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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 정당성 위기, 극우 선동,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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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음모론은 사회 주변부의 기이한 미신이 아니다. 현대 정치와 대중문화, 인터넷 하위문화, 극우 운동, 나아가 주류 정치의 한복판에서 작용하는 사고방식이다.
음모론은 은밀하면서도 강력한 세력이 규명되지 않은 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믿음이다. 이때 배후 세력을 대개 정치적 동기와 억압적 의도를 지닌 자(들)로 여긴다는 점이 중요하다. 음모론을 단순히 원인 불명의 사건에 대한 잘못된 추론인 ‘인식론적 오류’로만 규정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보이지 않는 지배 세력이라는 권력 구조에 대한 특정한 상상을 핵심 요소로 봐야 한다.
음모론을 무지한 자들의 망상으로 여기지 말고 음모론을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 그 이유는 음모론이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불안, 불신, 소외, 분노가 뒤틀려 표현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음모론은 거짓이다. 그러나 무(無)에서 생겨나는 순전한 허구는 아니다. 현실의 틈새를 타고 기승을 부린다. 정부는 실제로 거짓말을 하고, 기업은 이윤을 위해 정보를 숨긴다. 정보기관은 비밀 공작을 벌이며, 언론은 지배계급의 관점을 정상적인 상식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대중이 공식 설명을 의심하는 것 자체는 비합리적이지 않다. 문제는 그 의심이 어떤 방향으로 조직되는가에 있다.
거짓 총체성: 구조 대신 배후를 찾다
음모론은 대중의 정당한 불신을 포착해 왜곡된 총체성으로 이끈다. 여기서 ‘총체성’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를 개별 악당의 우연한 행위가 아니라 생산관계, 계급 지배, 국가, 이데올로기, 세계 시장, 제국주의가 얽혀 작용하는 전체로 파악하고자 한다. 그런데 음모론도 겉보기에는 전체를 설명하는 듯하다. 금융, 전쟁, 팬데믹, 이민, 성소수자 권리, 페미니즘, 교육, 언론, 국제기구를 하나의 거대한 그림으로 연결한다. 그러나 그 연결은 구조 분석이 아니라 인격화된 악에 대한 서사다. 자본주의의 맹목적 경쟁, 축적 압력, 국가 간 경쟁, 계급 이해관계, 관료의 자기보존 논리는 없고 그 자리에 ‘그들’이 들어선다. 그들은 글로벌리스트(이하 세계주의자), 유대인 금융가, 공산주의자, 딥스테이트, 백신 카르텔, 중국의 공작, 이민자 배후 조직 등이다. 세계는 모순된 사회 체제가 아니라 악한 의지를 지닌 비밀 집단의 작품이 된다.
한국 극우 음모론도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부정선거론은 선거관리위원회나 투표·개표 시스템이 특정 정치세력에 유리하도록 조작됐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중국 공산당의 선거 개입설, 진보계열 인물과 단체를 북한과 연결하는 간첩·종북 프레임, 주요 언론이 진실을 은폐한다는 언론 조작설이 덧붙는다. 서로 다른 주장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같다. 투표 관리의 실패, 주류 언론에 대한 불신, 기성 정치의 위선, 대중의 분노를 한데 묶어 ‘선관위·중국·간첩·언론·현 정부’가 연결된 거대한 배후 조작 서사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매력
음모론의 첫째 매력은 혼란스러운 세계에 질서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현대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힘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물가는 치솟고 일자리는 불안정하다. 전쟁은 갑작스럽게 터지고 팬데믹은 삶을 멈춰 세운다. 기후 위기는 갖가지 재난으로 일상을 위협한다. 정치인은 책임을 회피하고, 전문가는 서로 다른 말을 하며, 언론은 갈등을 상품화한다. 이런 혼돈 속에서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은 진실일 수 있다 해도 정서적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세계가 (자본주의의 경쟁적 축적 압력 때문에)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때로 우연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은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음모론은 바로 이 불편함을 단숨에 해소한다. 우연 대신에 계획, 혼란 대신에 은폐, 구조 대신에 의도가 들어선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라는 질문에 음모론은 ‘배후의 조종자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다. 큰 사건에는 그만큼 강력한 인물(또는 집단)이 배후에 있어야 한다는 ‘비례성 편향’, 사소한 불일치에서 단서를 찾는 ‘패턴 추구’, 우연 속에서 의도를 읽으려는 심리가 결합된 결과다. 음모론은 지식의 형태를 띤 심리적 보상이다. 이는 ‘나는 속지 않는다’, ‘나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진실을 본다’는 우월감을 준다. 무력한 개인은 이 속에서 잠시나마 통제감을 회복한다.
