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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미디어의 프랑스 10월 폭동과 약탈 비난에 속지 말라

이 기사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과거 기사들(온라인)을 많이 원용하며 작성했다.

10월 17일 토요일 저녁,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의 샤넬 매장 유리창이 깨지는 장면은 몇 시간 만에 전 세계로 퍼졌다. 그 뒤로 2주 넘게 프랑스 정치인들과 매스미디어는 거의 한 가지 이야기만 했다. 약탈, 방화, “극좌 분파와 비행 청소년”(마크롱), “폭력에 인질로 잡힌 운동”(교육부 장관 제프레), 통금, 야간 체포, 즉결 재판. 프랑스 정부는 7만 명의 경찰과 헌병, 장갑차, 물대포, 헬리콥터를 동원했고 루브르와 오르세를 닫았다. 법무부 장관 다르마냉은 10월 22일, 17일 이후에만 2,700명이 구금되고 1,000명 넘게 법정에 섰으며 217명이 즉결 재판으로 수감됐다고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필자는 이 글에서 그 약탈자들과 폭동 참가자들을 변호하려 한다. 나아가 이번 프랑스 폭동뿐 아니라 폭동과 약탈이라는 저항 형태 일반을 변호하려 한다.

먼저, 카메라가 비추지 않은 것부터 말해야 한다. 이번 운동은 9월 중순 크레테유의 생텍쥐페리 고등학교에서 시작됐다. 학생들이 교문을 봉쇄한 이유는 한 반에 32명에서 36명이 들어차는 교실, 교사 부족, 무너져 가는 건물 때문이었다. 생드니의 한 학생은 물이 나오지 않는 화장실, 쥐와 바퀴벌레, 겨울에는 영하 5도까지 떨어지고 여름에는 40도까지 오르는 임시 설치 교실을 증언했다. 정부는 바로 그 시기에 430억 유로의 지출 삭감을 담은 긴축 예산안을 내놓았고, 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경윳값은 리터당 2.37유로(약 3,600원. 서울은 평균 1,883원)까지 치솟았으며, 물가 상승률은 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리고 경찰이 있었다. 9월 30일 투르에서는 한 고등학생이 고무탄에 맞아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10월 5일 랑스에서는 15살 학생의 손이 경찰 수류탄에 날아갔다. 법무부 집계로 10월 5일까지 구금된 5,060명 가운데 87퍼센트가 미성년자였다. 10월 17일 55만 명(내무부 집계, 주최 측 추산 80만 명)이 거리로 나오기 전에, 이미 프랑스 국가는 아이들의 눈과 손을 빼앗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샤넬 매장의 깨진 유리창 뒤로 사라졌다. 2011년 영국 런던 토트넘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폭동의 발단은 흑인 청년 마크 더건이 경찰 총격에 숨진 사건이었다. 그가 먼저 총을 쏘지 않았다고 경찰 감독 기구가 확인했지만, 이 사실은 뉴스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카메라는 깨진 유리창과 불타는 상점에만 고정됐고, 경찰과의 대치는 뒤로 밀려났으며, 약탈이 폭동의 유일한 측면인 양 보도됐다. 이것은 우연한 편집이 아니다. 약탈을 분리해 비난하는 것은 발단을 지우는 효과를 낸다. 교실의 쥐, 날아간 손, 430억 유로의 삭감은 사라지고, ‘비행 청소년의 탐욕’만 남는다. 약탈 비난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적 조작이다. 투쟁을 변호하는 일은 그래서 도외시된 발단을 복원하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빵이라면 모르지만 샤넬은 안 된다?

약탈을 비난하는 논리 가운데 가장 흔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이것이다. 굶주린 사람이 빵을 훔친다면 이해하겠다. 그러나 샤넬 가방과 보석과 운동화를 터는 것은 저항이 아니라 소비주의에 눈먼 범죄다. 이 논리는 우파만의 것이 아니다. 2011년 영국에서 노동당 계열 언론인(빈첸초 람풀라)은 “그들은 티파니가 아니라 파운드랜드[저가 잡화점]를 턴다, 필요가 아니라 잃을 게 없어서 턴다”고 썼고, 〈가디언〉의 한 칼럼니스트(조 윌리엄스)는 “생필품이라면 고귀한 대의로 재구성할 수 있겠지만 운동화와 노트북은 그럴 수 없다”고 개탄했다. 이번에 장뤼크 멜랑숑이 약탈을 두고 “정치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선을 그은 것도 결국 같은 논리의 좌파 버전이다.

그러나 약탈 가담자 다수에게 약탈은 체제가 자신들에게 거부한 것을 집단적으로, 힘으로 취하는 행위다. 다만 오늘날이 과거와 다른 점은, 체제가 쏟아지는 광고로 상품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수적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만든 다음 정작 그 상품을 가질 기회는 빼앗아 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하에서 욕망 자체가 집약적으로 상품화됐음을 보여 준다. 생필품과 사치품의 구분은 그 욕망이 체제에 의해 체계적으로 주입된 것임을 간과한다.

