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라 맥그리거 방한 강연:
아동학대의 근원
〈노동자 연대〉 구독
이 글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오랜 활동가이자 신간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성차별, 성폭력》(책갈피)의 저자 실라 맥그리거(사진)가 2017년 7월 방한해 〈노동자 연대〉 신문 기자들과 가진 모임에서 한 강연을 녹취한 것이다. 실라 맥그리거는 20여 년 동안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지금도 교사노조(NUT) 조합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편집자가 덧붙인 것이다.
발제
오늘 주제는 아동학대의 근원인데요. 일단 이 현상이 제가 사는 곳에서 얼마나 광범한 것인지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2009년에 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미혼모 수용소] ‘막달레나 수용소’에서 1930년부터 1990년대까지 아동들이 지속적으로 신체적, 성적, 심리적 폭력에 시달렸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2012년에는 영국에서 1970~1980년대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앵커인 지미 새빌이 한평생 주로 여자 아동들을 성추행 해왔음이 드러났는데요. 솔직히 저는 그 사람을 TV에서 볼 때마다 뭔가 좀 흉측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지미 새빌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신고 건수만 해도 450건이 됩니다. 지미 새빌은 자신의 BBC 직위를 이용해서 이런 짓을 벌였고, [개인정보를 얻고자] 국민보건서비스(NHS)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접근권을 남용하기도 했습니다. 또 최소 8세 되는 아동까지 학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로더럼 스캔들이라는 것도 있는데 주로 노동계급 소녀들인, 최소 1400명이 성적으로 학대당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아동학대 사건으로 재판정에 선 사람들은 주로 아시아계[인도·파키스탄계]의 남성들이었는데 이 때문에 아시아계 남성이 백인보다 아동을 더 자주 학대하는가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사례를 나중에 다시 언급할 텐데요. 참고로 이런 사건에 대한 훌륭한 다큐-드라마가 있습니다. 〈세 소녀(Three Girls)〉라는 드라마입니다. 만약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다면 보실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 사례가 드러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동학대는 이 사회에서 만연해 있고, 이것이 드러나면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이 사회에서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가장 취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가난
아동학대의 근원은 사회 전체의 성격과 특히 자본주의 하에서 가족이 하는 구실에서 비롯합니다.
국제적 통계 수치를 몇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5억 5000만~15억 명 정도의 어린 아이들이 모종의 폭력을 경험합니다. 여성 5명 중에 1명 꼴로, 남성 13명 중 1명 꼴로 어린 시절에 성적 학대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남자 아이들이 성적으로 학대받는다는 것은 영국에서 축구 코치들이 유소년 팀 단원들을 체계적으로 성적으로 학대해 온 것이 드러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아동의 36.3퍼센트가 정서적 학대로 고통받습니다. 22.6퍼센트가 신체적 학대로 고통받고, 16.3퍼센트는 기초적인 물질적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는 식으로 고통받습니다. 사춘기 여자 아이가 10분에 한 명씩 폭력으로 사망하고 있습니다.
장애가 있는 아동이 폭력에 시달릴 가능성은 3.7배, 성폭력에 시달릴 가능성은 2.9배 더 높습니다. 또, 인신매매 피해자의 33퍼센트가 아동들입니다.
아동학대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난입니다. 아동 사망률과 문맹률을 높이는 것도 가난이고요. 가난은 결식 아동, 아동 노동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는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남아시아의 어린이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바로 이 지역들에 전 세계 빈민의 80퍼센트가 살고 있고, 영유아 사망의 81퍼센트가 이 지역에서 일어납니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1분마다 5세 미만 아동 11명이 사망하고 1시간마다 산모 35명이 출산 중에 사망합니다.
이렇듯 아동학대는 성적, 신체적, 정서적 폭력과 학대를 다 포괄하고 아동학대와 가난과의 연계성은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든 가난과 기아가 심각하거나, 전쟁이 벌어지고 난민촌이 생기고 아동 노동이 있는 데서는 아동학대가 일어납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에서 말했던 자본주의의 기본 동력, 즉 ‘축적하고 또 축적하라’는 절대 명령이 바로 가난을 유발하고 사람들의 삶을 조각내는 원인이고 따라서 아동학대의 근원입니다.
