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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장기집권 개헌은:
러시아의 심화하는 경제·정치 불안정을 보여 준다

7월 2일 러시아에서 개헌 국민투표가 가결된 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평생 집권의 길을 열었다”는 논평이 쏟아졌다.

이번 개헌으로 푸틴은 앞으로 두 차례 더 대권에 도전할 수 있고, 최대 82세까지 도합 32년을 집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방 지배자들과 주류 언론들은 푸틴의 권위주의 독재를 소리 높여 비난한다. 그러나 이들은 평범한 러시아인들의 민주적 권리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러시아와의 제국주의적 갈등이라는 배경에서 그렇게 한다. (관련 기사 본지 193호 ‘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 러시아 해킹 소동 뒤에는 제국주의 경쟁이 있다’)

푸틴 집권기는 탄압과 부패, 반대파 암살로 얼룩져 있다. 특히 푸틴이 영국으로 망명한 반대파 인사와 잠재적 경쟁자들을 런던 한복판에서 독살한 것(소위 ‘방사능 홍차’ 사건), 러시아 안팎에서 반(反)푸틴 저항을 잔혹하게 억누른 것 등은 널리 알려진 바다.

소련 시절 악명 높은 보안 경찰 KGB 관료 출신인 푸틴은 소련 붕괴 후 총체적 혼란 상황에서 질서를 확립하겠다고 약속하며 부상했다. 푸틴은 총리 시절인 1999년에 체첸 독립 요구에 맞서 체첸 (재)침공을 주도했고, 대통령이 돼서도 거듭 체첸인들을 학살했다. 본토 러시아인들에게도 푸틴은 대중 저항을 잔혹하게 억눌렀고, ‘반정부’ 단체의 수립을 법으로 금했으며, 성소수자를 탄압했다. 푸틴 정부는 2014년에는 미허가 집회에 참가하기만 해도 5년 이하 징역형을 내릴 수 있는 법을 제정하기까지 했다.

푸틴은 네 번 모두 선거를 통해 집권했지만, 그 선거는 정치적 술수와 공권력을 동원한 경쟁자 탄압으로 얼룩져 있었다. 푸틴 아닌 대선 후보들에게는 사실상 승산이 없었고, 대선 후에는 보복을 당하기 일쑤였다. 푸틴이 출마하지 않았던 2007년 대선도 (푸틴의 측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출마했다) “투표함을 열지 않아도 결판은 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가디언〉)

두마(입법부)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현 다수당은 푸틴 자신이 세운 통합러시아당(ER)인데, 다득표 정당에 터무니없이 유리한 선거 제도에 힘입어 50~55퍼센트를 득표하고도 450석 중 343석을 차지하고 있다. 제1야당 러시아공산당(CPRF)은 구소련 시절로의 회귀를 부르짖으며 푸틴과 갈등하는 양하지만, 푸틴과 대(大)러시아 국수주의를 공유한다.

푸틴은 ‘들러리 정당’도 조직했다. 제2야당인 강경 국수주의 우파 정당 러시아자유민주당(LDPR),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자처하는 제3야당 정의러시아당(SR)은, 설립부터 이후 활동까지 푸틴의 만년 책사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가 배후 조종한 것으로 악명 높다.

이런 일들은 푸틴 통치의 권위주의적·독재적 성격을 보여 준다.

모순

그러나 푸틴의 러시아가 대내외적으로 맞닥뜨린 상황을 따져 보면 푸틴을 편집증적 불안에 시달리게 하는 요인들이 많다.

2000년대 초 러시아는 고유가에 기대 석유·천연가스 등 원자재 판매로 경제 호황을 구가했다. 흔히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로 통칭되는 신흥국들의 경제는 당시 성장하는 추세였다.

푸틴이 총리가 되기 전인 1998년에 러시아는 극도의 위기에 시달리며 모라토리엄(외채 상환 유예) 선언까지 했지만, 10년 후인 2007년에는 세계 3위 외환 보유국이 됐다. 푸틴 하에서 러시아 국영 기업 가즈프롬은 러시아 천연가스 생산량의 83퍼센트를 산출하는 세계 1위의 천연가스 기업으로 거듭났고, 석유 기업 로즈네프는 세계 3위 산유 기업으로 부상했다.

러시아의 지배자들은 여기서 막대한 이득을 챙겼고, 대체로 푸틴을 지지하며 단결했다. 푸틴이 올리가르히* 몇몇을 제거하고 지배계급 내 반대파조차 혹심하게 탄압했지만, 구소련 시절의 영광을 복원하겠다는 푸틴의 대(大)러시아 국수주의 전략이 러시아 자본주의와 그 지배자들에 득이 된다고 봐서였다.

그러나 2013년 이래로 세계 유가가 급락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전까지 고성장을 구가했던 러시아 경제는 유가 하락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2014년 한 해에만 달러 대비 루블화(貨) 가치가 47퍼센트포인트 하락했다.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은 이후 3년 동안 반토막 나, 지금까지도 2012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 위기뿐 아니라 서방과의 지정학적 갈등도 러시아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냉전 종식 후 미국은 러시아의 부활을 억제해 미국 주도 세계 질서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유럽연합과 나토를 동부·중부 유럽으로 한껏 확장해 러시아를 포위하고, 더 나아가 미국의 영향력을 유라시아 대륙 중심부로 확장하고자 했다. 소련 붕괴 후 회복됐다고는 하지만 상대적 힘이 크게 하락한 러시아로서는 이 전략을 전체적으로는 저지할 수 없었다.(관련 기사 본지 330호 ‘미국과 중국은 신냉전에 돌입했는가’)

하지만 지역적 수준에서는 사뭇 다른 그림도 펼쳐졌다. 러시아가 접경국들(옛 소련 소속 공화국들)에서 과거 소련 시절의 영향력을 일부 회복하려 나선 것이다. 러시아는 2008년에 미국이 경제 위기의 충격과 ‘테러와의 전쟁’ 수렁에 발목 잡힌 틈을 타 캅카스 지역의 친미 국가 그루지야(지금의 조지아)를 침공했다. 미국은 러시아와 직접적 충돌이 부담스러워 그루지야를 포기했고, 그 여파로 중앙아시아에서 미사일방어체계(MD) 배치를 중단하는 수치를 겪어야 했다. 또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에 미국보다 효과적으로 개입해 ‘몸값’을 높였다.

