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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좌파는 어째서 청년 반란의 시험대를 통과하지 못했는가

소요 사태를 계기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날카로운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많은 좌파가 자본주의 국가를 비호하는 정치에 완전히 포섭됐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론 7월 8일 프랑스에서 노동조합, 좌파 정당, 운동 단체 100여 곳이 30여 개 도시에서 “애도와 분노”의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이 행진은 소요가 대부분 진압된 후에 추진됐고, 제한적인 경찰 개혁만을 요구했고, 경찰과 소요 참가자들의 폭력에 거의 양비론을 취했다.

아래 기사에서 찰리 킴버는 경찰 등 국가의 인종차별에 효과적으로 맞서 싸우려면 소요와 그 참가자들을 방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요는 “업신여겨진 자들의 언어”다 ⓒ출처 Toufik-de-Planoise

프랑스의 가장 저명한 좌파 인사 장뤼크 멜랑숑은 경찰이 “멋대로 날뛰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연금 개악 반대 시위 참가자들을 때려잡던 경찰이 이제는 십대 소년까지 살해하고 이를 덮으려 드는 것을 보면, 그렇게 심한 말도 아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사회민주주의 정당 사회당(PS)의 대표 올리비에 포르는 그 정도의 표현도 용납할 수 없다고 나섰다. 포르는 멜랑숑의 발언에 “심각한 이견이 있다”고 했다. 그는 리옹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자제하고 시민적 평화로 돌아가야 한다는 우리의 호소는 옳다. 폭력을 부추기고 용인하는 느낌을 줘서는 안 된다.”

사회당은 녹색당·공산당과 함께, 멜랑숑이 이끄는 선거 연합 신생태사회민중연합(NUPES, 이하 “뉘프”)에 참여하고 있다. 사회당의 일부는 뉘프와의 연계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지난 몇 년 동안 지지율이 폭락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게 뉘프 덕인데도 말이다. 이제 사회당은 소요에 대한 반응을 뉘프와 결별할 또 다른 구실로 삼으려 한다.

멜랑숑은 자기 말이 너무 심했나 걱정하는 기색이다. 멜랑숑은 파리 인근의 소도시 라이레로즈에서 우파인 시장의 집이 공격당하자 이를 “강력 규탄”한다고 밝혔다. 게다가 현재 멜랑숑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경찰의 훈련을 개선하고 독립적인 “감시위원회”를 만들라는 것에 불과하다.

자신들이 “기생충”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여기는 경찰을 설득해, 인종차별적이지 않은 노동계급 지킴이로 탈바꿈시키겠다는 발상은 터무니없다.

멜랑숑의 정당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에 소속된 클레망틴 오탱은 훨씬 당돌하게 말한다. “우리는 일상의 회복을 바라지 않는다. 일상이 비정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요 사태의 책임은 상황이 곪아 터지도록 방치한 권력층에게 있다.

“2005년에 자이드와 보우나가 경찰에 살해된 것을 계기로 소요가 일어난 뒤에도 그들은 뭘 했는가? 불평등이 심해지고, 빈곤이 창궐하고, 복지가 열악해졌다.” 오탱은 낭테르에서 “정의를 위한 행진”을 벌이자고 호소했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과 밀접한 프랑스의 혁명적 사회주의 단체 ‘계급독립성’(A2C)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흑인과 아랍계가 대다수인 그 노동계급 청년들의 용기와 단호함을 옹호해야 한다. 넉 달 동안 연금 개악 반대 투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불과 몇 주 만에 경찰과 국가,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이 폭발했다. 자본주의와 지배계급, 국가의 강제력과 구조에 맞선 전(全)계급적 대결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계급독립성’은 7월 14일 마크롱이 참가하는 혁명기념일[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기리는 날] 공식 행사에 맞서는 성격의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반자본주의신당(NPA)의 트위터에는 몇몇 옳은 말들이 올라왔다. “반란과 분노는 정당하다! 폭력적인 정권과 체제를 끝장내고 싶어 하는 반란자들의 편에 서야 한다.” 7월 1일자 게시글이다.

다음 날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계속되는 항쟁을 지지하며 NPA는 오늘 저녁부터 프랑스 전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동에 참가할 것을 호소한다. #나헬에게정의를.”

지난해 NPA 측 대선 후보였던 필리프 푸투는 이렇게 말했다. “존엄을 표현하는 사람들에게 자제를 촉구하는 것은 경우를 모르는 짓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7월 4일 오전이 되도록, 즉 소요가 시작된 지 1주일이 거의 다 되도록 NPA 웹사이트에는 소요에 관해 한마디도 올라오지 않았다. 어쩌면 NPA 온라인 활동이 원래 굼뜬 것일 수도 있다.[7월 4일 오후 5시 56분에 게시물이 올라왔다. ─ 역자] 그러나 기민한 대응은 분명 아니고, 사태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지의 발로라고 보기에는 더더욱 어렵다.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 파비앵 루셀은 소요 참가자들에게 역겨운 비난을 잇달아 퍼부었다. 6월 30일 루셀은 “그날 밤 일어난 폭력을 전적으로 규탄”했다. 경찰 폭력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루셀은 “좌파라면 공공 서비스 약탈이 아니라 공공 서비스 수호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셀은 거듭 인종차별적 주장으로 후퇴한 바 있다. 루셀은 프랑스 국경을 구멍이 숭숭 뚫린 “체”에 비유하며 이민자들이 너무 많이 넘어온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혁명적 좌파를 자처하는 또 다른 단체 ‘노동자투쟁(LO)’은 메스꺼운 입장을 내놓았다. 노동자투쟁은 성명서에서 흑인·아랍계 청년들이 겪는 빈곤과 인종차별을 인정한다. 그러나 뒤이어 이렇게 주장한다. “가슴에 분노를 품고 사는 젊은이들, 아이들이 있다. 그런 분노 때문에 소수가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분노가 나헬의 죽음을 계기로 맹목적 폭력으로 분출한 것이다.