전쟁이나 대량 난민 사태를 겪지 않는 평상시에는 가족이 하는 구실이 아동학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고 가족 내의 여러 조건들은 계급 위치에 따라서 많이 결정됩니다. 즉, 가정에 필요한 재원들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단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 즉 안정적인 주거지가 있는지, 그날그날 먹을 음식이 있는지, 추울 때 난방을 하거나 더울 때 냉방을 할 수 있는지 등의 능력은 결국 그 가족의 구성원들이 어느 계급에 속해 있느냐와 관련 있습니다. 노동계급이라면 임금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와 직결되고요. 가족이 확보할 수 있는 자원은 해당 가족 내 아동이 어떤 식으로 대우를 받느냐와 직결됩니다.
영국의 아동 복지 단체 ‘아동에 대한 잔인성 예방을 위한 전국 연합’, 약자로는 NSPCC라는 단체에 따르면, 아동학대의 가장 두드러진 형태는 바로 방치라고 합니다.
그들이 아동학대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주된 요인은 가난과 형편 없는 주거 환경 두 가지입니다. 그보다 좀 덜 중요한 셋째 요인은 바로 부모들 자신이 어릴 때 아동학대를 경험했는지 여부입니다.
그들의 추산에 따르면 어린이 4명 중에 1명 꼴로 가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수치는 2014~2015년의 경우 아동 390만 명에 해당됩니다. 그 이후 평균 임금이 줄었기 때문에 이 비율은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 가난한 아동들의 66퍼센트는 부모 중 적어도 한 명이 일을 하는 데도 그렇습니다. 또 34퍼센트는 가족 내 자녀 수가 세 명 이상인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집에 음식이 부족해 아침을 먹지 못하고 굶주린 채로 학교에 가는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르쳤던 곳을 비롯한 많은 학교들에서 수업 시작 전에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입니다. 배고프면 학업도 굉장히 어렵고 교육적 성취에도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시 미래 소득에도 악영향을 끼칩니다. 아동 결식은 기대 수명과 전반적인 건강에도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이렇듯 계급과 가난은 아이들이 무슨 일을 겪을지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칩니다.
계급 차별과 가난은 아동학대의 중요한 형태이고 종종 정서적 학대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학교 공부에서 뒤처진 사람은 이 사회에서 자존감이 낮고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으로 자랄 공산이 큽니다. 그런데 가족 안에는 남성이 여성 위에, 부모가 아이들 위에 있는 위계 질서가 있기 때문에 [부모의] 이런 자존감 부족은 모종의 ‘권력 획득 경쟁’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가족 내 여성 차별이 아이들에 대한 정서적 학대로 이어지는 식입니다. 그리고 가족 안에서 여성이 성적 학대나 신체적 폭력에 시달릴 때 아이들은 원치 않아도 이를 목도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그 때문에 트라우마를 겪게 됩니다. 또한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의 대다수는 가족 안의 동년배나 아는 사람에 의해서 자행됩니다.
‘섹스팅’
자본주의에서 가족의 역할이나 성 상품화에 대해서는 지난 며칠 동안 충분히 얘기했기 때문에 (관련 기사 참조) 필요하다면 더 나중에 말씀 드리기로 하죠. 여기서는 10세 아이들의 4분의 1 정도가 포르노를 본다는 정도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날 학교 현장에서 흔히 벌어지는 여자 아이들에 대한 학대의 한 형태는 이른바 ‘섹스팅’이라는 건데, 여학생들이 남학생들한테 자기 신체 일부를 촬영해서 보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립니다. 폭력배들이 웹캠으로 성행위 장면을 촬영해서 온라인에 올리는 일도 있습니다.
불우한 가정 또는 열악한 사회복지시설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존감이 낮거나 자율적인 선택을 할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그루밍’이라는 것에 취약해지기 쉽습니다. ‘그루밍’은 어른이 취약한 여자 아이들이나 남자 아이들을 물색한 후 접근해서 선물도 주고, 근사한 데나 비슷한 또래의 다른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데를 데려다 주겠다고 하면서, 즉 애정을 주는 척하며 친밀감을 느끼게 하고는 어느 단계에서 성관계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평소 애정 결핍 속에서 살아온 아이들은 나이 든 남자가 선물을 주면 이것을 모종의 따뜻한 애정으로 받아들이기가 쉽고 그 관계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남자가 ‘내가 이걸 그냥 공짜로 줄 줄 알았어? 이제 받은 걸 갚아야지’ 하고 말하면서 그 아이를 협박하면, 그 때 가서 아이는 빠져 나오기 힘들다고 느낍니다. ‘그루밍’은 온라인에서 진행될 수도 있고 오프라인에서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협박 받는 상황에 놓인 청소년이 누구에게 손을 내밀 수 있겠습니까? 청소년들이기 때문에 부모들과 관계가 안 좋을 가능성도 많고 가족이 굉장히 억압적인 장소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접근해 온 성인과의 관계가 그 가족 내에서의 불만족스런 관계에 대한 대체물로 보였을 수 있죠. 그래서 이런 청소년들이 부모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 경우도 흔합니다.