조금 더 밀고 나가 보자. 자본주의 체제는 필요와 욕망의 구분을 스스로 허물어 왔다. 휴대전화 없이는 구직 신청도, 학교 공지 확인도, 정부 보조금 신청도 할 수 없다. 운동화는 10대에게 사회적 생존의 조건이다. 그런데 바로 그 체제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영원히 가질 수 없다고 말하면서 매일 그것을 눈앞에 흔든다. 이 모순을 만들어 낸 쪽은 약탈자가 아니다. 약탈자는 그 모순을 하룻밤 가장 노골적인 형태로 드러냈을 뿐이다. 필요한 것만 훔쳐야 저항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말은,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답게 빵만 바라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변호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모욕이다.

소유와 공간의 정치: 폭동의 지리학

약탈 비난의 또 다른 단골 논리는 “그들은 자기 동네를 태운다”는 것이다. 2005년 방리외(주로 가난한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프랑스 대도시 외곽의 빈민촌) 폭동 때 이 말은 사실에 가까웠다. 파리 동부 외곽의 클리시수부아에서 시작된 폭동은 3주 동안 교외의 공영 주택 단지들에서 자동차 수천 대와 학교, 체육관을 태웠다. 그러나 2005년 폭동에서 약탈은 적었다. 그 이유는 프랑스 청년이 영국 청년보다 고결해서가 아니라, 폭동이 일어난 곳에 상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리외는 도심과 단절된 고립된 섬이고, 거기에는 털 만한 것이 없었다. 반대로 2011년 런던 토트넘 폭동에서 약탈이 광범했던 이유는 폭동 참가자들 바로 옆에 대형 복합 상업 단지와 쇼핑센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약탈의 표적은 도덕이 아니라 지리와 계급이 정한다.

이 관점으로 보면 2026년 10월이 2005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드러난다. 이번 폭동은 방리외가 아니라 도심에서 벌어졌다. 레퓌블리크 광장, 리옹 시내, 마르세유 시청, 리모주 시청. 한 달 가까운 고등학교 봉쇄와 노동조합의 대규모 행진에 맞춰 교외의 청년들은 파리와 리옹과 마르세유의 심장부로 몰려왔다. 그리고 거기서 불탄 것은 그들의 동네 버스 정류장이 아니라 19세기에 지은 리모주 시청이었고, 털린 것은 동네 슈퍼가 아니라 샤넬 매장과 보석상이었으며, 마르세유에서는 청년들이 시청 로비까지 들어갔다.

이 표적 선택은 놀랍도록 정확하다. 시청은 국가의 상징이고, 샤넬은 그들이 결코 가질 수 없다고 배운 부의 상징이다. 2011년 런던 폭동의 표적은 운동화 매장, 휴대전화 매장, 대형 TV 매장, 그리고 마권업소와 전당포였다. 언론은 처음에 여기에 집중하다가 곧 감정적 호소력이 더 큰 소상공인 피해로 초점을 옮겼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형 체인점이 소상공인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었다. 이번에도 같은 패턴이 반복됐다. 샤넬이 털린 날 밤 영국 신문은 “방리외식 약탈자들”에 대해 대서특필했고, 며칠 뒤에는 문 닫은 작은 빵집 사진이 신문 1면을 채웠다.

소상공인 피해를 냉소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2011년 런던 폭동 때 두 젊은 여성의 말을 들어 보자. “부자들, 사업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걸 부자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약탈 가담자 다수에게는 소상공인조차 실제 재산과 무관하게 자신보다 훨씬 부유하고 특권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의 무지가 아니라, 한 반에 36명이 들어찬 교실에서 자라 평생 가게 주인보다 위로 올라가 본 적 없는 사람의 정확한 계급적 감각이다. 폭동에는 지도부가 없으므로 표적을 세밀하게 고를 수 없다. 그러나 큰 그림을 보면 10월 17일 프랑스에서 표적은 부와 국가였고, 그것은 잘못 겨냥된 것이 아니었다.

권리의식에 대한 모독

약탈이 왜 하필 지금, 하필 청년 빈곤층에게서 터져 나왔는지를 이해하려면 역사가 E. P. 톰슨이 남긴 통찰이 필요하다. 1 톰슨은 1971년 발표한 기념비적 논문 「18세기 영국 군중의 도덕경제」에서, 당시 빈민들이 일으킨 식량 폭동이 단순한 배고픔의 표출이 아니라 확고한 전통적 권리 의식과 가치관에 기반한 의도적이고 규율 잡힌 행동이었음을 밝혀냈다.

그가 발견한 18세기 영국 군중의 ‘도덕경제’의 핵심 특징은 다음과 같다.

  • ‘발작적 폭동’ 관점의 기각: 이전의 역사가들은 식량 폭동을 단순히 배가 고파서 이성을 잃고 일어난 본능적이고 무질서한 반란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톰슨은 이들이 뚜렷한 목표와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고 움직였다고 분석했다.
  • ‘공정 가격’에 대한 사회적 합의: 당시 군중은 식량(특히 빵과 밀)을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공공재로 봤다. 따라서 흉년이나 위기 상황에서 상인들이 매점매석이나 가격 인상을 통해 폭리를 취하는 것을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 자유 시장 논리에 대한 저항: 애덤 스미스류의 자유 시장경제(공급과 수요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시스템)가 도입되면서, 전통적인 촌락의 온정주의적 보호망이 무너졌다. 도덕경제는 이러한 비인간적인 시장 논리에 맞서 공동체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저항이었다.
  • 규율 잡힌 직접 행동(대중적 가격 통제): 군중은 빵집이나 마차를 습격해 밀을 빼앗은 뒤, 자신들이 생각하는 ‘공정 가격’(전통적인 가격)으로 사람들에게 판매했다. 그리고 그 판매 대금(심지어 밀을 담았던 포대 자루까지)을 상인에게 정확히 돌려주는 ‘대중적 가격 통제’의 모습을 보였다.

