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발생 1년:
팬데믹, 자본주의,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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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2월 21일 같은 주제로 진행한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표문이다
팬데믹은 가뜩이나 심각해지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불평등과 지난 수십년 동안 신자유주의로 더욱 심화된 양극화는 팬데믹 하에서 그야말로 야만적인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
충격이 컸던 나라들의 통계는 거리두기를 강화할 때나 완화할 때나 그 충격이 모두 노동계급과 취약 계층에 집중됐다는 것을 보여 준다. 거리두기 강화는 소득 감소나 스트레스 등 경제적·정신적 고통을 안겨 줬고, 거리두기가 완화되면 코로나에 감염돼 죽어나갔다.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가장 큰 희생자가 됐다.
전국적으로 수만 명에 이르는 노숙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식사를 제공하던 시설들이 문을 닫자 끼니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졌다. 노숙인을 치료해 주던 서울의 일부 공공병원들이 모두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전환돼, 그들을 받아주는 병원도 없어졌다. 사회의 최하층으로 내몰린 그들에게 지금은 전쟁보다도 못 한 상황일 것이다.
유럽의 가난한 노인들은 요양원에서 속절없이 죽어 갔는데, 일부 요양원에서는 공포에 질린 직원들이 다 도망쳐 노인들이 다 죽을 때까지 방치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때문에 늘어난 민간 요양원은 정부의 감시도 받지 않았다. 수십 명이 사망한 지 몇 주 만에 발견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요양원과 요양병원에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지금도 많은 요양 시설이 코호트 격리 상태에 있다. 이는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한 공간에 가둬 놓고 사실상 감염되기를 기다리는 꼴이다. 평상시에도 요양 시설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데, 감염을 관리할 인력은 없다시피 하고 요양보호사들도 고령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추가 인력을 충분히 투입하는 것도 아니다. 정부는 다른 병원에 병실이 부족하고 집에 가도 돌봐 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코호트 격리를 한다. 학교나 공장, 사무실이었다면 이 자본주의 정부가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팬데믹 하에서 일어난 일들은 오늘날 평범한 여성들을 옥죄는 굴레가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팬데믹 하에서 여성은 병원, 선별진료소 등 팬데믹의 최전선에서 두터운 일차 방어벽 구실을 해 왔다. 자본주의 국제 경제 기구인 세계은행이 인정한 바다.
보육, 양육, 요양, 장애인 지원 등 이른바 ‘돌봄’ 노동으로 불리는 일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별 가정에 떠맡겨져 왔다. 호황기에 지배자들은 여성을 생산현장으로 끌어내어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려 했고, 이를 뒷받침하려고 이른바 ‘사회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러나 지배자들이 ‘돌봄’을 사회화한 것은 아니었다. 또, 현재와 미래의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분야는(예컨대 교육) 사회의 핵심 기능으로 여겨졌지만, 노인 요양이나 아동 돌봄 등 이윤 획득과 직결되지 않는 분야는 평가절하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 부문은 대개 여분의 일자리 취급을 받았고 저임금에 시달려 왔다. 교육과 훈련에 돈을 들이지 않고, 가사 노동으로 돌봄에 능숙해진 여성들을 부려 먹기 좋은 일자리였으므로 그나마 여성 노동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취업이 수월했고 따라서 여성 비중이 매우 높다.
그런데 팬데믹으로 돌봄 시설들의 운영이 중단되자 연쇄 효과가 나타났다. 돌봄 노동자들은 갑자기 실직에 준하는 상태가 됐다. 올해 초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은 일이고, 방과후학교 교사들이 지금도 겪고 있는 일이다.
돌봄 노동이 중단되면서 그 부담이 가정으로 돌아왔다. 여성들의 가사노동과 특히 양육 부담이 커졌다. 아이나 노인을 돌볼 여력이 없는 노동계급 가족 내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이어진 이유다. 가뜩이나 낮은 출산율이 급감한 것도 여성들이 느끼는 부담이 얼마나 큰지 보여 준다.
