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라 맥그리거 방한 강연:
강간과 포르노 그리고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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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오랜 활동가이자 신간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성차별, 성폭력》(책갈피)의 저자 실라 맥그리거(사진)가 2017년 7월 방한해 <노동자 연대> 신문 기자들과 가진 모임에서 한 강연을 녹취한 것이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편집자가 덧붙인 것이다.
발제
강간과 관련한 최근의 세 사건을 소개하며 시작하겠습니다. 첫째는 지난 4월, 말레이시아에서 판사 출신 [여당] 국회의원이 “강간 피해자는 강간 가해자와 결혼하면 암울한 미래를 피할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둘째 사건은, 올해 3월 스코틀랜드 리스라는 가난한 동네 출신인 다니엘 치에슬라크가 고등법원에서 강간 혐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난 것입니다. 판사들은 “전적으로 예외적인 정황” 때문에 그랬다고 밝혔습니다.
사건 당시 다니엘은 19세였고, 상대 여성은 법적으로 성관계 승낙 연령보다 어린 12세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여성이 섹스에 동의하고 다니엘은 그 여성이 [성관계 승낙 연령인] 16세 이상인 줄 알고 성관계를 맺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무죄 석방됐습니다.
셋째 사건은 체드 에반스라는 유명 축구 스타가 19세 여성을 강간한 혐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건은 원심을 뒤엎고 2심에서 무죄 판결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항소 법원은 피해자의 성관계 내력이 새로운 증거로 인정돼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2심에서는 증인 두 명이 나와서 피해 여성의 성적 취향이라든가 섹스 도중에 사용한 언어 등에 대해서 증언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피해 여성은 공개된 법정에서 자신의 성 생활의 아주 내밀한 부분까지 다 까발려지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증인 중 한 명은 강간이 일어났던 그 주말을 낀 휴가 기간에 그 여성과 성관계를 맺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둘째 증인은 그로부터 2주 뒤에 피해 여성이 자신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증언했습니다.
체드 에반스가 기소돼 [원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게 2012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체드 에반스의 약혼자의 아버지는 기업가였고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이 가족은 체드 에반스가 풀려나도록 캠페인을 벌였는데 그 일환으로 무죄를 입증할 증거를 가져다 준 사람한테는 5만 파운드[약 7천5백만 원]의 사례금을 주겠다고 광고까지 했습니다.
재판에서 체드 에반스는 자기가 [강간이 일어난] 호텔 방의 키를 얻으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걸 시인했습니다. 또한 그는 섹스 이전에도 이후에도 피해 여성과 말을 나눈 바 없었습니다.
더욱이 체드 에반스의 남동생이랑 또 다른 한 남성이 그 섹스 장면을 녹화하려 했다는 것도 재판에서 밝혀졌습니다. 섹스가 끝난 후 체드 에반스는 화재용 탈출구로 호텔을 빠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피해 여성은 그 당시에 술에 취한 상태여서 아무 것도 기억을 못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자신이 어떻게, 그리고 어쩌다 거기 갔는지도 기억을 못했습니다.
이 세 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강간 사건을 둘러싼 몇 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일단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피해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첫째 사건의 말레이시아 의원처럼 피해자에게 더 침 뱉는 식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반면에 둘째 사건은 ‘과연 미성년자가 어느 정도 나이가 돼야 합의 의사 능력이 있는 것으로 봐야 하느냐’에 관련한 좀더 까다로운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여성의 나이가 어렸음에도 성관계에 동의할 능력이 있었다고 판사가 판단한 게 옳은 것 같습니다.
셋째 사례는 영국에서 강간 사건이 다뤄지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 줍니다. 바로 피해 여성들의 성관계 내력 등이 공개적으로 까발려지는 것이죠.