그렇다면 경찰이나 사회복지사들에게는 손을 내밀 수 있을까요? 만약에 고아원 같은 데서 자랐다면 그 고아원 교사들한테 손을 내밀 수 있을까요?
아동복지기관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거기에 제공되는 재원이 턱없이 부족하고 사회복지사들은 1인당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걸 먼저 지적해야 합니다. 고아원 같은 경우에는 거기서 일하는 교사들이 임금도 열악하고, 근속 기간도 짧고,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합니다.
동시에 고아원이든 경찰이든 사회복지시설이든 이런 국가 기관들은 그 사회 전체의 구조를 반영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권위적이고 위계적으로 조직돼 있습니다. 기업이 경영진의 압력을 받듯이, 사회복지시설, 경찰, 고아원 등에도 이런 압력과 위계 질서가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경우에는 [사회복지기관들의] 종교적 편견이 악명 높고, 영국에서는 경찰이 지독한 인종차별과 성차별적 편견들을 가지고 있는데 아마 사회의 다른 집단보다도 더 심할 겁니다. 심지어 사회복지사들조차도 노동계급 아동들에 대한 온갖 편견들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2014년의] ‘제이 보고서’는 아까 말씀드린 로더럼 스캔들을 조사한 것인데 굉장히 중요한 사실들을 밝혀 냈습니다. 섬찟하게도 경찰들뿐 아니라 압도 다수의 사회복지사들조차 노동계급 여자 아이들이 피해를 호소할 때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쟤네들은 어차피 구제불능이야’, ‘쟤네들은 이미 직업으로 성매매를 선택했다’고 봤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13세 내지 14세의 소녀들이 나이 든 남성의 차에 타고서 클럽에 가는 게 그날 밤 다른 남성 스무 명에게 성적 노리개처럼 취급받겠다는 자발적인 선택이고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시류를 거부한, 영웅적이고 예외적인 사례가 있었는데, [로치데일이라는 또 다른 지역에서] 청소년 성 자문팀을 이끈 사라 로보섬입니다. 로보섬과 그의 팀원들은 일체의 선입견을 완전히 배제하려고 했습니다. 소녀들이 언제든 와서 피임 관련 도구를 받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로보섬은 자기 센터를 찾아오는 소녀들의 말에서 모종의 패턴을 발견하고서는 자기 팀원들한테, 소녀들이 하는 말을 한 마디 한 마디를 다 받아 적고, 특히 소녀들에게 접근해 온 남성들의 이름이나 인상착의 등을 기록해 놓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는 일단 아이들의 말을 믿을 것과, 아이들은 상황을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즉 아이들이 체계적으로 강간당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 팀은 아이들의 진술 속에서 특정 이름의 남성들이 거듭 거론되고 그 남성들과 관련된 아이들을 모조리 기록하는 방식으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성폭력 네트워크를 찾아냈습니다. 로보섬 팀의 노력 덕분에 결국 경찰이 몇 명의 남성들을 기소하고 2012년에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그 재판에 오른 13명이 모두 특정 택시 운전기사들의 네트워크에 속한 남성이었고 아시아계였습니다[영국에서는 이주민들이 택시 운전에 많이 종사한다]. 나치들은 이 사건을 이용해 인종차별적 선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제이 보고서’는 일반적으로 아동학대 가해자의 압도 다수가 백인 남성들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한편, 사라 로보섬은 ‘제이 보고서’가, 피해 호소 아동들의 얘기를 묵살한 사회복지사들에 대한 비판이 거의 없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로보섬은 자신의 노조를 통해서 다른 사회복지사들이 어떻게 피해 소녀들의 증언을 묵살했는지를 세부적으로 폭로하고 나섰습니다. 내부 고발은 엄연히 법으로 보장된 권리임에도 로보섬은 이 행위로 인해서 해임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례를 통해서,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기관이 오히려 문제를 은폐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문제 자체를 인정할 용의가 없고, 인정하더라도 대처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족
결론 짓자면,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아동학대는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어납니다. 그것이 전시 상황이나 난민이 대량으로 발생하는 상황에서 벌어지든, 가난 때문에 벌어지든 말입니다.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 사건이 벌어지면 사회는 대체로 굉장히 크게 분노하고 응당 그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지 도덕주의적 분노로 치닫고 그 이상 나아가지는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아동학대의 근본 원인을 지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가난입니다. 그리고 가족 내의 위계적 구조, 가족이 처한 가난이 원인임을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가족 구조가 가난뿐 아니라 심리적, 신체적, 성적 학대로 이어진다는 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가족은 천국인 동시에 지옥인데,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가족이 지옥이 될 때 어린 아이들이 그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입습니다. 가장 정신적으로 파괴되는 게 아동들인데, 그렇게 되면 나중에 그 아이들이 알콜 중독에 빠지거나 약물 남용 같은 악순환을 빚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동이 나중에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도 그런 해악적인 패턴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 변혁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아동이 학대당하는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으로 항상 되돌아 와야 하는 것입니다.
