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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말뿐인 페미니즘

[이 글은 지난 7월 21일 맑시즘 워크숍 ‘문재인 정부와 페미니즘’에서 발표한 내용을 그 뒤 상황 변화를 반영해 대폭 수정·보완한 것이다. 이 강연을 녹취해 준 장미순 씨에게 감사드린다]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여성 집회를 기록한 불법촬영('몰카') 항의 운동 8월 4일 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이미진

문재인이 대선에서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해서 많은 여성들이 변화를 기대했다. 하지만 갈수록 실망이 늘어났고 많은 여성들이 문재인에게 분노하고 있다.

지방선거 뒤 문재인이 급속하게 우경화하면서 지지율이 급락해 8월 말에는 53퍼센트까지 낮아졌다. 특히, 일자리 축소, 최저임금 개악 등 노동개악과 알량한 복지 대책 등이 노동계급과 서민의 불만을 샀다. 문재인 지지율 하락에는 말뿐인 성평등 정책에 대한 여성들의 불만도 작용했다.

문재인은 “성평등을 적극 실현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라는 공언과 달리, 지금껏 상징적이거나 미미한 조처만 실행했다. 첫 내각 임명 때 외교부 장관·고용노동부 장관·보훈처장 등 주요 보직에 여성을 임명하며 ‘내각의 30퍼센트 여성 할당’ 공약 달성을 공표했지만, 노동계급 여성들을 위한 조처는 미미했다.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약속은 생색내기에 그쳤고 성별 임금격차 해소책도 거의 내놓지 않았다. 성별 임금격차가 OECD 평균 14.1퍼센트의 2배가 넘는 37퍼센트를 기록하며 OECD 1위를 19년째 차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성별 임금격차는 여성에게 맡겨진 과중한 양육 부담, 장시간 노동체제, 승진 차별 등 사회의 구조와 관행이 결합된 결과다. 하지만 문재인은 임금 수준을 공개하는 성별임금공시제처럼 실효성 없는 대책이나, 승진할당제처럼 소수 여성에게 혜택을 주는 대책만 제시했을 뿐이다.

반면 여성 노동자 대부분이 최저임금제의 영향을 받는데도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을 약간 올려주다가 도로 빼앗는 개악을 자행했다. 또, 박근혜 정부의 적폐로 꼽혔던 시간제 (저질) 일자리 양산 정책을 폐지하지 않고 계속 유지하고 있다. 최근 문재인 정부는 노동유연화 확대를 노골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 운운하지만 노동시간 단축은 지연시키고 양육 지원은 여전히 생색내기 수준이다. 쉬운 해고, 의료보험·국민연금 개악 등도 추진하고 있다. 결국 노동계급 여성들이 직장에서 혹사당하면서도 집에서 양육·노인 부양 등도 소홀히 하지 말라고 주문하는 셈이다.

고용 악화, 커진 소득격차 등으로 문재인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자 최근 문재인 정부는 복지 예산을 늘렸다. 하지만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 심화를 막는 게 목적이어서 찔끔 인상 수준이다. 또한 의료 영리화 등처럼 복지 증대를 상쇄시키는 정책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문재인에 대한 여성들의 실망은 5월에 ‘불법촬영 편파수사’에 항의하는 대규모 운동으로 분출했다. 노동정책은 정부 초기부터 노동자들에게 기대와 불만을 동시에 샀다. 최저임금 개악 등으로 문재인 정부의 친자본주의적 본색이 분명히 드러나자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여기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대거 포함됐다.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 집회 등 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지방선거 직후 열린 민주노총 비정규직 철폐 집회에는 무려 6만~7만 명이 모였는데, 대열의 절반 이상이 학교 비정규직 등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이 든 “사기 치지 마라”라는 손팻말은 문재인 정부의 본질을 선명하게 폭로했다.

노동정책과 성평등 정책을 분리해 별개 문제로 취급하는 경향이 운동 내에서 강하지만, 이 둘은 결코 별개 문제가 아니다. 여성의 다수가 노동계급에 속하므로 친자본주의적 노동정책은 여성 대부분의 조건을 후퇴시킨다. 의료, 국민연금 개악 등과 같은 복지 후퇴도 대다수 여성들의 생활조건을 악화시킨다. 문재인 정부의 ‘페미니즘’이 노동계급 여성에게는 생색내기 이상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생색내기

문재인 정부는 모호한 언사를 사용하면서 지배계급과 자신을 지지하는 진보 염원 대중 사이에서 아슬아슬 한 줄타기를 해 왔다. 낙태 문제에서 이런 줄타기가 두드러졌다. 2017년 10월 낙태죄 폐지와 임신중절약(미프진) 도입 청원에 23만 5천여 명이 참가했다. 청와대 민정수석 조국은 개혁을 암시만 할 뿐 알맹이 없는 답변을 하며 헌법재판소로 공을 떠넘겼다.