이런 과정은 다음을 함의합니다. ‘그 여성의 행실이 문제다’, ‘여성이 술에 취한 게 문제다’, ‘여성의 복장이 문제였다’, ‘여성 자신도 그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있었던 거 아니냐’, ‘그 사건 당시에는 성관계에 동의를 안 했다 하더라도 평소 행실을 봤을 때 어차피 섹스에 동의했을 것이다’ 등. 이런 편견들은 강간 사건에서 흔히 수면 위로 드러납니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이런 불의에 당연히 분노하고 피해 여성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뿐 아니라 강간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이런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포르노와 강간이 모두 계급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고, 계급 사회의 위계 질서와 불평등, 특히 남녀간의 불평등, 또 아동들이 취약한 지위에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남자들은 원래부터 그래” 하는 식의 상식적인 견해를 거부하고 그에 도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실천”이라는 1974년의 로빈 모건의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또한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 상태에 묶어 두고자” 강간을 한다는 1975년 수전 브라운밀러의 말도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듯이 우리가 “강간 문화”[사회적으로 강간이 만연하고, 언론이나 대중문화, 또는 대중들 사이에서 강간이 용인되거나 정상으로 간주된다고 보고 그런 환경을 지칭하는 말] 속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강간의 원인이 사회의 작동 방식과 생활 양식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를 위해 사회가 조직되는 방식이 개인들의 생활 양식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규명해야 합니다.
제가 맑시즘2017 워크숍 ‘섹슈얼리티와 자본주의’에서 말씀 드렸듯이 성의 관계 그리고 그와 관련된 강간, 포르노는 그 사회 조직 방식과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의식주를 해결하는 방식이 사회에 의해 규정되듯이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분명히 해야 될 것은 강간과 포르노가 인류 사회에 늘 존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급 사회가 등장한 이후에야 나타났고 선사시대에는 강간이나 포르노가 존재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심지어 동굴의 벽화 같은 것들을 보더라도 남성이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우리는 현실 속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타인에게 자행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강간 같은 것이 워낙 내밀하고 개인적인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보니까 그걸 설명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결코 우리의 DNA에 각인된 것은 아닙니다.
데이트 강간이나 부부 강간 같은 걸 다루기에 앞서 전쟁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전쟁 문제를 짚고 넘어가려는 이유는 제가 포르노에 대해서 1989년에 글[‘성폭력, 포르노, 자본주의’,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성차별, 성폭력》(2017, 책갈피)에 수록됐다]을 쓴 이래로 한 30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전쟁이 더 만연해지면서 여성에 대한 폭력, 강간, 인신매매 등이 급격히 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현대전의 아주 핵심적인 특성처럼 됐습니다.
전시에 벌어지는 강간은 잠시 뒤에 말씀드릴 데이트 강간 등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전시에는 남성에 대한 강간이 흔히 알려진 것보다는 훨씬 더 만연하게 벌어집니다. 군대가 어떤 지역을 점령했을 때, 남성에 대한 강간이 흔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자행되는데 남성 포로들에 대한 학대의 맥락 속에서 벌어집니다.
여성이 전시에 강간당한다는 것은 이미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남성 강간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성이든 여성이든 강간 피해자들은 모두 트라우마에 시달립니다.
일단 신체 상의 피해가 상당한데 전시의 강간은 평시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남녀 모두 정신적, 정서적 피해도 모두 엄청난데 남녀 사이에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강간을 당한 남녀는 예전의 공동체나 파트너에게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여성의 경우에는 더는 아내로서 자격이 없고, 남성의 경우에는 남편으로서 자격을 잃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 있죠.
그런데 여성이 피해 사실을 털어 놓고 도움을 받기가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전쟁 중에 여성이 강간당하는 것이 사람들한테 널리 받아들여지기 때문이죠. 그리고 분명 강간은 역사적으로 각종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늘 수반된 일이었습니다. 국제적 규범과 그에 대한 법률도 있지만 항상 둘은 따라다닙니다.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은 현대전에서 강간은 아주 의도적인 군사 전략으로도 활용된다고 지적합니다. 상대편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서요.
그리고 군대의 결속을 도모하는 방도로 남성에 대한 강간이 활용된다고도 주장합니다. 대부분 젊은 남성들로 이뤄진 병사들이 포로들을 일렬로 세워두고 강간을 자행하며 서로간의 결속을 다지는 상황들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마치 갱단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려면 살인을 해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개인적인 관계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닌] 강간의 또 다른 유형은 여성을 노리고 벌어지는 인신매매와 대규모 난민촌에서 벌어지는 강간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길게 다룰 시간이 없네요.
