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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임금체계 개편:
직무급제는 (임금 격차를 해소하는) 공정한 임금체계인가?

지난 6월 19일 김동연 기획재정부 장관은 공공기관 호봉제를 폐지하고 직무급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직무급 중심 보수체계 개편 등 공공기관 관리체계를 전면 개편해 공공기관 혁신을 뒷받침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8월 31일에는 정향우 기획재정부 제도기획과장이 공공운수노조 등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인사혁신처가 공무원 직무급제 도입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김동연 장관은 “공공기관은 직무가치·성과·능력 등에 기반을 둔 보수체계로 가야 한다”고 지난해부터 공공연히 주장해 왔다. 그는 박근혜 정부 시절 추진되던 성과연봉제에 대해서도 “성과연봉제 시행은 필요하지만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게 문제였다”며 성과급 지속 추진 의지도 숨기지 않았다.

이미 올해 3월 초 정부가 ‘공공기관 경영 및 혁신에 관한 지침’을 제시하면서 성과연봉제 시행안을 포함시키려 했음이 드러난 바 있다. 그 한 달 전인 2월 ‘공무원보수 등의 업무지침’을 발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동연 장관은 정부 내의 우향우 선두주자로 알려져 있지만, 직무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 추진은 결코 그와 기재부 관료들만의 의지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친문 인사들은 임금체계 개편 방향이 직무성과급제임을 분명히 해 왔다.

가령 이용섭 전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은 지난해 7월 대한상의 회원기업 CEO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래 근무하면 무조건 봉급이 늘어나는 시스템을 지양하고, 업무 난이도와 성과를 따지는 직무성과급제로 바꿔 가겠다.” 이 부위원장은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성과연봉제가 “방향은 맞지만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문재인 대통령 자신이 이 같은 성격의 임금체계 개편이 필요함을 강조해 왔다. 이미 대통령 선거 운동 과정에서 문재인 후보는 이렇게 주장했다. “단순히 연공서열대로 임금이 올라가는 구조는 옳지 않고, 직무급제를 도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또, 지난해 10월 18일 일자리위원회 모두발언에서도 “직무와 능력에 따라 [보상받고] 노력·성과·보상 간 연계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임금체계를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평등”을 문제 삼는 “공정”

문재인 정부는 임금 공정성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가 말하는 “공정성 강화”는 바로 직무의 가치에 따라 기본급을 정하고, 노력과 성과에 따라 보상을 차별화하는 것이다.

공정성 강화를 강조하는 것은 기존 임금체계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공격의 주된 대상은 연공급제(호봉제)다. 연공급제는 “주로 근속이라는 연공적 요소에 의해 임금이 결정되는 체계”다. 재직 기간에 따라(더 오래 근무할수록)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

임금체계를 변화시키려는 정부와 기업들의 시도가 그동안 꾸준히 있었지만 연공급제는 여전히 한국 임금체계의 근간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의 2015년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임금체계의 호봉제 비중은 65퍼센트 이상으로 여전히 지배적이다.

문재인 정부는 연공급제가 저성장 시대에 적합하지 않고, 일자리 창출과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특히, 연공급제 하에서 고용형태별(정규직과 비정규직), 기업규모별(대기업과 중소기업) 임금 격차가 커졌다고 비판한다. 연공급제가 지배적인 임금체계라지만 그 이점은 노동조합이 있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나 누릴 수 있지,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와 경력 단절 여성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부는 같은 직무를 수행하면 나이, 근속연수, 성별, 고용형태 등과 관계없이 동일한 기본급을 받는 직무급제가 더 공정한 임금이라고 주장한다. 직무급은 직무평가에 의해 직무의 상대적 가치를 정하고 그에 따라 직무 등급을 매겨 임금 수준을 결정하는 임금체계다.

