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프랑스 급진좌파 활동가가 말한다:
“소요는 경찰 탄압에 대한 청년들의 정치적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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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프랑스의 혁명적 좌파 활동가 셀마 오마리를 인터뷰했다. 그는 알제리계 프랑스인이자 노동총동맹(CGT) 소속 활동가다.
나헬의 죽음에 분노하는 소요 직전에 연금 개악에 반대하는 저항이 수개월 동안 벌어졌습니다. 이번 소요가 연금 개악 반대 투쟁과 이어져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두 저항이 직접 연결돼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는 연금 개악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신자유주의적 사회를 만들려 했어요. 사실 연금을 둘러싼 싸움은 오래된 싸움입니다.
마크롱이 집권한 이래로 벌어지는 현상이 있어요. 정부가 사회에서 갈수록 고립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정부는 국가와 사회의 연결을 가능케 하는 모든 세력을 공격하려고 해요. 노동조합이 그런 연결을 가능케 하는 조직의 하나인데요, 전통적으로 정부는 이런 조직을 통해서 대중의 분노가 어디서 오는지 파악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연금 개악 반대 투쟁이 벌어지는 동안 국가는 노동조합 운동을 깡그리 개무시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노동조합들이 유례 없는 규모로 행동에 나서 [은퇴 연령을 앞당겨] 자유로운 시간을 늘리고 사람들의 건강도 지키는, 노동과 관계 맺는 다른 방식이 가능함을 보여 줬는데도 말이죠. 정부는 대화조차 거부했어요. 노동조합이 파업을 하면 정부가 협상 테이블에 그들을 앉히는 등 운동이 벌어지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이 있는데, 이번에 정부는 이를 전혀 따르지 않았어요.
인종차별 반대 운동도 이런 공격의 최전선에 있어요. 마크롱은 이전 임기[2017~2022년] 때 인종차별 반대하는 여러 단체들을 강제 해산시켰어요.[관련 기사: ‘프랑스, ‘이슬람 급진주의’와의 투쟁? — 무슬림 희생양 삼아 주의 돌리려는 마크롱’(2020.10.7)]
마크롱 정부는 인종차별 반대 운동, 인권 운동을 혐오해요. 그래서 이들이 운동에 나서면 굉장히 강압적으로 탄압하고, 시위를 금지하고, 심지어 단체 해산 위협까지 해요. [NGO들의 연맹인] 프랑스 인권연맹조차 정부가 너무 나갔다며 몇 번이나 반발했어요.
이제 정부는 기존의 관례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사회 운동 전체를 업신여긴다는 점에서 일종의 국가의 급진화가 진행되고 있어요.
그래도 연금 공격에 맞선 저항을 계기로 일종의 노동조합 운동이 부활하고 있어요. 많은 사람이 노조에 가입하고 있어요.
그러나 다른 사회 운동 세력들은 분열이 심해지고 있고, 공동 행동을 조직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인종차별 문제에서 프랑스 좌파는 여전히 문제점을 개선하지 못한 것 같아요. 좌파 자신들이 내세우는 이미지와는 달리, 인종차별 반대 단체들과 관계 맺는 문제에서도 그렇고, 방리외[대도시 교외의 낙후된 이주 배경 노동계급 밀집 지역] 기반 단체들이 오랫동안 좌파들로부터 배제당하는 것을 봐도 그래요. 좌파들이 인종차별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봐요.
최근 소요의 배경은 무엇인가요? 프랑스 사회에서 북아프리카계와 흑인이 겪는 인종차별은 얼마나 심각한가요?
최근의 소요는 전통적인 노동조합 운동과는 다른 궤적에 있다고 봐요. 프랑스에서 소요는 자체적인 역사와 정치적 문화가 있어요. 프랑스 청년들은 지금의 소요를 2005년 소요와 비교합니다.