임금 인상을 위한 투쟁이 가족 내에서의 폭력과 학대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봐야 합니다. 월세나 빚을 감당 못해서 집에서 쫓겨나는 가족들을 방어하고, 보건의료 서비스나 성폭력 상담소에 대한 예산을 줄이는 것에 맞서 투쟁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경찰이나 심지어 사회복지사들도 ‘소녀들이 자기 의사에 따라서 성매매를 선택했다’고 말할 정도로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차별과 인종차별, 또 반노동계급적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싸워야 합니다.
질의 및 응답
한국에서 총선 때 우파들이 아동학대 문제를 쟁점으로 삼으면서 경찰력 확대와 처벌 강화를 얘기하는 등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 했습니다. 영국이나 서구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다른 나라 사례들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부적인 사례보다는 일반적인 접근 방법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경찰력 확충이 우리에게 유리한 경우가 과연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경찰력 확충과 처벌 강화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영국과 미국에서 처벌 강화가 불러온 효과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나쁩니다. 미국에서는 3진 아웃제 같은 것이 그랬죠. 이 때문에 감옥에 투옥되는 인구가 크게 늘었는데 압도 다수는 흑인이었고, 영국에서는 아시아계 사람들이었습니다. 노동계급 남성과 일부 여성이 대거 투옥되는 결과로 끝났습니다. 처벌 강화는 아동학대 문제에서 사회적 경제적 원인이 아닌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고 개인에게 주목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아동학대의 주된 유형은 다름 아닌 가난과 방치입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입고 갈 옷이 없고 배고픈 채로 학교를 가야 하는 그런 것들이 더 큰 아동학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되물어야 하는 것이죠. 당신들이 정말로 아동학대의 근절에 관심이 있다면 주거 문제에 대해서 뭘 하고 있느냐, 복지 서비스 제공과 임금 문제에 대해서는 뭘 하고 있느냐 등.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성교육을 제대로 받아서, 성관계는 동의에 의한 것이어야 하고 평등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서 자신들이 성적 결정권을 가진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성인이 접근해서 그루밍을 하려 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도 교육받아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아이들이 학교 안팎에서 다른 성인이나 관련 기관의 도움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학교에 상담사들이 충분히 배치돼 있는가, 또 그들은 아이들을 지원해 줄 수 있도록 적절한 훈련을 받았는가, 청소년 센터와 같은 각종 상담소는 충분한 인력을 보유하고 있는가, 아이들의 학업을 보조해 주고 숙제를 도와주도록 제대로 훈련받은 인력들이 있는가 등의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교사로서 경험한 게 있는데요, 한 학년의 학생들의 상담을 도맡아 하는 위치에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동안 상담 책임자로서 별도의 사무실을 제공받았고 그 안에서 다른 교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학생들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당시 학생들이 저를 찾아와서 자기 일상사에 대해서 여러 가지 얘기들을 해 줬는데 한 16세 여학생이 저한테 와서 삼촌한테 강간당했다고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여학생과 상담하면서 그가 자기 엄마한테 그 사실을 알릴 정도의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해 줬고, 임신 검사나 성병 검사 같은 걸 받을 수 있도록 클리닉에 연결해 줬고, 또 성폭력 상담소와도 연결해 줬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건을 상급 기관에 보고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늦췄고 다행히 그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경찰은 이 사실을 접수하자 학교에 들락거리며 그 여학생에게 자기 삼촌을 고소하도록 종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은 고소를 원치 않았습니다.