요컨대 톰슨이 보기에 18세기 군중을 직접행동에 나서게 한 것은 절대적 궁핍만이 아니라 이 도덕적 전제에 대한 모독이었다.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

첫째, 폭동은 청년 빈곤층이 자신에게 주어지리라 여겼던 것, 곧 일자리, 교육, 미래의 전망이 줄어든 데 대한 항의를 표현할 수 있다.

둘째, 이 ‘권리의식에 대한 모독’이 절대적 빈곤보다 더 결정적이다. 아무것도 가져 본 적 없는 사람은 절망 속에 체념할 수 있다. 폭동과 약탈은 흔히 무언가를 약속받았다가 빼앗긴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프랑스 공화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많은 것을 약속하는 국가다. 자유, 평등, 우애. 공교육을 통한 ‘기회의 평등’.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올라갈 수 있다는 공화주의적 능력주의. 이번에 거리로 나온 고등학생들은 바로 그 약속을 믿도록 교육받은 세대다. 그런데 그들이 받은 것은 36명이 들어찬 교실, 물이 나오지 않는 화장실, 그리고 불투명하고 불평등한 대학 입학 지원 시스템 ‘파르쿠르쉬프’였다. 정부는 교육 예산 285억 유로 가운데 32퍼센트가 퇴직자 연금으로 나간다고 설명하면서도, 정부 전체 예산에서 430억 유로를 깎는 긴축안을 추진했다. 약속과 현실의 간극, 이것이 역사가 톰슨이 말한 모독이다.

이 틀로 보면 ‘샤넬’도 다르게 이해된다. 2026년 프랑스 10대에게 브랜드 운동화는 (18세기 영국 군중에게 ‘공정 가격’이 그랬던 것처럼) 당연히 자기 몫이어야 한다고 배운 것의 일부다. 약탈이 그것을 집단적으로 취하는 행위라면, 그것은 톰슨이 분석한 군중의 가격 통제 행동과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 다만 18세기 군중에게는 관습이 있었고 2026년 청년에게는 광고가 있었을 뿐이다. 어느 쪽이든 체제가 스스로 심어 준 기대를 체제가 스스로 배반했을 때 터져 나오는 반응이다.

폭동이 일어나는 두 조건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크리스 하먼은 1981년 영국 폭동 직후 폭동이 재등장하는 두 조건을 제시했다. 폭동은 산업 자본주의 이전부터 있던 저항 형태로, 파업과 노동조합이 발전하면 역할이 줄어든다. 그러나 두 경우에 재등장한다. 파업만으로는 부족해 보일 때, 그리고 노동자들이 노사관계에 기반한 조직에 대한 신뢰를 잃을 때다. 2011년 영국은 두 조건 모두에 해당했다. 폭동 피고인 대다수가 25세 미만이고 4분의 1 이상이 18세 미만이며 다수가 비취업 상태였다. 노동조합이 없는 사람들에게 파업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2026년 프랑스도 두 조건 모두에 해당한다. 2023년 봄 프랑스 노동계급은 연금 개악에 맞서 14차례의 전국 파업과 수백만 명의 행진으로 싸웠고, 여론의 3분의 2가 그 편이었다. 마크롱은 의회 표결도 없이 헌법 49조 3항으로 개악을 밀어붙였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거기서 멈췄다. 그때 중학생이던 아이들이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이다. 그들은 ‘점잖은’ 파업과 행진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직접 봤다. 올해 9월 17일 교사 파업이 있었고 그다음 날 크레테유 학생들이 교문을 봉쇄했다. 파업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크리스 하먼이 말한 첫째 조건이다.

둘째 조건, 곧 정치적 출구의 부재는 더 심각하다. 2011년 영국의 배경으로는 노동당 청년단체의 지부가 광원 파업 시기(1984년 3월부터 1985년 3월까지) 581개에서 1993년 18개로 쪼그라든 끝에 해체된 과정, 흑인 자체조직화가 노동당 흑인 분과로 흡수돼 “높은 자리에 흑인 얼굴을” 올리는 정치로 변한 과정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모든 인종의 청년에게 체제를 향한 분노를 쏟을 의식적이고 정치적인 출구가 거의 없었다. 프랑스에서 이 과정은 더 일찍, 더 철저히 진행됐다. 1983년 방리외 청년들의 ‘평등을 위한 행진’은 이듬해 사회당의 후원 아래 ‘SOS 라시슴[인종차별]’으로 흡수됐고, 그 뒤 40년 동안 방리외의 분노는 2005년, 2023년, 그리고 올해처럼 주기적으로 폭발했다가 그때마다 “정치적으로 무의미하다”는 말을 들었다.

