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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팔레스타인·이란전쟁 내란 청산과 극우 이재명 정부 이주민·난민 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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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위태로워지고 있는 이재명 정부의 중도 줄타기

1. 들어가며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남짓 지났다. 윤석열의 친위 군사 쿠데타 미수와 탄핵이라는 입헌정치 위기 속에서 치러진 2025년 6월 조기 대선으로 집권한 이 정부는 지난 1년여 동안 예상보다 강한 회복세의 경제 지표를 바탕으로 ‘민생’과 ‘실질적 성장’을 전면에 내세웠다. 1분기 경제성장률은 5년 반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수출은 세계 5위권에 진입했다. 경상수지도 분기 기준 사상 최대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중도 우파를 겨냥한 이재명 대통령의 외연 확장 전략은, 여전히 극우와 그들이 공생하는 국민의힘이 지방선거를 통해 기사회생하는 결과만 초래했다.

이 모호한 정부가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 그 전반적인 방향성이 이 글의 관심사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전에는 중도 좌파 정치인으로 분류됐다. 특히, 과거 공약인 보편적 기본소득과 거침없는 기득권 저항적 발언 스타일이 이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정부 출범 이후 실제 국정 운영에서는 실용주의적으로 중도 자유주의 경향을 보여 왔다.

첫째, 외교·안보 문제에서 한미동맹과 한미일 협력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실리적으로 관리하는 현실주의적 접근법을 취했다.

둘째, 인공지능(AI)과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내에서 한국의 지위를 강화하고자 기업 친화적인 규제 완화와 지원책을 쓰는 실용주의적 경제 성장 정책을 추진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의 관세 장벽과 통상 압박 속에서 한국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치열한 협상을 벌이는 실리적 협상가의 모습도 보여 줬다.

셋째,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틀 안에서 복지, 재분배, 공공성을 위한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한계를 드러냈다. 높은 조세 부담, 광범한 노조 조직, 보편복지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에는 이르지 못한 채 중도 자유주의 노선을 따라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했다.

이 글의 논지는 바로 그 비일관성과 좌고우면을 짚는 데 있다. 먼저 분명히 해 둘 것은 이재명 정부의 개혁이 지난 한 세기 넘게 국제적 좌파가 추구해 온 개혁과 본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좌파가 추구해 온 개혁은 착취와 억압, 차별을 완화하는 조치를 뜻한다.

반면 이재명 정부의 개혁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해 온 부르주아적 개혁이다. 피착취·피억압 대중의 고통과 불만을 완화하는 데 진지한 관심 없이,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내놓는 처방이자, 피착취·피억압 대중에게는 거의 기만적인 대안이다. 자본주의의 효율과 생산성을 높여 전체적인 수익성을 높이는 데 진정한 목적이 있다. 부르주아(적) 개혁주의는 국가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공정하게 법과 제도를 조율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를 통해 노동자 저항의 분출이라는 시한폭탄의 작동을 늦출 수 있다고 본다.

부르주아 개혁주의의 사회적 기반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안타까워하며 ‘따뜻한 자본주의’, ‘공정한 시장’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자본가나 지식인들이다. 마르크스는 이들을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라 부르며 비판했다. “부르주아 사회의 존속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적 불만을 시정하려는” 운동으로, 오늘날로 치면 자본주의 유지를 위한 사회개혁론이었다.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생산력, 부, 질서, 문명, 시장의 이점은 누리고 싶지만, 그 체제가 필연적으로 낳는 계급투쟁, 빈곤, 혁명적 노동운동은 없었으면 했던 이들은 자본가들의 도덕적 각성이나 선의에 기대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 서구의 중도 정당들인 사회자유주의자들도 부르주아 개혁주의를 지지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경제주의에 매몰돼 정작 이윤 체제 폐지라는 최종 목표를 망각한 노동조합 우파 관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재명 정부의 개혁은 시장 공정성을 회복하고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이른바 ‘구조 개혁’이다. 구조 개혁은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를 엄단해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 관행을 바로잡고, 다주택자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며, 부동산 투기 및 주가 조작 같은 금융 범죄를 엄격히 처벌해 시장을 정상화하는 개혁이다. 이에 따라 쿠팡에 전례 없는 대규모 과징금을 부과하고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 움직임을 보이며 공정 경쟁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한 달여 전 이재명 정부는 잠재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6대 구조 개혁(규제, 금융, 공공, 연금, 교육, 노동)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자 외신들은 한국 정부가 단순히 돈을 푸는 복지 정책에 힘쓰기보다는,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기 위해 구조조정을 시도하는 실용 정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제조업 중심의 한국 경제를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첨단 기술 중심의 ‘초격차 산업 강국’으로 탈바꿈하려는 시도라고 평가했다.

