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포비아 페미니즘》(박가분 지음, 인간사랑):
페미니즘 일각의 문제점에 대한 통찰을 보여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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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비아 페미니즘》은 청년 ‘진보 논객’으로 잘 알려진 박가분 씨의 최근작이다.
저자는 “젠더 이슈에 대한 논의는 페미니스트에게만 맡기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며 “‘약자의 권리를 옹호한다’는 백지수표 아래 양해되었던 페미니즘 일각의 잘못된 관행과 담론에 일련의 비판적 논점을 제기”한다.
물론 저자는 일베 등 “넷상의 우익적이고 퇴행적인 경향”에 대해서는 분명히 거리를 두고,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전제 위에서 논의를 전개한다. 저자는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는 비非 페미니스트이지만 안티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 … 안티 페미니즘은 제가 볼 때 페미니즘을 극복할 수 있는 보편적 규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에 대한 반대라면 좌파든 우파든, 진보든 보수이든, 퇴행이든 발전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긍정하는 입장입니다. 그런 종류의 안티 페미니즘과 제가 동일시된다면 저는 적극 사양하고 싶습니다.”(박가분의 블로그)
남 대 여의 성별 환원론에 대한 비판
저자는 일부 페미니즘과 정체성 정치가 모든 문제를 남 대 여의 구도로만 환원해 여러 오류를 낳는다고 여러 차례 비판한다.
저자는 트럼프 당선을 둘러싼 논란을 그 한 사례로 다룬다. 힐러리가 아닌 트럼프가 당선한 결과를 두고 각종 언론들은 ‘정체성 담론’에 입각해 ‘유권자들의 보수·반동화’, ‘백인 남성 노동자들의 여성 혐오’ 프레임으로 해석했지만, 진실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 러스트 벨트에 거주하는 중하층 백인 노동자들이 겪는 소외감과 일자리의 감소” 등 자본주의의 사회경제적 메커니즘이 트럼프 당선에 결정적 요소였다고 보는 게 진실에 더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무시하고 트럼프에 표를 던진 중하층 백인 노동자들을 단순히 [여성·성소수자] 혐오주의자나 무식한 멍청이로 낙인 찍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계급 불평등이라는 진정한 이슈를 사장시켰다고 지적한다.
저자의 말대로 ‘유권자의 보수화’나 ‘여성 혐오’ 프레임은 민주당 전임 정부가 행한 반反 노동자적 정책에 미국 노동계급이 환멸을 느껴 힐러리에 냉담했다는 중요한 진실을 가린다.
저자는 요즘 진보정당이 노동계급 지향성 버리기를 선호하는 경향도 비판한다. 그는 과거의 진보정당은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을 지향한다는 공통분모를 공유하기라도 했지만, 지금은 “각자의 정체성 정치의 분할과 분열을 그대로 수용한 채 자기 내부에서도 그러한 대립과 혼란을 반복해서 재생하고 있다”고 개탄한다.
이런 평가를 내린 데에는 저자가 한때 속했던 진보신당-노동당에서의 경험도 크게 작용한 듯하다. 실제 최근 노동당에서는 근본적 페미니즘이 심각한 내분을 촉발했다.(관련 기사: 본지 230호 ‘노동당 내분의 정치학 ― 근본적 페미니즘, “노동” 그리고 선거 정치’)
저자가 말하는 “계급”의 의미는 다소 불분명해 보이고 고전 마르크스주의 개념과도 차이가 있는 듯하다. 또한 진보정당의 현 상태에 대한 전반적 진단도 다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저자는 정체성 정치가 현실의 계급 분단을 흐리고 계급을 파편화시킨다는 합리적 핵심을 잘 포착한 듯하다.
“포비아 페미니즘”
이 책은 근본적 페미니즘이 “남녀 간의 혐오감과 공포심을 비현실적인 수준으로 부추기는” 경향에 대해서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제목인 “포비아 페미니즘”도 이런 문제의식을 담은 것이다. 저자는 이런 류의 페미니즘은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음을 조목조목 논증한다.
