사건을 (신생아) 살인으로 처벌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설사 태아가 출산 후 방치 등으로 사망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은 살인과 같은 형사 처벌이 아니라 보건의료적 견지에서 다뤄져야 한다.
물론 산모가 겪을 트라우마나 여러 논란을 고려하면, 자궁 내 태아 사산이 나은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자궁 내 태아 사산은 상당한 기술을 요한다. 주로 태아의 심장, 제대(탯줄) 정맥 또는 양수 안에 약물을 주입하는 방식인데, 실패할 시 응급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 그래서 숙련된 의료진과 정밀 의료 장비가 있는 상급병원에서 주로 실시한다.
이 사건의 해당 병원은 후기 임신중지나 고위험군 산모에게 필요한 의료 장비나 고숙련 의료진이 갖춰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임신 36주에 들어서 수술을 하게 돼 사산의 방식을 선택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던 해당 여성은 병원의 수술 방법과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국가의 책임 방기
무엇보다 이 모든 문제의 책임은 임신중지 권리를 보장하라는 요구를 묵살하고 책임을 방기한 국가에 있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지금까지도 임신중지권은 보장되지 않고 있다. 그런 탓에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서 병원마다 부르는 게 값이고, 의료 과실 등 부당한 일을 겪어도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사회적 냉대도 여전하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좌우 눈치를 보며 여성들의 임신중지권 보장 염원을 묵살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지난 6년 동안 민주당은 국회에서 다수였지만 임신중지권 보장 법안 제정에는 열의가 전혀 없었다. 몇몇 민주당 소속 개혁파 의원들이 법안들을 발의했지만 무관심 속에서 해당 상임위의 논의도 몇 번 되지 못한 채 폐기됐다. (최근 남인순 의원과 이수진 의원이 각각 임신중지권 보장 법안을 다시 발의했으나, 법안 발의 정족수를 겨우 채웠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반낙태 세력에 직접·간접으로 힘을 실어 줬다. 이 사건도 지난해 윤석열 정부가 ‘36주 낙태 유튜브 영상’에 직접 수사를 의뢰하며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해당 사건을 “무분별한 살해,” “반인륜적 범죄”(수사 기관)라며 도덕적 공포를 부추기고 절박한 처지에 내몰린 여성을 낙인찍는 것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
이 여성은 국가의 책임 방기와 임신중지권 공백으로 인한 피해자이지, 범죄자가 아니다. 여성의 요청으로 임신중지 수술을 한 의료진을 살인죄로 처벌하는 것도 부당하다.
자기결정권
이런 식으로 탄압과 처벌이 강화되면, 많은 여성들이 더욱 음성적이고 안전하지 못한 임신중지로 내몰릴 것이다.
이미 반낙태 보수 우익은 이번 사건을 이용해 “생명 경시 풍조” 운운하며 임신중지 전체에 대한 규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태아는 여성에게 의존하며, 독립적 존재가 아니다. 또한 임신과 출산은 온전히 여성이 감내해야 할 일이므로, 임신중지 여부는 오직 해당 여성만이 결정할 자격이 있다.
여성이 원할 때 언제든지, 모든 임신중지를 신속하고 안전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하루빨리 미프진(임신중절약)을 합법화하고, 모든 임신중지에 건강보험을 적용해 합법적이고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