이는 중도 자유주의의 전형이다.

중도 자유주의의 본질은 줄타기다. 한쪽 끝에는 자본의 자유와 성장 제일주의가, 다른 한쪽 끝에는 민생·복지·노동의 함성이 있다. 이재명 정부는 그 사이에서 기회주의적 행보를 보이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다. 이 줄타기는 위태롭다. 줄의 한쪽 끝이 경쟁적 자본 축적이라는 토대에 단단히 묶여 있는 한, 균형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본과 자유주의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주의 측이 자유주의를 비판할 때 핵심 질문은 늘 하나다. 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가 누구를 위한 자유이며, 그 자유는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자유주의는 자신을 보편적 해방 사상으로 제시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자본 축적의 자유를 자연스러운 형식으로 정당화해 왔다. 중도 자유주의는 그 변종이다. 신자유주의가 국가의 비개입(불간섭)을 자유의 조건으로 봤다면, 중도 자유주의는 빈곤과 불평등이 실제 자유를 제한한다고 인정한다. 이에 따라 복지와 약자 보호의 필요성을 수용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지점에서 이는 여전히 자유주의다. 시장과 자본 축적 시스템을 사회의 자연스러운 토대로 전제하고, 이를 유지하면서 불평등을 완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의 행보는 이러한 중도 자유주의적 줄타기의 교과서적 사례다.

여기서 흔한 오해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재명의 정치를 두고 ‘포퓰리즘’이라는 평가가 자주 뒤따른다. 반기득권 메시지, 엘리트·관료·언론·재벌 비판, 국민 대 기득권의 대립 구도, 강한 대중 호소가 그의 정치 스타일을 특징짓는 까닭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이데올로기라기보다 대중 동원 방식이다. 복지·재분배·공공성 같은 정책 내용은 중도 자유주의와 개혁주의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따라서 이재명 정치의 본질을 규정하는 용어로는 포퓰리즘보다 중도 자유주의가 더 정확하다. 대중 동원의 외피 뒤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것은 시장과 자본 축적을 전제한 채 불평등을 관리하려는 자유주의적 기획이다.

2. 줄타기의 한쪽 끝: 자본 축적 명령

먼저 줄타기의 한쪽 끝을 살펴본다. 이재명 정부는 경제 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 실체적 내용은 자본 축적이다. 정부는 AI·반도체 투자, 기업 경쟁력 강화, 주식시장 활성화를 적극 추진했다. 2026년도 연구개발(R&D) 예산은 전년 대비 19.3퍼센트 늘어난 35조 원대로 책정해 ‘기술 주도 성장’에 방점을 찍었다. 부동산 문제의 해법도 세금이나 규제 대신 공급 확대와 주식시장 활성화에서 찾았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 타결도 주요 성과로 내세웠다.

이 축적 우위 논리는 노동 지표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2026년 최저임금은 전년 대비 2.9퍼센트 인상된 1만 320원에 그쳤다. 이는 문재인 정부 첫해의 인상률인 16.4퍼센트는 물론, 노동 적대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윤석열 정부 첫해의 5.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노동과 함께하는 공정 성장’을 표방한 정부의 첫 최저임금 인상률이 직전 우파 정부보다 낮았다는 사실은 줄타기의 무게중심이 처음부터 어디로 기울었는지 단적으로 보여 준다.

