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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 강연:
유물론이란 무엇인가
성과 젠더에 대한 생물학적 결정론 비판

이 기사는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영국 런던에서 열린 ‘맑시즘 2025’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명예교수이고, 강연 당시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대표였다.

이 강연의 제목은 ‘유물론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저는 이 강연에서 인간이 나머지 자연과 맺는 관계, 그리고 그 관계가 현재 성과 젠더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다루고자 합니다.

유물론이라는 것은 철학적 입장이기 때문에 그다지 첨예하지 않은 문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최근의 영국 대법원 판결[평등법에서 말하는 여성은 생물학적 여성이라며 트랜스젠더 배제를 정당화함 — 역자]을 둘러싼 좌파 내 논쟁에서 보듯 불쑥 제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성은 이분법이 아니다" 생물학을 근거로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시도에 맞서야 한다 ⓒ출처 Steve Eason (플리커)

일부 좌파들은 성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유물론의 입장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성이 사회적으로 결정된다거나 사회적 관념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고 보는 견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주장합니다. 제 생각에 이는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저는 주디스 버틀러가 쓴 최근 책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국역: 윤조원 옮김, 문학동네, 2025]의 내용에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반대하며》[국역: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주의의 비판》, 책갈피, 2014]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 책을 쓴 것[1991년 — 역자]이 벌써 몇 십년 전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제 입장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닙니다.

이런 논쟁에서 트랜스젠더를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유물론은 사실 아주 조야한 환원주의 형태의 유물론입니다. 역사적으로 마르크스주의들은 이런 형태의 유물론을 기계적 유물론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기계적 유물론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루겠습니다.

유물론이라고 하면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지만, 모든 가능한 정의를 늘어놓는 식으로 여러분을 지루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유물론은 유물론적 역사관, 즉 마르크스가 공들여 진술한 역사유물론입니다.

역사유물론이란 사회의 성격과 변화는 사회 생산의 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 갈등에서 비롯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역사유물론을 다룰 때 결정론의 소지를 없애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종종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결정론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세상만사가 그저 경제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결과라고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했다는 것이죠.

그런 결정론은 전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전체[총체성 — 역자]를 이루는 여러 측면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포착하지 못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체가 존재할 여지를 없애 버리기 때문입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마르크스의 문장 하나는 “인간은 역사를 만들지만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조건 속에서 만드는 것은 아니다”입니다. 이렇듯, 마르크스는 인간의 주체 됨과 의식적 선택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고 봤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곧 자유의 이론입니다. 자유는 마르크스가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정치적 가치입니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접근법이 자연의 나머지 부분들에 어떻게 적용되는가가 유물론을 둘러싼 논쟁의 쟁점입니다.

제가 ‘자연의 나머지 부분’이라고 표현한 것은 마르크스가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매우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 같은 그의 초기 저작에서 그렇습니다.

마르크스의 이런 강조는 17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스피노자도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고 매우 강조했습니다.

마르크스는 후기 저작에서도 이런 관점을 계속 견지합니다.

생태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최근 부쩍 관심을 갖게 된 마르크스의 개념이 있는데,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 과정(인류가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각종 유용한 것을 생산하는 것)을 노동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라고 일컬었습니다.

물질대사는 마르크스가 당대 자연과학의 최신 개념을 빌려온 것입니다. 자연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상호작용 과정을 강조하는 개념이죠.

비록 마르크스가 노동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마르크스가 노동 과정도 자연계 내부에 속한다고 봤다는 점을 지적해야겠습니다. 인간도, 그리고 인간이 건설한 사회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모두 자연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논의를 멈춘다면 기계적 유물론으로 빠지기 매우 쉽습니다.

이런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면, 우리의 모든 행동도 결국은 자연 법칙, 특히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작용하는 물리 법칙의 결과가 아닐까?’

흔히 ‘마르크스주의’로 통용되는 유물론 정의[옛 소련 공식 교과서에서 언제나 볼 수 있었던 — 역자]에 따르면 ‘모든 것은 물질의 운동’이라고 합니다. 제 생각에 그런 정의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됩니다.