지금부터는 전시가 아닌 평시에 젊은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강간에 대해서 다뤄보겠습니다.
2013년 통계를 보면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만 한 해 여성 8만 5천 명과 남성 1만 2천 명이 강간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 강간 피해자의 4분의 1 정도가 흑인이거나 다른 소수 인종이고, 4분의 1 정도는 장애인입니다. 피해자의 약 90퍼센트 정도가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열에 세 명 꼴로 여성 강간 피해자는 만 16세 이하였습니다. 4분의 1은 만 14세 미만이었고 9퍼센트는 9세 이하였습니다.
양성 모두 강간 피해자들은 15세에서 19세 사이일 확률이 가장 높았습니다. 그리고 강제추행, 그루밍(뒤에서 설명함), 성적학대 등 여타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들의 절반 정도도 16세 미만의 여성이었습니다.
이런 통계를 보면 강간 피해자들이 대체로 매우 어린 여성과 남성들임을 알 수 있고, 이 점은 전체 강간 피해를 가늠하는 데서 중요합니다. “강간 문화”라고 하면 강간이 굉장히 광범한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이렇게 특정 연령대에 편중돼 있는 겁니다.
또 하나 충격적인 통계는 강간 사건이 1천 건이면 그 중 검찰이 접수하는 사건이 13건밖에 안 되고 그 중에서 7건만이 중범죄로 인정받습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려면 첫째, 왜 어린 사람들이 특히 더 강간 피해에 노출돼 있는지 설명해야 하고, 둘째로는 왜 아주 소수의 사건만이 기소로 이어지는가를 설명해야 됩니다. 둘째는 그리 까다롭지 않지만 첫째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아주 복잡하지만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이 부모가 양쪽 다 있는 가족에서 자라든,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든, 고아원 등의 시설(그 안에서 부모-자녀 관계가 재생산됩니다)에서 자라든 결국 성 역할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환경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청년들은 40~50년 전보다 젠더가 고정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훨씬 더 많이 받아들이고, 퀴어 이론에 따라서 자기 성 정체성을 마음대로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게이나 레즈비언이라는 섹슈얼리티가 더 공개적으로 거론되고, 트랜스젠더 권리 옹호와 젠더를 바꾸는 것에 대한 논의가 더 많아졌습니다. 또한 오늘날에는 여성의 삶에 남성이 끼어드는 일은 결혼과 출산 이후에야 본격화됩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남성과 여성은 여전히 성장하면서 '재생산 문제에 관한 한 여성은 남성과 달리 특별한 역할을 부여받았고 남성과 여성은 사회적 구실이 다르다'는 생각을 주입받으며 자랍니다.
또한 오늘날 아이들은 성적 매력을 몹시 강조하는 사회에서 자라납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성 상품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여성은 어때야 하고, 특히 여성의 몸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력합니다. 남성도 어느 정도 몸에 대한 압박을 받고 그래서 오늘날 남성들은 예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정도로 탈취제나 향수를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압력은 여전히 압도적으로 여성에게 가해지고 여성의 몸은 남성의 섹스 도구로 여겨집니다.
더욱이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일단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성교육을 시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하지를 않죠. 사실, 어른들 사이에서도 성에 대한 솔직한 얘기가 그렇게 공공연히 이뤄지지 않습니다.
동시에 아이들은 온갖 성적 이미지들과 섹스가 범람하는 환경에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운 좋은 아이들만이 피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상식을 얻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들 중 자신감이 없고 자존감이 약하고 사랑과 존중을 받은 경험이 적고 애정에 목마른 아이들이 특히 그루밍에 취약합니다. 그루밍은 어른이 청소년에게 선물을 사주며 접근한 뒤 성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빠져 나가기 어려운 아이들을 특히 노립니다.