그러나 여기서 “공정”성이 “평등”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정 임금” 옹호자들은 “지나친 평등을 강조하[면] 공정성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유규창, ‘공정한 임금체계와 직무평가’, «월간 노동리뷰» 2018년 9월호, 한국노동연구원)

직무급 지지자들이 말하는 “공정 임금”은 과실물이 만들어지기까지 각자가 기여한 것에 따라 임금을 분배하는 것이다. 능력이나 노력 등이 기여의 기준이 된다. 능력이나 노력과 관계없이 똑같은 임금을 주는 것(“평등 임금”)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동일 노동을 하는데도 동일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강조한다. 이 말에는 동일하지 않은 노동을 하는데도 동일한 임금을 주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래서, 능력이 없는데도 단지 나이가 많다고 해서 능력 있고 성과를 내는 사람과 동일한 임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며 연공급제를 비판한다.

일반으로 자유주의자들은 “결과의 평등”이 기여나 노력을 무시한다고 본다. 그러나 능력과 노력에 따른 보상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상 능력과 노력을 근거로 임금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셈이다.(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직무급에서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직무급을 대안적 임금체계로 제시한 것이 문재인 정부가 처음은 아니다. 일찍이 1990년대 초부터 사용자들은 직무급 도입을 주장했다. 박근혜 정부도 〈합리적 입금체계 개편 매뉴얼〉에서 직무급제를 제시했다. 그뿐 아니라 〈비정규직 종합대책(안)〉’에서도 비정규직 차별의 근원적 해소 방안으로 직무성과급제의 확대 도입을 제시했다.

얼핏 보면 문재인 정부의 임금체계 개편은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성과연봉제를 직무 중심 체계로 대체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연속성이 훨씬 강하다. 둘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문재인 정부가 직무급제에 진보적 색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노동(직무)을 하는데도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중소기업에 다닌다는 이유로, 근속연수가 적다는 이유로 더 적은 임금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며 차별받는 사람들의 편인 것처럼 말하면서 말이다.

올해 6월 30일 비정규직철폐 전국노동자대회에 모인 8만의 노동자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직무급제에 진보적 색깔을 입혀 홍보할 진보계 인사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는 점도 이전, 우파 정부들과의 차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런 인사들을 활용하면 노동조합이 차별과 임금 격차 해소라는 명분을 거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파고들어 직무급제를 수용하게 만들려고 한다. 노동조합과의 협상 또는 공공기관 인사 운영에 노조 지도자들을 참여시키기는 또 다른 당근책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노동계 고위간부층 일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의 대안으로 직무에 따라 임금을 정하는 직무급을 검토해 왔다. 특히, 산업 또는 전 사회적으로 합의된 직무 가치에 따라 임금을 정하는 사회적 직무급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과 하청의 임금 격차도 줄일 수 있는 대안으로 여겨지며 검토돼 왔다.

사용자들은 왜 임금체계를 개편하는가?

그렇다면, 과연 직무급제는 공정한 임금일까? 직무급제는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도 연공급제보다 더 나은 임금체계일까?

공정한 임금이란 노동자가 제공한 노동만큼 그 대가를 받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친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은 노동세계에서 “자유롭고 공정한 교환”이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가치만큼 임금을 받지 못한다. 사용자는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의 일부만 임금으로 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가져간다. 마르크스는 이를 착취라고 불렀다. 이것이 바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고용해 이윤을 얻는 비결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공정한 노동에 대한 공정한 임금’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일하고 받는) 임금은 마치 노동의 대가인 것처럼 보인다. 이 외관은 착취를 은폐한다. 어느 만큼이 유급노동이고 어느 만큼이 무보수 노동인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농노는 가령 사흘은 자기 토지에서 일하고 사흘은 지주의 토지에서 무상으로 일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자신을 위한 노동과 지주를 위한 무보수 노동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자본주의 임금 제도는 그렇지 않다. 자본가들은 노동의 대가를 지불한다는 외관을 전제로, 임금 지불 방식의 변화를 이용해 착취의 증대를 꾀한다.