마르크스의 협력자였던 엥겔스는 그런 자연관에서 벗어나는 데서 매우 유용한 통찰을 주는데, 자연의 복잡성을 매우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엥겔스는 ‘변증법의 일반 법칙’ 등을 거론하며 일부 혼란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그 문제는 오늘 다루지 않겠습니다.

자연은 그저 일련의 힘과 인과적 요인들의 꾸러미가 아닙니다. 자연은 매우 복잡합니다.

물론, 복잡하다고만 말하면 별로 흥미로울 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기에 내용을 부여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 방법은 ‘창발(emergence)’이라는 철학 개념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자연이 여러 층위로 이뤄져 있고, 각 층위가 더 기본적인 하위 층위를 바탕으로 생겨난다는 개념입니다.

예컨대,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층위에는 물리적 층위가 있고, 그 위에는 화학적 층위, 그 위에는 생물학적 층위, 그 위에는 우리의 가장 주된 관심사인 사회가 있다고 자연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자연의 각 층위가 자율성을 갖는다는 견해와 조화를 이룹니다.

자율성(autonomous)이란 단어는 ‘스스로 통치하다’, ‘자신이 따를 법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는 그리스어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사회적 층위들―물론 지나치게 단순한 구분이지만 일단 넘어갑시다―은 저마다 고유한 법칙을 갖고 그 아래의 층위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당연히 물리적 층위로도 환원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물리적 층위에는 나름의 법칙이 있고, 그 위의 화학적 층위에는 물리적 층위를 바탕으로 생겨난(창발) 나름의 법칙이 있고, 그 위에 있는 생물학적 층위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생겨난 나름의 법칙이 있고, 그 위의 사회적 층위도 나름의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는 자연의 복잡성과 통일성을 잘 포착해 낸다고 생각합니다. 유일한 단점은 각 층위가 서로 별개로 움직인다고[1974년 이후의 알튀세르주의처럼 — 역자]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오늘 아침 제가 버스를 타고 이 강연장으로 오는 과정을 사례로 들어 보겠습니다. 단순한 일상이지만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제가 걸어다닐 수 있는 것은 태양이 빛나고 있고, 지구가 중력 등을 통해 태양을 포함한 온갖 천체와 상호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또, 아침 식사를 했기 때문에 움직일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한편, 제가 아침으로 먹은 시리얼은 모두 아시다시피 지구를 착취(약탈)하고 파괴하는 경제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제가 여기까지 오는 버스를 무료로 탈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연금 수급자이고 이제 일하기에는 너무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자본주의 타도와 사회 혁명을 논하는 토론회에 온 것이죠.

제가 방금 한 설명을 보면, 매 순간 다양한 층위가 상호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호작용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현실 전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나머지 자연과 분리된 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생물학적 층위와 사회적 층위도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읽은 최고의 생물학 서적 하나는 리처드 레빈스와 리처드 르원틴이라는 미국의 두 생물학자가 쓴 《변증법적 생물학자》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두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생물학을 이해하는 아주 흥미롭고 변증법적인 방식을 발전시켰습니다.

그 책에 수록된 가장 탁월하고 중요한 글은 ‘진화의 주체이자 객체로서의 유기체’입니다. 유기체란, 쉽게 말해 뭔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진화의 객체”라는 말은 우리가 학교에서 흔히 배운 것을 뜻합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기체들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레빈스와 르원틴은 유기체가 진화의 객체이자 주체라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얘기죠?

레빈스와 르원틴은 유전자와 그 유전자가 내재(부호화)된 유기체 사이에 매우 복잡한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유전자와, 유기체에 나타나는 그것의 표현 사이의 관계가 매우 가변적임을 보여 줍니다. 유기체가 갖고 있는 특정한 유전자들과, 그 유기체의 구조 등으로 나타나는 그것의 표현 사이에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대응 관계가 없다는 것이죠.

