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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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과 러시아는 미사일방어(MD) 시스템 구축을 둘러싸고 정면 대결 양상을 보였다.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미국이 유럽에 MD체제를 도입하면 러시아는 유럽에 미사일을 겨냥할 것”이라며 “핵 충돌”을 경고하기까지 했다.
북한과 이란을 핑계로 한 미국의 MD가 사실은 중국과 러시아 등을 겨냥한 것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러시아 측이 지적하듯 “북한과 이란은 미국이 요격해야 할 정도의 로켓을 확보하고 있지도 않다.”
이런 대결 양상은 G8 정상회담에서 푸틴이 ‘레이더 기지 공동 사용’을 전격 제안하며 잠시 주춤하는 듯했지만, 미국은 동유럽 지역 MD 계획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겠다며 푸틴의 제안을 거부했다.
사실, 미국과 러시아의 MD 갈등 이면에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흔히 무능력자 취급을 받던 러시아의 부활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경쟁과 축적이 핵심 동역학인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 제국주의 세계 체제의 불안정성 심화가 반영돼 있다.
이 글은 영국의 혁명적 반자본주의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 2007년 1월 호에 실린 피트 글라터의 글이다. 피트 글라터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당원이고 울버햄튼대학교 상경대학의 명예 연구교수이고, 소책자 《1905년 ― 예행 총연습》 등 러시아의 정치와 경제를 다룬 글을 많이 썼다. 독자들이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번역·게재한다.
옛 소련 몰락 이후의 러시아는 얼마나 민주적인가? 왜 러시아는 많은 주변국들을 지배할 필요를 느끼는가? 그리고 러시아는 주요 제국주의 열강과의 관계에서 어디쯤 위치해 있는가? 온갖 질문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옛 KG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독살, 탐사 전문 기자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 암살, 그루지야에 대한 가스 공급 중단 위협, 이 달 초 벨라루스에 대한 석유 수출 중단과 유럽 대부분 지역에 대한 석유 공급 중단 결정 등등, 이런 사건들 때문에 러시아 문제가 다시 의제로 떠올랐다.
그럼에도 미국과 영국은 여러 해 동안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지지했다. 1999년 총리로 임명된 직후 푸틴은 체첸 독립 투쟁 전사들의 국경 침범과 일련의 “테러” 공격 ― 체첸 투사들의 소행이라는 근거가 아주 희박한 ― 을 핑계로 야만적인 대(對) 체첸 전쟁을 재개했다.
국가의 수호자라는 새로운 이미지 덕분에 푸틴은 몇 달 뒤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할 수 있었다. 그는 체첸 주둔 러시아 군대가 전투적 이슬람에 맞서 싸우는 유럽의 최전선이라고 선언하기 시작했다.
취약한 러시아 국가 구조를 쇄신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많은 민주적 권리들 ― 옛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인들이 획득한 ― 이 희생됐다. 서방과 특히 토니 블레어는 푸틴의 선거운동을 지지했고 체첸 상황에 대한 진상 규명 노력을 방해했다.
자본주의는 엄청나게 모순적인 체제다. 한편으로, 자본주의는 높은 수준의 협력에 의존한다. 심지어 서로 경쟁하는 기업들과 국가들 간의 협력에도 의존한다. 다른 한편으로, 경쟁하고 지배하려는 근본적 동력이 끊임없이 작동한다.
그래서 오늘날 푸틴에 대한 서방 지도자들의 태도는 6년 전만큼 열렬하지 않다. 그들은 체첸에서 벌어지는 더러운 전쟁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쉬쉬한다. 그들은 런던 주식시장에 상장하려고 줄지어 대기중인 러시아 기업들한테서 거리낌없이 거액을 받는다.
서방 권력자들은 푸틴이 러시아 국가 구조를 복구하려고 애쓰는 것을 우려한다. 왜냐하면 그 때문에 러시아가 위험한 경쟁의 초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서방은 리트비넨코 독살을 이용해 푸틴에 대한 새로운 강경 노선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서방이 푸틴을 비난하는 목록은 여러 가지다. 그리고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제기된 비난은 요컨대 다음과 같다.
2000년 대통령 취임 이래 푸틴은 올리가르키 ― 1990년대에 당시 대통령 보리스 옐친 덕분에 백만장자들이 된 자들 ― 의 권력을 제한하면서 경제와 산업에서 민간 부문에 대한 국가의 우위를 재확립했다. 푸틴은 국가 관료를 중앙집권화했고 많은 언론을 정부 통제 아래 두었다.
확장 정책
푸틴 정부는 반(反)서방 러시아 민족주의의 성장을 부추기고 국제 무대에서 공격적인 확장 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한 것이 이 새로운 정책의 증거다. 따라서 [서방의 비난인즉] 푸틴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됐고, 그의 리더십의 특징은 옛 소련 전체주의로 회귀하는 것이다.
푸틴을 비난하는 목록들이 전 세계의 많은 서방 동맹국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서방의 푸틴 비난은 꽤나 그럴싸하다. 그러나 러시아 자본주의의 방향에 대한 설명으로는 여러 가지 허점들이 있다.
첫째, 그런 비난은 푸틴의 성공 정도를 과대평가한다.