청년 실업도 크게 늘었다.
한편, 바이러스의 확산과 이를 막기 위한 조처는 그동안 이 사회가 얼마나 노동자들에게 위태롭고 가혹한 환경을 강요해 왔는지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동시에 노동자들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움직이게 해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드러냈다.
앞서 언급한 돌봄 노동자들이 대표적인 사례이고,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렇다. 그런데 이들은 일감이 없어지거나, 업무가 중단되면서 소득 절벽에 내몰렸고 언제 다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상태에 놓였다. 대리운전 기사, 방과후학교 교사들도 그런 처지다.
영세 자영업자들도 고통을 받았고, 일부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다. 물론 자본가들이 하나같이 해고를 택한 것은 아니다. 일부 자본가들은 팬데믹이 끝난 뒤, 혹은 팬데믹 와중에 사업을 유지하려고 고용을 유지했지만(정부가 임금의 80퍼센트를 댔다) 임금을 삭감하고, 무급휴직을 강요하는 등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애썼다.
거리두기를 지킨다며(사실은 흉내만 내는 곳이 많다) 식사와 휴식 시간이 단축됐고, 후미진 흡연 공간이나 계단 밑 창고에서 쉬던 노동자들은 쉴 곳도 사라졌다.
물류센터 노동자들은 고질적인 저임금 탓에 두세 개의 일자리에서 일해야 하는 상황(투잡)으로 흔히 내몰린다. 쿠팡 물류센터 노동자들은 콜센터나 학교 돌봄 노동자로도 일했는데, 감염 확산으로 물류센터가 폐쇄됐을 때 이 시설들도 운영이 중단됐다.
학교와 보육 시설도 운영이 중단됐지만 처지가 다 똑같지는 않았다. 고급 사립학교와 보육 시설은 학급당 학생 수가 적어서 거리두기 단계가 상향 조정돼도 계속 운영될 수 있었다. 10월 7일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사립초등학교의 출석일수는 공립초등학교의 두 배나 됐다. 애당초 교사 수가 부족해 교육 여건이 안 좋던 보통의 학교들은 여지없이 폐쇄됐다.
병원 노동자들은 이전에도 살인적인 노동강도에 시달려 왔는데 이제는 더한층의 ‘헌신’을 강요당하고 있다.
택배 등 물류 운송 노동자들도 살인적인 노동강도 때문에 과로사가 잇따른다. 노동자들이 인력 충원을 요구했더니 고용주들은 그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정부는 이런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에는 인색하면서도 기업주들에게는 투자 촉진이라는 명목으로 엄청난 자금을 제공했다. 이 와중에 신성장동력을 육성한다며 규제 완화 정책을 폈고, 박근혜 정부 시절 의료 영리화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권덕철을 신임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하려 한다.
백신이 팬데믹을 끝낼 수 있을까?
2019년 12월 중국 우한시의 의사들이 원인 모를 폐렴이 발생했다고 정부에 보고했다.
그때만 해도 그들을 포함해 아무도 상황이 지금처럼 악화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강력한 팬데믹이 세계 전체를 휩쓸었다.
1년 뒤인 2020년 12월 20일 현재 전 세계 코로나19 사망자는 170만 명을 훌쩍 넘겼다. 이 중 50만 명은 지난 한 달 새 죽었다. 북반구가 겨울로 접어들면서 확산세는 더욱 커지고 있다. 일일 확진자 수는 한 달 전 20만~30만 명이었는데, 지금은 40만~50만 명 수준이다. 통계 파악도 제대로 안 되는 빈국들을 고려하면 실제 감염자 수는 통계 수치의 수배 내지 수십 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주류 정치인들은 백신 개발 소식으로 ‘터널 끝에 빛이 보인다’고 외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지금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접종이 시작된 백신들은 상당한 효과를 낼 것으로 보인다. 12월 초에 발표된 임상시험 보고서들을 보면, 코로나19를 앓는 사람들의 수가 백신을 맞은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사이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아래 그림은 화이자 백신의 임상시험 결과이다. 파란색이 백신을 맞은 사람, 빨간 색이 백신을 안 맞은(정확히 말해 식염수만 맞은) 사람이다. 발병률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백신이 신속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되면, 정말로 터널을 빠져나올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럼에도 “신속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되면”이라고 조건을 단 이유가 있다.
