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라는 환상》 서평:
중도 철학자의 트랜스젠더 공격
〈노동자 연대〉 구독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의 철학 교수 알렉스 번이 쓴 《젠더라는 환상》(원제: Trouble with Gender)은 젠더와 젠더 정체성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책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유명한 책 《젠더 트러블》을 패러디 한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주디스 버틀러와 같은 젠더 이론가의 견해를 반대한다.

저자가 우파이거나 트랜스젠더 혐오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2023년에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을 “지루한 중도주의자”라며 “미국에서 항상 민주당에 투표해 왔다”고 말했다. 또, 자신이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으며 성전환 등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여러 번 말했다.
하지만 저자의 결론은 매우 보수적이다. 저자는 분석철학의 방법을 사용해 성이란 무엇인지, 젠더 정체성을 모두가 지니는지 등을 종종 따분할 정도로 자세히 논증하지만, 결론적으로 생물학적 성의 우위와 이분법적 성을 옹호하고, 젠더(와 젠더 정체성) 개념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책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평할 수밖에 없다.
최근 몇 년간 트랜스젠더 권리는 전 세계적으로 우파가 벌이는 소위 ‘문화 전쟁’의 주요 요소가 됐다. 우파는 트랜스젠더 문제를 놓고 도덕적 공포(여성 위협 등)를 조장하고, 좌파를 분열시키고, 전통적 성역할을 강화하는 데 활용했다.
이는 특히 미국과 유럽에서 심했는데, 영국에서는 2016년 이래로 트랜스젠더에 적대적인 조직들과 웹사이트들이 생겨났고 트랜스젠더 권리가 일부 후퇴했다. 미국에서도 트럼프 첫 집권 이래 트랜스젠더가 혹심한 공격을 받아 왔다.
진보·좌파의 출발점은 다양한 젠더를 표현하는 사람들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그들과 연대하며, 차별과 천대에 함께 맞서는 것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일부 페미니스트와 심지어 일부 좌파도 트랜스젠더의 권리가 여성 권리와 대립된다는 주장에 동조했고, 그럼으로써 우파의 트랜스젠더 혐오를 그럴싸한 것으로 포장하는 효과를 냈다. 이 책도 그렇다.
저자는 트랜스젠더가 사회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저자의 행보를 보면 이 말은 거의 무의미한 빈말에 가깝다. 예컨대 한 인터뷰를 보면, 저자는 생물학적 성을 우선하면서 여성 스포츠나 여성 전용 공간에 트랜스젠더 여성이 접근하는 것에 대체로 부정적이고, 법적 성별 변경에서도 엄격한 절차를 주문한다.
저자의 비판 대상인 주디스 버틀러가 포스트구조주의 접근법을 취하면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분석과 대안에서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생물학적 성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 것도 그중 하나다. (관련해서 필자의 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이론 비평: 젠더 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 《마르크스21》 43호를 참고하시오.)
하지만 버틀러는 트랜스젠더 차별 반대에서 올바른 방향에 서 있다. 버틀러는 최근 그의 저서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는가?》(미번역)에서 임신중지권과 성소수자·트랜스젠더 권리를 연결하고, 이를 공격하는 주동자로 복음주의 교회와 우익 포퓰리스트·파시스트를 지목하며, 핵심 쟁점은 (차별받는 사람들의) 자기결정권이라고 옳게 주장한다.
진실
저자의 주장이 정치적으로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저자가 추구하는 “진실”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두 가지 중요한 개념만 살펴보겠다.
먼저, 저자는 혼란스러운 ‘젠더’ 용어의 폐기를 주장하며, 오직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생물학적 성(Sex)만이 실재한다고 말한다(간성은 극소수의 예외적인 성발달장애에 속한다고 본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성이 실재하고 유성생식으로 인간 종이 유지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성이 곧 생물학으로 환원되진 않는다. 인간의 성은 단지 생식을 위한 것으로만 발전하지도 않았고, (인간 성의 일부인) 성적인 행동이나 태도는 사회마다 달랐다. 인간의 성은 생물학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의 상호작용 속에서 봐야 한다.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사회적 행동에는 생물학적 영향과 사회적 영향이 분리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 그 요인들은 말 그대로 떼려야 뗄 수 없이 뒤엉켜 있다.”
또,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 생물학자인 리처드 르원틴은 이렇게 말했다. “유기체와 그 주변 환경은 서로 반응하며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 모든 인간 현상은 사회적인 동시에 생물학적이다.”
‘젠더’라는 용어가 저마다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젠더’를 삭제하자는 요구는 명백히 트랜스젠더 권리를 반대하는 측에서 나오고 있다. 저자도 이렇게 말한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젠더 정체성
동시에 저자는 젠더 정체성도 부정한다. 생물학적 성별이 객관적 진실인 반면, 젠더 정체성은 “신화”이거나 기껏해야 개인의 심리적 상태나 느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 사람들이 차별과 적대 속에서도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젠더 정체성의 실재와 (상대적) 안정성을 보여 준다.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트랜스 여성인 로라 마일스는 젠더 정체성이 “느낌 이상의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자신이 인식하는 신체, 자신의 생물학적 성(일부 경우에는 이에 대한 깊은 불안감 포함),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신체에 대한 사회적 인식, 성별 가치와 기대와 같은 사회적 요인, 그리고 성적 매력과 성적 욕구(즉, 성적 지향)를 지닌 성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발달 간의 상호작용의 결과다. 젠더 정체성은 이러한 변증법적 상호작용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일정한 변화 가능성과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젠더 정체성은 사회적 압력, 즉 우리가 성별 이분법과 성에 따른 사회적 기대에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 심지어 배척과 폭력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지속성을 유지한다.”
여기서 더 자세히 다루지 못하지만, 저자는 트랜스젠더 권리를 약화하기 위해 고안된 온갖 신화들을 활용하기도 한다.
예컨대 “탈전환”에 대한 과장(실제로 성전환을 되돌리는 경우가 있지만 매우 소수이고, 전환이든 재전환이든 개인의 선택으로 존중돼야 한다), “급속발병 젠더불쾌감”(트랜스젠더가 사회적으로 전염된다는 주장), 트랜스 여성을 성적 도착의 한 종류로 설명 등.
이 주장들은 트랜스젠더의 젠더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트랜스젠더를 일종의 질병이나 문제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젠더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주디스 버틀러가 지적하듯이, 사람들이 자신의 성을 정의할 권리를 지지할 것이냐 하는 문제다.
자본주의는 이분법적 성역할에 기초한 가족제도를 유지하려 애쓰고 이를 위해 사람들을 끊임없이 이분법적 젠더 규범에 욱여 넣는다. 이에 맞선 저항은 중요하고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