자유주의 사상에서 자유는 누구에게나 같은 의미가 아니다. 자본가에게 자유는 투자와 고용, 해고, 자금 운용의 자유가 확대됨을 의미한다. 반면 다수 대중에게는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판매할 ‘자유’에 불과하다. 법률적으로는 양측 모두 자유로운 계약 당사자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한쪽이 생산수단을 통제하고, 다른 한쪽은 거기서 배제된 채 노동력을 팔아야만 한다. 성장의 결실을 만드는 주체로 자본을 먼저 상정하고 사후에 이를 분배하는 방식을 취하는 한, 정부의 무게추는 늘 자본의 자유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선 성장 후 분배’의 약속에서 성장의 조건을 통제하는 주체는 언제나 자본이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 타결도 같은 맥락을 보여 준다. 정부는 이를 대외 악재 속에서 거둔 방어적 성과로 내세웠다. 하지만 협상의 핵심은 한국 자본의 대미 수출 조건과 투자 약속을 맞바꾸는 데 있었다.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 대규모 대미 투자 약속, 조선·방위 분야 협력까지 정부의 산업정책은 한국 자본의 국제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국가의 시장 개입 자체가 개혁의 징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개입하는가이다. 이재명 정부의 산업정책은 자본 축적의 조건을 정비하는 데 국가를 동원하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국가의 개입이다.

3. 줄타기의 다른 쪽 끝: 민생·복지·노동의 요구

그렇다고 줄의 반대편 끝이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재명 정부는 ‘기본사회’ 구상, 소득보장 확대, 공공의료·공공주택 확대, 노동시간 단축(주 4.5일제), 정년 연장, 사회안전망 강화를 핵심 의제로 내걸었다. 노동 분야에서는 윤석열 정부에서 무너진 노동 기초질서를 복원하는 조처가 이어졌다. 산업안전 공시제도와 노동자 참여형 위험성 평가를 도입했다. 2조 원을 넘긴 임금 체불에 대응해 근로감독관을 늘리고 대지급금 지급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렸다. 하청 노동자도 원청이 실질적 사용자라면 교섭을 요구할 수 있도록 노조법 제2·3조(이른바 노란봉투법)를 개정했다. 윤석열 정부가 25퍼센트에서 24퍼센트로 내렸던 법인세 최고세율을 다시 25퍼센트로 되돌렸다.

이 중 상당수는 노동계급에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 개혁이다. 사회주의자가 자유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그 성취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공정한 비판은 자유주의의 성취를 먼저 인정한 뒤, 왜 불충분한지 보여 주는 방식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재명 정부의 개혁 조치를 윤석열 정부와 똑같이 여기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태도다. 표현과 결사의 자유, 노동조합 결성 및 교섭권, 산업안전과 임금 보호 같은 성과는 노동운동이 자유주의로부터 얻어 낸 소중한 개선이다.

물론 결정적인 단서가 있다. 이러한 권리와 제도는 늘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낳은 산물이지, 자본이 베푼 선물이 아니다. 노란봉투법도 원청의 책임을 묻고 차별에 맞서 싸워 온 비정규직·하청 노동자들의 투쟁 결과다. 따라서 이러한 권리는 자본의 이익이 안전하다고 판단될 때는 허용되지만, 핵심 이익이 위협받는 국면에서는 언제든 축소되거나 회수될 수 있다. 줄타기가 위태로워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4. 아슬아슬한 이유 (1): 형식과 실질의 간극. 노란봉투법이라는 시험대

권리가 존재한다고 해서 실질적 자유까지 보장되지는 않는다. 권리의 형식을 마련하더라도 그것이 작동하는 사회적 조건과 하위 제도에서 실질이 빠지면 권리는 형해화된다. 노란봉투법의 운명은 중도 자유주의적 개혁의 전형을 보여 준다. 노조법 제2·3조 개정은 하청 노동자가 실질적 사용자인 원청에 교섭을 요구할 권리를 보장해 원·하청 격차를 줄일 유의미한 입법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초기업 교섭 성격에 맞지 않는 ‘교섭창구 단일화’를 시행령에 포함해 법 취지를 살리지 않았다. 사용자가 지지하지 않던 의무를 지게 만든 법이 사용자 배려 조치로 인해 ‘도돌이표’가 될 위험에 놓였다. 소수 노조의 교섭 기회 상실 비판이 거세지자 노동부는 상급단체별 교섭단위 분리 방식으로 시행령을 보완했다.