또한 어린 소년이든 소녀든 아이들은 진정한 섹스(이성애든 동성애든)의 본질이 상호 동의에 기초한 즐거움이라는 사실을 배우지 않고 'No는 No이다'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섹스가 상호 동의에 기초하는 만큼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은 것을 동의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배우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다음을 명확히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는 법률적으로 적절한 강간의 정의가 수립돼야 합니다. 강간에는 부부 강간도 포함되고 성매매 여성이나 술 취한 여성도 강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적시해야 되고, 또 남성의 성기만이 아니라 다른 여타 도구를 삽입하는 것도 강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둘째로, 강간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이 있을 때 그에 대처하는 경찰이 제대로 훈련을 받아야 하고 또 강간 사건 처리에 관한 적절한 절차를 마련해야 합니다. 강간 피해 호소 중 92퍼센트가 사실이기 때문에, 경찰은 피해호소인의 호소가 맞다는 가정 하에 사건이 기소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건 처리의 모든 과정에 걸쳐 여성이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거기에는 상담도 포함됩니다.
셋째로, 재판의 대상이 여성이 아니라 피의자 남성임을 재판 과정에서 분명히 해야 합니다. 피해 여성의 실명이 공개되는 것에 반대해야 하고 여성이 익명으로 남을 권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여성의 성관계 내력이나 사건 당시 음주 여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등은 사건과 완전히 무관하게 다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피해 여성에게 법정까지 가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피해 여성 본인의 선택이어야 합니다. 강간 사건 처리 과정에서 여성이 겪는 고초를 생각해 보면, 고소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죠.
남은 시간 동안에는 포르노에 관한 내용을 다루겠습니다.
포르노는 계급 사회 전반에 걸쳐서 존재했지만, 현재 형태의 포르노는 〈플레이보이〉 잡지가 등장한 1950년대부터 시작됐고 그 뒤에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세계화되고 첨단 기술을 사용하는 포르노로 발전했습니다.
뻔한 얘기지만 포르노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사회의 산물입니다. 포르노는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에 집착하고, 조잡하고,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입니다. 그리고 갈수록 폭력적인 양상을 띱니다.
포르노 산업의 규모가 과연 어느 정도 되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고 일부 추정은 과장으로 보입니다. 아무도 자세히 모릅니다만, 저는 두 가지 명확한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성인 잡지 〈펜트하우스〉 사장] 리차드 데스몬드라는 포르노 재벌은 포르노를 통해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일간지 〈익스프레스〉와 TV 방송국 〈채널 5〉까지 사들일 수 있었습니다.
둘째 사실은, 미국의 샌퍼넌도 밸리라는 데서는 포르노 산업에 2만 명이 종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산업과 마찬가지로 포르노 산업에서도 집중화, 독점화가 이뤄집니다.
저는 포르노가 야기하는 피해는 과장됐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스마트폰이나 SNS 같은 것 때문에 포르노가 좀 더 보급된 측면이 있습니다.
젊은 남녀의 섹슈얼리티에 끼치는 해악은 이 사회가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프레임 자체에서 비롯합니다. 포르노는 그런 사회의 극단적 측면입니다. 포르노가 아니더라도 성적 매력을 넘치도록 강조하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자라납니다. 또한 성별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자랍니다.
아까 제가 말씀 드린 2013년의 강간 통계에서 나타나는 패턴은 제가 포르노와 강간에 대해 처음 글을 썼던 1989년 당시와 거의 똑같습니다. 차이라면 스마트폰이 있고 없고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르노의 영향이 전무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포르노는 남성이 섹스에 기대하는 바에 관해 영향을 끼치는데, 포르노가 그 사회의 대세를 이루는 기업 광고들의 메시지를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르노는 여성의 신체 모양이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화시킵니다.
그런데 여배우나 가수가 유방확대술을 받았다는 뉴스나 각종 성형 수술 광고들은 여성의 신체가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데서 포르노보다 영향력이 훨씬 더 큽니다.
1970년대 이래로 하드코어 포르노를 시청하는 사람들의 수보다, 〈선〉 같은 [선정적] 신문 3면에 꾸준히 실리는 여성의 상반신 나체 사진을 보는 남녀 수가 더 크게 늘었습니다.