유기체와 환경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의 관계 문제는 유기체가 진화의 주체임을 이해하는 데에 핵심적입니다. 왜냐하면 둘의 관계는 단지, 유기체들이 자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환경에 적응되기만 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죠. 환경은 그것과 관계 맺는 유기체들의 영향력 바깥에 서 있는 장벽 같은 것이 아닙니다.

레빈스와 르원틴은 유기체의 특성이 환경에서 무엇이 유의미한지를 결정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자갈밭 위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유용한 예시로 듭니다.

딱따구리의 입장에서 볼 때, 나무에서 중요한 부분은 나무껍질입니다. 왜냐하면 부리로 나무껍질을 뚫고 들어가 그 아래 숨어있는 곤충을 먹는 것이 관심사이기 때문입니다.

지빠귀의 입장에서는 나무 아래에 깔린 자갈이 관심사입니다. 그 자갈을 이용해 달팽이의 껍질을 깨서 식사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나무는 동일한 물리적 대상이지만 그 나무가 갖는 의미는 유기체의 특성에 달려 있습니다. 이 예시에서는 각 유기체가 무엇을 섭취하느냐에 달려 있죠.

유기체는 환경을 변화시키도 합니다.

자연 선택론을 정립한 찰스 다윈은 지렁이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다윈은 지렁이를 대단히 흥미로운 생물이라고 여겼는데, 지렁이는 맹목적으로 주변 환경을 휘젓고 돌아다니면서 토양을 개량하고, 그 토양을 이용해 인간이 집을 짓고 농작물을 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유기체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특정 측면을 선택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면서 상호작용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강조한 노동과 나머지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개념을 미리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사회를 건설하는 유기체인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살펴볼 때에도, 이러한 폭넓은 이해를 견지해야 합니다.

생물학적 층위와 사회적 층위도 서로 별개가 아니라 서로 얽혀 있고 상호작용하는 관계라고 봐야 합니다.

이것은 성과 젠더의 관계라는 문제에 대해 갖는 함의가 있습니다. 성의 물리적 표지자로 흔히 여겨지는 염색체, 생식선, 생식기를 생각해 봅시다. 이 셋의 관계에는 오만가지 조합이 가능하고 각각의 경우마다 유기체에 나타나는 결과도 상이합니다.

실제로 관련 연구를 읽어 보면 놀라울 정도입니다. 2018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실린 한 탁월한 논문은 생식선이나 염색체 상의 작은 변화가 얼마나 복잡하고 또 방대한 차이를 낳을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레빈스와 르원틴은 거시적 층위, 즉 유기체의 층위와 유기체-환경의 관계에 엄청난 복잡성과 어느 정도의 비결정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동일한 유전자라 하더라도 유기체에 내재돼 있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고, 다양한 유기체가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환경을 변화시키는 오만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복잡성과 비결정성은 미시적 층위에도 있습니다.

이처럼 온갖 변화가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성적 행위와 젠더 정체성이 존재할 조건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역사 기록을 통해 우리는 실제로 그 다양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에서 그러한 다양성이 확인된다고 해서, 인간이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성적 행위와 젠더 정체성을 자유롭게 선택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행히도 인간의 역사는 그렇게 행복한 역사가 아니었죠.

주디스 버틀러가 저서에서 가장 훌륭하게 다룬 주제 하나는 젠더가 부여[또는 젠더로 호명 — 역자]되는 것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불리고 다뤄지게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분법적인 성과 젠더가 우리에게 부과되는 과정을 보면, 아이들은 소년/소녀로서 특정한 방식으로 불리거나 다뤄지며, 여기에는 그들의 행실과 품성이 어떠어떠해야 하고 그들이 무슨 옷을 입고 어떤 놀이를 해야 한다는 등의 함의가 따라옵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그 과정이 반복적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규범으로 요구되는 특정한 성적 지향을 갖고 사회에서 인정되는 특정한 행동을 하는 특정한 젠더 정체성을 아이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부단한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생물학적 기초는 상대적으로 열려 있고 가변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생물학이 성을 결정한다거나 성적 차이가 생물학의 결과라는 대법원의 얘기는 그야말로 허튼소리입니다. 가장 앞서가는 과학자들의 주장과도 맞지 않고, 방대한 인류 역사와 인간의 실제 행동으로 확인되는 것과도 맞지 않습니다.