현재 세 가지 백신이 사용 중이거나 사용 직전이다. 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의 백신이다.
사람 호흡기는 상기도와 하기도로 나뉘는데 각각의 면역 체계가 조금 다르다. 세 가지 백신 모두 하기도에서는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백신을 맞을 경우 폐렴 등 폐가 망가지는 병으로 진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상기도 감염까지 막는지는 불확실하다.
화이자는 이를 검증하지 않았고(따라서 모른다), 모더나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고 보고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자체 검사 결과 상기도 감염을 막는 효과는 ‘없다’고 보고했다.
한번에 모든 사람이 백신을 맞을 수 있다고 가정하면, 코로나19를 독감 같은 병 정도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감염은 계속 일어나겠지만 사망률을 낮출 수 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병에 걸리는 것을 100퍼센트 막는 것도 아니고, 감염력이 독감의 두 배에 가까워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망할 것이다. 감염 자체를 막을 백신이 추가로 나올 때까지는 풍토병처럼 주기적으로 유행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시나리오조차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다. 지금 같은 속도로는 올겨울 내내 사망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즉, 확진자 중 사망자 수(증례치명률)는 낮아질 수 있지만, 확진자 수는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크고 따라서 그만큼 사망자 수도 늘어날 것이다.
백신의 분배는 야만적인 자본주의 세계 질서를 잘 보여 준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 일부 선진국들이 한동안 백신 접종을 독점할 것이다. 인도만은 예외인데, 세계에서 가장 큰 백신 생산 시설을 갖추고 있어, 주요 제약사와의 공급 계약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백신의 효과가 얼마나 가는지도 문제다. 코로나19에 감염된 사람들의 경우 보통 6개월 이상 면역력이 유지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아직 시간이 그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재감염되는 사례도 있어서 이에 관한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백신이 얼마나 효과를 낼지는 두고볼 일이다.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80퍼센트) 백신 접종을 마칠 때까지 면역력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코로나19는 계속 유행할 것이다.
백신의 안전성도 계속 의심받고 있다. 그러다 보니 특히 코로나19를 두고 정부가 거짓말을 하거나 방역에 실패한 나라들에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백신을 맞지 않으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를 설득하는 것은 만만찮을 것이다.
탐욕스러운 체제
해결되지 않은 이러한 난점들에도 불구하고 백신 개발 자체는 놀라운 일이기는 하다. 1년도 안 걸려 이 정도 백신이 나온 것은 역사상 유례 없는 일이다. 이번 백신 개발로 인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해결되지 않던 난제를 풀었다. 이 기술이 최종 성공을 거둔다면(혹은 실패하더라도) 앞으로 백신 개발은 한 단계 도약할 것이다. 아직은 초보적이고 실험적인 단계에 있던 면역 항암제가 어쩌면 실질적인 치료제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당초 제약회사들은 중국에서 코로나19가 유행했을 때 백신을 개발할 생각이 없었다.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을지 확실해질 때까지 개발 자체를 안 한 것이다.
팬데믹이 확실해져 수요가 충분해지고 각국 정부가 개발비를 쏟아붓자 그들은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백신 개발 경험도 없는 기업이다.
이런 상황은 자본주의의 우선순위가 오늘날 과학기술에 가하는 제약을 잘 보여 준다.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기술이 있지만, 경제 침체로 투자가 부족해서 실용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오른쪽 그림은 주요 백신 개발에 얼마나 많은 ‘공적 자금’이 투입됐는지 보여 준다. 실제 투자는 이보다 훨씬 큰데 왜냐하면 대부분 정부가 운영하는 연구소들이 이 개발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와 미국의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가 각각 아스트라제네카와 모더나 백신 연구의 중추적 구실을 했다.
