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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혼란유발자들》:
소셜 미디어 기업들의 추악한 실체를 보여 주지만 정치적 약점이 있다

‘알고리즘의 노예’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소셜 미디어에 접속하면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수많은 콘텐츠를 보느라 해당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스타그램 릴스나 유튜브 숏츠 같은 짧은 영상을 보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숏폼 중독’이라는 말도 유행하고 있다.

소셜 미디어 기업들은 사용자들을 플랫폼에 최대한 오래 붙잡아 둘 방법을 골몰한다. 그래서 사용자의 개인 정보나 관심사를 수집해 알고리즘에 반영하거나, 사용자에게 더욱 자극적인 콘텐츠를 추천하기도 한다.

《혼란유발자들》(맥스 피셔 지음, 제이펍)은 이윤에 혈안이 돼 있는 소셜 미디어 기업들이 사용자들을 자신들의 플랫폼에 묶어 두기 위해 무슨 짓을 벌이는지 폭로하는 책이다.

《혼란유발자들》 맥스 피셔 지음, 제이펍, 520쪽, 24000원

이윤에 혈안이 되다

“혁신”이라는 포장 속에 감춰진 소셜 미디어 기업들의 추악한 실체를 들춰내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책에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현 엑스), 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 기업이 자신의 플랫폼에서 극우적 선동, 터무니없는 가짜뉴스, 음모론이 판치는 것을 이용하거나 심지어 조장하는 사례가 숱하게 나온다.

브라질에서 극우 정치인 보우소나루가 성장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유튜브가 2016년에 알고리즘을 개선한 뒤로 우파 채널이 여느 채널보다 시청자가 상당히 빠르게 늘어 정치 콘텐츠를 장악했다.”

페이스북에서 일했던 데이터 과학자 소피 장은 이렇게 증언했다.

“페이스북에서 일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을 때 긴급 조사를 받았다. 트럼프 대통령 캠프가 조회수가 줄어든다고 불평해서였다.”

소피 장은 페이스북이 “종파 간 폭력 사태와 권위주의 확산으로 위험이 커지는 곳”에서 플랫폼이 악용되는 것을 일부러 내버려뒀다고 폭로했다.

소셜 미디어 기업의 안팎에서 자정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제기돼 왔지만, 기업 수뇌부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페이스북에서 해외의 허위 선거 정보에 대응하는 업무를 맡았던 프랜시스 하우건은 이렇게 증언했다.

“페이스북은 알고리즘을 더 안전하게 바꾸면 사람들이 사이트에서 시간을 덜 보내고 광고를 덜 클릭해 자기네가 돈을 덜 벌 것을 인식했습니다.”

또 저자는 포용성과 표현의 자유를 표방하는 소셜 미디어 기업의 수뇌부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지 보여 준다.

예컨대 페이스북(현 메타)의 CEO 마크 저커버그는 고위 경영진 50명을 모아 놓고, “웬만해서는 이견을 용납하지 않고, 더 큰 복종을 요구하고, 페이스북의 적들과 싸우겠노라고 알렸다.”

저자는 IT 기술로 세상을 구하겠다고 으스대는 실리콘밸리 기업주들이 실제로는 세상을 망치고 있다고 꼬집는다.

“몇몇 기업과 그런 기업들 꼭대기에 앉아 자축하는 IT 엘리트들이 우리의 피해를 대가로 자기네 배를 불렸다.”

다큐멘터리 영화 <소셜 딜레마> 화면 중 일부 ⓒ출처 넷플릭스

과장

이 책에는 유용하고 참고할 만한 폭로가 많이 담겨 있지만, 중요한 정치적 약점도 있다.

저자는 소셜 미디어가 극우의 성장에서 일정한 구실을 했다고 설명하는 것을 넘어, 아예 소셜 미디어가 정치 양극화와 극우 성장의 핵심 요인인 것처럼 설명한다.

물론 오늘날 극우가 선전·선동·조직화의 수단으로 소셜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엑스(옛 트위터)를 반동적 선동과 지지층 결집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트럼프가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극우 성장의 결정적 요인을 소셜 미디어로 설명하면 극우가 부상하게 된 진정한 원인을 보지 못하게 하고 극우에 맞설 대안을 모색하는 데서도 길을 잃는다.

오늘날 극우가 부상하게 된 핵심적 원인은 신자유주의를 이끌어 온 주류 정치(좌우 모두)의 실패에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극우파의 영향력이 극적으로 증대한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분노 누적 덕분이었고, 세계 금융 위기로 인한 경제적 고통과 혼란은 그 분노를 더 강렬하게 만들었다.”(알렉스 캘리니코스, 《재난의 시대 21세기》)

또한, 극우는 기존 자본주의 질서에서 자라난다. 저자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성장했다고 지적하는 보우소나루만 해도 브라질 지배계급의 투사 구실을 하며 성장했다. 트럼프가 지키려는 것도 결국 미국 자본주의의 이익이다.