이로써, 인간 본성을 포함해 자연의 모든 것을 ‘물질의 운동’ 따위의 기초적인 물리적 힘으로 환원하는 기계적 유물론이 아닌 유물론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한 유물론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확고히 자리매김하면서도, 인간과 나머지 자연의 상호작용이 매우 복잡하고 비교적 열려 있음을 이해합니다.

이러한 이해의 중요성은 방금 얘기한 성과 젠더를 둘러싼 논쟁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다른 분야에서는 이것이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에서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우리 종은 특별합니다. 특히, 지적·육체적 수완을 결합해 새로운 생산력을 발전시켜서 자신과 자연을 변화시킬 능력이 있습니다. 마르크스도 이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파괴할 능력도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고등한 유인원에 불과한 이 동물(과연 고등한 것인가를 놓고 논쟁을 걸 수도 있겠습니다)이 무시무시한 핵무기를 그토록 많이 보유하며 지구를 몇 번이나 파괴할 능력을 스스로 갖게 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정확히는 지구 전체가 아니라 지구상 생명체 대부분을 파괴할 능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핵전쟁이 벌어져도 바퀴벌레가 살아남아 지구를 접수할 테니까요.)

핵전쟁이 벌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후변화라는 매우 파괴적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산업화 이전 시대 대비 1.5도 상승이라는 한계선을 돌파하기 직전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처럼 인류에게는 파괴 능력이 있습니다. 그 힘은 우리 인류가 속해 있고 우리가 이해하려는 자연 과정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 논의에서 위안이 되는 논점 하나는 주체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초보적인 형태의 주체 됨은 아까 말한 지렁이가 주변의 흙을 비옥하게 해서 (우리가 작물을 재배할) 토양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물론 매우 제한적인 형태의 주체 됨이죠.

인간은 적어도 때때로는 훨씬 복잡한 종류의 주체 됨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특히, 지적으로 무언가를 이해할 뿐 아니라 집단적 힘으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조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을 강조하면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과거의 유물론은 관조적일 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 이전의 유물론자들은 세계(사회를 포함해)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통제 바깥에 있는 물리적 힘에 의해 변화한다고 여겼습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능동성에 관한 논의를 발전시킨 것은 관념론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인간의 주체적 역할,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체로서의 인간 등에 관한 지적이었습니다.

앞서 제가 주디스 버틀러의 최근 저작을 좋게 언급했지만, 버틀러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닙니다. 비록 마르크스를 인용하지만 말입니다.

버틀러는 가치와 규범의 층위에서 벌어지는 변화에만 초점을 두고 그것과 물질적 구조 사이의 실질적이고 심층적인 관계, 가치와 규범 등을 떠받치는 사회적·경제적 관계를 파고들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버틀러는 능동적 측면에 관한 논의를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성과 젠더에 인간의 자기 창조적 요소가 있다는 점을 펴 밝혔다는 점에서 버틀러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는 불확실성, 비결정성을 포함하는 심층 유물론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비결정성이라는 말은 결과가 열려 있다는 것, 어떤 상황이 여러 결과로 이어질 수 있고, 인간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 과정에 개입해 이를 바꿔 낼 주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재창조합니다.

제 생각에 트랜스젠더+ 운동의 위대한 점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재창조하기로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창조하려는 사회는 인류가 더 많은 가능성 속에서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는 사회입니다.

현재 벌어지는 트랜스젠더 권리 운동을 보면, 인간이 세계를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는지 힐끗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리 발언

훌륭한 기여가 많아서 몇 가지만 간단하게 보태겠습니다.