그러나 제약회사들은 이 백신을 다시 여러 나라 정부에 팔아서 거액의 이윤을 획득할 것이다. 화이자와 모더나의 CEO는 백신 개발 성공 소식을 언론에 알린 뒤 2~3일 만에 주식을 대량 처분해 큰돈을 벌었다. 그러면서도 부작용에 대한 책임은 안 진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정말이지 탐욕이 지배하는 체제다.
코로나 발병의 자본주의적 기원
코로나 팬데믹의 기원과 대처 문제를 봐도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류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지, 또 지배자들이 그 충격을 빈곤층과 노동계급에 전가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이 점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
2003년 사스, 2015년 메르스는 코로나19의 삼촌과 이모뻘이다. 셋 다 박쥐에서 유래한 코로나바이러스가 가축화되던 야생동물을 거쳐 인간에게 전해진 것이다. 코로나19의 위협에 가려져 있지만 지금 전국으로 확산된 조류인플루엔자와 갈수록 남하하고 있는 돼지열병도 잠재적으로 인간에게 전염될 수 있는 감염병들이다. 2009년 신종플루가 그런 사례의 하나였다. 그리고 지난 6월에는 중국 과학자들이 2011~2018년 중국 내 돼지들을 조사했더니 갈수록 독성이 강한 인플루엔자가 발견되고 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2018년 중국 돼지의 절반 가까이를 죽인 돼지열병 때문에 이 연구는 중단됐다.
〈노동자 연대〉가 소개한 롭 월러스의 글들을 보면 왜 이런 일이 잦아지는지 잘 알 수 있다. 간단히만 요약하면 이렇다.
자본주의적 농축산업은 자연과 인간 사회, 그 사이에 놓인 가축들 사이의 균형을 파괴하고 있다.
자연과 그 일부인 인간 사회의 상호연관 관계(마르크스는 이를 자연과 인간 사회의 ‘신진대사’로 일컬었다)를 고려하지 않고 이윤과 자본 축적만을 추구한 결과다.
공장식 축산업은 바이러스의 진화에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장벽들을 제거한다. 특히, ‘너무 강력하면 숙주가 죽어 버려 멀리 퍼지기 어렵다’는 제약을 깬다. 우연히 그런 돌연변이가 생겼을 때 제거되기는커녕 크게 확산되게 한다.
다른 측면은 이런 생산 기지들이 ‘미개척지’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벌어진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경우 지금까지 이뤄진 조사에 따르면, 후베이성보다 상당히 남서쪽에 있는 윈난성에서 가장 가까운 조상이 발견됐다.
중국 남부, 특히 광둥성과 그 서쪽에 있는 윈난성은 오늘날 세계 축산업의 용광로 같은 곳이다. 1980년대 이후 국제 시장에 개방된 이 지역에는 해외 자본이 대량 유입됐고, 다국적기업들에 의해 농축산업 생산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아래 그림은 윈난성 쿤밍시市의 뎬츠호 주변의 변화를 표시한 것이다. 도시가 커지면서 그 주변의 농경지들이 인근 산림 지역으로 파고드는 것이 보인다.
윈난성은 말레이 천산갑 유통의 요충지다. 중국에서 천산갑은 약재와 고급 음식으로 인기 있는 동물인데, 중국 정부는 천산갑뿐 아니라 다양한 야생동물을 가축화하는 정책을 지원해 왔다. 농업 개방으로 처지가 열악해진 소농 등이 속한 지역 경제를 부양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2018년 돼지열병으로 인한 고기값 상승은 야생동물 유통을 가속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에게 감염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갖춰져 왔다. 몇 해 동안 이 지역에서 퍼져 가던 바이러스가 어느 날 인간들 사이에서도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은 이미 여러 차례 재현된 바 있고, 일부 과학자들은 이를 거듭 경고해 왔다.