반증을 흡수하는 폐쇄적 신념 체계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음모론의 위험성이 드러난다. 음모론은 합리적 의심을 권장하지는 않고 오히려 맹목적 확신 속에 갇히게 만든다. 합리적 의심은 증거를 따르며 늘 반증 가능성을 열어 둔다. 반면 음모론은 자신에게 불리한 반증조차 자양분으로 삼는다. 자료가 없으면 은폐됐기 때문이고, 전문가가 부정하면 한패이기 때문이며, 오류가 드러나면 그 자체가 교란 작전이라고 주장한다. 이 폐쇄적 체계 안에서 반증은 반대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음모를 뒷받침하는) 추가 증거가 된다. 결국 음모론은 겉으로는 증거에 집착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떤 반증도 허용하지 않는 신념 체계다.(이 점은 개신교 근본주의와 상통하는 면이다.)
이 방식을 잘 드러내는 음모론의 원리는 세 가지다. 첫째, 아무 일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 보이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셋째,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음모론자는 작은 어긋남, 날짜, 상징, 사진, 말실수, 문서 조각, 대중문화의 장면을 모두 퍼즐 조각으로 삼는다. 문제는 연결 자체가 아니다. 실제 세계는 연결돼 있다. 문제는 그 연결을 사회 체제와 구조에서 찾지 않고 초인적으로 유능한 배후 집단의 의도 속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낙인찍힌 지식과 인터넷의 증폭 효과
음모론의 또 다른 특징은 단일한 주장이라기보다 ‘낙인찍힌’ 문화적 지식의 집합이라는 점이다. UFO, 일루미나티, 뉴월드오더(그림자 정부,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등 비밀 세력이 개별 국가의 주권을 없애고 하나의 거대한 ‘세계 단일 정부’를 수립하려 한다는 시나리오), 대체의학, 고대문명론, 기독교 종말론, 반정부 민병대 서사, 유대인 혐오는 내용상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주류 지식 기관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공통된 지위에 있다. 이에 따라 한 영역의 신봉자는 다른 영역으로 쉽게 이동한다. 주류가 부정한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진실성의 증거가 된다. ‘그들이 저토록 부정한다면 뭔가 숨기고 있다’는 논리다. 음모론은 이처럼 배제된 지식의 느슨한 컬트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다.
인터넷은 이 과정을 비약적으로 촉진했다. 물론 인터넷이 음모론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음모론은 프랑스 혁명 직후의 일루미나티 공포, 유대인 혐오적 세계 지배 음모론, 반공주의 마녀사냥, 케네디 암살 의혹, 냉전기의 적색 공포 등 역사가 훨씬 오래됐다. 그러나 인터넷은 각 하위문화 사이의 장벽을 낮췄다. 한 영상에서 다른 영상으로, 한 블로그에서 다른 블로그로, 한 ‘폭로’에서 다른 ‘폭로’로 끝없이 이동할 수 있게 했다.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의심을 강화하고, 온라인 공동체는 고립된 확신을 집단적 정체성으로 바꾼다. 과거에는 소책자, 집회, 라디오 방송, 음모론 서점이 필요했던 일이 이제는 휴대전화 하나로 가능해졌다.
한국에서도 인터넷과 유튜브는 극우 음모론의 결정적 증폭 장치가 됐다. 극우 유튜버와 정치인 그룹, 탄핵 반대 세력은 선거 결과에 대한 불만, 일부 대중의 반중 정서, 반공주의, 언론 불신, 사법·행정기관에 대한 분노를 서로 연결한다. 이때 핵심은 증거의 축적이 아니라 의심의 누적이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 선관위의 해명 지연, 언론 보도의 빈틈은 모두 ‘우연일 수 없는 단서’가 된다. 온라인 공동체는 이런 단서들을 계속 유통시키며, 반론은 ‘은폐’로, 검증 요구는 ‘기득권 지키기’로, 침묵은 ‘두려움의 표시’로 해석된다.
불신의 사회적 기초: 소외와 불투명성
인터넷을 원인으로 보는 것은 피상적 관점이다. 인터넷은 증폭 장치일 뿐이며,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 바로 자본주의의 소외와 비민주적 불투명성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가동하는 생산수단을 통제하지 못한다. 시장은 인간이 만들었음에도 인간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처럼 작용한다. 기업의 투자 결정, 중앙은행 금리, 국제 원자재 가격, 군사 동맹, 환율, 공급망 위기, 부동산 시장, 플랫폼 알고리즘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좌우하지만 결정 과정은 불투명하다. 사람들은 삶이 누군가의 손에 달려 있다고 느끼면서도,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음모론은 바로 이 불투명성을 인격화한 결과다.
