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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 운운 — 표현의 자유, 계급 투쟁, 사회주의적 언론으로 맞서자

윤석열의 언론 통제를 비판하는 민주당의 입장에 대해 보충했다.(2023.11.20)

윤석열은 입만 열면 ‘가짜뉴스가 우리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고 떠든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팔레스타인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치 조직 하마스를 한낱 테러 음모 조직 취급하며 이스라엘을 편든다.

하마스가 영유아 수십 명을 참수했다는 이스라엘의 가짜뉴스는 미국 대통령 바이든이 버젓이 “내가 봤다”며 뻔뻔하게 퍼뜨리는 짓을 한다. 지배자들의 가짜뉴스가 정말 문제다.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는 진실이 아니다. 자기들에게 불리한 뉴스에 “가짜” 딱지를 붙여 대중을 속이고, 언론이 정부 눈치를 보게끔 길들이며, 불만과 비판의 목소리를 억누르는 것일 뿐이다.

지난 몇 달간 윤석열 정부(문체부)는 후쿠시마 핵폐수의 안전성을 강변하는 자료집을 9만 부나 만들어 KTX, 도서관 등 전국의 다중이용장소와 공공기관에 배포했다.

동시에, 핵폐수의 위험성을 주장하는 “가짜뉴스”를 잡겠다며 신고센터를 설치하고 홍보했다.

한편, 최근 정부는 “미디어 플랫폼의 신뢰성 및 투명성 강화”라고 이름 붙인 포털 통제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6월 국민의힘과 TV조선은 네이버 뉴스의 알고리즘 노출도와 언론사 인기도 순위가 조작돼 〈조선일보〉가 뒤로 밀려났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노골적 우파 이동관이 지휘하는 방송통신위원회는 9월 25일 네이버 등에 대한 이례적인 실태 조사에 나서며 “위법 행위를 엄단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그러나 10월 10일 국정감사에서 방통위는 “인위적 개입 흔적이 있더냐”는 질문에 아무 답도 못 했다.

10월 4일에는 포털 사이트 ‘다음’의 항저우 아시안게임 응원 페이지에서 중국 응원 클릭 수가 높게 나오자 국민의힘 대표 김기현 등이 “반국가세력의 여론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그리고 선거 개입에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가짜뉴스는 사회적 재앙” 운운하며 범정부 TF까지 구성해 그 페이지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하지만 어떤 청소년의 장난일 가능성 외에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지난 7월에 대통령실은 고작 윤석열의 건배사를 허위로 언급해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유튜버 ‘고양이뉴스’를 고발했다.

9월에는 검찰이 윤석열 명예훼손 및 대선 공작 혐의(근거 없다)로 급진 언론 〈뉴스타파〉와 기자들의 집을 압수수색했다.

편파적인 언론과 SNS의 팔레스타인 지지 게시물 검열을 규탄한다 10월 18일 서울에서 열린 이스라엘 규탄 긴급 행동 참가자들 ⓒ이재혁

가짜뉴스를 명분으로 언론을 옥죄는 윤석열 정부의 언론 통제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광범하다. 대부분의 야당들도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민주당의 비판은 일관되지 못하다. 같은 가짜뉴스 규제도 민주당 정부가 추진할 때는 찬성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추진할 때는 반대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당시 민주당은 언론중재법 등 가짜뉴스 규제 입법을 추진했었다. 이 때는 국민의힘이 “언론재갈법”이라며 반대했다. 위선적이게도 뒤에서는 인터넷 준실명제 부활 법안을 추진하면서 그랬다.

그러나 정권이 교체되자 양당은 서로 입장을 맞바꾸기 했다.

문재인 정부 당시 국회 언론특위 위원장을 맡아 언론중재법 추진을 주도한 바 있는 현 민주당 원내대표 홍익표는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우리가 여당 때 가짜뉴스를 막기 위한 입법을 하자고 할 때 국민의힘이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 가짜뉴스를 막는 것을 저희는 전혀 반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권력에 비판적인 뉴스를 막겠다, 이게 핵심 아닌가 싶습니다.”

민주당이 재집권한다면 가짜뉴스 규제가 다시 시도될 수 있다.

한편, 민주당 이외의 진보 야당들과 좌파들의 비판은 초점이 가짜뉴스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에 있다.

물론 이는 참말이다. 그런 모호함 때문에 “가짜뉴스나 혐오표현 규제”를 명분으로 만들어진 법은 좌파와 저항 운동에 그러한 누명을 씌워 억압하는 데 얼마든지 이용될 수 있다. 최근 팔레스타인 지지 계정이 정지되거나 게시물이 삭제되는 일도 그런 사례다. 가짜뉴스나 이슬람 혐오 표현을 줄이는 데에는 아무 소용도 없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규제 기준의 모호함에 초점을 맞추면, 규제 자체를 반대하기보다는 더 엄밀한 기준을 개발하려 애쓰게 되기 쉽다.