1985년 브로드워터팜 폭동 뒤 경찰이 “호되게 얻어맞았다”고 말한 노동당 정치인 버니 그랜트와, 2011년 더 많은 경찰을 요구한 그 후임 데이비드 래미를 대비해 보자. 2026년 프랑스에서 이 대비는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 내부에서 재현됐다. 생드니의 LFI 소속 시장 발리 바가요코는 폭력이 “정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가 파리 경찰청장에게 검찰 고발을 당했고, 학생들을 감싸다 최루탄을 맞았으며, 일드프랑스 지역의회 의장 페크레스에게서 10만 유로(약 1억 5,200만 원)의 청구서를 받았다. 같은 당의 대선 후보 멜랑숑은 “약탈·강탈 행위”와 거리를 뒀다. 어느 쪽이 폭동 참가자들에게 정치적 출구를 열어 주는가는 분명하다. 바가요코가 고발당한 것은 그가 정치적 출구를 열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상수였던 약탈

약탈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마치 약탈이 이번 폭동을 다른 모든 정당한 봉기와 구별되는 새로운 타락인 것처럼 말한다. 필자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부분은 바로 이 착각이다. 약탈은 모든 도시 폭동의 상수였고, 그럼에도 그 봉기들은 역사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았으며 실질적 성과를 냈다.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 흑인 게토를 휩쓴 폭동들을 보자. 할렘에서 100곳, 와츠에서 600곳, 뉴어크에서 1,000곳, 디트로이트에서 2,500곳, 모두 합쳐 1만 개 넘는 상점이 털렸다. 거의 전부 소규모 사업체였다. 체인점은 애초에 게토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적은 술, 담배, 약, 의류처럼 바로 소비할 수 있는 물건이었고, 팔아야 하는 물건은 피했다. 즉, 1960년대 미국 폭동은 ‘생필품 약탈’이 아니었고 소상공인을 털었다. 그런데도 오늘날 누가 와츠와 디트로이트를 ‘탐욕스러운 범죄’라고 부르는가. 그 폭동들은 흑인 대중을 정치 무대에 강제로 진입시켰고, 도시 빈곤과 인종차별을 1960년대의 핵심 쟁점으로 만들었다. 폭동은 미국 권력층의 정치 위기를 심화시켰고, 이들은 게토에 자원과 일자리를 투입해야 함을 인정해야 했다.

1981년 영국 브릭스턴과 톡스테스 폭동에서는 광범한 약탈이 벌어졌다. 〈가디언〉은 “경찰이 없으면 누구든 알아서 가져간다”고 개탄했다. 그러나 폭동의 결과 대처 정부는 긴축 일부를 즉각 철회했고, 도심에 여가센터를 열었으며, 평생교육을 대폭 확대했다. 정부 의뢰로 스카먼 판사가 작성한 보고서는 구조적 인종차별을 인정하는 데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경찰 역할의 역효과를 인정하고 반인종차별 훈련을 도입했다. 게다가 흑인과 백인 청년이 같은 편에서 싸운 경험은 1970년대 반나치 운동이 만든 반인종차별 정서를 정착시켰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1886년 2월 런던에서 실업자 시위는 팰맬 거리의 신사 클럽들을 지나며 폭동으로 변했다. 클럽 유리창이 모조리 깨졌고, 피커딜리에서는 약탈이 시작됐으며, 하이드 파크에서는 군중이 마차를 뒤집어 부유한 탑승객의 돈과 보석을 빼앗았다. 1931년 10월 글래스고에서는 5만 명의 실업자가 경찰의 시위 금지를 무시하고 도심 전역에서 싸웠고 상점 유리창이 깨졌다. 수십 년이 지난 뒤 이 폭동들은 고통에 맞선 이해할 만한 분출로 여겨지게 됐다. 그러나 권력층을 의식한 당시 직업별 노동조합 기구들은 묵묵히 고통을 견디는 “존경할 만한 노동계급”과 무관한 “범죄자”의 소행이라고 비난했다. 오늘 프랑스의 노동조합 ‘노동자의 힘’(FO)이 내놓은 규탄 성명은 이 전통의 충실한 계승이다.

영국 바깥을 보면 더 분명하다. 1989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소는 IMF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봉기였고, 사람들이 가전제품과 소비재를 들고 나오는 영상이 남아 있다. 그 봉기는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이 바꿨고, 이후 10년 넘게 이어진 민중 저항의 출발점이 됐다.

2001년 아르헨티나 봉기는 아예 ‘엘 사케오’, 곧 ‘약탈’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옛 제조업 지대의 가난한 주민들이 외국계 대형 매장에서 옷과 전자제품과 고기를 카트 가득 밀고 나왔다.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민중은 정부를 전복했다.

우리에게는 더 익숙한 예가 있다.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들은 서울신문사에 불을 질렀고 반공청년단 본부를 부쉈으며 이기붕의 집을 털었다. 당시 정권은 그들을 “폭도”라 불렀다.

1980년 5월 계엄 당국은 당시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했다. 오늘날 우리는 4·19를 혁명으로,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기린다. 그렇다면 프랑스 청소년들이 벌이는 저항도 그들을 거리로 내몬 사회적 조건과 국가의 대응 속에서 판단해야 한다. 폭동과 약탈이 있었다는 이유로 그 저항을 옹호한 사람들에게 “도덕성이 없다”고 비난한다면(박노자), 그는 자신이 개별 행위를 비판하는 것인지, 저항 전체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인지 밝혀야 한다. 과거의 항쟁을 평가할 때 고려하는 억압과 저항의 맥락을 오늘의 저항에도 적용해야 한다.