영국의 어떤 연구 결과를 보면 오랫동안 남성들은 포르노와 성매매를 성교육 수단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여성의 신체가 어떻게 생겼고 성행위라는 게 도대체 어떤 건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포르노가 비록 왜곡된 형태이지만 기본적인 교육 수단이 됐던 것이고 여전히 그런 현실입니다.
노동운동이 퇴조하고 기타 사회 운동들이 퇴조하면서 여성의 성적 만족이 남성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관념도 쇠퇴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사회적 연대의식이 희미해지는 상황에서 섹스는 갈수록 남성을 만족시켜야 하는 행위로 인식됐고 여성은 남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분투해야 하고 오럴섹스 요구에 당연히 응해야 한다는 등의 압력에 더 많이 노출됐습니다.
그러나 포르노의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측면들이 사람들의 실제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굉장히 모순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성에 대한 개방성이 훨씬 높아졌고 사실상 섹스의 범람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자신을 성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훨씬 더 많은 재량이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지금의 섹스는 파트너가 평등하게 누리거나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것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파트너간에 서로 만족을 주고 연대감을 느끼는 행위가 아니라 여성이 남성에게 봉사하는 일방적인 것으로 인식됩니다.
이런 환경이 결국은 청소년들을 아주 안 좋은 상황으로 내몰고 그 때문에 일부 성의 관계가 파국적으로 치닫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 속에서 특히 어린 여성들은 자기 주장을 분명히 하기 어렵고,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내세우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복잡한 이유로 자기가 원하는 성적 관계를 이룰 수가 없고, 현실에서 만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포르노와 성 산업 따위가 그 공백을 채우려 드는 것입니다.
질의 및 응답
1970년대 이후 계급의식의 후퇴와 함께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성적 만족이 중심이 됐다고 하셨지만, 남성 수술과 남성 병원에 대한 광고, 비아그라와 같은 약이 많이 팔리는 등 남성들도 성적으로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많습니다. 이런 건 어떻게 봐야 합니까?
지금 말씀하신 것이 제가 말씀 드린 것과 배치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자본주의에서 문화 자체가 섹스화 되는 경향이 있고 남성도 예외가 아니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제 또래의 한 어머니는 자기 아들들도 다리 털을 밀고 면도를 하고 향수 뿌리는 등에 매우 집착한다고 전해 줬습니다. 그렇게 해야 데이트에서 잘 보일 수 있다는 것이죠. 이렇듯 남성에게도 그런 압력이 가해집니다.
남성의 ‘섹스 실력’을 강조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고,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의 동전의 뒷면입니다. 여성이 섹스 도구로서 삽입의 대상이라는 생각은 곧 남성이 삽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발기에 필요한 비아그라 같은 약물이 중요해지는 거죠.
저는 남성이 성적으로 ‘유능’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부당한 거라고 늘 생각해 왔고, 실제로 남성들한테 엄청난 압력으로 작용합니다. 남성의 ‘섹스 실력’이 뛰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남성이 성의 관계를 주도해야 하고, 여성은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섹스는 남성이 늘 주도하며 잘 해내야 하는 게 아니라, 파트너와의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입니다.
제가 [1968년 대규모 투쟁 직후의] 독일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했을 때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그 당시 독일 학생운동 내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연대에 기초하고 또 남성이 여성을 대할 때 굉장히 감수성이 있고 여성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는 것 등이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가 이후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걸로 대체됐고, 특히 남성 잡지에서 표현되는 공격적 남성상과 수동적 여성상으로 대체됐습니다.
물론 실제 현실의 성의 관계는 훨씬 더 복잡합니다. 그리고 이런 지배적인 남녀 역할상 때문에 실제로는 남녀 모두 성관계에서 굉장한 불만족을 느끼고 자신을 탓하곤 합니다.