예를 들어, 시간급 하에서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생존 유지에 필요한 노동시간조차 보장하지 않고도 잉여 노동을 짜낼 수 있다. 일감이 없을 때 단시간만 일하는 노동자들이 최저 생계 수준도 벌지 못하는 것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일감이 많을 때 노동자들을 과도한 노동으로 내몰 수 있는 것이다. 낮은 시급은 노동시간의 연장을 자극하지만, 오래 일한 만큼 많이 주는 공정한 규칙인 것처럼 보인다.

또, 성과급 하에서 사용자는 임금이 생산자의 업무 수행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노동자 개개인이 스스로 더 열심히, 더 오래 일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 결과 성과급은 표준 노동강도 강화, 노동일 연장, 임금 인하를 위한 지렛대로 작용한다.

그러나 특정 임금체계가 어떤 조건 하에서도 사용자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다.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는 언제나 임금 수준, 즉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 가운데 얼마만큼을 가져갈 것인지를 둘러싸고 투쟁이 벌어진다. 이런 투쟁은 (특정 조건과 결합되면) 애초 사용자가 특정 임금체계에 기대한 효과를 다소 뒤틀어 버릴 수 있다.

가령 개수임금(생산량에 따른 임금체계)은 사용자들이 착취율을 높이기 위해 오랫동안 이용한 방식이었다. 19세기 중반부터 19세기 말까지 영국 노동자들은 개수임금 도입에 반대해 싸웠다. 그러다 19세기 말 개수임금 도입 반대 투쟁이 패배하면서 개수임금 방식이 확대됐다. 개수임금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대는 제1차세계대전 이후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상황이 변했다. 완전고용으로 노동자들이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고 직장 조직(노동조합의 사업장 단위 조직)이 강력해진 덕분에 오히려 개수임금은 임금 수준을 대폭 올리는 효과를 냈다. 한 예로, 1964~67년 영국의 전국 협약임금 인상률은 4.7퍼센트였지만, 사업장별 협상으로 실제 임금 인상률은 17.1퍼센트에 달했다.

애초 개수임금은 착취율을 높이기 위해 도입됐지만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20여 년 동안 노동자들에게 더 높은 임금과 생산 과정에 대한 일정한 통제력을 제공했던 것이다. 개수임금이 임금 유동(사업장별 협상에서 전국적 임금협약 이상의 임금 수준을 얻는 것)을 촉진해 임금 수준이 높아지자 사용자들은 임금체계 개편(생산표준에 기초한 고정급으로)을 모색했다.

임금 억제를 노린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임금체계 개편을 추진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즉, 여러 조건의 변화로 연공급제를 도입하던 시대에 기대했었던 더 높은 착취 효과를 더는 거둘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연공급제는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이 낮았던 시절 사용자에게 유리한 제도였다. 그때, 사용자들은 저임금을 강요하고 승진과 미래 보장을 미끼로 노동자들의 충성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연령이 높아지면서 임금 부담이 커졌다.

게다가 현재의 연공급제는 애초에 사용자들이 원했던 제도라기보다는 1987년 노동자 투쟁 이래 초임이 대폭 인상되고 인사고과가 무력화된 것으로, 사용자들은 오랫동안 임금체계 개편을 바라 왔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든 이전 정부들 하에서든 사용자들이 직무급제를 도입하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임금 억제다. 호봉제는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자동으로 오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이 높아지고 정년 연장마저 된 상황에서는 기업들의 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직무 가치나 성과에 연동되지 않은 임금 인상에 제동을 걸려 한다.

직무 중심 임금체계의 옹호자들은 초임 대비 30년 근속자의 임금이 유럽은 1.69배인 데 비해 한국은 3.28배나 된다며, 동일 직무 내 임금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림1〉 참고)

<그림1> 근속-임금 증가 비교(신입 평균을 100으로 봤을 때 격차)

그러나 유럽의 30년 근속자 임금이 보여 주는 것은, 직무 중심 임금체계에서는 같은 직무에 20~30년 종사해도 임금이 거의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럽에 비해 한국의 초임이 매우 낮은 현실을 감안하면, 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랫동안 낮은 수준으로 묶인다는 뜻이다.

