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고령화’ 담론 비판:
출산율 감소는 경제적·사회적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노동자 연대〉 구독
이 글은 〈노동자 연대〉 349호에 실린 ‘인구 감소는 과연 재앙일까’ 기사를 약간 손본 것이다.
2020년 우리나라 주민등록인구가 2만여 명 줄어 사상 처음으로 감소했다는 발표가 나오면서 ‘인구 절벽’의 충격을 다루는 언론 보도가 쏟아졌다. 출생자 수가 27만여 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한 반면, 사망자 수는 30만 명을 넘으면서 인구가 자연 감소했다.
출산율 저하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한 나라들에서는 출산율 하락이 보편적으로 나타났고, 각국 정부는 출산율을 높이고자 여러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한국 지배계급은 한국의 출산율이 OECD에서 가장 낮다는 것에 걱정이 크다. 2020년 8월에도 문재인 정부의 ‘인구정책 TF’ 보고서는 한국의 출산율이 세계 최하위라며, “지속된 저출산·고령화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급속한 인구구조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는 출산율 하락을 걱정하지만 아이를 낳고 싶은데도 낳아서 기를 수 없는 사회적 조건을 개선하는 데는 큰 열의가 없다.
물론 한국 지배계급은 ‘저출산’으로 장차 노동인구와 병역 인력이 부족해지는 것을 우려한다. 자본주의에서 부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계급이고 이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데에서 지배계급의 이윤이 나오기 때문이다. 자본 축적을 위해 국가는 당장의 노동력 공급뿐 아니라 미래의 노동력이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것을 중시한다. 노동계급의 필요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출산·양육에 국가 재정 투입을 계속 늘려 온 까닭이다.
또, 세계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적 경쟁뿐 아니라 지정학적 경쟁까지 벌어지므로 국가는 병역 인력 확보도 중시한다. 불황으로 국가 간의 경제적·지정학적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국가는 미래의 병역 인력 ‘부족’에도 대비하고자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국가기관과 국책·기업 연구소, 주류 언론 등의 인구 감소 담론은 현실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다. 사태를 과장하고 원인을 왜곡하면서 지배계급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목적에 이바지한다.
‘경제 붕괴’, ‘한국인 소멸’ 등 종말론적인 과장으로 가득차 있는 인구 감소 담론은 경제 위기와 실업, 빈곤 등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인구 수 탓으로 몰아가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낸다. ‘저출산·고령화’ 담론은 여성 차별, 노동·연금 개악, 사회보험료 인상, 교육 재정 축소, 공공서비스의 시장화 등 온갖 신자유주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널리 이용되고 있다.
‘저출산’ 담론
정부와 전경련, 주류 언론 등은 세계 최저의 출산율이 지속되고 있어서 한국이 심각한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한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출산율 감소는 노년층이 ‘생산 가능 인구’(만 15~64세)보다 많아지는 ‘기형적’인 인구구조를 만들고 있다며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생산과 소비를 위축시켜 경제에 큰 충격을 준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매우 흔하지만 그 근거는 없다. 출산율과 경제 성장 사이에 직접적 관계가 없다는 것은 학계에서도 종종 제기된다.
일본의 대표적 거시경제학자로 꼽히는 요시카와 히로시 릿쇼대 교수는 “경제 성장을 결정짓는 것은 인구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인구가 줄어들면 경제가 망할까?》(세종서적)에서 그는 150년 간의 일본 인구 추이와 실질 GDP 통계를 제시하며 “경제 성장과 인구는 거의 관계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괴리된 모습을 보인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경제 성장을 좌우하는 게 출산율이 아니라는 것은 한국의 경험에서도 확인된다. 1960년대 산업화 이후 30년 넘게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는데, 출산율이 하락하면서도 고도성장이 계속되던 시기가 있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보편적으로 출산율 저하가 일어난다. 출산율 저하에는 사회의 구조 변화와 국가의 정책들, 대중의 의식 변화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 증가와 교육 기회 증대가 큰 영향을 끼친다. 피임과 낙태술의 발전, 보건의 향상, 아동의 교육기간 확대 등도 영향을 끼친다.
출산율 저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 속에서 여러 요인들이 결합돼 일어난 결과이지 불황의 원인이 아니다. 경제 위기와 침체는 ‘저출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본질에서 비롯한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의 목적은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이윤이다. 경쟁적 자본 축적 때문에 자본주의는 엄청난 성장을 하며 호황을 보이기도 하지만, 같은 이유로 경제 위기가 필연적이게 된다.(관련 기사: ‘왜 자본주의에서 경제 위기는 필연인가’) 국가의 개입으로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원인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자본주의가 오래될수록, 호황은 점점 더 짧아지고 불황은 점점 더 길어지고 만성적이 된다.
오늘날 주류 언론과 정부, 학계 등은 대체로 출산율 저하를 부정적으로만 묘사한다. 하지만 제2차세계대전 이후 본격화된 출산율 저하에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다 있다. 한편에서는 여성이 자신의 출산 능력을 통제하기 쉬워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비록 이것이 충분히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는 한계가 있지만, 여성이 자신의 출산 능력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여성과 성 해방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동시에 장시간 노동과 높은 양육 부담, 빈곤 등으로 인해 여성이 아이를 원해도 출산을 기피하게 되는 어두운 측면도 있다. 지배자들은 이를 여성이나 청년들의 개인주의 탓을 하지만, 높은 양육 부담과 빈곤 등은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지 개인들의 책임이 아니다.