성관계와 성폭력 사이의 ‘회색 지대’에 대한 질문입니다. 아마도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의 경우에 좀 쟁점이 될 수 있을 텐데요. 한국의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명시적으로 Yes라고 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다 성폭력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내키지 않은 섹스를 하게 되는 경우와 강압적 성관계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회색 지대’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판단하는 게 좋을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결국에는 당사자 여성이 자신이 당한 것이 강간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만약 그게 강간이라고 판단한다면 그에 대해 항의를 하고 나아가서 고소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섹스 이전에 명시적인 합의라는 형식적 절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남녀가 섹스를 할 때는 응당 사전에 서로간의 어떤 암묵적 신호 같은 것들을 캐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관계에서 여성이 내키지 않는데도 번번이 섹스를 하는 게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잡은 경우에는 특히 까다로워집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이런 경우가 흔합니다. 외부에서 제3자가 그것을 강간과 다름없다고 여길 수 있지만, 여성 당사자가 그걸 강간이라고 판단하지 않는 이상 제3자가 그렇게 규정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계에 있던 여성이 어느날 목소리를 내기로 하고 ‘나 이제 더 이상 이런 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를 했을 때 남성이 그걸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여성이 ‘이건 강간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일방적인 관계를 오랫동안 맺어 왔던 여성이 여러 가지 이유로 또는 자신감이 생겨서 이런 관계를 끝내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는 많습니다. 오랫동안 폭력에 시달리던 여성이 관계를 끝내려는 경우도 많습니다.
여성이 이렇듯 일방적인 관계를 끝내려 하고 저항하기 시작할 때 남성이 그걸 존중하지 않는 상황에서 여성이 그 남성을 강간으로 고소하면 우리는 확고히 그 여성을 지지해야 합니다. 이 때 남성이 ‘너 예전에는 섹스하면서도 한 마디도 불평 안 하지 않았냐’라고 하더라도 그건 전혀 사건과 무관한 과거사로 치부해야 할 것입니다.
이게 현실에서는 좀 까다로운 문제인데 특히 상담자 구실을 맡는 경우에 그렇습니다. [실라 맥그리거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담하는 업무를 수년 간 맡은 바 있다.] 어떤 여성이 일방적인 관계 속에서 원치 않는 섹스를 계속해 왔다는 걸 알게 됐을 때, 페미니스트 상담사라면 이를 강간으로 규정하고 그 남성을 강간으로 고소하라고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저는 그런 접근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보다 좀더 나아가서 남성에게 항의 의사를 밝히고 남성의 태도를 바꾸도록 해 보라고 권하거나, 그와의 관계를 끝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 당시에는 당사자가 강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사후적으로 그걸 강간으로 규정하도록 조언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저와 이견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대안 문제에서도 차이를 낳습니다. 우리가 내세워야 할 대안은 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더 적극 발휘하고 남성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더 적극적으로 내도록 고무하는 한편, 남성에게는 여성의 바람에 대해서 더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반면,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하듯 강간 개념을 확장하는 것은 이런 대안이 못 됩니다.
제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또는 다른 누구든)이 자신을 가여운 희생자로 여기는 생각에서 벗어나, 운명을 스스로 만드는 주체로서 자신을 인식하고 그가 더 자신감을 느낄 만한 환경을 찾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피해 여성에게 '당신은 강간 피해자다'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접근법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입니다.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성폭력의 특성상 당사자들만 있는 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의 진술 외에 확보할 수 있는 증거가 없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증거주의는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성폭력 범죄의 특성 때문에 증거주의의 아쉬움이 제기될 때 그것에 대한 대안은 뭐가 있을까요?
각 사건을 아주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정황에 따라서 배심원이나 판단 주체들이 고심해서 결론을 내야 할 것이고 제게도 참 난감한 상황일 것 같습니다.