폭동은 성과를 낸다: 10월 26일의 양보

이 역사적 귀납은 이번 프랑스에서 이미 한 차례 확인됐다. 9월 중순부터 10월 16일까지 한 달 동안 고등학생들은 질서정연하게 교문을 봉쇄하고, 다섯 차례 전국 행동의 날에 행진했으며, 교육부에 교실 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그동안 정부가 한 일은 6,800명 넘게 체포하고 눈 하나와 손 하나를 빼앗은 것, 그리고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와 극좌 대리인들이 조직한 작전”이라는 정보기관 보고서를 흘린 것이었다. 르코르뉘 총리는 10월 6일 각료들에게 10월 말까지 제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을 뿐이다.

10월 17일 밤 샤넬이 털리고 리모주 시청이 불탔다. 그리고 9일 뒤인 10월 26일 르코르뉘는 학생 대표들을 만나 고등학교 1학년 학급 정원 28명 상한, 고등교육 정원 1만 5,000명 확대, 학교 개보수를 위한 40억 유로의 저리 대출, 2028년 파르쿠르쉬프 폐지를 내놓았다. 학생들은 충분하지 않다고 답했고, 그 판단은 옳다. 그러나 순서를 기억하자. 한 달의 ‘점잖은’ 봉쇄에는 수류탄으로 답했던 정부가, 하룻밤의 폭동에는 40억 유로와 파르쿠르쉬프 폐지로 답했다. 폭동을 비난하는 정치인과 언론인은 이 순서를 설명해야 한다. 우리의 결론은 이것이다. 특정 상황에서 폭동은 국가로부터 개혁과 양보를 얻어 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폭동은 지배계급을 걱정하게 만든다. 걱정한 지배계급은 양보한다.

정치가 없다고?

약탈을 비난하는 가장 세련된 논리는 슬라보예 지젝과 데이비드 하비 같은 좌파 지식인들에게서 나왔다. 지젝은 2011년 영국 폭동 참가자들에게는 학생 시위대와 달리 “메시지가 없다”고 했고, 하비는 “생각 없는 폭도”가 자본주의를 심판대에 올리지 못한다고 했다. 2026년 멜랑숑의 “정치적으로 무의미하고 우리 방식에도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말은 이 계보에 속한다.

그러나 요구 사항 목록이 없어도 폭동은 명백히 정치적 행위다. 톰슨이 말했듯 폭동에서 분명한 정치적 의도를 찾으려는 시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시에는 비합리적 범죄의 분출로 취급되던 많은 도시 폭동이 나중에는 정당한 불만에서 나온 사건이자 장기적으로 긍정적 효과를 낸 것으로 재평가됐다. 1981년 폭동에 대해 하먼은 “대부분의 큰 폭동에 뚜렷한 정치는 거의 없었지만, 폭동의 경험은 매우 정치적이었다”고 썼다. 그리고 엥겔스는 1845년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서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경멸은 법 위반이라는 극단적 형태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정치가 없다’는 비판의 근저에는 정치란 요구 사항 목록과 대변인과 기자회견이 있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는 누가 거리를 지배하는가, 누가 재산을 지키는가, 누구의 명령이 통하는가를 둘러싼 싸움이다. 10월 17일 밤 몇 시간 동안 레퓌블리크 광장과 마르세유 시청 로비에서는 프랑스 국가의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 그것이 정치가 아니라면 무엇이 정치인가? 마크롱이 다음 날 저녁 대국민 연설을 하고, 총리가 통금을 선포하고, 상원이 열흘 남짓 만에 시위 참가자에게 최대 1만 유로(약 1,520만 원)의 배상 책임을 지우는 법안을 229 대 105로 통과시킨 것은 그들이 그 밤을 매우 정치적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 준다. 지배자들은 폭동의 정치를 정확히 이해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는 것은 좌파뿐이다.

폭동의 해방적 경험

약탈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폭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거의 후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먼은 큰 폭동 뒤에 참가자 쪽 사상자가 경찰보다 많아도 후회를 표현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기록했다. 희망 없는 이들이 무관심에서 분노로 돌변하면 자본주의 교육이 심어 놓은 억제가 깨지고, 거리는 바리케이드와 불타는 차, 국가에 맞선 즉각적 연대의 전장이 된다. 폭동은 황폐하고 원자화된 삶을 살던 이들에게 파업보다 더 강렬한 연대와 집단적 힘의 경험을 준다.

폭동 참가자들은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경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을 필요는 없다는 느낌, 사람이 충분히 모이면 경찰이 도망칠 것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매일 불심검문을 당하고, 교문 앞에서 고무탄을 맞고, 친구의 손이 날아가는 것을 본 10대에게 경찰이 도망치는 광경은 평생 처음 보는 것이다. 그 경험은 그 청소년을 바꾼다. 그는 이제 국가가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지배자들이 폭동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이유이고, 그들이 7만 명의 경찰과 장갑차와 즉결 재판을 동원해 그 경험을 지우려 드는 이유다. 그들은 샤넬 가방 몇 개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 밤 레퓌블리크 광장에 있던 수천 명이 무엇을 배웠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좌파가 그 경험을 “정치적으로 무의미하다”고 폄하하는 것은 지배자들의 일을 대신 해 주는 셈이다.