저자는 강남역 사건 이후 대유행한 “여성혐오” 용어의 남용에 대해 다룬다. 지난해 여러 언론들과 대다수 페미니스트들은 강남역 사건을 “여성혐오 살인”으로 규정했고, 이는 ‘우리 사회가 여성혐오 살해의 위험이 만연해 있는 여성혐오 사회’라는 주장으로 손쉽게 연결됐다. 이런 주장들은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이고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라는 근본적 페미니즘 고유의 주장을 입증하는 것처럼 사용됐다.
물론 강남역 사건이 많은 여성들에게 준 충격과 슬픔, 공포심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진보·좌파가 현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해선 안 된다. 이것은 진정한 해결책과 대안 제시에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노동자 연대〉가 강남역 사건과 흉악범죄, 그리고 ‘여성혐오 사회’ 담론에 대해 대다수 페미니스트들의 견해를 거슬러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대안을 제시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관련 기사: 본지 174호 ‘강남역 살인사건 ― 여성차별, 흉악범죄, 자본주의’, 176호 ‘‘여성 혐오 사회’ 담론은 여성 차별에 맞선 운동에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는가?’)
저자는 ‘여성혐오 살해 위험 만연’이라는 주장이 심각한 통계 왜곡에 의한 억측임을 실증적 근거를 들어 주장한다. 또한 강남역 사건 당시 유행했던 “대한민국 강력범죄 피해자의 80퍼센트는 여성”이라는 주장의 실체에 대해서도 파고든다. 그는 이 통계가 ‘여성혐오 사회’의 근거로 제시되곤 하지만, 이런 일반화는 한국의 강력범죄 분류 통계에 대한 무지에 기초해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사건의 본질과 무관한 “여성혐오” 프레임 씌우기로 범죄의 공포를 과장하는 것은 정작 범죄 방지대책에 대한 토론을 사장시킨다고 지적한다. 또한 불행하게도 온라인에서의 소모적인 남녀 대립의 문제로 비화하는 결과만 낳았다고 지적한다.
이는 근본적 페미니즘 정치가 예비한 결과였다. 그들이 강력범죄에 대한 공포를 과장한 데는 근본적 페미니즘의 남 대 여 프레임이 크게 작용했을 법하다. 즉, 자신들의 이론에 현실을 끼워 맞춘 셈이다.
저자는 당시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마치 강남역 살인사건이 무조건 여성에 대한 증오범죄로 규정되어야만 여성범죄 문제를 더 잘 이슈화할 수 있다는 듯이” 행동했다고 꼬집기도 했다.
또한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일방적인 사건 규정과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여성 혐오’라고 몰아붙이는 일마저 생길 지경이었다”며 당시 페미니즘 일각의 독단성을 비판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여성혐오에 항의하는 측의 담론이야말로 혐오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실제로 강남역 사건을 ‘여성혐오 살해’로 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퀴어퍼레이드 주최측이 노동자연대에 배정된 부스를 일방적으로 취소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이밖에도 저자는 여러 페미니스트들이 개념을 새로 창조하거나 기존 개념을 사전적 의미 이상으로 확장해 놓고도(미소지니, 가스라이팅, 젠더권력, 맨스플레인, 플러팅 등등), 아무런 설명이나 논증을 하지 않은 채 되레 그 개념을 공유하지 않는 상대방을 비난하는 관행도 비판했다. 개념의 자의적인 무한 확장은 정작 아무것도 설명해 주는 게 없고, 페미니즘 내에서조차 정확한 합의가 없어 마치 그리스도교 교리 논쟁처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메갈리아에 대한 무비판적 정당화 거부
저자는 정의당 내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메갈리아와 워마드에 대해서도 과감한 비판을 이어간다.