대중의 정치적 경험은 이러한 불신을 더욱 키웠다. 주류 중도 정당들은 번갈아 집권했으나 긴축,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복지 삭감, 이민자 희생양 만들기, 전쟁 지지 등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제 위기 때마다 은행과 대기업은 구제받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실업과 임금 삭감, 생활비 위기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팬데믹 시기에 평범한 대중에게는 이동 제한과 처벌이 부과됐으나, 이윤이 걸린 공장과 물류센터 등 일터의 감염 확산 위험은 충분히 통제되지 않았다. 방역을 명분으로 국가 권한이 확대되는 동시에 자본의 이윤 활동은 계속 보호됐다. 이러한 이중성은 ‘공공보건 정책은 엘리트의 통제 공작’이라는 반동적 해석이 자라날 틈을 제공했다.
권력 비판과 음모론 낙인의 경계
따라서 음모론 비판은 오만하지 않아야 한다. 대중이 정부, 언론, 전문가를 신뢰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실제로 국가와 자본은 수많은 거짓말을 해 왔다. 워터게이트, 이란-콘트라 사건, CIA의 비밀 공작, FBI의 반체제 운동 탄압, 기업의 유해성 은폐, 전쟁 명분 조작 등은 모두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실제 음모를 폭로하고 방지하는 것은 공동선에 부합한다. 권력을 향한 의심은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필수 조건이다. 음모론이라는 프레임이 권력 비판을 침묵시키는 낙인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지배 질서를 보호하는 구실을 할 뿐이다.
음모론을 단순한 병리로 보지 말고 한편으로 권력과 비밀의 요소, 다른 한편으로 이해 욕구와 포퓰리즘의 요소를 뒤섞은 확고한 견해로 봐야 한다. 음모론자는 단지 믿는 사람이 아니라 읽고, 해독하고, 연결하며 숨은 플롯을 구성하는 사람이다. 이 믿음의 실천은 모험적이지만 매혹적이다. 그것은 무력한 개인에게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는 주체’라는 느낌을 준다. 음모론은 권력 집중에 대한 민주적 분노를 표현할 수도 있는 동시에, 반동적 희생양 만들기와 폭력으로 빠질 수도 있다. 이 양면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음모론’이라는 말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작용하는지 물어야 한다. 어떤 설명은 공식 설명이 되고, 어떤 설명은 음모론으로 배제된다. 국가가 테러 사건을 설명할 때도 여러 행위자의 비밀스러운 공모를 말하지만, 이는 음모론으로 불리지 않는다. 반면 국가나 정보기관의 개입을 의심하는 대중적 주장은 검토되기도 전에 ‘음모론’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이때 ‘음모론’이라는 말은 중립적 분류어가 아니라 조롱, 배제, 무효화의 효과를 낸다. 게다가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일종의 음모론으로 (근거도 없이) 몰아세운다. 음모론 낙인은 ‘합리적 시민’과 ‘비합리적 극단주의자’의 경계를 만들고, 국가 감시, 전문가 권위, 언론의 ‘문지기’ 역할을 정당화한다.(문지기는 뉴스 미디어가 수많은 세상사 중에서 어떤 소식을 통과시켜 ‘뉴스’로 만들고, 어떤 소식을 걸러내어 ‘폐기’할지 결정하는 권한을 쥐고 있다는 뜻에서 흔히 붙여진 비유다.)
그러나 모든 음모론 비판이 억압적 낙인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유대인 혐오, 인종차별, 여성차별, 성소수자 혐오, 이민자 혐오와 결합된 음모론은 사람들을 죽이고 사회운동을 파괴한다. 예컨대 나치의 ‘유대-볼셰비즘’ 음모론은 유대인 학살뿐 아니라 공산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노동조합 파괴를 정당화했다. 오늘날에는 ‘백인 대체’ 음모론이 2018년 피츠버그 시너고그 총격과 2019년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모스크 학살 같은 극우 테러를 부추겼다. 아무리 세상에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해도, 명백한 사실과 진실까지 흔들며 ‘다르게 해석할 수 있지 않느냐’고 본질을 흐릴 수는 없다.