직무급제를 도입하면 직무 등급 내 임금상한선을 둬 임금 상승을 억제하기가 쉽고, 상위 직무 등급으로의 이동도 어렵다. 그래서 많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직무급 도입을 성과연봉제 확대보다 더 불리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직무급이 도입되면 승진 가능성이 줄고 지속적인 임금 상승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직무급이 도입되면 대부분의 산업에서 기본급이 15퍼센트가량 하락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윤진호, ‘한국의 임금체계, 《일의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가1》, 한울). 특히, 남성(21퍼센트), 중장년층(22퍼센트), 대졸자(26퍼센트)의 임금이 대폭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임금 억제 효과가 정규직·남성 노동자들에게만 미치는 것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직무급제를 도입하려는 이유 하나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기존 정규직의 임금을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무기계약직이 된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기존 정규직과 차별 없는 호봉제를 원하지만,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이들에게 적용할 새로운 임금체계를 만들었다. 표준임금모델(안)이 그것이다.

표준임금모델(안)은 무기계약직 전환자인 청소, 식당, 경비, 시설관리, 사무보조 등의 노동자들에게 적용될 직무급제인데, 가장 낮은 직무 등급의 월급을 최저임금 수준에 맞추고 있다. 15년 걸려 최고 단계로 승급해도 1단계의 임금보다 고작 10퍼센트 더 받을 수 있을 뿐이고, 30년을 일해도 9급 공무원 1호봉의 급여 수준을 넘지 못한다.

직무급제는 낮은 직무 등급에 속한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고착되기 십상인 임금체계인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낮게 평가된 직무들은 여성들이 많이 담당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직무급제가 고용 형태(정규직과 비정규직), 기업 규모(원청과 하청), 성별에 따른 차별과 임금 격차를 해소하는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표준임금모델(안)은 직무급제가 차별 해소가 아니라 차별을 정당화하는 방안임을 보여 준다.

조건을 개선해 주기는커녕 여전히 차별적 조건을 유지한 채 이를 합리화하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직무가 다르다는 것을 근거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법이다. ‘당신의 저임금은 차별이 아니라 당신의 직무 가치가 낮은 데서 비롯한 공정한 결과입니다.’ 이 같은 분리직군과 직무급은 2007년 비정규직법 시행을 전후로 은행과 마트 등의 여러 기업들이 이미 애용한 방식이다.

문재인 정부는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직무 분리를 통해 ‘동일가치노동’의 근거를 없앰으로써 임금 차별이라는 비난을 모면하려 하는 것일 뿐이다. 또, 점심값이나 통근비 차등 지급처럼 한눈에 부당한 것으로 보이는 차별은 없애는 대신, 직무 관련성이 커서 차등 지급이 합리적으로 보이는 성과급을 추진하려 한다.

‘합리적’ 차별의 기준을 세운다

직무 중심 임금체계의 옹호자들은 근속연수, 고용형태, 기업 규모에 따른 임금 격차가 불공정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직무 가치를 분석해 직무 등급에 따라 ‘공정’하게 임금 차등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직무에 따라 “능력과 노력·성과”와 연계해 임금을 정하는 것은 공정하기는커녕 또 다른 방식의 임금 차등을 합리화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 직무 가치를 평가한다면 어떤 직무의 가치가 높게 매겨질지는 뻔하다. CEO와 임원들이 부와 일자리를 창출해 사람들을 먹여살린다는 자본주의 ‘상식’에 따라 그들의 직무 가치가 최고로 인정될 것이다. 관리자들은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전문성’이 있다고 해서 높은 직무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수억, 수십억 대 연봉과 스톡옵션은 정당한 것이 된다.

그러나 CEO와 임원들이 부를 만들지는 않는다.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그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을 더 많이 일 시키고 임금을 더 적게 줘서 결국 더 효과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생산한 가치만큼 임금을 받지 못한다. 노동의 가치에 따라 임금을 받는다는 것은 신화일 뿐이다.