(물론 저는 그 학생이 고소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지지했을 것이고 그 학생도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자기 엄마한테 강간 사실을 얘기했고, 엄마는 다시 아빠한테 얘기했고, 다행히 부모 둘 다 딸 편이어서 아빠는 강간을 저지른 자기 남동생과 연을 끊어 버렸고, 그가 그 어떤 가족 모임에도 다시는 오지 못하도록 하려고 다른 친척들과 한 판 대결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교사들이 접수한 사건을 보고할지 말지에 대한 재량권이 더 축소됐습니다. 지금은 해당 사건을 기소하는 데 온통 관심이 쏠려 있는데 이런 처벌지상주의적 접근법은 사실 피해 여성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또 처벌지상주의는 형량 강화 요구와도 직결되는 건데요. 1960년대에 관련 논쟁이 있었는데, 감옥에 가두는 것이 범죄자의 교화에 도움이 되긴커녕 오히려 범죄 학습 효과가 더 크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처벌지상주의가 아니라 다른 방법들이 더 효과적일 수 있음을 시사하는 증거들이 있는데요. 예컨대 덴마크에서는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성인 남성들이 스스로 당국에 보고를 하게 합니다. 어떤 남성이 자기가 아동에 대해 성욕을 느끼거나 자기가 아이들 주위에 있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여기면 그것을 관계 당국에 스스로 보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와 상담이 이뤄지고 교육이 이뤄지는데, 이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엥겔스가 이미 지적했듯이 범죄와 가난의 상관관계가 높습니다. 빈곤율이 높아지면 범죄율도 치솟습니다. 그런데 국가에 의한 징계, 탄압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보육시설에서 아동학대가 자행된다면서 CCTV 설치가 대안으로 제기됐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사회적 투자가 부족한 문제를 보육 노동자 개인에게 결국 떠넘기는 거라고 반대했지만 결과적으로 CCTV 설치가 관철됐습니다. 영국에도 보육시설에 CCTV가 많이 설치돼 있습니까?
아시겠지만 영국은 원조 CCTV 공화국입니다. 거리의 어디를 가도,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도 다 CCTV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각종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CCTV 설치한다고 해서 보육 시설에서 아동학대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 같으면 왜 그런 아동학대가 벌어지는지에 대한 철저한 진상 조사를 요구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시설의 물리적 환경이 어떤가, 시설 운영자들의 자격 조건이나 훈련받은 정도는 어떤가, 또 보육교사들의 임금이나 노동 조건은 어떠한가, 교사 대비 학생 수가 몇 명인가, 교사들이 아동들을 어떻게 다루는가 등을 따졌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아동학대를 부르는 데 기여하기 때문입니다.
영국 같은 경우에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고아원 교사들이 훈련도 제대로 못 받고, 임금도 낮고, 직원 수도 너무 적고, 근속 기간도 짧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대가 벌어지는 게 놀랍지 않은 환경입니다.
저는 아동을 상대하는 교사들이 더 양질의 훈련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임금도 다른 직종보다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보고, 이를 충분히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아이들은 이 사회에서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이 자기 애를 키우는 방식에 대해 제3자가 요구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지라도 보육 기관에서는 아이들이 최상의 보육을 받을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하고,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사회가 더 존경하고 대우도 더 좋아져야 합니다.