둘째, 러시아 자본가 계급의 소수파인 친(親)서방 올리가르키 탄압은 사실 러시아 자본주의 전체에 유리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가 계급 전체에게 공평한 경쟁의 장(場)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셋째, 국가 자본가로서 엄청난 돈을 모으는 것과 민간 자본가로서 그렇게 하는 것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는 생각은 틀렸다. 두 부문의 자본가들은 모두 자유시장의 법칙을 받아들이고 노동자들과 환경을 무제한으로 착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찬성한다.
넷째이자 마지막으로, 서방의 푸틴 비난은 러시아의 변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없다. 조금만 진지하게 조사해 보면, 그런 변화의 동기가 서방 자체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푸틴이 권력을 장악하기 직전에 옐친의 러시아는 지배계급 안팎의 소수 특권층의 내분으로 유명했다. 이것은 주로 통치 구조의 핵심에 있던 위계 집단인 옛 소련 공산당이 느닷없이 붕괴한 탓이었다.
푸틴이 집권했을 때는 러시아의 안정적 위계질서를 회복할 필요성에 대한 상류층의 합의가 점차 커지고 있을 때였다. 이런 의미에서 푸틴은 서방에서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합의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합의 자체가 자동으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방의 평론가들은 러시아 지도자들이 엄청나게 치솟은 유가와 다른 천연가스 수출 덕분에 크게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푸틴은 경제 호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이미 중앙집권화를 시작했다.
다른 설명들은 “러시아의 정치 문화”나 “옛 소련의 유산”, 특히 옛 소련 보안경찰인 KGB와 푸틴의 연관 등을 들먹인다.
이 관점들은 모두 국제적 그림을 무시한다. 사실, 결정적 자극은 러시아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왔다. 1990년대 말 이후 서방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려 할 때 점차 군사적 수단에 의존했다. 처음에는 세르비아를 공격했고, 그 다음에는 아프가니스탄, 그 뒤에는 이라크를 공격했다. 러시아는 이 세 곳 모두에 경제적·전략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는 꺼림칙하게도 러시아 국경선에서 가깝다. 지금 [미국이] 이란 ― 카스피해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 을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 때문에 러시아와 서방의 이해관계 충돌이 점차 두드러지고 있다.
거울 이미지
세르비아·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러시아 지배계급은 너무 취약해서 자신의 세력권이 침범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군사적 도전을 감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은 군사적 도전을 할 수 있기 전에 먼저 국내 질서부터 바로잡아야 했다. 이제 러시아는 옛 소련 지역에서 잃어버린 영향력을 어느 정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경쟁을 동반하고, 경쟁은 경쟁 참가자들에게 특정한 대칭을 강요한다. 서방의 공세가 강화하면 공세적 대응도 증가하기 마련이다. 푸틴은 부시의 거울 이미지이다. 다만, 러시아가 훨씬 더 취약한 제국주의 열강이라는 상황에 적응하려 할 뿐이다.
전에는 밖으로 빠져나가던 돈이 치솟는 유가와 천연가스 수출 급증 덕분에 러시아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러시아 경제는 1999년 이후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가망없는 이라크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 제기되는 도전에 미국의 수퍼파워가 대처할 수 없는 상황, 즉 “다극화한 세계”라는 크레믈린의 꿈이 실현되고 있는 듯하다. 2006년 새해 첫날부터 러시아 지도자들이 보인 대담한 행동은 15년 전 옛 소련 해체 이후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그들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같은 옛 소련 소속 공화국들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하거나 중단하겠다고 위협해서 천연가스 판매 대금을 엄청나게 늘려 받았고,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부에 압력을 가해 다시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만들고, 그루지야의 친서방 정부를 굴복시켰다. 더 나아가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오랜 영토 분쟁에 다시 불이 붙었음에도 일본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극동 지방의 대규모 액화천연가스 사업인 사할린-2 프로젝트의 지배권이 로열더치셸[영국-네덜란드계 석유 다국적기업]에서 러시아의 천연가스 독점기업인 가즈프롬으로 넘어갔고, 영국과 러시아의 석유 합작 사업체인 BP-TNK에서 BP의 위치가 위협받고 있다. 2006년 말에 미국은 러시아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할 수 있도록 획기적 타협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서방이 푸틴에게 부드러워졌다는 신호가 아니다.
서방 자본주의의 목표는 러시아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사용해서 러시아를 더 고분고분한 팀원으로 만들고 통합하는 것이다. 경제 호황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경제 실적은 멕시코·루마니아·자메이카보다 더 낫지 않다. 러시아는 여전히 취약하고, 따라서 쉽게 타격받을 수 있다. 러시아 경제의 기초는 여전히 주로 천연자원 생산에 집중돼 있고, 이것은 진정한 발전을 뜻하는 경제적 다변화의 조짐이 거의 없음을 보여 준다.
그와 동시에, 러시아의 경우는 세계가 얼마나 더 불안정해지고, 예측할 수 없게 되고, 위기에 취약해졌는지도 보여 준다. 부시와 블레어가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노린 것은 유가 상승으로 푸틴이 득을 보고 자신들이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한편으로, 푸틴은 러시아의 석유 호황으로 러시아 노동자들이 그 호황의 과실을 더 많이 나눠 달라는 전투적 요구들을 제기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권력자들에 대한 기층의 반발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대 러시아의 영속적인 특징들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그것은 러시아인들뿐 아니라 전 세계의 우리 모두에게도 단연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