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주디스 버틀러 지음, 문학동네):
누가, 왜 젠더를 두려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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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석학이자 젠더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의 신간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가 번역 출판됐다. 《젠더 트러블》(1990) 이후 35년 만에 ‘젠더’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다.
《젠더 트러블》은 출판 당시 반향을 일으켰지만 그럼에도 학계에 국한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버틀러와 그의 사상은 훨씬 더 널리 논의되고 있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트랜스젠더나 논바이너리* 사람들이 더 많이 가시화되고 이들의 운동이 성장한 덕이다. 젠더 이분법과 이성애유일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한 버틀러의 젠더 이론은 젠더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에게 청량감을 줬다. 버틀러 자신도 논바이너리다.
한편, 우파의 반발도 만만찮게 제기돼 왔다. 특히, 극우가 성장하면서 “젠더 이데올로기 반대”는 오늘날 전세계 극우가 사용하는 하나의 표지가 됐다. 젠더와 버틀러의 사상은 이제 그것을 놓고 정치적으로 격렬하게 다투는 대상이 됐다.
실제로, 버틀러가 이 책을 쓴 계기도 2017년 그가 방문한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자신의 모형을 불태우는 성난 군중을 맞닥뜨린 경험에서였다. 그들은 버틀러가 소아성애와 근친상간, 수간을 옹호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처구니없이 지독한 일단의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우리를 비난하며 광분하던 그들이 누구였을까 곱씹어 보다가 나는 반젠더 이데올로기 운동에 대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402쪽)
한국에서도 2021년 EBS가 버틀러 강연을 방영한다고 예고했을 때 개신교 우익이 방영 취소 운동을 벌였다(다행히 방영됐다). 매해 퀴어퍼레이드 반대 집회를 하는 개신교 우익은 자신을 “젠더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거룩한 방파제”라고 칭한다.
“판타즘”(허깨비)
버틀러는 이 책에서 자신의 젠더 이론 그 자체보다는 전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반젠더 운동에 주목한다. 누가, 왜 젠더를 두려워하는지 묻고 답한다. 버틀러의 글은 난해하기로 유명한데, 이 책은 오늘날 현실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어 그의 저작 중 가장 쉽게 쓰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버틀러에 따르면, 젠더는 오늘날 다양한 사회적 불안과 두려움이 투사된 “판타즘(phantasm)”이 됐다. 판타즘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나 상상 속에서 실재처럼 작동해 심리적·정서적 효력을 발생시키는 특정한 이미지(허깨비, 허상)를 말한다.
그리하여 젠더는 러시아에서는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푸틴)으로, 바티칸에서는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무기’로, 보수적 복음주의 개신교에서는 전통적 가정을 파괴하고 “엄마,” “아빠”라는 호칭조차 금지하려는 음모로, 미국 일부 학교에서는 어린이에게 동성애자가 되는 법을 가르치는 일종의 세뇌로(한국의 개신교 우익이 포괄적 성교육 반대 운동을 벌이면서 하는 얘기와 똑같다!), 브라질에서는 ‘전통적 가치에 대한 위협’(보우소나루), 헝가리에서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공격’(오르반 총리) 같은 것이 됐다.
“젠더 이데올로기”가 나타내는 것들이 일관성을 요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부추기려 하는 그 어떤 불안이나 공포도 일관성 없이 다 포괄할 수 있다.”(29쪽)

젠더가 왜 지금처럼 판타즘적 힘을 가지고 유포되는지에 대해서도 버틀러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반젠더 운동이 단지 “문화전쟁”이 아니고,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근본적 불안 속에서 삶의 조건이 악화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 경제구조에 대한 반응임”을 지적한다.(389쪽)
몇 가지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동유럽에서는 신자유주의로 복지 제도가 후퇴하고 해체됨에 따라 사람들은 더욱 가족에 의존하게 됐다. 우간다에서는 의료와 교육을 위한 정부 지원이 중단되자 그것을 대신한 신오순절교회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처럼 삶의 악화가 젠더 판타즘이 힘을 얻는 조건이 됐다.