학교에서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비정규직 교사들이 정규직이 되기를 원하는데, 전교조 정규직 조합원들이 반대해서 전교조 집행부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냈습니다.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핵심 주장은 초등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아무나 못 하는 것이라서 비정규직 교사들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문성을 내세우는 것인데, 우리는 비정규직 교사들도 이미 학교 현장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정규직화 해야 하고 동시에 그들이 받지 못한 교육 실습, 교육 이론 등을 받도록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즉, 보완책을 곁들인 정규직화를 지지하는 것이죠. 어린 아이를 교육하는 경우에 필요한 전문성에 대해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동지가 말씀한 접근법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영국에서는 아마 1960년대, 어쩌면 1970년대, 아무튼 노동당 정부 하에서 초등과 중등 과정의 모든 교사들이 일정한 자격을 획득하도록 했습니다. 나중에는 16~19세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칼리지]에서도 교원들에게 일정 자격을 갖추도록 했는데, 저는 기본적으로 그게 옳다고 봅니다.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것은 그 나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고 그냥 부모가 아이들을 키우는 것과는 다른 겁니다. 단지 아이를 키워 봤다고 해서 비고츠키의 교육심리학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학생 중심적 학습이 어떤 건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교육 커리큘럼을 독자적으로 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다 훈련을 받아야 하는 건데, 그래서 자격 요건 자체는 옳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미 학교 현장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요구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교육 과정이 있다면 이를 이수할 수 있도록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그들이 어떤 대학 기관 같은 데 가서 필요한 학점을 따야 하는 게 있다면 1년이든 2년이든 그들이 연수를 받을 수 있도록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고 그 기간 동안은 학교 일을 쉴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학생들의 연령대에 따라서도 다른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유치원 교사와 초등 교사와 중등 교사에게 요구되는 것이 좀 다릅니다.
저는 또한 교사들이 학교 현장에서 서로의 수업을 관찰하고 그에 대해서 서로 피드백을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피드백이 불이익으로 연결되지 않으면서도 서로 배울 수 있는 여건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학교들을 방문 관찰하고 최상의 교육 방법을 배워 오는 것도 필요하고요.
한국 정부는 국가 수준의 성교육 표준안을 만들어서 올해 각 학교에 배포를 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남성은 누드에 약하고 여성은 무드에 약하다’든가, ‘여성이 데이트 비용을 분담하지 않으면 남성이 그 대가를 요구하면서 데이트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든가 하는 황당한 내용이 많고,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이 완전히 삭제돼 있습니다. 이에 맞서 여성 단체들과 성소수자 단체들이 항의 기자회견을 하거나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데요, 영국에서도 성교육과 관련한 문제가 중요한 쟁점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간단하게 얘기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학교 성교육을 요구하는 캠페인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른바 1980년대에 AIDS ‘공황’ 사태가 벌어졌을 때 [보수당 총리] 마거릿 대처가 악명 높은 [지방정부법] 28조를 제정한 문제는 생생히 기억납니다. 학교 현장에서 성소수자들을 미화하거나 논하는 것을 금하는 역겨운 법률이었는데 결국에는 폐지가 됐죠. 그럼에도 이 법은 교사들이 성소수자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위축시키는 효과를 냈고, 올바르게도 좌파, 사회주의자, LGBT 공동체가 그에 맞서서 싸웠습니다.
또 다른 쟁점은 부모들이 강력하게 요구하면 자기 자녀가 성교육을 못 받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사는 타워햄리츠에서도 최근에 어떤 학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성교육 시행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로 해당 초등학교의 교장이 사과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비슷한 캠페인에 참여한 학부모 중 한 명과 저는 논쟁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주 어린 아이들한테도 성교육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주장했고 그 학부모들이 틀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한 학부모는 성교육 내용이 너무 적나라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아이들이 이미 보고 있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 알면 아마 더 놀라실 걸요?” 하고 반문했습니다.
저는 부모들이 자기 자녀가 성교육을 받지 못하도록 선택할 권리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누구나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죠.
제가 일한 타워햄리츠 지역은 영국에서, 원치 않게 임신한 10대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상담 책임자였을 때 저는 지역의 병원에서 직접 학교로 와서 아이들에게 성교육을 시키도록 했습니다.
제가 근무한 곳은 여학교였는데 남녀가 같이 있는 간호사 팀이 성교육을 하러 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교육 전문가들이었고 정말 잘 했습니다. 플라스틱으로 된 성기 모형 같은 것들도 가져 와서 책상에 올려 놓고 콘돔 끼우는 과정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곳 학생들은 90퍼센트가 무슬림이고 방글라데시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일부 교사들은 그 성교육 장면을 불편해 했고 저는 “당신들이 딱히 여기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했어요. 그러나 정작 학생들한테서는 어떤 불만도 접수되지 않았습니다. 또 학생들이 영리하게도 부모들한테 알리지 않았습니다.(웃음)
그루밍처럼 아이들을 성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성인 여성들한테도 그루밍 같은 시도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성인에 대한 그루밍도 처벌을 요구해야 하는 것일지 궁금합니다. 두 번째는 요새 성폭력 사건 같은 게 대학 안에서도 많이 벌어져 학생회 등이 반성폭력 학칙 제정 운동을 하기도 하는데 참고할 만한 외국 사례가 있을까요?