푸틴은 서방의 동진(東進)에 제동을 걸고 러시아의 힘을 보여 주려고 2014년 3월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우크라이나를 분열시켰다.

미국은 러시아와의 전면적인 갈등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러시아에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유럽의 주요 국가인 우크라이나를 러시아가 침공한 것을 좌시했다간 동유럽 국가들의 서방 제국주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수 있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유럽연합(EU) 강국들도 러시아와의 직접적 갈등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의 위력 과시가 달갑잖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방은 러시아를 G8에서 추방했고, 수많은 경제 제재를 가했다. 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러시아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푸틴이 벌인 지정학적 도박이 앞서 말한 경제 위기와 갈마들며 위기를 키운 것이다.

바로 이 위기 속에서 러시아 지배자들 내부에 분열이 싹텄다. 소수지만 결코 무시 못할 만큼의 러시아 지배자들은, 러시아가 위기에서 회복하려면 서방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러시아에 ‘자유 시장(친서방) 개혁’을 더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친서방 시장주의자 알렉세이 나발니 같은 자가 반(反)푸틴의 기수를 자처했다.

푸틴은 경쟁자들을 탄압하고 반대 세력을 혹독하게 공격했으며 노골적인 대(大)러시아 국수주의를 더한층 부추기는 것으로 대응했다. 동시에 미국의 제재를 우회해 판로를 넓히고, 국내적으로는 연금 개악을 단행하는 등의 조처로 러시아 자본주의를 회복시키려 했다.

푸틴은 갖은 정치 탄압과 술수를 동원한 끝에 2016년 총선과 2018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푸틴은 선거 후에도 공권력으로 반대파를 계속 탄압했지만, 불만은 러시아 사회 곳곳에서 계속됐다.

안정?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2020년 개헌이 이뤄졌다. 푸틴은 국가 기구와 친푸틴 세력을 총동원해 개헌 선동에 나섰다. 이번 개헌에 유일신 관련 언급을 포함시키고, (코로나19 때문에 연기됐지만) 애당초 투표일을 정교회 부활절인 4월 19일로 잡았던 것도 러시아정교회를 동원해 대(大)러시아 국수주의를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푸틴은 심화하는 경제적·정치적 불안정과 위기에 대응해 러시아 자본주의를 ‘안정화’시키려면 지배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고 봤다. 개헌과 함께 1인 중심 체제 강화에 나선 배경이다. 푸틴의 개헌 추진 선언 직후, 푸틴의 최측근이자 후계자로 거론되던 여당 대표 메드베데프와 수석보좌관 수르코프는 실각했다.

올해 상반기 ‘마이너스 유가’ 사태까지 촉발하며 푸틴이 사우디아라비아와 벌인 유가 전쟁도(관련 기사 본지 315호 ‘코로나19 확산과 유가 전쟁으로 위기로 치닫는 세계경제’) 장기적으로 러시아의 시장 점유를 늘려 미국의 경제 제재에 대응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개정 헌법은 최저임금을 빈곤선 이하로 인하할 수 없게 하거나 연금 지급률을 물가 인상률에 맞추도록 했다. 극심한 빈곤 때문에 물밑에서 커지는 대중적 불만을 엄혹한 탄압만으로는 억누를 수 없는 상황임을 보여 준다. 실제로 2018년에 연금 제도를 ‘더 오래 일하고 덜 받게’ 개악하자 이에 맞서 시위가 분출했고 푸틴 지지율은 재선 3개월 만에 25퍼센트 가까이 떨어진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조처들로 푸틴이 바라는 것처럼 러시아가 ‘안정화’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경제 위기와 겹친 코로나19 위기 때문에 러시아 경제 상황은 더한층 악화됐고, 이에 대한 불만도 조금씩 수면 위로 나오고 있다.

올해 7월에도 코로나에 대처하느라 노동강도가 세진 청소와 음식 배달 노동자들의 파업과 연대 행동이 벌어졌다. 국영 기업 가즈프롬, 모스크바의 셰레에티예프 국제공항,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현장 등지에서 임금 체불에 항의하고 임금 인상과 특근 수당 지급을 요구하는 투쟁들이 있었다. 푸틴의 야만적인 이주민 탄압에 맞서 시위와 단식 투쟁 등 정치적 행동도 벌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러시아 지배 체제를 압박하는 경제·정치 위기는 모두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의 경제적·지정학적 위기와 깊이 연결돼 있다. 이에 따라 위기가 심화한다면 독재로 상황을 온전히 통제하려는 시도는 한계에 부딪힐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소련 붕괴 후 수십 년 동안 혹심한 양극화와 절망적 생활 조건, 권위주의적 탄압에 시달리던 러시아 노동계급이 오랜 좌절을 떨칠 가능성은 열려 있다. 현재 벌어지는 저항들이 더 큰 저항으로 발전한다면 말이다. 이를 위해 그간 ‘스탈린 식 구소련 대 서방 시장주의’로 제한돼 있던 정치적 선택지를 넘어 체제의 위기에 맞서는 진정한 좌파적 대안이 발전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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