올해 문재인 정부는 낙태죄 유지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최근 보건복지부는 낙태 처벌을 강화한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 시행을 기습 공포했다. 직선제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의사들이 낙태 수술 거부를 선언하며 반발하자 하루 만에 헌재 판결 때까지 시행을 유보했지만, 개정안을 철회하지는 않았다.(그래서 직선제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모자보건법 개정을 요구하며 낙태 수술 거부를 계속할 방침임을 시사했다.) 보건복지부는 올해 10월 낙태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인데, 조사 항목이 낙태죄 찬성 쪽으로 편향돼 있음이 며칠 전 폭로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가 낙태죄 존속을 원한다는 것은 올해 5월 낙태죄 헌법소원 공개변론을 앞두고 법무부가 헌재에 낸 공개변론서에서도 얼핏 드러났다. 법무부는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을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 및 출산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면서 낙태죄 폐지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최근 문재인 정부는 올해 2분기 출산율이 0.97로 떨어졌다며 큰 우려를 나타냈다.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도 ‘세계 최저인 0.9명 대 출산율 쇼크’를 대서특필했다. 여성을 아이 낳는 도구로 여기는 보수파들은 낙태죄 폐지가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더 낮출까 봐 우려한다.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폐지 판결을 올해 8월에 내릴 듯하다가 다음 재판부로 기약 없이 미뤄 버린 것도 이와 관련 있다. 9월 19일 헌재 재판관 5명이 교체돼, 심리부터 다시 해야 하므로 헌재의 낙태죄 판결이 언제 나올지는 알 수 없다.

지난해 〈한겨레〉, 〈경향신문〉 등 자유주의 친정부 언론들은 2012년 낙태죄 합헌 판결 이후 헌재 구성이 더 자유주의적으로 바뀌었으므로 올해 낙태죄 위헌 판결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다며 사람들의 기대를 부추겼다.

〈노동자 연대〉 신문은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크지 않는 한, 출산률이 매우 낮은 나라에서 낙태죄 위헌 판결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배계급이 출산과 양육을 위한 조건 개선에 큰 관심이 없고 여전히 개별 가정의 여성들에게 떠넘겨 노동력을 값싸게 재생산하려 들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도 병역을 걱정하는 한국의 지배계급이 낙태죄 폐지를 꺼리는 이유다.

따라서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받으려면 문재인 정부와 헌재에 조금치도 기대를 걸지 말고 독립적으로 대중 투쟁을 해야 한다. 향후 몇 년을 내다보며 대중 운동을 건설해 지배계급과 보수파들을 압박해야 한다. 낙태권 운동이 노동계급의 여성과 남성들이 대거 동참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할 때 낙태죄 폐지와 낙태 합법화가 성취될 수 있다.

여성운동

문재인 정부의 성평등이 말뿐인 것에 불만을 품은 여성들은 5월부터 대중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고 그 규모가 갈수록 커졌다. 올해 5~8월 불법촬영(‘몰카’)에 항의하는 운동은 네 차례 집회에 연인원 17만~18만여 명이 참가했다.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3차 집회 뒤에는 ‘문재인 재기해’ 구호를 트집 잡아 친문 인사들과 언론들이 마녀사냥을 벌였지만, 8월 4일 광화문 집회에는 더 많은 여성들이 참가했다(주최 측 추산 7만 명). 이 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머잖아 5차 집회 일정이 공지될 듯하다.

10대·20대의 학생과 젊은 노동계급 여성들이 참가자의 대부분을 이룬 이 운동은 기존 주류 여성운동 밖에서 일어났다. 여성들은 불법촬영(‘몰카’)에 대한 미온적 수사와 불충분한 정부 대책에 분노했을 뿐 아니라 성별 임금격차, 승진 차별, 기업과 국가 요직에 여성이 소수인 현실 등 사회의 성차별 전반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연성 아나키즘 성향을 보인 집회 주최 측은 성차별에 대한 강한 분노의 일환으로 분리주의를 강하게 드러내며 문재인 정부, 입법부, 사법부 등 국가기관 전반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엔지오가 주도하는 주류 여성운동은 ‘불편한 용기’가 이끈 불법촬영 항의 운동보다 훨씬 덜 두드러지긴 했지만 올해 미투와 낙태죄 폐지 운동 등 의미 있는 집회를 조직했다. 미투시민행동이 주최한 안희정 무죄 판결 항의 집회에는 여성들이 대거 참가해 2만 명이 참가했다.

안희정 무죄 판결에 분노한 시위대 8월 18일 2만 명이 모인 ‘안희정 1심 판결 규탄 집회’ ⓒ조승진

불법촬영 항의 운동, 낙태권 운동, 미투 운동은 그 운동의 참가자 구성, 양상, 주최 측의 성향 등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모두 여성 천대·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에 대한 여성들의 열망을 담고 있다. 차별에 저항하며 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여성들의 투쟁은 앞으로 더 확대되고 심화돼야 한다.