경찰이 없으면 야만 상태인가?

통금과 7만 명의 경찰을 정당화하는 논리의 근저에는 특정한 인간관이 있다. 국가가 질서를 강제하지 않으면 인간은 본성상 약탈과 폭력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난의 실제 기록은 정반대를 말한다. 리베카 솔닛이 《이 폐허를 응시하라》(펜타그램, 2012)에서 보여 주듯,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때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즉시 협력하기 시작했다. 한 미용사는 골든게이트 공원에 천막을 치고 하루 300명을 무료로 먹이는 급식소를 열었다. 중국인 혐오로 악명 높던 도시에서 도살장 주인이 차이나타운 주민 수천 명에게 고기를 무료로 나눠 줬다. 잭 런던은 “히스테리도 무질서도 없었다”고 썼다. 반대로 가장 야만적인 행위는 ‘질서 회복’을 위해 투입된 군대가 저질렀다. 군인들은 약탈자로 보이는 사람은 누구든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가족과 이웃에게 먹일 식량을 가져가던 사람 수십 명이 총에 맞았다. 가게 주인이 불타기 전에 물건을 가져가라고 청한 상점에서 나오던 사람이 군인의 총검에 찔렸다. 처형된 사람은 500명에 이르렀을 수 있다. 그리고 한 군장성은 이렇게 일갈했다. “몸 성한 남자와 여자를 먹이는 일을 빨리 중단할수록 도시에 좋다.”

이 탐사 기록은 2026년 프랑스를 읽는 열쇠다. 10월 17일 밤 정말 야만적이었던 것은 무엇인가? 보석상 유리창인가, 아니면 그 전 3주 동안 10대의 눈과 손을 빼앗고 미성년자 수천 명을 유치장에 가둔 국가인가? 그날 파리에서는 59세의 한 시위 참가자가 심장마비로 숨졌고, 생테티엔에서는 한 청년이 경찰 수류탄에 오른손을 잃었으며, 두 청소년이 눈을 잃었다. ‘질서’의 이름으로 투입되는 무장 병력이야말로 역사적으로 폭동 현장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여 왔다. 진정한 야만적 폭력은 폭동이 일어나는 거리가 아니라, 억압적인 통행금지령 아래에서 그 민낯을 드러낸다.

솔닛은 재난 직후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낡은 질서는 더는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은 구조와 피난처와 공동체를 즉흥적으로 만들어 낸다. 그 뒤 낡은 질서가 온갖 결함과 불의와 함께 다시 강제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질서가 생겨날 것인가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진다.” 폭동도 작은 재난이다. 몇 시간 동안 낡은 질서가 사라진다. 그다음에 무엇이 오는가는 그 거리에 누가 있는가에 달려 있다.

누가 진짜 약탈자인가?

폭동을 도덕적 공포(흔히 희생양 찾기가 동반되는 과장된 사회적 불안)에 이용하려는 기성 언론의 위선에 속지 않으려면 계급에 따른 피해 규모를 비교해 봐야 한다. 2011년 런던 폭동에서 상점 화재로 집을 잃은 소수는 분명 피해자다. 그런데 2011년 상반기에만 영국에서 1만 8,100채, 하루 약 100채의 주택이 은행에 압류됐다. 복합 상업 단지에서 TV 한 대를 턴 것이 경비를 부풀려 공금을 챙긴 의원들, 구제금융을 받은 은행가들에 비하면 무엇인가. 거친 비교일지 몰라도 꼭 필요한 비교다.

2026년 프랑스에서는 비교가 더 쉽다. 한쪽에는 샤넬 매장과 보석상 몇 곳, 훼손된 점포 2,488곳(그 가운데 약탈·파손·방화된 곳 1,161곳)이 있다. 다른 쪽에는 430억 유로의 지출 삭감이 있다. 호르무즈 봉쇄를 핑계로 리터당 2.37유로까지 오른 경윳값과 그 가격에서 이윤을 챙기는 석유 기업들이 있다. 2023년 마크롱이 대중의 압도적 반대를 무시하고 연금 개악으로 빼앗아 간 2년의 노후가 있다. 물이 나오지 않는 화장실을 10년째 방치한 교육 예산이 있다. 어느 쪽이 약탈인가? 국가는 36명이 들어찬 교실의 청소년들에게서 미래를 약탈하고, 그 아이들이 하룻밤 운동화를 가져가면 사흘 만에 감옥에 보낸다.