저는 그루밍 문제를 다룰 때, 어떻게 처벌할지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여성이 자기의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해서 자신감과 명확한 의식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핵심적 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여성이 자신감을 갖는 것은 자기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고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갖고 당당하게 사회 주체로 살아갈 거라는 전망이 있는 것과 연결됩니다.
성교육을 받는 것뿐 아니라 모든 과목에서 여학생들도 남학생들 못지 않게, 그 이상으로 자신감을 갖도록 해주고, 교육적 지원을 해주고, 어떤 직업이든 여성도 할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캠페인들이 중요합니다.
영국에는 성차별금지법 제정의 한 결과로 여성 소방관들이 탄생했는데 처음에는 남성 소방관들에게 ‘문화적 쇼크’를 일으켰습니다. 그때까지 소방관은 주로 참전 용사 출신 남성들이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와 동시에 여성뿐 아니라 소수 인종 남성들도 더 많이 소방관이 됐습니다. 예전에는 주로 거의 백인 남성들이었죠.
학교 현장에서도 여학생들에게 ‘여성 직종’만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들을 보도록 장려하는 프로그램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 덕택에 예전에는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건축가 같은 직업에도 오늘날에는 여성들이 진출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아직 여성들이 많이 진출하지 않은 수학이나 과학 분야에서 여학생들이 더 좋은 성적을 거두도록 장려하는 프로그램들도 많이 있고, 그 일환으로 과학과 수학계에서 성공한 여성들을 ‘롤 모델 삼기’ 같은 움직임도 있습니다. 여성들이 더 넓은 가능성을 모색하고 그들의 전망을 더 높여주려는 시도입니다.
물론 여학생들뿐 아니라 남학생들에게도 ‘너는 노동계급이니까, 유색인종이니까 상위 계층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따위의 생각이나 자격지심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 주는 프로그램들이 운용될 필요가 있습니다. 설령 학교 교육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게 한계가 있더라도 교사들은 이런 프로그램들을 요구하며 계속 도전해야 합니다.
반성폭력 학칙 관련해서는, 미국의 일부 대학들은 학칙 제정보다도 더 멀리 나가는 것 같습니다. 학생들에게 특정 규칙에 따르겠다는 서명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데서는 심지어 학생들이 “나는 성관계 이전에 명시적인 동의를 얻어 내겠다”는 규약에 의무적으로 서명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회 문제에 대해 이렇게 규약과 규제로 대응하는 것은,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개인들과 그들을 이어주는 시장만 존재한다고 여기며 시장이 낳은 나쁜 결과들을 규제로 대응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물론 신자유주의자들은 더 나아가 규제를 대거 없애버리자고 말하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대학이라는 것이 하나의 공동체이고 그 안에서 여성이나 성소수자가 평등한 주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평등과 상호 존중의 원칙에 위배되는 행사가 교내에서 벌어진다면, 예컨대 〈플레이보이〉의 ‘바니걸’이 들어온다거나 아니면 여성차별적 행사가 열릴 때 우리는 그에 맞서 캠페인을 벌여야 합니다.
또는 강간 사건이 벌어지면 예컨대 하루를 정해서 대학 내 모든 강의 시간에 성폭력이란 무엇이고 강간이란 무엇이고 그에 대해서 어떤 편견들이 있는지 교육하는 자리를 만들라고 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배 남학생들이 새내기 여학생들을 손쉬운 ‘먹잇감’으로 여기는 생각에 맞서서 캠페인을 벌일 수 있습니다. 강사들과 교수들이 솔선수범해서 학생들을 남녀 또는 성소수자 불문하고 똑같이 대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것이 학생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성차별적 또는 성소수자 차별적 언행을 할 경우에 강사들이 나서서 그걸 제지하도록 압력을 넣어야 합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교내 문제든 사회적 문제든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함께 투쟁에 나설 때 학내에서 평등한 관계도 더 증진된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강간을 자행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쓰인 문서에 서명하게 만드는 것은 불행히도 강간을 막는 데 효과가 없습니다. 그게 효과가 있었다면 강간이 진즉 사라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