실제 음모와 음모론은 어떻게 다른가
잘못된 두 극단이 흔하다. 하나는 권력에 대한 급진적 의심을 ‘음모론’으로 낙인찍어 봉쇄하는 자유주의적 태도다. 다른 하나는 모든 공식 설명을 거짓으로 보고 모든 사건 뒤에 비밀스러운 배후를 상정하는 음모론적 태도다. 전자는 기존 질서에 순응하고, 후자는 현실의 구조를 흐린다. 필요한 것은 증거에 근거한 의심, 실제 공모와 구조적 지배를 구분하는 능력, 그리고 개별 음모보다 공개적으로 작용하는 계급 권력의 논리를 파악하는 태도다.
이러한 구분을 하려면 먼저 실제 음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음모는 대체로 범위가 제한돼 있고 관련자도 적다. 목표가 구체적이며 결과도 음모자들의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반면 음모론이 상정하는 음모는 수십, 수백 년간 지속된다. 수많은 관련자가 필요하며 세계 지배 같은 과대한 목표를 상정한다. 더 근본적으로, 음모론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전제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알고 장기간 일관되게 실행하며, 사회 전체를 계획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전제다. 그러나 사회적 결과는 수많은 행위자의 상호작용, 제도적 제약, 경쟁, 우발성,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뒤섞여 나타난다.
자본주의는 음모 없이도 잔혹하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음모 없이도 잔혹하다. 물론 자본가와 국가 관료는 실제로 음모를 꾸미고 로비하며, 은폐하고 거짓말한다. 그러나 착취는 밀실 모의가 있어야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 자체가 착취를 낳는다. 경쟁은 개별 자본가에게 끊임없이 비용 절감과 노동강도 강화를 강제한다. 국가는 폐쇄적 모의가 없어도 자본 축적의 전반적인 조건을 보장하려 한다. 언론은 매일 정부 관료나 사주의 비밀 지령을 받지 않아도 소유 구조와 광고, 취재 관행, 계급적 상식 속에서 지배적 견해를 재생산한다. 제국주의도 소수 악당의 성향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과 국가 간 경쟁에서 비롯한다.
음모론은 바로 이 체제를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소행으로 의인화한다. 그래서 음모론은 때로 매우 급진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체제에 면죄부를 준다. 문제가 ‘사악한 금융가 몇 명’이라면 금융 시장 자체는 비판에서 벗어난다. 문제가 ‘부패한 관료’라면 국가의 계급적 성격은 은폐된다. 문제가 ‘세계주의자(글로벌리스트)’라면 자본주의 세계 시장과 제국주의 질서는 애국주의적 분노 속에 묻힌다. 문제가 ‘문화 마르크스주의’라면 여성, 성소수자, 이민자,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모든 사회 불안의 배후로 지목된다. 그 결과 자본주의의 공개적인 폭력은 가려지고, 차별받는 집단이 희생양이 된다.
파시스트 선동과 ‘문화 전쟁’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결합한 뢰벤탈과 구터만의 연구는 이 과정을 생생하게 설명한다. 1 파시스트 선동가는 사회적 불만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대중에게 이미 존재하는 불안, 박탈감, 원한, 혼란을 포착한다. 그러나 그 원인을 구조적으로 규명하지는 않는다. 그는 불만을 합리적 개념으로 정리하기보다 모호하게 흐린다. 실업, 빈곤, 기성 정치의 부패, 전쟁, 세금, 노동조합, 이주민, 난민, 동성애자 등에 대한 불만을 하나의 거대한 분노로 응축시킨다. 청중은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어 선동가는 그 불쾌감을 해소할 가상의 적을 제시한다. 유대인, 공산주의자, 이주민, 난민, 동성애자, 자유주의 정치인·언론인이 바로 그 적이다.
선동가의 기술은 단순한 거짓말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청중에게 낯선 관념을 주입하기보다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금지된 욕구와 공격 충동을 자극한다. 그는 ‘당신들이 하고 싶지만 용기가 없어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 한다고 자처한다. 농담, 과장, 암시, 도그 휘슬을 비롯한 이중어법(하나의 메시지에 상반되거나 모호한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담아 겉으로는 상식적인 말처럼 포장하되 속으로는 대중의 증오와 본능을 자극하는 영악한 말장난), 피해자 코스프레, 자기희생적 지도자상, 모금 호소, 도덕적 공포, 폭력의 암시는 마치 하나의 잘 짜인 연극처럼 연출된다. 이는 우스꽝스럽지만 유해하다. 농담은 폭력의 리허설이 되고, 음모론은 혐오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
오늘날의 극우는 이 선동 기술을 ‘문화 전쟁’과 결합한다. ‘문화 전쟁’은 극우가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 못지않게 중시하는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경제적·정치적 불만을 계급 문제가 아닌 사회의 가치관, 도덕, 정체성 문제로 치환하는 정치 전략이다. 생활비 위기, 주거 불안, 실질임금 감소, 지역사회 붕괴, 의료·교육 위기는 자본주의와 국가 정책이 낳은 산물이다. 그러나 극우는 그 원인을 이민자, 난민,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진보 편향적인’ 지식인, 국제기구, 인권단체, 교사, 언론 탓으로 돌린다. 이로써 계급적 분노는 아래를 향한 적대로 치환된다. 서민은 자본가에게 분노하지는 않고 노동자와 차별받는 소수자들을 적으로 규정하게 된다.