2005년에도 여러 방리외에서 3주 동안이나 소요가 벌어졌어요. 엄청난 일이었어요. 이 소요는 당시 14, 15세쯤이던 두 소년이 [경찰의 괴롭힘을 피해 달아나다]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벌어졌어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경찰이 살인을 저질렀을 경우 거대한 소요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요.[관련 기사: ‘차별이 낳은 분노의 폭발’(2005.11.9)]
소요는 경찰의 인종차별적 살인 같은 일들을 멈추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응답이에요. “이제는 너희들이 표적이다. 경찰이 당할 차례다. 이 개떡 같은 것들을 다 불태워 버리겠다.” 이런 메시지인 것이죠. 왜냐고요? 병원도 개떡 같죠, 자신들이 사는 거리도 개떡 같고, 동네도 개떡 같기 때문이죠. 모든 게 다 개떡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 불태워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런 운동을 하나의 요소로만 설명할 수는 없어요. 불만에 찬 운동은 다양한 요소로 촉발될 수 있기 때문이죠. 프랑스의 식민 지배 역사에서도 그 배경을 찾을 수 있겠죠. 이민 2세대가 중심이 된 1980년대의 대규모 소요의 배경도 거기에 있어요.
이런 소요는 프랑스 사회 전체에 “대체 이 젊은 프랑스인 청년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져요. 이 청년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미래인데도, 이들을 죽이고 있다는 것이죠. 대체 이 청년들이 겪는 절망이 얼마나 깊기에 이런 소요들이 때때로 터져 나오는 것이냐는 질문이 나옵니다.
소요에 나선 청년들도 사회 전체에 이렇게 물음을 던져요. “대체 우리더러 뭘 어쩌라는 것인가?”, “모든 게 개판인데 어떻게 할 거냐?”
그런데 특히나 2005년 이래로 이런 물음에 대한 국가의 답변은 경찰 폭력이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바로 정부가 투자를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모두가 공공 서비스를 평등하게 이용하기를 바라지 않아요. 정부는 사람들이 평등하게 쾌적한 공간에서 거주하고, 동등한 취업 기회와 교육을 누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이 청년들은 경찰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것은 물론, 학교로부터도 배제당해요. 이번에 살해당한 소년[나헬]도 어린 나이에 학교를 떠나야 했어요. 다행히도 자선 단체의 지원을 받아서 미래를 그릴 기회를 얻었어요. 그러다가 경찰한테 살해당한 겁니다.
한편, 경찰의 급진화라는 측면도 있어요. 경찰 내부 문화는 매우 우익적이예요. 파시스트들도 많아요. 그런데 경찰의 이런 문화는 프랑스 사회가 갈수록 다문화 사회가 된 것과는 정반대예요.
경찰은 그런 변화를 거부하고 있죠. 경찰들은 [파시스트 정당인] 국민연합에 투표하는 비율도 높아요. 경찰 대부분은 총기 사용을 선호하는데, 이런 자들에게 정부는 사람들을 죽이라고 무기를 더 나눠주고 있어요. 바로 이게 오늘날 벌어지는 일입니다.
여기에 더해 사법부도 경찰을 옹호합니다. 경찰은 살인을 해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업무로 복귀해요. 누군가 경찰에 의해 살해돼도 그 사건은 진전이 없어요. 아마 거의 2~3주마다 살해당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 소요가 벌어진 이후에도 경찰은 사람들을 살해했어요. 아무 이유도 없이요. 이렇듯 2005년 이래로 국가의 대응은 대체로 억압을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국가는 대테러 조처를 동원하기도 했어요.
사실 정말 무서워요. 경찰의 정차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례는 나헬이 처음이 아닙니다. 몇 개월 전에도 한 젊은 여성이 죽임을 당했어요. 차를 멈췄는데도 말이예요.
당시 이 여성은 운전면허증이 없었어요. 그런데 멀리서 경찰이 오는 것을 보고 겁을 먹고 차를 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신호등에 걸려서 멈췄는데 경찰이 차 옆으로 왔습니다. 경찰은 여성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발포했어요. 이 여성도 그렇고, 살해당하는 사람은 대부분 아랍계입니다.
프랑스 국가가 왜 이렇게까지 경찰을 동원한 억압을 강화하고 권위주의적으로 대응하는 건가요?
세계적 흐름의 일부인 것 같아요. 사회 통제 강화는 국제적으로도 비슷한 사례가 많은데, 어린 아이들을 체포하려고 대테러 전술을 펴는 것도 여러 나라에서 반복되고 있죠. 제가 보기에 국가는 지금 과부하가 걸려 있어요. 사회적으로 고립됐기 때문이에요.