우선, 메갈리아가 설정한 남녀 대결 프레임의 역효과를 직시해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합리적 핵심이 있다. 저자는 메갈리아와 워마드 내에서 사용된 용어 중에는 심지어 남성 성소수자들(“똥꼬충”, “게이충”), 남성 어린이(“한남유충”), 남성 장애인(“윽엑”, “장애한남”), 산업재해를 당한 남성 비정규직(“태일해”)에 대한 혐오와 조롱 어린 공격도 있었음을 고발했다. 심지어 트랜스젠더를 “젠신병자”(‘남성으로 태어났으면서 자신이 여성이라고 착각하는 정신병자’라는 뜻으로 사용됨)라고 부르는 일조차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마치 여성에 의해 사용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무해한 저항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듯이” 메갈리아를 무비판적으로 옹호한 페미니스트들의 이중잣대를 저자는 통렬히 비판한다.
실제로 메갈리아 내에서 “한남충” 등 남성 일반을 적대시하는 용어가 공공연히 사용되던 상황은 차별받는 집단들조차 폄하하는 분위기로 쉽게 나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메갈리아가 설정한 ‘남 대 여’의 근본적 페미니즘이 진보 성향의 여성과 남성들조차 반발하게 만들 만큼 불필요한 분열을 조장했음을 무시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메갈리아를 그저 ‘페미니즘의 새로운 물결’로 추어올리기만 한 행태는 반성돼야 한다.
다만 저자의 메갈리아 비판에는 균형을 잃은 부분도 있다. 저자는 메갈리아 가입자들이 모두 소수자 혐오에 동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또, 메갈리아와 워마드를 잘 구분하지 않는 것도 아쉽다.
특히 메갈리아를 일베와 마찬가지로 “반사회적 혐오사이트”로 규정하는 것은 부적절했다. 이것은 ‘미러링’이라는 형식만 보고, 사회적 기반과 배경은 보지 않은 것이다. 메갈리아 사이트에 가입한 사람들이나 이들을 응원한 사람들은 여성 차별을 반대한 사람들이고, 다수는 진보적 개혁을 지지했을 사람들이다.(박근혜 지지 글이 상당수 올라온 워마드는 메갈리아에서 분열해 나간 쪽이다.)
또한 저자는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김자연 성우가 게임회사 넥슨에서 계약 해지된 것을 부당하다고 보지 않지만, 이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한 부당해고였다.(관련 기사: 본지 178호 ‘정의당 지도부의 넥슨 항의 논평 철회를 둘러싼 논쟁’)
이런 아쉬움이 있지만, 저자는 근본적 페미니즘의 또 다른 역효과에 대해서도 통찰력 있게 지적한다. 예컨대 아무런 사실 검증도 없이 (성폭력을 당했다는) 여성의 진술만을 절대화함으로써 나타난 폐해에 대해서도 여러 사례를 들어 다룬다.
경희대 서정범 교수의 무고 피해 사건, 이른바 ‘#문화예술계_성폭력’ 운동에서 “성폭력과 상관없는 데이트 실패나 삼각관계의 파국 등이 경중과 상관없이 도매금으로 ‘성폭력’으로 묶인 [사례]” 등.
여성 웹툰 작가 이자혜 씨의 사례도 온라인 폭로 맹신의 문제점을 보여 준다. 이 작가가 강간을 사주·방조했다는 한 여성의 온라인 폭로만으로 아무런 사실 검증도 없이 그의 작품들이 폐기처분됐다. 그러나 이 작가의 자세한 입증과 소송 결과는 피해호소 여성의 진실성에 대한 합리적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자세한 내용은 이자혜의 입장문 참고)
반편향
그러나 저자가 근본적 페미니즘의 일면성과 과도함에 워낙 데서인지, 젠더 이슈에서 다소 균형을 잃은 듯한 부분도 있다. 그 결과 여성차별의 현실을 다소 축소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가령, 저자는 페미니즘 교육을 했다는 이유로 우익에게 마녀사냥을 당한 최현희 교사를 방어하지 않는다. 저자는 최 교사가 일부 메갈리아 용어를 썼다거나 수업시간에 남학생에 핀잔 주는 말을 했다는 일부 보수언론의 보도를 근거로 최 교사를 비판한다.