이 같은 신화는 능력주의에 의해서도 부추겨진다. 즉,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노동시장에서의 위치가 결정되고 보상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수인종과 여성의 임금이 내국인과 남성에 비해 낮은 것은 차별이지 능력 탓이 아니다.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을 이간하고 분열시켜 득을 보려고 노동자들의 일부를 의도적으로 차별하는 것이다.

직무 중심 임금체계에서는 기업 임원과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 격차가 더 커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 격차도 커지고 굳어지기 쉽다. 예를 들어, 연공 성격이 강한 한국의 경우 하위 직급 노동자의 근속연수가 올라가면 상위 직급 평균임금 수준에 다다를 수 있다. 반면, 직무급 전통이 강한 영국의 경우는 하위 직급 노동자의 임금 분포가 끝나는 지점에서 한 단계 상위 직급 노동자의 임금 분포가 시작된다(〈그림2〉 참고).

<그림2> 직무·직급 간 임금 격차 비교 (연공급 한국과 직무급 영국) [확대]

문재인 정부의 직무 중심 임금체계의 관점에서 보면, 직무 등급 간 임금 차이가 큰 것이 “공정”한 임금이다. 그러나 1987~89년 이전에 노동자들은 이런 차별을 철폐하기를 원했고 마침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염원을 이뤘다. 생산직 노동자들은 사무직과의 임금 차별을 폐지했고, 차등 승급이 아닌 일률적 자동승급을 쟁취했다. 생산직 노동자들에게도 정기승급제가 확대 적용된 것이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전사원 호봉제, 상여금 차등제 폐지를 쟁취했다.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은 인사고과에 의한 특호봉제를 폐지하고 실질적인 단일호봉제를 쟁취했다. 당시 노동조합 지도부는 승격 평가를 절대평가 방식으로 하고 평가위원회에 노조 참여 보장을 요구했지만, 노동자들은 노조의 안을 거부하고 인사고과 자체를 반대했다.

요컨대 문재인 정부는 ‘직무 가치’라는 잣대로 1987~89년 투쟁을 통해 대공장 생산직 노동자들이 확립한 매우 연공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임금 관행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1987-89년 투쟁을 통해 대공장 생산직 노동자들이 확립한 임금 관행을 공격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대공장 생산직 노동자들이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객관적 근거(직무 가치)도 없이 그저 규모가 큰 기업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임금을 더 많이 받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한 통계는 흔한 편견과 달리 대기업 노동자들의 보상 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줬다. OECD가 발행한 《한눈에 보는 기업가정신 2017》을 보면, 한국 대기업(제조업)은 부가가치의 단지 28퍼센트만을 노동자 임금으로 주고 있다. 프랑스가 76퍼센트, 독일이 73퍼센트인 것에 비하면 이것은 매우 낮은 수치다. 한국은 32개국 중 30위다.

일부 노동자들이 임금을 너무 적게 받고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지만, 그것이 다른 일부 노동자들(공공부문·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이 너무 많이 받기 때문은 아니다. 저임금층이 늘고 빈곤이 증대하는 동안 기업주, 기업 임원, 은행가, 고위 정치인들의 부는 엄청나게 늘었다. 재산은 차치하고 임금소득만 보더라도 2000년대 초반 이후 한국에서는 오로지 상위 1퍼센트만이 소득 상승 가도를 달렸다.

진정으로 심각한 불평등과 격차는 바로 이것이다. 이런 문제의 해결은 뒷전인 채, ‘공정’(또는 ‘적정’) 임금 논리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을 공격하는 것은 진정한 불평등을 감추고 바닥을 향한 경쟁을 부추기는 것일 뿐이다.

최근 ‘광주형 일자리’의 임금 논란은 이런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애초 광주형 일자리는 ‘공정’(또는 ‘적정’) 임금 적용을 내세우면서 추진됐는데, 초임 연봉이 2100만 원으로 논의되고 있음이 최근 폭로된 것이다.