폭동을 ‘범죄 성향’으로 설명하는 논리도 비판받아야 한다. 2011년 영국 에식스대학교 연구자들은 법 위반 성향 조사로 ‘잠재적 폭도의 풀’을 상정했다. 이 정태적 관점은 큰 집단의 일원이 되는 연대감과, 정당성을 상실한 상황에 맞서 반격한다는 정당화 감각을 간과한다.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는 어떤 법을 어긴다. 다만 어기는 법이 다르고, 적발되고 기소될 확률이 계급과 인종에 따라 다를 뿐이다. 이번에 셔츠 몇 벌을 들고 나온 10대는 체포 사흘 만에 즉결 재판으로 감옥에 갔다. 수백억 유로의 세금을 빼돌린 배당세 중복 환급 사기(이른바 ‘쿰엑스(Cum-Ex) 사건’)에 관련된 은행가들 가운데 그 속도로 감옥에 간 사람은 없다. 법은 그들에게 사흘이 아니라 수년의 시간을 준다.

형량을 보자. 2011년 영국에서는 슈퍼마켓에서 3.5파운드어치(당시 환율로 약 6,195원) 생수를 훔친 사람이 6개월, 약탈된 아이스크림을 한 번 핥고 건넨 22세 청년이 16개월, 일어나지도 않은 폭동을 페이스북에서 ‘선동’한 청년이 4년형을 받았다. 〈가디언〉이 정보공개 청구로 입수한 이메일은 법원 서기가 치안판사들에게 양형 지침을 버리라고 촉구했음을 보여 줬다. 2026년 프랑스에서는 즉결 재판이 그 역할을 한다. 옷 몇 벌을 들고 나온 초범이 며칠 만에 실형을 받고, 법무부 장관은 검사들에게 부모에게까지 민사 책임을 물으라고 지시했으며, 상원은 시위 참가자에게 최대 1만 유로의 배상 책임을 지우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 법안은 원래 지난 5월 파리 생제르맹 팀 우승 축하 폭동 뒤에 마련됐던 것이다. 축구 팬들을 겨냥해 만든 칼을 고등학생들에게 휘두르는 것이다.

한 가지 역설이 있다. 2011년 영국의 터무니없는 형량은 오히려 사회주의자의 개입을 쉽게 만들었다. 도덕적 공포에 휩쓸렸던 사람들도 생수 한 병에 6개월은 너무하다고 느꼈고, 당시 노동당 대표 밀리밴드조차 은행 구제금융과 국회의원 경비 스캔들과 전화 해킹을 폭동과 연결해 말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도 같은 틈이 열리고 있다. 10월 1일 프랑스의 대표적 여론조사 기관 오독사의 조사에서 62퍼센트가 학생 운동이 정당하다고 답했다. 국제앰네스티, 휴먼라이츠워치, 인권연맹, 치안판사노조, 유엔 인권최고대표가 미성년자에 대한 폭력을 비판했다. 체포된 청소년들을 방어하는 운동은 가능할 뿐 아니라 이길 수 있다.

도덕적 공포와 갈라치기

마크롱은 10월 18일 대국민 연설에서 “고삐 풀린 폭력”의 책임을 시위대가 아니라 “극좌 분파와 비행 청소년”에게 돌렸다. 르코르뉘의 총리실은 정보기관이 이 운동을 “LFI와 그 극좌 대리인들이 조직한 작전”으로 본다고 흘렸다. 전 내무부 장관 르타이오는 LFI가 “폭력에 매료돼 있다”며 해산을 거론했다. 제무르는 “재이주”를 말했고, 트럼프와 밴스와 네타냐후는 이민과 “이슬람 좌파주의”를 말했다. 아랍계 이름의 15세 학생 대표 리아드 라니는 밤마다 살해 협박을 받는다.

이것은 반복되는 시나리오다. 1978년 스튜어트 홀과 동료들은 《위기의 치안》에서 1970년대 영국의 인종차별적 ‘머깅’(노상강도 범죄) 공포를 분석했다. 1981년 폭동 뒤에는 “방임 혁명”(도덕과 규율이 느슨해진 1960년대의 사회·문화적 현상을 비판적으로 일컬은 말)이 비난받았다. 2011년에는 캐머런의 “도덕적 붕괴”, 법무부 장관 켄 클라크의 “물질주의 말고는 주류와 단절된 야생 하층계급”, 역사가 데이비드 스타키의 “백인이 흑인이 됐다”는 발언이 나왔다. 모두 같은 패턴이다. 폭동을 사회적 조건에서 떼어내 특정 집단의 본성 문제로 만들고, 그 집단에 대한 탄압의 명분을 쌓는다.

이 공포는 폭동보다 먼저 시작된다. 2011년 영국 국가는 8월 폭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학생운동을 “아나키스트의 침투”로, 3월 노동조합 시위를 “블랙 블록”으로 몰아 체포자들에게 징벌적 형량을 예고했다. 프랑스에서도 순서는 같았다. 샤넬 매장이 털리기 보름 전인 10월 1일, 총리실은 이미 고등학생 봉쇄를 “LFI가 조직한 작전”이라 불렀다. 공포는 폭동의 결과가 아니라 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미리 준비된 도구이고, 폭동은 그 도구를 꺼낼 구실을 줄 뿐이다.