먼저, 오늘날에는 모종의 삽입 행위가 이뤄졌다는 것 자체는 입증하기가 더 쉬워졌습니다. 남성이 여성의 옷이든 침대 커버든 뭐든 정액을 남기기 마련이기 때문에 여성이 비록 강간을 당한 직후에 샤워로 흔적을 씻어냈다고 하더라도 증거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모종의 성행위가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면 그 다음에는 과연 동의에 따른 것이었냐는 쟁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만약에 강간 사건 재판 과정에서 여성의 과거 성 이력, 음주 여부, 옷 차림 등을 완전히 무관한 일로 취급하는 것이 정착되고, 그에 따라 남성이 여성의 동의 여부를 좀더 책임 있게 입증해야 한다는 것을 지금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면 남성들이 강간 혐의 제기에 대해 훨씬 더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현재 영국에서는 심리 과정을 비디오 촬영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피고인 변호사가 피해 여성을 공개석상에서 모욕 주는 일을 중단시킬 수 있을 거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결국 배심원단이 판단하겠지만, 만약에 우리가 배심원과 같은 위치에 처한다면 어쨌든 92퍼센트의 여성이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할 것입니다. 92퍼센트면 굉장히 높은 수치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비록 피고인 남성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무죄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일단은 여성을 믿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살면서 남성이 연기를 아주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익히 봐 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교사 일을 하면서, 사람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교묘하게 거짓말하는 법을 익히면서 자란다는 걸 불행히도 알게 됐고, 그래서 아이들의 말에서 거짓을 추려 내고 배후의 실체를 밝혀내는 법을 원치 않지만 익혀야 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사람들은 자기 자신마저도 아주 완벽하게 속이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결국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의 공정한 재판 절차를 보장하라고 싸우고 배심원에 참가한 다른 시민들도 공정하게 판단해 주길 바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청소년에 대한 성범죄 관련된 질문입니다. 2015년에 한 연예 기획사 사장이 중학생을 강간한 게 무혐의로 판명이 나서 페미니스트 출신의 한 의원이 의제 강간 연령, 즉 청소년과 합의 하에 성관계를 했더라도 법률적으로 강간으로 간주되는 연령 상한을 13세에서 16세로 상향 조정하는 법안을 발의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법으로 청소년에 대한 성범죄가 없어질 거라고 보지는 않습니다만, 이 법안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좀 궁금했는데요. 분명 청소년은 취약 집단이지만 동시에 청소년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 억압돼 있는 만큼 이 법은 반대도 지지도 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했습니다.
저는 현재 사회에서는 아마 16세 정도가 적정한 상한인 것 같습니다. 13세는 너무 낮은 감이 있고요. 그런데 물론 이것도 구체적으로 봐야 하는데, 예컨대 13세 여자 아이가 또래 집단의 남자 아이와 성관계를 한다면 저는 뭐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13세와 16세의 관계라면 그건 좀 구체적인 맥락을 봐야 할 것 같고요. 제가 말씀드린 스코틀랜드 사례에서는 19세 남성이 13세 여성과 관계를 맺었는데, 판사가 그걸 무죄라고 봤습니다. 하여간 저는 이런 경우도 사례마다 다를 텐데 대체로 비슷한 연령대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역시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아동학대가 굉장히 심각한 분위기에서는 어느 정도 연령 제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16세로 상향 조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 복잡한 고려 사항들이 남아 있긴 합니다. 남성의 나이가 여성보다 현격히 더 많은 경우에 여성이 과연 얼마나 자신감 있게 성적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남는 겁니다. 만약에 누구나 자신감 있게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모르겠으되, 현실이 그렇지 못한데 성인이 13세 이상의 청소년과 아무런 제한 없이 섹스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던지는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 고려해야 합니다.
덧붙여서 성관계 제한 연령을 법으로 명시할 경우 청소년의 성을 억압할 수 있다는 제기에 대해서는, 제가 한국의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최종 판단은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청소년들이 서로 섹스한 것 때문에 대대적으로 처벌받는 것이 예상되는 상황이 아닌 한, 의제 강간 연령을 설정하려는 시도를 지지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정리 발언
포르노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 말씀을 드리며 마무리하겠습니다. 한국의 페미니스트들과 NGO들이 포르노에 맞서서 검열을 강화하는 식으로 대응하려고 한다는 것을 어제 듣고는 제 생각을 정리해 봤습니다.
우선 저는 자녀들이 흉악한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하는 걸 차단하려는 부모의 심정을 십분 이해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에 비춰 보면 아이들은 궁금한 것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답변해 줄 어른만 있다면 그에게 뭐든지 물어본다는 겁니다. 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교사로서 아이들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변한 것 때문에 부모한테 항의를 받는 곤란한 상황에 처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경험은 검열 강화라는 접근법에 왜 잘못됐는지 분명히 알게 해 줬습니다. 섹스에 대해서 쉬쉬하면서 어떻게 포르노 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단 말입니까?