개혁 입법을 하고서도 시행 차원에서 자본의 우려를 배려하는 장치가 끼어드는 방식은 형식과 실질의 간극을 드러낸다. 자유주의는 권리를 법적 형식과 절차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권리를 실제로 행사할 물질적 능력이 계급에 따라 어떻게 불평등하게 배분되는가이다. 권리 선포와, 자본의 저항을 뚫고 권리를 작동시키는 일은 별개 문제다. 중도 자유주의는 늘 전자에서 멈추거나 후자에서 후퇴하는 경향을 보인다.

5. 아슬아슬한 이유 (2): 중립적 심판자의 외양. 삼성전자 파업이라는 시험대

줄타기의 위태로움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 사건은 얼마 전 삼성전자 파업 미수 사태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모든 조정의 최종 책임은 정부에 있다”며 자신을 공정한 조정자로 자리매김했다. 동시에 노조의 성과급 요구에 대해 “이해되지 않는다”, “투자자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깎아내렸고, 노동자가 “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국무총리 김민석은 긴급조정권 발동을 위협하며 타결을 압박하는 등, 정부의 전방위 중재 속에 협상은 막판 합의에 이르렀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국가가 결코 초계급적 중재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엥겔스에 따르면, 국가는 “사회가 화해 불가능한 계급 대립으로 갈라졌음”을 인정하는 산물이다. 대립이 지배자의 권력과 이익을 훼손하지 않도록 기존 질서의 한계 안에 묶어 두기 위해 사회 위에 군림하는 듯한 권력이 바로 국가다. 삼성전자 파업 미수 사태에서 정부가 한 일이 정확히 그랬다. 중립적 조정자를 자처했으나 실제로는 파업을 “선을 넘는 행위”로 규정했다. 노동자의 요구를 깎아내리며 갈등을 질서의 한계 내로 되돌려놓는 역할을 했다.

이재명 정부가 파업 자체를 ‘선 넘기’로 규정하고 사용자 쪽으로 기울어 개입하는 순간 ‘중립적 정부’라는 외양은 벗겨진다. 자본주의 하에서 정부의 중립성은 체제의 본성이 아니다. 자본의 핵심 이해관계, 구체적으로 삼성전자의 부가가치 배분 구조와 소유권이 직접 위협받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작동하는 관리 방식일 뿐이다. 관용과 조정은 사태가 안전할 때 가능한 운영 방식일 뿐, 결코 체제의 본성이 아니다.

삼성전자 사례는 예외가 아니다. 고용노동부가 2026년 전략 목표로 내건 “노동과 함께하는 진짜 성장”이라는 구호 자체가 이 줄타기를 행정 언어로 공식화한 것이다. ‘노동과 함께’를 앞세웠지만 문장의 주어와 목적은 어디까지나 ‘성장’이다. 노동은 성장의 동반자로 불릴 뿐, 성장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하는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정년 연장과 노동시간 단축 같은 의제도 ‘사회적 대화’를 통해 자본의 동의를 구하는 방식으로 다뤄진다. 경영계는 인건비 부담을 이유로 ‘퇴직 후 재고용’ 같은 ‘자율적’ 활용을 요구하며 제동을 건다. 결국 개혁의 최종 수위는 자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 조정된다. 노동자가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남는 한 ‘함께’라는 미사여구는 줄타기의 균형추에 불과하다.

6. 아슬아슬한 이유 (3): 자본 축적은 과연 성역

자유주의는 법 앞의 평등과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말하면서도, 정작 사회의 핵심 권력인 생산수단 소유를 성역처럼 다룬다. 소유권을 건드리지 않는 한 다른 모든 권리의 평등한 외양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의 자산·재정 정책은 이 성역을 우회하는 중도 자유주의의 전형을 보여 준다.

정부는 부동산 문제의 대안으로 세금과 규제 대신 공급 확대와 주식시장 활성화를 제시했다. 2025년 6월 수도권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6억 원으로 제한하는 등 시장 관리 조치를 시행했으나, 이는 자산 격차의 핵심인 소유 구조를 개혁하기보다 단순한 대출 관리에 그쳤다. 법인세율을 25퍼센트로 복원한 조치도 이전 정부의 인하분을 되돌린 수준에 불과해 구조적 재분배와는 거리가 멀다. ‘함께 잘사는 사회’로 가는 경로도 주식시장 활성화로 다수가 과실을 나누게 하겠다는 발상에 기초한다. 그러나 과실의 심각한 불균등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중도 자유주의와 개혁주의가 갈라진다. 개혁주의는 조세와 재분배를 통해 소유에 따른 불평등을 사후에 조정하고자 한다. 반면 이재명 정부는 소유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자산시장 성장에 일부 국민(중간계급의 상층)을 편입시키는 데 무게를 둔다. 자본 축적은 개인의 권리를 넘어 노동자를 비롯한 서민의 삶을 지배하는 사회적 권력이다. 이 권력을 성역으로 남겨두는 한, 정부의 부동산·주택 시장 안정화 대책은 주변적 조정에 머무를 뿐이다.