그러나 보수언론들의 보도를 다 사실로 단정할 수 없거니와, 성별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최 교사의 수업 내용은 기본적으로 정당하다. 무엇보다, 우익들은 동성애 혐오 선동의 의도에서 최 교사를 공격했다.(관련 기사: 본지 220호 ‘〈조선일보〉는 ‘페미니즘 북클럽’ 교사 마녀사냥과 동성애 혐오 부추기기 중단하라’) 이런 상황에서 최 교사를 우익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를 꺼리는 것은 옳지 않다.
또 다른 사례는 성별임금격차 문제다. 저자가 이 문제에 큰 비중을 두고 있고 실제로도 중요한 문제이므로 이 부분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OECD 최대인 한국의 성별임금격차가 심각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지표상 임금격차는 “그 자체로 여성차별의 결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반론 전에, 저자의 주장에서 합리적 측면을 먼저 인정해야 공정할 것이다. 가령, 저자는 남성 노동자가 여성 노동자의 저임금에서 이득을 얻지 않는다고 본다. 또한 여성 노동자에게 주로 육아부담이 전가되는 현실의 반대편에는 남성 노동자들이 주된 생계부양자의 짐을 지는 현실이 존재하고, 남성 노동자들이 살인적 노동시간과 산업재해에 더 많이 시달린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저자는 “남녀가 임금격차에 관해서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고 제시한다. 장시간 노동관행이 불평등한 가사 분담과 임금 격차의 주범이므로 노동시간을 줄이자고 제안한다. 또한 경력단절을 겪는 여성에 대한 취업 지원과 남성 육아휴직의 확대에도 적극 찬성한다.
저자의 이런 접근법은 ‘여성의 저임금에 남성 노동자도 공모했다’는 페미니즘 일각의 음모론이나 남성 노동자가 여성 차별에서 특권을 누리는 집단인 양 취급하는 진보진영 내 흔한 격차론보다는 훨씬 더 현실에 부합한다.
그런데 저자는 성별임금격차가 체계적 여성차별의 결과임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 하지만 저자가 마치 차별과 무관한 요소처럼 나열한 근속 연수, 직종 선택, 노동시간, 근로 형태 등에 이미 체계적인 여성 차별이 반영돼 있다. 여성의 평균 근속 연수가 남성보다 짧은 이유는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때문이다. 여성이 저임금 직군에 몰리게 된 것도, 20대 후반까지는 남녀 비슷한 비정규직 비율이 30~40대를 경과하며 달라지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진화심리학을 빌어, 남성은 본래부터 더 위험하고 장시간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 리스크 감수 성향이 있고 여성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임금격차 문제를 설명한다. 물론 저자는 진화심리학을 여성비하적 의도로 수용하지는 않는다. 그는 남성과 여성은 다른 성향이 있을 뿐, 그것이 우열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은 결국 여성의 노동시장 내 낮은 지위가 여성의 성향에 따른 선택의 결과라는 얘기와 다름없게 된다. 이는 성차별의 구조적 원인을 흐린다. 또한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남성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과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혹사당하는 것도 결국 남성적 성향에 따른 자발적 선택일 뿐이게 된다. 이처럼 인간본성론과 비슷하게 들리는 저자의 주장은 결국 그의 근본적 페미니즘 비판에 대한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저자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남성이 어디선가 이득과 손해를 본 만큼 여성이 다른 영역에서 그와 비슷한 이득과 손해를 보는 트레이드-오프 관계”라고 규정한다. 남녀가 차별 받는 영역이 서로 다를 뿐이지 여성만 차별 받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남성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과 위험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는 것에서 보듯 남성 전체가 특권층이라고 볼 순 없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는 것이 여성 차별을 희석시키는 것으로 연결될 이유는 전혀 없다. 여성 노동자들이 육아의 굴레 때문에 남성에 비해 노동시장 진출과 노동조건에서 체계적으로 더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된 것은 명백한 성차별이다.