올해 차별에 맞선 여성들의 운동이 크게 성장하면서 문재인의 페미니즘도 시험대에 올랐다. 5월 이후 여성들의 분노가 폭발하자 문재인 정부는 처음에는 몇 가지 대책을 제시하며 달래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충분한 대책에 참가자들은 만족하지 않았고 불법촬영 항의 운동은 계속 확대돼 왔다.

이 운동이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길 바라는 문재인은 최근 진선미 민주당 전 원내수석부대표를 여성가족부 장관 자리에 앉혔다. 진선미는 2015년 국회에서 소라넷 폐지를 공론화해서 소라넷 폐지 운동을 벌인 메갈리아의 공식 지지를 받은 바 있다. 그래서 문재인은 진선미가 이 운동을 잘 관리해 주기를 기대한다.

진선미가 문재인의 이런 바람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여전히 매우 불충분하다. 특히, 불법촬영물 유포의 주범 중 하나인 웹하드 등과 같은 기업 규제에 열의가 전혀 없다.

문재인은 페미니스트 각료 등을 내세워 계속 ‘성평등 정부’ 행세를 하려는 한편, 여성운동을 길들여 결국 약화시키려 할 것이다. 따라서 여성운동이 실질적 양보를 얻어 내고 큰 전진을 이루려면 문재인 정부에게서 독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또한 여성운동은 더 개방적으로 연대를 건설해 운동의 저변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 여성 차별 반대 운동은 노동계급의 여성과 남성이 대거 동참하는 더 크고 강력한 운동으로 성장해야 한다.

여성 차별에 맞선 운동이 효과적이 되려면

문재인의 성평등 정책이 모순돼 생색내기에 그치는 것은 이 정부가 ‘남성 권력’이어서가 아니라 자본가 계급에 기반을 둔 정부이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여러 포퓰리즘적 언사를 사용하긴 하지만 기업들의 수익성 회복, 국제 경쟁력 강화가 최고 목표이다. 그래서 기업들의 이윤을 침해하는 개혁은 한사코 피하려 든다. 최초의 여성 노동부 장관으로 기대를 모았던 김영주가 금융권의 성차별 채용비리 전수조사를 “금융권 혼란”을 이유로 거부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위기이고 한국 경제도 더 악화되고 있다. 국가들 간의 경제적 경쟁뿐 아니라 지정학적 경쟁도 심화되고 있다. 일자리 축소, 노동조건 후퇴, 복지 삭감 압력들은 더욱 커지고 있다. 따라서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이 없다면 개혁 성취는커녕 후퇴를 막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여성 각료들이 늘었지만 노동계급과 서민층 여성들을 위한 개혁은 미미했다. 오히려 정리해고, 비정규직 양산, 복지 축소 등 노동계급 여성들의 삶을 후퇴시키는 공격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났다. 당시 여성 각료들도 노동계급 여성들의 삶을 공격하는 정책에 침묵하거나 협조했다. 이것은 이들 정부의 우선순위가 자본주의 이윤율을 회복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불법촬영, 낙태권 부정, 여성 고용과 임금 차별 등 여성 천대와 차별은 남성들의 본성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계급구조와 자본주의 가족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노동계급 여성이 개별 가정에서 아이를 무보수로 길러내는 것은 자본가 계급에 필요한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일이다. 노인 부양과 간병 등 가족의 돌봄노동도 자본주의 국가의 복지 지출 비용을 줄여줘 체제 유지에 기여한다.

대중매체, 교육기관, 국가기관 등은 여성에 대한 보수적 편견을 거듭 부추겨 이런 일들을 노동계급 여성들에게 떠넘긴다. 여성 차별은 임금 등 노동조건을 낮추고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데에도 유용하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여성 차별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여성 차별에 맞선 운동이 효과적이 되려면 체제를 지탱하는 지배계급의 권력에 도전해야 한다. 여성 차별 반대 운동이 착취에 맞선 노동계급의 투쟁과 연결된다면 그런 도전이 가능하다. 노동계급은 자본가들의 이윤을 타격할 힘이 있기에 지배계급에 실질적 양보를 강제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자체를 타도할 잠재력이 있다.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가가 증대하면서 노동계급의 일부로서 여성들의 잠재력도 커지고 있다.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 이후에 미조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수만 명씩 가입했고 여성들의 노조 가입도 크게 늘었다. 2010년 이후 늘어난 노동조합원 중 여성 비중이 더 높다고 한다. 여성 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 투쟁하면서 자신감을 높이고 의식과 조직을 성장시켜 왔다. 또한 미조직 여성들(대개 노동계급 여성들인)도 불법촬영 항의 운동, 낙태권 운동 등 여러 투쟁을 벌이고 있다.

여성의 대다수가 노동계급이기에 여성 차별과 착취에 맞선 운동은 연결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노동운동은 차별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운동을 지지하며 운동이 확대·심화될 수 있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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