자유주의적 평등이 지닌 형식주의도 문제다. 자유주의는 법 앞의 평등을 선언하나, 소유 여부에 따라 노동자와 자본가의 삶은 극단적으로 갈린다. 법적 평등이 확립돼도 경제적 불평등은 구조화된다. 불평등이 사회 구조로 굳어지면서,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탈출하기 힘든 시스템이 고착됐다. ‘공정’과 ‘기회’가 공식 담론의 핵심어이지만, 규칙 자체가 계급 구조를 반영하는 상황에서는 공정한 적용만으로 진정한 평등에 도달할 수 없다. 이재명식 ‘공정 성장’은 불평등을 개인의 능력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보다 낫다. 신자유주의는 불평등을 사회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경쟁력 문제로 돌린다. 그 결과 실업, 저임금, 주거난, 교육 격차 같은 문제도 국가와 자본의 책임이 아니라 개인이 더 노력하고 자기계발해야 할 문제로 바뀐다. 비록 이재명식 ‘공정’이 신자유주의적이지는 않아도 소유 관계를 방치하기에 그 ‘공정’은 분배 문제의 지엽적 부분을, 그것도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꾸며 대어 맞추는 데 그친다.

7. 아슬아슬한 이유 (4): 군사주의의 중력, 줄타기의 또 다른 축

중도 자유주의의 줄타기는 경제 정책에만 머물지 않는다. 민생(대중 생계)과 복지를 표방하는 이재명 정부가 군비 증강과 제국주의 체제에 스스로 편입된다. 2026년 5월 26일 정부는 진해에서 열린 제1회 미래국방전략위원회에서 한국 첫 핵추진잠수함 사업인 ‘장보고 N사업’을 공식화했다. 2030년대 중반 1번함 진수를 목표로 배수량을 8000톤급으로 키우고 3척 이상을 건조한다는 계획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를 “굳건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한 자주국방”과 “방위산업”(무기 산업) 강화의 상징으로 규정했다. 한미 양국은 핵추진잠수함 건조와 “원자력”(핵에너지) 권한을 둘러싼 안보 합의 이행 협상에 돌입했다.

핵추진잠수함은 자주국방의 상징으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제국주의적 미·중 경쟁 구도 속에서 한국 지배계급의 군사적 지분을 키우는 사업이자 동아시아 지역 강국 지위를 추구하는 기획이다. 자유주의는 자유를 보편적 언어로 말하지만 실체는 자본의 자유다. 국제 무대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민생을 말하는 정부가 막대한 재정을 무기 산업에 투입하고 제국주의적 경쟁에 동참할 때, 노동계급의 이익과 지배계급의 이익(‘국익’)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이 대외·안보 축에서 중도 자유주의는 가장 빠르고 노골적으로 자본과 국가 편으로 기운다. 국내 줄타기에서 보이던 망설임조차 여기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제국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이 대목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 간 경쟁은 국가 간 군사·외교 경쟁과 맞물리고, 각국 지배계급은 자기 자본의 세계적 지분을 지키기 위해 군비 증강과 동맹 관계 재편에 의존한다. 미·중 경쟁이 격화하는 국면에서 한국 지배계급이 핵잠수함과 방위산업, 군사·산업 협력을 추구하는 것은 이 논리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중도 자유주의가 약자 보호를 말하면서 군비 경쟁에 가담하는 짓은 사실 모순이 아니라 일관된 계급적 선택이다. 두 얼굴 모두 자본주의 국가가 지배계급의 이익을 관리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노동계급에게 ‘국익’은 곧잘 삶을 침해하고 위협하는 비용, 즉 세금과 동원, 전쟁의 위험으로 돌아올 뿐이다.