한편, 세계은행이나 유럽연합 같은 신자유주의적 기구들은 아프리카 등지에 대출을 해 주는 조건으로 차별 금지 정책 등 젠더 인정을 강요하는데(‘핑크 워싱’의 일환이다), 이는 오히려 그 나라들에서 젠더 반대를 키운다는 점도 짚는다. 따라서 “젠더에 대한 옹호는 금융 강압에 대한 비판과 결부돼야 한다.”(96쪽)
반젠더 운동의 핵심 행위자로는 보수 복음주의 개신교, 바티칸, 러시아 정교회(푸틴이 성심껏 지원하는) 같은 보수 그리스도교 세력과 트럼프, 보우소나루, 오르반, 멜로니, 에르도안, 윤석열 같은 극우 정치인들이 지목된다.
반젠더 운동이 목적하는 바는 무엇인가? “‘젠더’라는 이 무시무시한 판타즘을 무기로 활용하는 전략의 핵심은 권위주의다. … 세상을 ‘젠더’ 이전의 시대로 되돌리겠다는 기획은 ‘역사’나 ‘자연’의 위상을 점유한 가부장제라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법한 꿈-질서로의 회귀를 약속하는데, 그것은 오직 철권통치 국가만이 복구할 수 있는 질서이다. 법원의 권한을 포함한 국가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반젠더 운동은 더욱 광범위한 권위주의적 기획의 하나임을 드러낸다.”(16쪽)

상호작용
또한 버틀러는 한 장을 할애해 반젠더 운동의 행위자 중 하나로서 영국의 “트랜스 배제적 페미니즘(일명 터프)”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들의 주장(트랜스여성이 여성 전용 공간에서 여성을 위협한다, 여성 스포츠에 참가해서 여성의 몫을 빼앗아 간다 등)을 예리하게 반박할 뿐 아니라, 그들이 하는 나쁜 정치적 역할을 지적한다. 즉, 젠더를 공격하는 반동적 우파와 (뜻하지 않게) 동맹을 맺게 되고, 천대받는 사람들 사이의 분열을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버틀러는 말미에서 세 장을 할애해 섹스(생물학적 성)와 젠더의 관계도 깊이 있게 다룬다. 그는 생물학적 성만이 실재한다는 관점(반젠더 우파와 “터프” 모두 그렇다)과 젠더가 오직 문화적·사회적이라는 관점 모두를 반대하며 “생물학적 실재와 사회적 실재가 상호작용한다”고 강조한다. 즉, 본성/양육, 자연/문화는 칼같이 나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자기형성 능력을 포함해 수많은 형성의 힘들이 성별이라는 문제에 작용한다는 주장은 성별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 성별의 실재를 이해하는 대안적인 방법을 제공하려는 것이다.”(274쪽)
이런 설명은 버틀러가 초기 저작에서 정립한 젠더 이론보다 더 명료하게 발전된 것이다. 인간이 (주어진 조건하에서)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능동적인 측면에 주목함으로써, 기계적 유물론자보다도 훨씬 마르크스주의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약점도 없지는 않다. 버틀러의 분석은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약점이 있다. 그래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종횡무진하며 전 세계 반젠더 운동과 관련 쟁점을 다루지만, 그 기저에 존재하는 사회적·경제적 물질 구조(자본주의와 그 가족 제도)와의 연관성은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따라서 대안 면에도 약점이 드러난다. 버틀러는 반젠더 우파에 맞서 여성, 트랜스젠더, 흑인 등 우익의 표적이 되는 모든 사람들이 연대해야 한다고 옳게 말한다. “억압의 공통된 근원에 초점을 맞추고 함께 나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억압의 공통된 근원”이 무엇인지, 연대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는 바가 없고, 사상과 담론을 바꾸는 것(“비판적 상상력,” “대안적 상상계,” “윤리적 비전” 등)이 대신에 제시된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도 극우가 세를 결집하고 있는 지금 이 책은 많은 힌트와 영감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