극우 음모론의 국제적 양상
트럼프주의는 이 왜곡의 전형이다. 트럼프는 백인 우월주의, 극우 음모론, 기독교 애국주의, 백신 반대 운동, 이민 반대 등을 주류 정치의 어젠다로 끌어올렸다. 2021년 1월 6일 의사당 폭동은 선거 부정 음모론이 실제 폭력으로 나타난 사건이다. 그러나 폭동 이후에도 극우 세력은 자신들의 행동을 헌법 수호로 포장하거나, 오히려 연방수사국(FBI)과 안티파의 공작이라는 음모론을 다시 덧씌웠다. 음모론은 실패조차 자기 합리화의 증거로 활용한다. 패배했을 때 ‘우리가 졌다’고 인정하지는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유럽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난다. 난민 위기, 무슬림 이민, 유럽연합(EU), 기후 정책, 트랜스젠더 권리, 감염병 정책은 모두 ‘자국민을 대체하려는 엘리트의 음모’라는 서사로 짜 맞춰진다. 이러한 극우 포퓰리즘 음모론은 얼핏 듣기에는 엘리트 비판처럼 들린다. 그러나 극우의 엘리트 비판은 결코 계급 지배를 겨냥하지 않는다. 오히려 금융 자본과 대기업 권력은 ‘국가 경제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보호받고, 대중의 분노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향하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혐오 암시가 종종 되살아난다. ‘세계 금융’, ‘세계주의자’, ‘문화 마르크스주의’, ‘언론 장악’ 같은 용어는 유대인 혐오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래된 유대인 세계 지배 음모론의 재탕에 불과하다.
부정선거론과 극우 위협
한국의 부정선거론은 이런 국제적 극우 음모론의 한국판이라고 할 수 있다. 선관위에 대한 불신은 실제 행정 과실과 맞물리면서 빠르게 확산됐다. 투표용지 부족 같은 선거 관리 부실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극우는 행정 책임 추궁을 넘어, 선거 결과 전체가 조작됐고 그 배후에 중국, 북한, 진보·좌파 단체, 언론, 현 정부·여당이 얽혀 있다는 식으로 비약했다. 부실 선거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부정 선거라는 음모 서사로 바뀌는 순간, 문제의 초점은 투표권 보장과 선거 행정의 민주적 통제가 아니라 정적 악마화와 극우 동원으로 옮아갔다.
2026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직후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개표소 앞에서 벌어진 시위는 이런 전환을 보여 준 사례다. 출발점에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분노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무능을 비판하는 요구가 있었다. 일부 참가자들은 특정 정치세력이나 부정선거 음모론과 거리를 두며, 자신들의 문제 제기가 ‘부정선거’가 아니라 ‘부실선거’에 관한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부정선거론자들의 목소리가 커졌고, 검증되지 않은 의혹과 극우적 구호가 집회의 전면에 등장했다. 투표권 침해에 대한 합리적 문제 제기가 음모론적 정치 동원에 이용될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음모론의 전형적 확장 방식이 나타났다. 선관위의 행정 실패는 선관위 자체의 조직적 조작으로, 선거 결과에 대한 불신은 현 정부·기성언론·진보단체·북한간첩·중국 등의 공모로 확대됐다.
음모론은 외부의 적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의심도 끝없이 증식시킨다. ‘진실을 아는 자들’의 공동체는 실제로는 끊임없는 배신자 색출과 분열을 낳기 쉽다. 음모론은 ‘우리는 진실을 아는 자들’이라는 우월감과 선택받은 소수라는 정체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체성이 연대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음모론 공동체는 겉으로는 공동 활동과 연대를 표방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끊임없는 의심과 분열이 작용한다. 누가 진짜 내부자인지, 누가 교란자인지, 어떤 단서가 진실인지를 둘러싼 반목이 이어진다.