첫째, 한 동지가 언급한 자연의 기이함에 대해 부연하고 싶습니다.

트랜스젠더 권리 문제에서 잘못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자연을 잘못 이해하는 더 광범한 경향의 일부입니다. 자연을 고정불변하고 이러저러한 것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견해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모든 층위마다 상이한 복잡성과 비결정성이 있습니다.

예컨대, 아직 실험적으로 뒷받침되지는 않았지만 초끈 이론에 따르면 입자 물리학의 층위에서 이 세계는 12차원으로 이뤄져 있고 그중 4개 차원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꽤나 기이하죠.

그런 만큼 우리는 자연이 여러 측면과 여러 차원에서 무척 매혹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자연이 그 어떤 보수적·반동적 사상에도 근거를 제공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딱 하나 단서를 달자면, 자연의 복잡성을 설명할 때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산타페 연구소가 내놓는 글들은 복잡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한 시스템의 상태가 다른 상태로 급격하게 도약하는 상전이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잘 설명합니다. 그런데 제가 읽은 어떤 책은 이를 유심론에 가까운 이데올로기로 포장해서 신이 존재할 여지와 자본주의를 옹호할 여지를 열어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동지가 발언한 주제로 이어지는데, 과학 이론이 진공 속에서 발전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학 이론은 이데올로기적 환경 속에서 발전하고, 그것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을 수 있고, 상이한 보수적 세력에 의해 이용될 수 있습니다.

둘째, 젠더가 이데올로기적 전장이 됐다는 지적은 매우 중요하고 지극히 옳다고 생각합니다.

극우가 젠더를 자신의 핵심 쟁점으로 삼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트럼프 정부가 트랜스젠더 문제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보고 있으면 그들에게 무슨 정신분석학적 사정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청중 웃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극우가 트랜스젠더들과 트랜스젠더 권리에 대한 공격을 이데올로기적 공세의 최전선으로 삼아서, 이성애 규범적 가족 제도를 재확립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성애 규범적 가족은 모두 인정하듯 온갖 위기에 처해 있고 극우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처럼 이성애 규범적 가족을 방어하는 무기로 소위 ‘젠더 이데올로기’를 휘두르는 것은 또 다른 반동적 사상과 흔히 연결됩니다. ‘용납될 수 없는’ 섹슈얼리티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 “백인 기독교 인종”의 약화에 일조한다는 사상입니다. 이렇듯 인종차별과 트랜스젠더 배척 이데올로기는 매우 긴밀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 우리는 대결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극우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트랜스젠더와 트랜스젠더 권리를 놓고 싸움을 걸면, 우리도 거기에 맞붙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한 동지는 [보수적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열린 자긍심 행진에서 트랜스젠더 참가단이 얼마나 큰 환대를 받았는지 전했습니다. 이런 순간들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연결됩니다.

올해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과 관련해서는, 어느 밴드가 ‘이스라엘군(IDF)에 죽음을’ 하고 외친 것을 둘러싸고 일어난 논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많은 사람들이 그 밴드를 지지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군이 제노사이드[인종학살] 집단이고 그들이 분쇄돼야 한다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상식이 됐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분석에 도달한 사람들은 트랜스젠더 권리 문제를 포함해 온갖 쟁점들 사이의 연관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연결은 중요합니다. 팔레스타인 대의에 일체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체제의 지배계급들이 자기 이해관계와 부합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그런 인종학살에 공모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트랜스젠더 권리까지 지지한다면, 그것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지는 그동안 매우 협소한 젠더 정체성이 사람들에게 강요돼 왔고, 그 과정에서 수 세대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천대받고 상상만 해도 끔찍한 고통을 겪어 왔다고 외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이 필연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재창조하면서 우리 자신을 재창조합니다.

그런 만큼 트랜스젠더 권리를 방어하는 투쟁은 인종학살, 억압, 착취 등을 낳는 이 끔찍한 체제를 타도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핵심적 투쟁입니다.

번역: 김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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