저자는 남성 노동자가 여성 몫을 뺏는 게 아니라고만 말할 뿐, 여성 차별로부터 진정한 수혜를 얻는 자들이 자본가 계급과 자본주의 국가라는 점은 잘 보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임금격차 문제를 설명할 때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본가들에게는 건강하고 교육받은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길러내는 일이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이윤 논리 때문에 그 막대한 부담을 개별 가정의 여성들에게 주로 전가해 왔다. 또한 노동시장 내의 임금격차를 이용해 노동자들을 서로 이간질하고, 더 낮은 부문을 핑계로 임금인상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압박한다. 따라서 차별을 방치하는 것은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 모두에게 불리하고, 차별에 맞서 싸우는 데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더 자세한 내용은 본지 199호 ‘여전한 성별 임금격차 100:64 ― 왜 이토록 불평등한가? 어떻게 싸워야 하나?’ 참고)
한편 저자는 (비록 이 책에서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지만) 동성결혼 합법화를 지지한다. 아일랜드의 동성혼 합법화 국민투표 결과도 지지한다. 최근에는 한서희의 트렌스젠더 배제적 주장도 비판했고, 트랜스젠더를 “젠신병자”라고 조롱한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저자의 점진주의적 접근법은 성소수자의 권리를 일관되게 옹호하지 못하게 되는 난점도 낳는 듯하다. 가령 저자는 “차별적 사회제도에는 반대하면서도 그들[성소수자들]의 문화와 생활방식에는 거리감을 느끼는 중간파가 있다”며, 이런 “중간파”적 정치인들(맥락상 저자는 문재인도 그 한 사례로 여기는 듯하다)에게 너무 압박을 가하면 안 된다는 취지로 주장한다. 대선 당시 문재인의 “동성애 반대한다” 발언에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격분한 것에 대해 저자가 못마땅한 듯 서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문재인은 동성혼 합법화나 군대 내 동성애를 반대하는 등 제도적 차별도 옹호했다. 우익인 홍준표의 동성애 혐오 발언을 반박하기는커녕 동조해 힘을 실어준 것도 문제였다. 따라서 성소수자들이 당시 문재인 발언에 분개하고 항의한 것은 정당했다.[i]
결론
몇 년 전부터 시작된 페미니즘의 부흥 속에서 낙태죄, 성폭력과 직장 내 성희롱, 성별 임금격차 등 차별에 도전하려는 분위기가 늘어난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일각에서 수용된 남 대 여의 근본적 페미니즘과 정체성 정치는 그 일면성과 과도함 때문에 여러 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럴 때조차 대부분의 진보·좌파는 그저 회피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추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페미니즘 일각의 도덕주의적 정죄 분위기와 독단성이 자기 검열 분위기를 낳아 진보·좌파 내에서 깊이 있는 토론과 논쟁을 어렵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저자가 이런 세태에 눈치보지 않고 나름의 진보적 시선으로 소신껏 논쟁적인 젠더 이슈들을 정면돌파 한 것은 청량감을 준다. 또한 다소 치우칠 때도 있지만 근본적 페미니즘의 과도함과 일면성, 역효과에 대한 흔치 않은 비판적 분석은 흥미롭다.
이런 고유의 강점들 때문에 이 책은 충분히 읽어 볼 가치가 있다.
[i] 저자가 다른 매체에서 하는 주장들 중에서도 문재인 정부를 두둔하는 듯한 내용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저자는 사드 배치 불가피론자이고, 문재인 정부가 “촛불을 계승했다”며 그 정부에 대한 좌파의 비판을 그저 기계적 관성으로 치부했다. 그래서 노동자연대를 비롯한 퇴진행동 내 주요 단체들의 촛불 1주년 시위가 청와대로 향한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