윤석열의 친위 군사 쿠데타를 ‘부정선거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정당화하는 서사는 한국 극우 음모론의 위험성을 더 선명하게 보여 준다. 여기서 부정선거론은 단순한 선거 불신을 넘어 권위주의적 탄압과 민주주의 압살 기도를 합리화하는 논리 구실을 한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절차가 아니라 ‘적의 조작 현장’으로, 언론과 시민단체는 공론장의 일부가 아니라 ‘공모 세력’으로, 반대파는 정치적 경쟁자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반국가 세력으로 묘사된다. 음모론은 이처럼 민주적 권리의 언어를 빌려 민주주의 자체를 공격하는 통로가 된다.
음모론에 맞서는 마르크스주의적 대응
음모론자들은 “국민 저항권” 운운하지만 대중을 사회 변화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중은 그저 속아 넘어간 자들, 선동당하는 양떼, 각성해야 할 무지한 존재, 멍청한 ‘그들’로 선이 그어지고 대상화된다. 진실을 아는 소수와 기만당한 다수의 이분법은 또 다른 엘리트주의의 발로다. 이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자력 해방을 도모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원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음모론 같은) 비밀스러운 지식의 이론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가 투쟁 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집단적으로 토론하며 사회의 작동 원리를 배우고, 자신들이 생산과 사회를 새로 조직할 수 있음을 천명하는 이론이다. 음모론은 대중에게 ‘너희는 속고 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에게 ‘당신들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말한다. 음모론은 밀실의 배후를 찾는다. 마르크스주의는 일터, 사무실, 학교, 병원, 물류창고, 플랫폼, 국가 예산, 전쟁 산업, 주택 시장, 국경 통제, 경찰과 군대의 공개된 구조를 분석한다. 음모론은 악당을 제거하면 세계가 정상(正常)으로 돌아올 것처럼 말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상 자체가 문제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자가 음모론자를 조롱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최악의 대응이다. 음모론을 믿는 사람을 단순히 어리석거나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하면, 그들의 핵심 정서인 ‘저들은 우리를 경멸하고 숨기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강화할 뿐이다. 또한 그런 태도는 국가와 자본이 실제로 저지른 범죄를 축소하는 결과를 낳는다. 필요한 것은 대중의 불신을 경멸하는 일이 아니라 그 불신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그래, 그들은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장막 뒤의 사악한 비밀 권력 집단이 아니라 계급 이해관계다.’ ‘그래, 언론은 편향돼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데스크 몇 명의 음모가 아니라 소유, 광고, 국가, 계급적 상식의 구조 때문이다.’ ‘그래, 정부는 팬데믹을 두고 위선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백신으로 인류를 조종하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보다 이윤을 우선하는 체제 때문이다.’
한국의 사례에서도 필요한 대응은 문제 제기를 조롱하거나 선관위에 대한 불신을 무조건 비이성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다. 투표용지 부족과 같은 선거 관리 부실은 실제 문제이고, 투표권을 온전히 보장하지 못한 책임은 분명히 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 책임 추궁은 증거에 근거해야 하며, 선거 행정의 투명성, 민주적 통제, 투표권 보장을 강화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극우의 부정선거론은 바로 이 방향을 흐린다. 행정 실패의 원인과 책임을 따져 묻지는 않고, 중국인·간첩·진보단체·언론이라는 희생양을 만들고, 권위주의적 해결책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단순한 팩트 체크로 이뤄지지 않는다. 사실 여부 검증은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음모론은 사실 관계의 오류이면서도 확신으로, 정서적 자원이자 정체성이며 공동체다. 사람들은 단지 몰라서 음모론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불안하고 분노하며 무력감과 모욕감을 느끼기 때문에 음모론에 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적 대응은 바른 지식뿐 아니라 바른 정치적 소속감을 제공해야 한다. 개인적 각성의 공동체가 아니라 집단적 투쟁의 공동체, 희생양 찾기가 아니라 연대, 거짓 적대를 선동하는 서사가 아니라 계급 분석, 음모 프레임이 아니라 해방 전략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주류 자유주의의 대응은 빈약하다. 자유주의자들은 음모론을 일종의 병리로 보고 전문가 신뢰 회복, 팩트 체크 체계화, 미디어 리터러시, 시민교육, 플랫폼 규제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물론 이러한 처방도 일부는 필요하기도 하다. 정말로 위험한 거짓 정보의 확산을 방치할 수 없으며, 정보 생산과 검증 과정을 교육하는 일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해법은 음모론을 낳는 사회적 원인을 간과한다. 불평등과 전쟁, 긴축, 인종차별, 국가 폭력, 기업 범죄, 정치 엘리트의 위선이 판치는 세상에서 ‘전문가를 믿으라’는 권고는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나아가 국가와 플랫폼 기업에 검열 권한을 부여하는 방식은 음모론자들의 피해자 서사를 강화할 뿐이다.