“몇몇 지역사회에 해를 끼친 파괴적인 분노는 환멸, 실망, 심지어 분노를 사고 있다. 그럴 만하다! 해를 입은 사람들은 자기 차가 불타고 자기가 다니던 고급 레스토랑과 테니스장, 골프장이 불탔을 부르주아지가 아니다.

“사회 복지 기관이 사라져 궁핍으로 고통받고, 장 볼 가게가 사라지고, 교통편이 없어 출근도 못 하는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이 해를 입었다.”

그 성명은 “자신들이 주민들의 삶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 소수의 폭력배와 인신매매범들”을 비난한다.

이런 역겨운 분석은 정부 대변인 올리비에 베랑의 말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베랑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는 정치적 메시지가 전혀 없다. 풋락커·라코스테·세포라 점포를 약탈하는 데에 담긴 정치적 메시지는 없다. 그것은 그저 약탈일 뿐이다.”

소요는 정치적인 것이다. 약탈도 마찬가지다. 반란자들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은 압도적으로 국가와 국가가 탄압을 위해 거느린 폭력배들[경찰을 가리킴 — 역자]이다. 사회적 분노가 부유층과 그들의 사치스런 은신처만 표적 삼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일은 벌어진 적이 없다. 심지어 파업도 그렇다.

간호사들이 파업을 벌이면 백만장자만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다. 사실 백만장자들은 자신의 건강을 지켜 줄 개인 주치의가 있을 것이다. 간호사 파업은 노동계급 사람들의 고통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임금을 늘리고 국민보건서비스(NHS)를 지키기 위한 간호사들의 파업은 완전히 정당하다.

교사 파업도 마찬가지다. 계급투쟁이 계급의 직접적 적들에게만 피해를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고 계급투쟁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1965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와츠 소요는 오늘날 위대한 항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항쟁에도 비난이 쏟아졌었다.

와츠 소요는 경찰의 잔혹한 인종차별에 대한 항의로 1965년 8월 11일 분출했다.

일주일도 안 돼 소요는 120제곱킬로미터 일대로 번졌다. 34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백인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밖에도 1032명이 다쳤다. 경찰은 3438명을 체포했다. 4000만 달러 상당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는데, 오늘날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5억 달러에 해당하는 액수다.

소요 참가자들은 건물 600채를 파손·파괴했다. 그러나 그 소요는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와츠 소요는 기성 권력 기구에 해법을 기대하고 변화를 구걸하지만은 않겠다는 수많은 흑인들의 선언이었다.

흑인 노동자들은 와츠를 방문한 평등권 운동 지도자 마틴 루서 킹 목사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킹 목사가 약탈을 비난했기 때문이다.

이 항쟁으로 킹 목사도 변했다. 3년 후 소요가 다시 분출하자 킹 목사는 한 유명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폭동은 업신여김 받은 자들의 언어다.” 킹 목사는 흑인 “중간계급과 그 계급이 배출한 지도자들”에 대한 “환멸과 분노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킹 목사는 암살당했다.

킹 목사의 죽음으로 또다시 거대한 소요가 일어났다. 하지만 충분히 큰 혁명적 세력이 없었기에 거기서 가장 큰 득을 본 것은 흑인 중간계급 상층이었다. 그들은 그 기회를 통해 정치권과 재계에서 한자리를 차지했다.

역사의 이러한 기본적 교훈을 프랑스 좌파들은 무시하고 있다. 그들은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지 않는 문제점을 오랫동안 보여 왔다.

2008년 노동자투쟁과 NPA의 전신[혁명적공산주의동맹 LCR을 말함 — 역자] 소속 회원이었던 교사들은 무슬림 학생 두 명이 니캅을 착용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게 만들었다.

많은 NPA 당원들이 히잡을 착용한 자기 당 후보를 매우 적대시해, 그 후보와 지지자들이 탈당한 일도 있었다.

프랑스 극좌파는 프랑스 국가의 악독한 인종차별과 무슬림 혐오에 맞서지 않았다. 그들은 1789년 프랑스 혁명기에 가톨릭 교회의 권력을 공격했던 세속주의가 오늘날에도 진보적이라는 거짓말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오늘날 세속주의는 무슬림 억압을 은폐하는 구실을 하며,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악마화하는 수단이다. 프랑스 좌파는 프랑스 식민주의가 노동계급 운동 내에 남긴 해로운 유산에 도전하지 않았다.

소요와 파업은 다르다. 파업은 이윤의 원천을 타격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가 의존하는, 일터에서의 착취를 중단시킨다. 파업은 민주적인 집단적 규율과 책임성을 부여할 수 있다.

그래서 대중적이고 투쟁적인 노동자 저항이라면(이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온전히 통제하는 신중하게 계획된 보여 주기식 행동이 아니다) 소요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잠재력이 있는 것이다.

소요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세상을 뒤집어엎기에 소요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소요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무너뜨릴 힘이 없다. 하지만 소요가 아닌 혁명을 추구한다고 해서, 기성 질서의 인정을 더 추구하거나 체제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체제를 끝장내려면 일터의 힘과 거리의 힘이 결합돼 봉기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첫 단계는 지금 소요 참가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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