8. 결국 개혁주의가 아니라 중도 자유주의

이재명 정부가 개혁주의의 ‘모델’이 아님은 분명하다. 20세기 중반 서유럽 사회민주주의는 높은 조세 부담, 강한 노조 조직률, 광범한 보편 복지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했다. 반면 이재명 정부는 기존 질서 안에서 경기 부양, 복지 재편, 산업 정책, 노동조합 지도부 포섭을 결합하는 수준에 머문다. 결코 복지국가로의 체계적 전환을 추구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더 근본적으로 따져볼 대목이 있다. 설령 ‘모델’ 개혁주의에 이른다 해도 자본 축적의 논리와 이윤율이라는 토대 위에서 움직이는 한 구조적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재명 정부는 거기에도 이르지 못한 채 여전히 자유주의의 변종에 머문다. 중도 자유주의는 불평등이 실질적 자유를 제약한다는 점을 인정해 신자유주의보다 한 걸음 나아갔다. 신자유주의는 “모두에게 경쟁할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이 애초에 얼마나 불평등한 조건에서 경쟁에 내몰리는지는 문제 삼지 않는다. 따라서 불평등이 자유를 제약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등한 시장 경쟁을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중도 자유주의는 불평등이 실질적 자유를 제약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시장과 자본 축적 질서를 사회의 자연스러운 토대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끝내 자유주의다.

따라서 그 개혁은 늘 ‘자본의 신뢰’를 유지하는 한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투자가 위축되지 않고 성장이 멈추지 않으며 이윤이 보장되는 범위가 기회주의적 운신의 폭을 결정한다. 최저임금 인상률을 직전 우파 정부보다 낮게 묶어 두고, 노란봉투법의 실질을 시행령에서 덜어내고, 파업을 ‘선 넘기’로 규정하며, 부동산 해법을 자산시장에서 찾고, 핵잠수함과 군비를 증강한 지난 1년여의 행보는 이 줄의 길이가 어디까지인지를 거듭 확인해 보여 주었다.

9. 나가며: 줄타기의 한계와 노동자 자력 해방

자유주의 비판의 결론이 ‘자유는 가짜다’가 아니듯, 우리 비판의 결론도 ‘이재명 정부의 개혁은 가짜다’가 아니다. 노란봉투법, 산업안전 강화, 임금체불 대책, 법인세 복원은 윤석열 정부와 비교하면 분명한 차이이자 개선이다. 그러나 그 개선은 부분적이며 계급적으로 제한돼 있다. 중도 자유주의적 줄타기는 상황이 안정적일 때 민생과 복지 쪽으로 무게를 싣다가도, 자본의 핵심 이해관계인 이윤, 소유권, ‘국익’이 위협받는 국면에서는 어김없이 자본 쪽으로 기운다. 지난 1년여의 기록은 그 기울기를 거듭 보여 주었다.

결론은 자유를 덜 원하는 것이 아니라 더 철저히 갈구하는 데 있다. 자유가 진정 모두의 것이 되려면 소수의 소유권이 아닌 다수의 주체 됨이 사회의 기초가 돼야 한다. 자유는 시장 거래나 간섭받지 않을 권리를 넘어, 인간이 노동과 삶의 조건을 집단적으로 결정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를 종식하고, 사람들이 연대해 일터와 삶의 규칙을 스스로 결정하는 진정한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재명 정부의 ‘공정·전환·포용 성장’과 ‘함께 잘사는 사회’(‘기본 사회’, 양극화 해소, 낙수 효과가 아닌 ‘분수 효과’)라는 약속에 던지는 질문은 단 하나다. 그 자유와 성장은 과연 누구의 것인지 묻는다. 지난 1년여의 성과가 노동자에게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었다면, 이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낳은 산물이지 중도 자유주의 정부가 베푼 선물이 아니다. 성과를 지키고 확장하는 길도 마찬가지다. 정부에 기대기보다 노동자 스스로 조직하고 저항하며 집단적 주체로 서는 능력과 힘을 키워야 한다. 이재명 정부 중도 자유주의의 줄타기가 위태로운 이유는 그 줄이 자본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이를 끊어내는 주체는 노동자 자신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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