음모와 음모론은 다르다. 음모는 있다, 그러나 음모론은 틀렸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이하에서 중간 정리하고자 한다. 음모론을 비판한다고 해서 음모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비밀 작전을 벌이고, 기업은 담합과 로비를 일삼으며, 정보기관은 쿠데타와 선거 공작에 개입한다. 이런 일은 역사 속에서 반복됐고, 이를 밝히는 것은 음모론이 아니라 권력 분석과 탐사 보도의 당연한 과제다.
음모는 존재한다. 오류는 음모가 늘 성공한다고 믿는 데 있다. 이 점을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마르크스주의자는 알렉스 캘리니코스다. 그는 《역사와 행위》(사회비평사, 1997년)에서 음모론을 정면으로 다루며 이렇게 말한다. “음모는 존재한다. 오류는 음모가 항상, 또는 대체로 성공한다고 믿는 데 있다.” 캘리니코스는 음모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지배계급이 자기 이익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전략을 수립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20세기 초 남아프리카의 사례를 제시한다. 영국 고등판무관 밀너와 거대 광업자본은 흑인을 보호구역에 묶어 두는 인종분리 체제를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백인이 떠안지 않기 위한’ 계산 아래 노골적으로 논의했다. 캘리니코스는 “허위의식의 증거는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왜 하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역사의 음모론’으로 이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어떤 세력도 무제한의 힘을 갖지 못한다. 음모를 꾸밀 수는 있어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수 있다. 둘째, 설령 성공하더라도 그 행동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실제로 남아공의 보호구역 정책은 아프리카인의 급속한 프롤레타리아화를 불렀고, 이는 훗날 아파르트헤이트 자체를 뒤흔든 흑인 노동계급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음모는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으며, 성공조차 그 성공의 토대를 잠식한다.
음모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사회와 역사 전체를 설명하는 궁극의 열쇠로 삼는 것이 문제다. 음모론은 자본주의 위기와 전쟁, 불평등과 국가 폭력을 모두 ‘은밀한 엘리트의 의도적 설계’로 환원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누군가의 사악한 계획이기 전에 자본 축적과 경쟁, 계급 관계, 국가 체계, 제국주의 경쟁이 맞물려 낳은 구조적 결과다.
자본주의는 음모가 아니라 체제다. 경제 위기가 이를 증명한다. 음모론은 위기를 금융 엘리트의 농간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위기는 경쟁이 강제하는 맹목적 축적, 이윤율 저하, 과잉생산의 산물이다. 개별 자본가는 생존을 위해 비용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일 뿐이지만, 그들의 행동이 모이면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체제 전체의 위기가 닥친다. 시장경제를 통째로 조종하는 단일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자본가조차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사회관계의 체제(또는 구조)다.
음모론은 바로 이 비인격적 지배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본의 추상적 힘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사람들은 이를 누군가의 손에 쥐어 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구조가 ‘숨은 의지’로 둔갑한다. 이는 마르크스가 말한 물신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다.
물론 ‘음모론’이라는 낙인을 함부로 찍으면 안 된다. 지배계급의 실제 담합과 국가폭력, 정보기관의 공작을 파헤치는 정당한 탐구마저 비합리적인 행위로 오인하면 안 된다. 권력자들은 실제로 모이고, 모의하며, 음모를 꾸민다. 필요한 것은 음모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음모를 궁극적인 설명으로 삼지 않는 자세다. 어떤 사건이 비밀 공작의 산물이라면 증거로 밝혀 내야 한다. 그러나 분석이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왜 그 공작이 가능했는지, 어떤 계급 세력 관계와 국제 정세가 그것을 뒷받침했는지를 함께 질문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음모론은 위험한데, 바로 희생양 정치가 진짜 위험이다. 유대 금융자본이 세계를 조종한다는 유대인 혐오 극우주의는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대신 추상적·금융적 측면만 떼어내 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특정 인종 집단에 뒤집어씌운다. 이는 반자본주의의 외피를 쓴 인종차별이다. 음모론은 노동자의 정당한 분노를 자본주의 사회관계 자체가 아니라 이민자, 소수자, ‘딥스테이트’, 국제기구 같은 가상의 적에게 돌린다. 계급 갈등이 ‘선과 악의 드라마’로 변하는 순간, 급진적 분노는 반동적 희생양 만들기로 전락한다.