완성차 공장 노동자의 임금이 최저임금 수준이라니 한국노총조차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현재 현대·기아차 평균 연봉은 9000만 원 수준이고, 초임은 4000만 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형 일자리의 임금 논란은 직무급제 도입이 공정성 논리를 내세워 ‘내부노동시장’(임금 수준이 높은 대기업)을 깨려는 목적도 있음을 보여 준다.

노동자들을 이간질한다

직무급제에서는 직무 평가가 매우 중요하다. 이에 따라 직무 등급이 매겨지고 임금이 책정된다. 직무 평가는 해당 직무의 특성에 따라 평가 기준(기술, 노력, 책임, 작업조건 등)을 나열하고 각 항목에 점수를 부여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뤄진다.

직무급제 옹호자들은 직무 평가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포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평가 요소를 선정하는 것부터 어떤 기준으로 점수를 부여하고 가중치를 매기는지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기준이 없다. 평가자 개인의 자의적 판단이 결과를 좌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직무 평가가 과학적이라는 것은 사기다.

무엇보다 직무 평가는 사용자의 관점에서 이뤄지므로 공정성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수익 창출 기여도가 큰 직무가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높은 임금 단가가 매겨질 것이다. 기업의 핵심·주요 업무 외의 직무는 직무급제에서 높은 임금률을 적용받기 어렵다. 직무 중요도는 사용자의 사업 재편 등에 따라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많은 연구자들은 직무 평가에 구조적인 편견이 끼어든다고 지적해 왔다. 가령 직무 평가자들이 남성 중심의 직무보다 여성 중심의 직무를 더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정신적인 노력이 많이 드는 직무보다 육체적인 노력이 많이 드는 직무를 더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또, 직무 평가는 대체로 외부와의 공정성을 조정해야 한다는 논리로 시장임금 수준을 반영하려 하는데, 이는 기존의 임금 차별을 반영하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 보통 사람들이 정말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가령 간호나 보육 등), 청소처럼 육체적으로 힘든 일, 여성이 다수 종사하는 일은 직무 가치가 낮게 정해지기 십상이다.

이런 논란을 의식해 직무 평가에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대안이 제시되기도 한다. 이것은 단지 노동조합 지도자들 측에서 요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직무에 대한 평가 결과를 일반 노동자들이 수용하도록 만들기 위해 사용자 측도 고려하는 바다.

그러나 노조 지도자들이 참여하더라도 노동자들의 직무에 상대적 중요도를 매기고 임금 차등을 수용해야 한다는 근본 문제점은 여전히 남는다.

직무 평가와 직무급은 노동자들의 지위와 임금에 등급을 매기는 사용자들의 게임이다. 그래서 직무 평가는 사용자와 관리자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기고 분열을 조장해 약화시킨다.

직무 평가는 유연한 노동 재배치(전환배치)를 쉽게 만들고, 승급과 임금 인상을 어렵게 만든다. 또, 노동자들을 이간질해 각개격파하려는 사용자들의 전략에 도움을 준다.

가령 노동자들 사이에서 직무 등급을 나누기 시작하면 숙련 노동자들은 반숙련 노동자들과 구분되는 새로운 상위 등급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또, 단일 임금체계에서는 모든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함께 싸우지만, 직무급 아래서는 배관공 수십 명이 배관 직무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용접공 수십 명이 용접 직무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식으로 투쟁이 전개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소규모로 각자 도생하는 양상으로 말이다.

이런 점에서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지위와 임금 등급을 매기는 게임에 뛰어드는 것은 위험이 매우 크다. 물론 직무 평가가 도입되더라도 노동자들이 싸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은 임금 수준이 높은 노동자 집단을 준거로 해 자신들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등 직무 평가가 사용자들에게 더 부담이 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사용자들이 고안한 무기로 사용자들을 겨냥하려면 노동자들은 직무 평가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행동해야 한다. 노동조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노동자들의 행동, 단결력, 단호함이다.