전통적으로 국가와 관계가 긴밀했던 지방 정부들도 이런 걸 느끼고 있어요. 그들은 민의의 대변자를 자처하지만 주민들이 자신들의 말을 안 듣는다며 국가의 정책을 관철시킬 수단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그렇다 보니 국가가 탄압 정국 조성에 기대는 것이에요. 물론 주민들의 지지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니 무한정 억압적으로 굴 수도 없어요.
또한 인종차별이 너무나 주류화된 나머지, 국가는 이것을 문제라고 인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에요. 어떤 의미에서 국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사회적 운동에 대한 탄압이 증가하는 동시에, 운동 자체도 특히 청년들 사이에서 급진화하고 있어요. 기후 운동이 대표적입니다. 프랑스에서는 토지 점거 운동의 전통이 있어요. 올해에도 대규모 토지 점거가 있었어요. [환경단체들이 집약적 목축 농장용 거대 저수지 개발 계획에 반대해서 벌였다.] 이 운동도 국가의 끔찍한 탄압을 받았죠. 노란 조끼 운동이나 연금 운동에 대한 국가의 대응도 억압과 경멸이었습니다.
오로지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밀어붙이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은 프랑스를 신자유주의적인 나라로 만들고자 해요. 그런데 사회가 이런 방향을 지지하지 않으니 강제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겁니다.
국가에겐 억압이 유일한 방법이에요. 왜냐하면 갈수록 자신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나 다문화주의가 중요하다는 등의 프랑스 정부의 언사는 미국이나 영국에서처럼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립서비스일 뿐이에요.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와 지위를 보장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복지나 공공 서비스에 돈을 쓰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대응 방식은 사회적 위기가 그만큼 심각하기 때문이기도 해요. 한편에서는 연금 개악이 벌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소요가 벌어지는 양상은,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한국에서 프랑스는 “똘레랑스”로 유명합니다. 프랑스 국가 자신도 “자유, 평등, 연대”를 가치로 내세우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내세웁니다. 현실은 어떤가요?
이런 가치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들이 아닙니다. 프랑스 혁명의 가치들이었어요.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서 폭력을 써야 한다는 것은 프랑스 역사에 아로새겨져 있어요.
프랑스 공화국 세워지면서 7월 14일은 국경일이 됐어요. 이날은 파리 시민들이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날이에요. 많은 한국인도 프랑스 혁명이나 바스티유 감옥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거예요.
바스티유 감옥 습격은 당시 파리의 가난한 사람들이 왕정과 억압의 상징인 감옥을 겨냥해 소요를 벌이고 파괴해 버린 아주 폭력적인 사건이었어요. 그리고 무기가 많이 보관돼 있던 이 감옥에서 무기를 탈취해 체제를 뒤엎어 버리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평등이라는 구호가 나왔습니다.
또, 프랑스 혁명 당시의 주요 구호 중 하나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였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똘레랑스”나 “자유” 등이 언급된 것입니다. 역사가 오래됐죠.
억압적이고 불의한 체제에 맞선 소요를 프랑스 사회의 오랜 전통문화라고 보는 연구자도 있습니다. 지금 소요를 벌이는 청년들이 이주민의 후손이고, 외래문화에 오염이 됐다는 등의 비난이 있지만,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사회적 진보를 위해 싸우는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지금의 소요는 더 공정한 시스템을 세우기 위한 싸움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굉장히 “프랑스적”입니다.
물론 국가는 이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죠. 이 청년들이 외래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행동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보시다시피 매년 이렇게 거대한 저항이 벌어집니다. 앞으로도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봐요.
사실 이 청년들은 “난 프랑스 사람이 아니야, 프랑스 사회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자신이 프랑스인이고, 이곳에 살고 있고, 나쁜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좋은 대우를 받고자 소요를 벌이는 겁니다. 화가 많이 나 있고, 꼭지가 돌아 있으니 다 불태워 버리고 있는 거예요.
나헬이 프랑스인이었는데도 그런 차별에 시달렸다면 이주민들의 처지는 더 끔찍할 것 같습니다. 공식 정치의 우경화와 인종차별 강화가 프랑스의 이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나요?
끔찍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소요가 벌어졌을 때 내무장관 다르마냉은 소요에 참여한 미등록 이주민들은 감옥에 갈 것이고, 추방될 것이라고 위협했어요. 프랑스에는 이주민들이 권리를 인정받고 체류할 수 있는 법적 통로가 있긴 합니다.