그러나 자본가들과 그들의 정부들은 이런 위험을 무시해 왔다. 신종 감염병이 가축과 인간을 해쳐 이윤의 원천을 손상시킬 위험이 있지만 개별 자본가들은 이윤 경쟁 때문에 장기적 위험에 대처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항생제와 합성 사료, 유전자 조작 등에 투자해 이런 위험을 피하려 했다. 일부 자본가들은 오염되지 않은 미개척지나 규제가 약한 저개발국으로 농장을 옮겼다. 그러면서 개별 농장의 생산성을 높였을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전체 농축산업에 심대한 위험을 낳았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주요국 정부들은 규제를 완화하고, 공적 연구 투자를 줄이는 한편, 기업 지원을 늘렸다.
자본주의 정부들의 대응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한 각국 정부의 대응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다.
주요 서방 정부들은 중국의 봉쇄 조처가 낳은 효과(세계적 생산의 연쇄 마비)를 보며 전율했지만 이내 자신들도 비슷한 조처를 실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동자들이 죽거나 건강이 크게 손상돼 이윤의 원천인 노동력을 잃도록 놔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국 정부도 개별 자본가들처럼 장기적 전망보다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과 단기적 이윤을 우선시하느라 대응에 실패했다. 실로 이들은 이윤이 줄어드는 상황을 일분일초도 견디기 어려워 했다. 팬데믹이 충분히 사그러들기도 전에 방역을 완화한 많은 나라들에서 2차 유행이 벌어졌고, 올겨울 최악의 상황 속에서 백신만 바라보고 있다.
트럼프는 중간에 잠깐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코로나19를 무시했다. 이를 합리화하려고 끌어다 쓴 각종 ‘과학적’ 견해들은 엉터리로 드러났고 지배자들 사이에서조차 불만과 조롱의 대상이 됐다. 경제적 충격을 완화하겠다며 기업들에게는 사실상 무제한 재정 지원을 했지만, 1929년 대공황 이래 최악의 실업 사태 속에서 재난지원금은 고작 한 차례 1200달러를 지급한 게 전부였다. 이런 형편없는 코로나 대응이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한 핵심 이유다. 한 통계조사에 따르면, 팬데믹 이후 현재 미국에서 끼니를 거르거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의 수가 2600만 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집단면역’ 전략을 공언한 영국의 존슨 보수당 정부는 노동계급 노인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싶어 하는지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대중의 공분을 샀다. 영국 노동자들은 이제 정부가 추진하는 백신 접종이 너무 성급한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다.
브라질의 우익 대통령 보우소나루도 코로나19를 무시했다. 가뜩이나 빈곤 인구가 많고 보건 인프라가 취약한 나라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이처럼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나라들 중에는 정부의 무능이 두드러진 곳들이 많다. 그러나 정부가 만만찮게 코로나19 방역에 나선 나라들 중에서도 기존의 빈곤과 신자유주의로 황폐해진 보건 인프라 때문에 커다란 피해를 본 나라들이 많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그렇다. 무엇보다 이 나라의 정부들도 이윤 감소를 못 견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나라들에서 다시 사망자가 폭증하는 이유다. 인도, 러시아 등도 비슷한 상황이다.
중국 정부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단기적 이윤을 우선시했지만, 이를 위해 취한 방식은 서방 지배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미국과의 경쟁이 격화되던 상황 덕분에 중국 지배자들은 권위주의적 통제를 더욱 쉽게 강화할 수 있었다. 시진핑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애국주의 분위기를 만들어 냈고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입에 재갈을 물리고 감옥에 가뒀다. 우한의 코로나 상황을 폭로하다가 수감된 장잔은 수감에 항의하며 단식을 했는데, 지난 10일 그녀를 면회하러 간 변호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장잔은 허리에 구속 벨트가 채워진 두꺼운 죄수복 차림이었고, 왼손은 몸 앞에, 오른손은 몸 뒤에 고정된 상태였다. 그녀는 당국이 강제로 유동식을 먹이기 위해 위에 관을 집어넣는 과정에서 생긴 입과 목 주변의 상처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문재인 정부의 조처들도 권위주의적이었음을 지적해야겠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한국의 방역이 마치 범죄 수사 같다고 보도했다. 여론조사에서도 감염되는 것보다 감염 사실이 알려지는 게 더 두렵다는 의견이 60퍼센트를 넘을 정도였다. 집회 금지 조처는 사실 별 과학적 근거도 없다. 반면 공장과 사무실, 대중교통은 사실상 방치돼 있다.