‘인구 고령화’ 담론
‘저출산’ 담론과 세트인 ‘인구 고령화’ 담론도 경제 위기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정당화한다.
인구 고령화로 사회가 위기에 빠진다는 주장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 영국 등 서구 자본주의에서 오늘날 상식처럼 퍼져 있다. 그런데 인구 고령화를 부정적으로 표현한 생각은 1980년대 미국에서 처음 나왔다. 경제 불황 속에서 부상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이 개념은 인구 고령화로 보건과 사회적 돌봄 비용이 증가하고 있다며 노인을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하고 노인을 모욕하는 사회·경제 정책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인구 고령화 주장은 증거에 기반한 게 거의 없고 방법상 여러 문제가 있다. 주요 문제 하나는 부양비 개념을 사용해 사회의 연령구조가 변화하는 데 드는 비용을 측정한 것이다. 65세 이상의 인구가 모두 사회의 재정 지원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한다고 가정하고 계산한다. 노인의 경험이 같지 않은데도 하나로 취급한다(부유한 노인들과 노동계급·서민층 노인은 그 차이가 특히 크다).
이렇게 자의적인 방식으로 낸 통계 수치는 청년층보다 노인 인구 비중이 높은 인구구조 때문에 사회 전반의 부담이 증가하고 청년의 부담이 증가한다고 해석된다.
이런 주장은 현실을 왜곡한다. 2019년 통계청의 ‘사회조사 결과’를 보면, 60세 이상 인구 중 자식과 친척에게 생활비를 의존하는 사람은 17.7퍼센트에 그쳤다. 대다수(69.9퍼센트)가 생활비를 본인과 배우자가 마련한다. 정부·사회단체 지원에 의존한다는 비율은 12.4퍼센트에 불과하다(그나마 2009년 8.6퍼센트보다 늘어난 것).
대학 등록금 부담, 주택난, 청년 실업 등으로 인해 노인들이 자녀에게 지원해 주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인구 고령화 추계에서 청년층이 노부모에게서 받는 재정 지원은 들어가지 않는다.
노인이 사회에 부담이 되기는커녕, 노인들은 계속해서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많은 노인들이 자녀가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손자·손녀를 돌보고 있다. 노인들도 대개 여러 방식으로 생계 활동을 하고 있고, 복지 부족 때문에 원하든 원치 않든 임금노동을 해야 하는 노인들도 많다. 이것은 OECD에서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은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과 영국 등의 나라에서도 비슷하다.
‘고령화’ 주장도 ‘저출산’ 담론처럼 지배계급이 자본주의의 진정한 문제를 가리며 복지비에 적은 돈을 쓰고 대중을 이간질하고자 퍼뜨리는 것이다.
모순
자본주의에서 지배계급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인구 수 자체가 아니라 얼마나 이윤을 확보할 수 있느냐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의 인구 정책은 착취적인 계급 관계를 철저히 보호하며 자국 자본주의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맞춰져 있다. 이 때문에 여러 모순이 생겨난다.
지배자들은 ‘저출산’으로 미래의 생산 가능 인구가 부족해진다고 말하지만, 당장 일자리를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해결에 나서지 않고 거의 방치한다. 미래의 청년 인구 부족 사태를 연일 경고하지만, 현재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있는 청년 실업 문제에 대한 대책은 제대로 내놓지 않는다.
세계 자본주의가 심각한 침체를 겪고 있지만 그렇다고 세계 인구가 줄고 있지는 않다. 세계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고 청년 인구 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선진국의 지배자들은 이민을 확대하면 국내 노동력 부족을 어렵지 않게 해소할 수 있음을 안다. 세계체제로서 자본주의는 시작부터 내국인 노동력에 의존해서 발전하지 않았고, 호황기에는 특히 그렇다. 심지어 불황기 때조차 이주 노동력의 필요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정부는 출산율을 높이려 해 왔고 지금도 그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여러 요인 때문에 출산율 재고가 쉽지 않다고 여겨 이민 확대를 대응책으로 내놓고 있다. 그러나 국가의 이주민 정책은 임금을 낮추고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자 내국인-이주민, 이주민들 사이에서도 차별을 제도화하면서 이뤄지고 있다.
‘인구 고령화’ 담론에 내재된 주장, 즉 노인이 쓸모없고 사회에 부담만 준다는 생각은 노동력을 착취할 수 없거나 착취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에 대한 지배계급의 태도를 보여 준다. 그러나 불황이 심화하면서 정부는 전반적인 임금 수준을 낮추고 복지비 인상 압력을 줄이고자 노인의 노동시장 참가를 더 늘리는 정책도 펴고 있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 노인 노동력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저출산·고령화’ 담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불안정, 실업과 빈곤 등에 대한 책임을 인구 문제로 돌리며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를 감추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정당화한다.
국가와 지배계급이 파국적인 인구론에 기초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공세를 펼치는 것은 새롭지 않다. 인구가 많아서 빈곤이 생긴다는 19세기의 맬서스 사상부터 그 뒤 세계적으로 확산된 우생학 이론 등에서 보듯, 각국의 지배계급은 언제나 자본주의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 차별 문제를 인구의 특정 집단(빈민, 여성, 장애인, 흑인 등)에게 돌리며 대중을 이간질해 왔다.
그러나 거대한 경제적·생태적 위기를 초래하고 사회의 지속 가능성에 위협을 가하는 것은 인구가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 체제이다. 위기 속에서도 소수는 더욱 부유해지고 위기의 책임이 없는 대다수 노동계급과 서민층이 피해를 보는 자본주의가 진정한 재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