그런데 국가는 이런 통로를 점점 좁히고 있어요. 연금 개악을 밀어붙이는 동안에 정부는 반이민법을 통과시키려고도 했었죠. [당초 마크롱은 연금 개악 직후에 관철시키려 했으나 일단 물러섰다.] 정부가 의회에서 과반을 확보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렇지만 이주민을 공격하는 갈수록 억압적인 개악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반적인 경향이예요.
정부는 청년들이 외래 문화에 오염되고 있다고 비난하는데, 난민들을 향해서는 더 거칠게 그런 비난을 합니다. 프랑스는 지중해 연안 국가입니다. 그리고 지중해는 난민들의 주요 이주 경로입니다. 프랑스에는 영국으로 가는 통로[영불해협]도 있죠. 정부는 이 경로들을 봉쇄하면서 난민들의 이동을 막고 권리를 빼앗고 있어요. 그래서 프랑스는 수많은 난민의 죽음에 공동의 책임이 있습니다.
프랑스는 지중해 연안국 중에서도 난민 수용에 엄격한 축에 듭니다. 지중해와 접한 긴 해안선이 있지만 난민선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아요. 또 마크롱 정부는 북아프리카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 합니다. 그 국가들이 난민들을 지중해를 건너지 못하도록 막게 하려는 것이죠.
사실 프랑스는 국제적으로도 이주민과 난민의 권리를 제약하는 주요 행위자입니다. 이주민들이 프랑스로 들어오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어요. 입국 허용 여부는 갈수록 당사자의 피부색에 좌우되고 있어요.
이건 식민주의의 유산입니다. 해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요. 아프리카 나라들의 자원을 수탈하는 주요 제국주의 국가입니다. 프랑스 제국주의의 역할을 빼놓고 이주 문제를 논할 수 없어요.[관련 기사: ‘[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 프랑스 안팎에서 전쟁 꾀하는 마크롱’(2021.1.27)]
제가 아프리카를 거듭 언급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이주민”은 유럽인을 의미하지 않아요. 이주민은 곧 아프리카인입니다. 아프리카인들이 문제이고, 무슬림들이 문제라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연결돼 있어요.
그리고 이주민들은 시민권을 취득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더 고통받아요. 시민권을 얻지 못하면 경찰에게 괴롭힘 당할 가능성이 더 크고, 각종 사회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없어요. 이들은 저항할 권리도 없어요. 저항에 나서면 출신 국가로 ‘추정되는’ 나라로 추방되죠. 출신 국가가 정확히 어딘지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추방부터 시킨다는 말이죠.
사실 많은 프랑스인들은 이주민들을 환영해요. 이주민들도 프랑스로 올 때는 프랑스 문화에 관심도 갖고, 사회의 일부가 되려고 노력해요. 그들 중에는 보호받아야 하는 아동들도 있어요. 그런데 국가는 사회와 단절된 채 억압에만 의존하면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어요. 이주민들이 지낼 공간과 기회가 많은데도 말입니다.
미등록 이주민 일부는 노동조합에 가입하기도 해요. 파업을 해서 미등록 이주민들이 체류 허가를 얻도록 하는 데에서 노동조합이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노동조합은 미등록 이주민들에게 파업 등 싸울 수단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해요.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왔을 때는 엄청난 환영 분위기가 조성됐어요. 그런데 이들도 프랑스 사회로 잘 받아들여지지 못했죠. 이들도 국가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어요. 이렇듯 외부 이미지와 실제 현실은 달라요.
프랑스의 이민 제도는 이주민의 사회 통합을 방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짜여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주민들은 고통을 받고 있어요.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왔을 때 이런 제도들을 고치려고 했지만 그대로였어요.
저들은 마치 이주 문제 때문에 나라가 거꾸로 뒤집힐 것처럼 말해요. 이주민이 떼거지로 몰려온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프랑스로 들어오는 데 성공하는 이주민들은 정말 소수예요. 이주 관련 제도가 [이주민 인구가 선주민 인구를 압도할 것이라고 근거 없는 공포를 조장하는] ‘대전환(인종 대교체) 이론’에 기반해 만들어졌다 보니, 이렇게 이주민들, 특히 아프리카인들이 행정적으로 부당 대우를 받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