메르스 경험 덕분에 정부가 초기에 비교적 신속히 움직인 것이 큰 도움이 됐고, 덕분에 경제 충격이 비교적 적었던 점 등이 작용해 문재인 정부는 일정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이후로도 몇 달간 정부의 방역지침에 사람들이 비교적 잘 호응한 배경이 됐다.
그러나 정부의 방역이 앞뒤가 맞지 않다는 의구심은 확진자의 증가로 지금 입증되고 있고, 총선 이후 86퍼센트까지 올랐던 ‘K방역’ 지지 여론은 정부가 1년 가까이 아무 준비도 안 한 것을 보며 50퍼센트로 주저앉았다. 수도권의 취약계층에서는 ‘의료붕괴’가 시작되고 있다. 빈곤층 노인이 일차 희생자가 되고 있다.
재난지원금은 갈수록 인색해지지만, 기업과 기업주들에 대한 지원은 막대하다. 이들에게 지원된 자금이 부동산 시장으로 쏠리면서 집값이 폭등해 왔다. 정부 여당 지도자들의 오만한 언행은 냉소와 환멸을 낳고 있다.
팬데믹 하의 투쟁
코로나19와 경제 위기로 인해 노동계급이 겪고 있는 고통은 결코 자연 현상이 아니다. 경제 위기는 물론이고 감염병의 발생, 그 피해의 양상도 자본주의 체제의 우선순위와 그 작동 방식 자체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리고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이를 지키려하는 그 수혜자들, 즉 자본가들과 정부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지배자들은 어떻게든 감염병과 경제 위기가 자신들이 지키려 하는 체제나 자신들의 결정과는 관계없는 불가항력적 현상으로 보이게 하려고 애쓴다. 그렇게 해야 노동자들에게 고통 ‘분담’을 강요하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도 그 원인에 궁극적 책임이 있는 자들은 오히려 이익을 얻고 있다. 스위스계 은행 UBS에 따르면, 세계 최대 부호들의 재산은 위기가 가장 고조되던 4~7월에 27.5퍼센트나 늘었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도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조건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정부의 진정한 성격에 대한 착각 때문에 투쟁이 아직 강력하지 않다. 노동자들이 경제 위기로 인해 고용 불안을 느껴 행동에 나설 자신감이 충만하지 않은 것이 가장 주된 원인인 듯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상황을 냉정히 인식해야 한다. 계급투쟁 수준이 충분치 않다 보니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더 크고, 이는 다시 계급투쟁에 악영향을 끼치는 상황이다. 팬데믹은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올해 투쟁이 가장 멀리 나아간 곳은 미국이었는데, 트럼프의 코로나 대응 실패와 경제 회복 불발이 큰 영향을 줬을 것이다.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은 최근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대중 운동이었다. 덕분에 트럼프를 쫓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바이든 하에서 더 전진해야 할 것이다.
2019년 세계 곳곳의 반란을 낳은 요인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팬데믹을 맞이한 지금 수면 아래에서는 양극화가 더욱 심화하고 있다. 팬데믹이 진정되는지의 여부, 그 시기, 이후 경제 상황, 무엇보다 혁명적 좌파의 준비 정도 등이 이후 계급투쟁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어설픈 낙관과 불필요한 비관 모두를 피하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행동이 충분치는 않지만 노동자들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적지 않은 청년들은 체제의 위기를 보며 근본적인 대안을 찾고 있기도 하다. 이들이 좌절하기보다 제대로 된 대안을 만나도록 혁명가들의 조직을 성장시켜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