사실, 소셜 미디어가 세상을 좌우한다는 주장은 처음이 아니다. 2011년 아랍 혁명이 벌어졌을 때는 정반대로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아랍 혁명을 일으켰다는 (그래서 민주주의에 이롭다는) 해석이 유행했다.

그러나 아랍 혁명은 아랍 정권들의 억압, 불평등과 빈곤, ‘테러와의 전쟁’ 등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켜켜이 쌓였던 대중의 불만과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혁명 분출 과정에서 SNS가 적지 않은 구실을 했지만, 국가 기구들이 인터넷을 차단한 뒤에도 혁명은 계속됐다. 종이 신문과 리플릿 같은 고전적 매체가 활용됐다.

소셜 미디어가 기존의 다른 매체들에 비해 양극화를 자극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은 많은 경험적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문제는 이런 양극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점이다. 이점에서 저자가 소셜 미디어가 낳는 양극화 효과를 지나치게 과장하며 균형을 잃은 것은 아쉽다.

사실 저자는 정치적 양극화 자체에 강한 반감을 보인다. 그래서 프랑스의 노란조끼 운동 같은 개혁 염원 대중 운동이나 멜랑숑 같은 급진 좌파에도 거부감을 드러낸다. “극단적”이고 “과격한” 좌우 정치 모두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보고, 그것을 소셜 미디어가 부추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주민·난민 배척, 낙태권 공격, 핵전쟁 위협 등으로 대중의 권리와 삶을 공격하는 트럼프 등 극우와 빈곤·저임금·불평등에 맞서 평범한 사람들의 이익과 권리를 대변하는 운동(과 급진 좌파)을 같은 선상에 놓고 모두 문제라는 것은 터무니없다.

나아가 저자는 “우파든 좌파든 공통변수는 언제나 소셜 미디어였다”고 말하면서, 소셜 미디어 기업들이 게시물 규제와 검수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 기업들의 규제와 검열을 지지할 수는 없다. 소셜 미디어 기업들은 (저자가 잘 폭로하듯이) 이윤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트럼프 임기 내내 그의 게시물을 특별 우대했다. 소셜 미디어 기업들이 극우에 맞서 일관되게 규제를 할 것이라는 것 자체가 공상이다.

설사 소셜 미디어 기업이 극우 인사의 SNS를 규제했다고 해도 극우의 입을 막는 데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트럼프 같은 자의 SNS 계정이 정지당했을 때 통쾌해하는 사람들의 정서는 십분 공감하지만 억만장자인 트럼프는 SNS 계정이 정지당해도 얼마든지 다른 수단으로 자기 주장을 매우 효과적으로 펼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소셜 미디어 기업들의 규제로 타격 입는 것은 좌파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메타의 팔레스타인 지지 게시물 검열은 악명 높다.

나만 하더라도 얼마 전 팔레스타인인 여성 투사 레일라 칼레드를 소개하는 게시물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가 강제 삭제 조처를 당했다. “위험한 것으로 정의된 사람 및 단체를 팔로우했거나 이들에 대한 상징, 찬사 또는 지지”가 삭제 이유였다.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와 윤석열 퇴진 촛불 집회의 사진을 올려 온 사진작가의 계정이 별 다른 설명 없이 통째로 삭제된 일도 있었다.

저자가 폭로했듯 메타는 전 세계 곳곳에서 수천 명의 검수원을 간접 고용해 사용자들의 게시물을 검열하고 있다.

소셜 미디어 기업들이 게시물 검수를 예리하고 철저하게 하면 할수록 차별과 억압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할 일도 많아질 것이다.

저자는 극우의 성장 등 오늘날 세계적 혼란을 멈추려면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을 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지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을 멈추는 것으로 극우를 막을 수는 없다.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집권할 때는 소셜 미디어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렇게 말했다.

“위기는 바로 낡은 것은 죽어 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 공백 기간에 아주 다양한 병적 징후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주류 정치의 실패 속에서 진정한 대안이 성장하지 못한 틈을 타 극우의 성장 같은 “병적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극우와 극우의 성장을 낳은 자본주의에 맞서는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혁명적 대안을 건설해야 극우를 막을 수 있다.

이 외에도 이 책에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그럼에도 소셜 미디어 기업들이 벌이는 악행을 생생하게 알고 싶다면 읽어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