섹스에 대한 검열은 권위주의 정권, 파시즘 정권, 우익적인 사회에서 주로 애용했던 방식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도 국가 권력이 막강한데 이를 더 강화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검열이라는 것은 결국 원인이 아닌 증상을 놓고 씨름하는 시도인데, 우리는 원인을 제거할 요구를 제출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우리가 “걱정 마, 사회주의 혁명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야” 하고 간단히 말해서는 안 되겠죠. 그러면 사람들은 우리를 황당한 소리나 하는 사람으로 취급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지금 당장 요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요구들을 준비해 봤습니다. 진정으로 현재 상황을 개선할 방향으로 이끌어 줄 그런 요구들 말입니다. 이런 요구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나 온전히 실현 가능할 것입니다.
첫째, 개방적이고 적절한 성교육이 학교나 병원, 청소년 단체, 기타 공공장소에서 시행되도록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청소년들이 어느 연령대건 성에 대해서 궁금한 건 뭐든지 정보를 접할 수 있게 해 주자는 거죠.
이와 더불어, 청소년들이 피임 도구를 무상으로, 그리고 쉽게 구할 수 있도록 하고 성관계에 대한 조언·상담도 쉽게 구할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청소년들에게 성 상담을 해 주는 노동자들 중 제가 만난 일부는 진짜 실력이 탁월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다양한 젠더와 성소수자에 대해 필요한 조처를 요구하는 캠페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영국의 일부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트랜스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성중립 화장실을 요구하는 운동도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학생회가 〈플레이보이〉의 바니걸 의상을 입히고 행사를 여는 등 성차별적인 행사를 벌이는 것이 특히 문제가 되고 있고 학생들이 이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입니다.
또 직장 동료들이 여성차별적 행동을 하는 것에도 도전해야 합니다. 여성의 노출 사진을 걸어 놓거나 다른 사람 있는 데서 포르노를 보는 것에 사회주의자들은 맞서서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마치 동료 노동자의 인종차별에 대해 우리가 좌시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또한 직장 내 여성차별적 관행들을 근절하고 또 여성 권익 신장을 위한 요구들을 노조가 공식적으로 채택하도록 압력을 넣어야 합니다. 예컨대, 남녀 동일 임금이라든가 여성차별 근절, 직장 내 탁아소, 그리고 남녀 불문하고 육아 휴직을 쓸 수 있도록 하는 문제, 아이들이 아플 경우 간병 휴가를 쓸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차별적 태도를 변화시키는 동력은 투쟁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남녀 모두 함께하는 투쟁을 고무하려고 가장 애써야 할 것입니다. 투쟁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연대의식도 높아지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더 자유롭게 이런저런 사상을 토론할 공간이 열립니다.
여성차별 때문에 남성들도 의외로 자기 정체성에 대해 불안해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남성들이 마초적인 태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의 심리적 방어기제일 수 있습니다.
진실은 사람들이 집단적인 투쟁에 나서고 연대를 경험할 때 불안정한 정체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아로 거듭날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제가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바로 노조가 파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일부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갖게 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고 예전과 달리 자신감이 충만해지는 것을 지켜 보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변화를 겪을 때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이 레즈비언이나 게이, 트랜스젠더 등이라고 밝히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합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쓴 《대중파업론》은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여유가 있을 때마다 다시 읽어볼 가치가 있는 소책자입니다.
자기 작업장만의 쟁점, 예컨대 임금 문제라든가 아니면 등록금 문제로 시작한 투쟁일지라도 변화의 동력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런 변화의 동역학이야말로 포르노나 강간과 같은 문제들을 진정으로 해결할 실마리를 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변화의 동역학 한가운데에 서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교육자는 누가 교육하는가?” 바로 우리는 투쟁 속에서 자기 자신을 교육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강간과 포르노가 없는 사회는 어떻게 가능할지 그리고 대안적인 사회에 대한 비전도 함께 제시해야 합니다. 성의 관계를 비롯한 수많은 삶의 측면들이 완전히 변혁되는 세상에 대한 비전 말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