임금 격차 해소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동안 노동조합이 임금 극대화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들이 노동운동 안팎에 꽤 있다. 고용형태와 기업 규모에 따른 임금 격차가 확대된 현실은 기업 내 임금 평등화에 머문 기존 임금정책의 한계를 보여 준다고 한다.

물론 노동조합은 임금 격차 해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대기업·공공부문 노동자들의 기업 내 임금 평등과 임금 수준을 무너뜨리는 것이 임금 평등화로 나아가는 길이 되지는 못한다.

문재인 정부 인사들은 비정규직, 하청, 여성 노동자들이 적정임금을 받으려면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의 양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기업·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임금이 공격받는다면 다른 많은 노동자들의 임금도 그에 이어 공격받으면 공격받았지, 개선되지는 않을 것이 뻔하다. 이것은 계급투쟁 동역학의 기본 중 기본이다.

가령 현대자동차 사측은 2015년부터 직무성과급을 뼈대로 신임금체계를 추진해 왔는데, 올해 초 기본급 비중을 확대하는 대신 기본급의 일부를 개인별로 차등화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신입사원들의 임금테이블을 아예 따로 만들어 임금을 낮추는 이중임금제도 제안했다. 이중임금제는 미국 자동차기업들이 노동자 임금을 반토막 내는 데 사용한 수단의 하나였다.

애초 사측은 노동자들도 기본급 비중이 너무 낮은 기형적 구조를 바꾸고 싶어 한다는 점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결국 임금 수준과 평등주의적 임금체계 모두를 공격하는 안을 내놓은 것이다. 이 안은 일단 폐기됐다. 하지만 만약 다시 추진된다면 완성차와 부품업체들은 물론이고 다른 민간 기업들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임금 격차의 해소가 하향 평준화가 아니라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 개선으로 이어지려면, 노동조합으로 잘 조직돼 있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을 방어할 뿐 아니라 저임금 노동자들의 조건 개선을 위해서도 연대해야 한다.

가령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온전한 정규직 전환을 지지하면서 표준임금체계 도입 반대와 정규직 임금테이블로의 통합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가 이런 데 예산을 쓰도록 압박하는 데 힘을 발휘해야 한다.

직무급제를 도입한다고 해서 임금 격차와 사회 양극화가 해소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직무급이 정착된 서유럽과 미국에서 임금 격차와 소득 불평등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더 심화돼 왔다. 특히 미국의 경우, 바로 기업 고위임원·관리자와 일반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가 소득 불평등의 주요 요인이었다. 그런데 국제노동기구(ILO)가 지적하듯이, 한국이 추종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미국의 보상 모델이다.(《Global World Report 2016/17》)

직무급이 된다고 해서 “직무와 능력”에 따라 보상받으며 다른 차별 요소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직무급이 정착된 서유럽과 미국에서 여전히 남녀 간, 인종 간 임금 차등이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능력과 아무 관계없는 순전한 차별일 뿐이다. 가령 영국에서 흑인 대졸자 임금은 백인 대졸자보다 평균 24퍼센트 낮고, 런던의 남녀 임금 격차는 약 23퍼센트이다.

임금체계를 특정 방식으로 바꾼다고 해서 임금 평등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임금 공정성을 높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이윤을 위해 노동자들을 이간·분열시키려고 일부 노동자를 차별하는 사용자들에 반대해 투쟁하는 것이다.

유럽에서도 남녀 동일임금에 한 걸음 다가간 것은 1968년부터 1970년대 전반부까지 노동자 투쟁의 고양 속에서였다. 당시 영국 등지에서 수많은 동일임금 파업이 벌어졌고, 남녀 노동자들이 성공적으로 연대한 경우 큰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오히려 동일임금법 효력이 발효된 1975년 이후로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동일임금 판단을 투쟁 대신 노동법원에 맡기면서 노동자들은 이전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이라는 진정한 강제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우리 한국 노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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