음모론은 권력자를 지목해 고발한다는 점에서 얼핏 급진적으로 보이지만,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계급을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에 반동적이다. 세상이 전능한 배후 세력의 손아귀에 있다면 파업도 점거도 무용지물이다. 역사는 엘리트들의 게임이 되고, 노동자는 주체가 아닌 조종당하는 구경꾼이 된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음모론을 “빈자의 인지적 지도 그리기”라 부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음모론이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평범한 대중의 궁여지책의 시도(빈자의 지도)이지만, 동시에 진짜 모순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려 대중을 영원히 지배당하게 만드는 덫이라는 뜻이다. 세계를 이해하려는 충동은 정당하지만, 체제와 구조 분석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음모론이라는 왜곡된 지도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음모론을 극복하는 길은 권력 비판의 포기가 아니라, 비판을 더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음모론은 권력을 소수 악인의 의지로 축소한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권력을 사회관계로 파악한다. ‘나쁜 놈들’만 제거하면 세상이 바뀐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문제의 근원이 자본주의 사회관계 자체에 있음을 직시한다.
음모론은 권력을 폭로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 체제 비판을 무디게 만든다. 마르크스주의는 ‘누가 배후에서 조종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회관계가 이 결과를 낳았는가’를 묻는다. 따라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누가 배후에서 조종했는가’가 아니라 ‘어떤 구조적 관계가 이 결과를 초래했는가’이다. 이러한 인식 전환은 권력자의 책임을 흐리기는커녕, 그 책임을 더 넓고 깊은 사회관계 속에서 묻게 한다. 음모론이 멈춘 자리에서 진정한 체제 비판이 시작된다.
결론: 더 급진적인 의심과 투쟁
음모론에 맞설 가장 강력한 무기는 조롱도, 검열도, 전문가주의도 아니다. 현실을 더 깊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사상,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경험하는 투쟁이다. 노동자가 임금 등 노동조건을 놓고 싸울 때 사회를 움직이는 진짜 힘이 어디에 있는지 드러난다. 이민자와 내국인 노동자가 연대해서 함께 싸울 때 극우의 희생양 정치가 깨진다. 여성과 성소수자, 노동자 운동이 연결될 때 ‘문화 전쟁’의 거짓 대립 구도가 약해진다. 전쟁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국제주의가 성장할 때 세계주의 음모론의 반동적 판타지가 설 자리를 잃는다.
한국 극우의 음모론에 맞서는 정치도 이 원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선관위의 폐쇄성, 선거 행정의 무능, 기성 언론의 편향, 정치 엘리트의 위선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음모론에 맞설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비판이 혐중 인종차별, 종북몰이, 권위주의, 계엄 정당화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투표권을 침해당한 사람들의 정당한 분노를 극우가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하려면, 투표권 옹호와 민주적 통제, 노동자·청년·차별받는 사람들의 연대라는 대안을 더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결국 음모론과 마르크스주의의 실천적 차이는 세계를 보는 방식뿐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주체를 어디서 찾는가에 있다. 음모론은 역사의 열쇠를 밀실 속 악당들에게 쥐여 준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그 열쇠가 노동계급 등 차별받는 사람들의 집단 행동에 있다고 본다. 음모론은 어둠 속 배후를 폭로하겠다고 약속하지만 끝내 사람들을 더 깊은 어둠으로 끌고 간다. 마르크스주의는 그 어둠을 낳는 체제 자체를 드러내며 이를 끝낼 수 있는 현실의 힘을 가리킨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음모론보다 더 급진적인 의심이다. 권력자들이 내놓는 공식 설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되, 모든 현상을 비밀스러운 계획으로 축소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지배자의 거짓말을 폭로하면서도 차별받는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 개별 악당을 넘어 구조와 체제 자체를 겨냥해야 한다. 나아가 의심에 머무르지 않고 투쟁으로 나아가는 정치가 요구된다. 음모론은 자본주의 위기를 비추는 왜곡된 거울이다. 이 거울을 깨뜨려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을 변혁할 집단적 힘을 조직해야 한다. 이것이 음모론의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정치 운동이 해야 할 역할이다.
후주
- Leo Lowenthal and Norbert Guterman, Prophets of Deceit: A Study of the Techniques of the American Agitator (Verso, 2021), 특히 Chapter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