여러 좌파 정당들은 오히려 혐오표현 규제에 적극적이다. 가령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유튜브상에 넘쳐나는 혐오표현을 줄이려면 온라인 폭력 방지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정희 전 의원이자 진보당 전 대표도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라는 책에서 “종북” 비방 등 혐오표현에 대한 국가 규제의 필요성을 주장한 바 있다.

이들도 혐오표현 개념의 모호성 문제를 의식해 혐오표현의 기준을 엄밀하게 규정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많은 언론학자가 지적해 왔듯이, 언론이나 표현을 규제·검열하려 한 그 어떠한 법도 규제 기준의 모호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수많은 경험적 연구 끝에 그들은 국가의 언론·표현 규제와 검열은 지향한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면서 악용되기만 하므로 대안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아래 추천 도서 기사 참조)


추천 신간 《혐오: 우리는 왜 검열이 아닌 표현의 자유로 맞서야 하는가》

최근 한국에 번역돼 출판된 네이딘 스트로슨의 책 《혐오: 우리는 왜 검열이 아닌 표현의 자유로 맞서야 하는가》는 이와 관련해 추천할 만하다.

저자는 그저 “탐탁지 않거나, 불온하거나, 두려움을 주는 메시지”라는 이유로 표현을 검열하려 하는 갖가지 혐오표현금지법을 반대한다.

많은 혐오표현금지법 지지자들이 규제 기준을 엄밀하게 하려고 했으나 “풀리지 않는 법조문 만들기 문제”에 봉착해 성공하지 못했음을 저자는 풍부한 사례를 들어 폭로한다.

저자는 검열이 아니라, 혐오표현에 맞서는 더 많은 표현(“대항 표현”)이 더 효과적이며 이를 위한 자유가 필요하다고 확고하게 주장한다.

아쉽게도 저자는 해악적인 위협 등에 대응할 필요 때문에 미국 수정헌법 1조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원칙에 따라오는 단서, 즉 “명백한 현재의 위험”(긴급성 원칙)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가 규제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아주 까다로운 판정 기준(“진정한 협박,” “처벌가능한 선동” 등)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단서 또한 ‘무엇을 긴급한 위험으로 볼 것인가?’ 하는 모호성의 문제, 그에 따른 악용 가능성을 벗어날 수 없다.

가령 이 단서는 역대 한국 정부들이 “헌법 위의 법” 국가보안법을 존속시켜 온 핵심 근거였다.(다행히 《혐오》의 저자는 한국 국가보안법에 비판적이다.)


국가를 활용해 민주적 권리를 지킬 수 없다

위 기사에서 말했듯이, 국가(의 법 집행)를 활용해 민주주의 권리를 지키려 한다면 난점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근본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갖는 본질적인 성격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결코 계급적 이해관계 바깥에 있는 중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지배/피지배 계급이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하는 구실은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 권리를 제약하는 권력을 국가가 휘두르도록 용인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기성 질서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와 차별받는 사람들의 운동을 공격하는 데에 쓰일 것이다.

표현의 자유의 본질은 저항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민주적 권리인 것이다.

각국 정부와 고위 정치인, 기업 그리고 기성 언론은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기성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다. 그래서 그런 사회에 위협을 제기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온갖 거짓말을 지어낸다. 천대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쉽게 단결해 저항하지 못하도록 편견과 차별적 이데올로기를 체계적으로 조장하고 퍼트린다.

이들이 가짜뉴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은 “가짜뉴스”라는 말이 2016년 유행하기 아주 오래 전부터 “진짜 뉴스”의 모습을 한 거짓말과 조작을 일상적으로 해 온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언론은 모순된 구실을 한다. “진짜 뉴스”는 언뜻 보기에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대중이 삶에서 경험하는 진실을 아예 무시하는 언론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기성 언론은 드물지만 세계가 실제로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중요한 폭로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경제 위기, 코로나19 팬데믹, 기후 위기 등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위기가 심각해질수록 그런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정부와 기성 언론·학계의 권위는 추락한다.

가짜뉴스는 그렇게 기성 질서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서 자라난다.

결국 가짜뉴스는 새로운 무언가라기보다 사회 전체와 “진짜 뉴스”의 정당성 위기 속에서, “진짜 뉴스”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 프로파간다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가짜뉴스 문제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가짜뉴스는 차별과 편견을 퍼뜨리려 하는 자들이 애용하는 수단이고,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들의 의식 성장과 단결을 방해한다. 지난 몇 년간 서구에서 성장한 극우와 파시즘 운동은 인종차별과 이슬람 혐오를 부추기는 가짜뉴스를 활용했다.

겉모습이 번듯한 언론이든 가짜뉴스이든, 그것을 걸러내고 세계를 더 온전하게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주어진 상황을 사람들이 그저 수용하는 것을 넘어 세계를 더 많이 경험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논쟁하고 투쟁하며 세계를 바꾸려는 실천을 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담대하게 도전하며 노동계급에게 진실을 말하는 사회주의적 언론의 구실은 필수적이다. 그런 언론은 체제 자체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는 구실도 해야 한다. 체제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조직과 연결망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