이 공포의 기능을 짚어 보자. 1886년에도 1931년에도 1960년대에도 1981년에도, 좌파에게는 폭동을 낳은 사회적 조건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점잖은’ 노동자와 경찰을 공격하고 차를 불태우는 ‘범죄자’ 청년 사이를 갈라치기 하려는 우파의 공세에 맞서 싸우는 것이 필수적이었고, 많은 자유주의자가 그 공세에 동조했다. 갈라치기는 지배자들의 가장 오래된 무기다. 55만 명의 행진과 하룻밤의 약탈을 분리하고, 학생 봉쇄와 방리외 청년을 분리하고, 노동조합과 ‘극좌’를 분리한다. 분리된 조각들은 각개격파된다. 먼저 약탈자가 감옥에 가고, 다음에 봉쇄 학생이 체포되며, 그다음에 파업 노동자에게 1만 유로의 청구서가 날아온다. 10월 25일 프랑스 노동조합들이 배상 법안에 반대하고 나선 것은 그 순서를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갈라치기에 맞서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쪼개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약탈자를 비난하는 성명은 ‘노동자의 힘’ 노조 FO가 생각하는 것처럼 노동조합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다음 차례가 노동조합임을 확인해 줄 뿐이다. 1968년 프랑스에서, 1981년 영국에서 갈라치기를 거부한 좌파만이 운동을 지킬 수 있었다.

빵뿐 아니라 빵집을

필자는 폭동을 낭만화하지 않는다. 우리 전통의 누구도 그러지 않는다. 하먼의 말대로 폭도의 힘은 경찰을 몰아내고 억압의 상징을 불태우는 데 있지만, 그들이 잠시 장악한 거리는 빈곤의 거리다. 폭동은 “로켓처럼 솟구쳐 올랐다가 막대기처럼 곤두박질친다.” 지도부와 방향이 없으면 촉발된 힘은 분산되고 표적은 빗나간다. 경찰과 은행과 대형 마트가 표적이 될 수도 있지만 학교와 지역사회 회관이 불탈 수도 있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 주민들의 분노 일부는 한인 소상공인에게로 향했다. 폭동은 낡은 사회의 일부를 태울 수 있지만 새 사회를 건설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한계에서 끌어낼 결론은 비난이 아니다. 지젝의 ‘혁명 없는 반란’이라는 진단은 타당하지만 운명론적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반란의 바깥에서 그것을 단지 논평하는 사람이 아니라, 반란의 과정에 개입해 함께할 사람들과 조직하는 사람이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학생들의 거리 전투는 프랑스 사회의 더 광범한 울분을 건드렸고, 그때까지 역사상 가장 큰 총파업을 촉발했다. 사회는 무차별적 폭력으로 와해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기 시작했고 사회를 운영하는 대안적 방식을 보여 줬다. 폭동과 파업을 그저 대립시키는 것은 큰 오류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광산과 공장의 집단행동과 거리의 폭력적 대치는 서로를 키웠다.

2026년 프랑스는 바로 그 가능성 앞에 서 있다. 고등학생 봉쇄가 노동조합의 행진을 불러냈고, 10월 17일의 폭동은 10월 26일의 양보를 끌어냈다. 10월 24일과 31일에는 2차, 3차 행동이 이어졌다. 11월 5일에는 노동조합들이 공동 파업에 나섰고, 노동조합총연맹(CGT)은 이를 총파업으로 확대하자고 호소했다. 1968년의 순서다. 이 순서가 끝까지 가느냐는 좌파가 갈라치기를 거부하느냐에 달려 있다. 즉결 재판으로 감옥에 간 217명과 그 뒤를 이을 수천 명을 방어하는 운동이 총파업과 같은 운동의 일부가 돼야 한다. 2011년 런던 토트넘과 해크니의 대중 집회와 피고인 방어 운동에서 끌어낸 교훈은 이것이다. 거리의 분노를 조직된 노동자의 힘과 연결하는 것, 그리고 폭동 지역에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다.

레닌은 1918년 볼셰비키가 약탈자라는 비난에 이렇게 답했다. “그렇다, 우리는 약탈자들을 약탈한다.” 그가 말한 약탈자는 “약탈한 부를 금고 속에 숨겨 두고 ‘당분간 가만히 숨죽이고 있자’고 말하는” 부르주아지였다. 물론 폭도와 은행가 사이에 도덕적 등가를 주장하는 것은 오해를 낳는다. 그러나 ‘약탈’이라는 말을 누가 누구에게 던지는가는 언제나 권력의 문제였다. 금고 속의 부가 아니라 운동화만 약탈이라 불리는 사회에서, 그 말을 돌려주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의 첫째 의무다.

토니 클리프는 1981년 폭동 직후 이렇게 말했다. “폭동과 약탈은 훌륭했지만 충분히 멀리 가지 못했다. 조직되지 않았기에 청소년들은 공장을 공격해야 할 때 상점을 공격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빵뿐 아니라 빵집을 차지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사회주의자가 약탈에 대해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정직한 비판이다. 너무 멀리 갔다는 비판이 아니라, 충분히 멀리 가지 못했다는 비판. 샤넬 가방을 가져간 것이 잘못이 아니라, 샤넬 공장과 샤넬의 금고를 가져가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비판이다.

물론 이 비판은 이 순간 통금령 아래 감방에 앉아 있는 10대에게 던질 말이 아니다. 그에게 먼저 해야 할 말은 이것이다. “당신은 범죄자가 아니다. 당신은 36명이 들어찬 교실과 물 없는 화장실과 날아간 친구의 손에 대해, 당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언어로 말했다. 우리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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