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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극우 이재명 정부 팔레스타인과 이란전쟁 이주민·난민 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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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는 무엇이고, 왜 정치적 전장이 됐나?

오늘날 ‘젠더’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란이 일고 있다. 극우는 “젠더 이데올로기” 반대를 내세우며 젠더가 ‘전통적’ 가족·성도덕·부모의 권리를 해체하려는 페미니즘·성소수자·좌파 운동과 국제 엘리트의 정치 프로젝트라고 규탄한다.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젠더를 거부하는데 그들은 젠더를 사회가 강요하는 성 규범으로 여기고 젠더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 사람들에게 젠더란 자기 정체성의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

이 글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 관점에서 젠더 개념을 짚어 보고 극우는 왜, 어떻게 젠더를 공격하는지 분석한다. 또,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젠더에 비판적인 이유와, 일각의 주장처럼 트랜스젠더 권리와 여성의 권리가 실제로 대립하는지 살펴본다.

젠더란 무엇인가?(1): 젠더의 발견

생물학적 특성은 고정돼 변하지 않으며,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형성하고 심지어 결정한다는 통념이 여전하다.

이에 맞서 20세기 주요 페미니스트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1949년에 발간된 책 《제2의 성》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보부아르가 ‘젠더’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 선언은 생물학적 성과 젠더를 구분하는 이론적 토대가 됐다.

여성이란 무엇인가? 여성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인형을 좋아하고, 머리를 기르고, 때로 치마를 입고,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존재를 뜻할까?

그러나 여성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특정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살아갈 필연적 이유는 없다. 생물학적 특징 자체가 아니라 사회와 문화가 성별에 따라 사람을 분류하고 다른 사회적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젠더’의 현대적 개념이다.

이런 의미의 ‘젠더’는 1950~1960년대 성과학이 발전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성과학자인 존 머니는 전형적인 남성·여성의 신체적 성 특징에 들어맞지 않는 간성 아동들을 연구하면서, 생물학적 성과는 별개로 한 사람이 남자·여자로서 나타내는 행동·역할·자기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젠더’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 개념을 대중화한 것은 1960년대 말~197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분출한 여성해방운동이었다. 여성해방운동은 젠더를 여성에게 강요되는 역할과 불평등을 비판하는 급진적 도구로 바꿔 놓았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한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낳고 수유할 수 있다고 해서 꼭 아이를 낳고 기를 필요는 없다. 생물학적 특성은 운명이 아니다. 생물학적 특성이 아니라,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식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생물학적 성과 젠더의 구분은 어느 정도 여성에게 자유의 지평을 열어 줬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압박과 부담이 생물학적 특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관행일 뿐이라면, 사회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분출했던 성소수자 해방운동은 생물학적 성에 따라 특정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관념에 더 강력하게 도전했다. 초기 성소수자 해방운동에는 게이, 레즈비언뿐 아니라 양성애자, 드랙퀸, 트랜스젠더 등 성별 이분법에서 벗어난 존재들이 많이 참가했다. 이들은 이분법적 젠더와 이성애주의가 모두 ‘자연스럽지’ 않음을 주장했다.

그래서 보수·우파는 젠더 개념을 혐오하고 두려워한다. 그들은 이성애적 핵가족이 자연스럽고 영원한 것이며, 남성과 여성은 본성적으로 그 역할이 정해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오늘날 극우가 젠더 반대 운동을 통해 노리는 바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겠다.)

젠더란 무엇인가?(2): 젠더 정체성

그런데 1970년대 여성해방운동이 발전시킨 젠더 개념, 즉 생물학적 성(섹스)과 구별되는 ‘사회적 성’ 이라는 규정은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당시 일부 페미니스트와 그 계승자들은 ‘생물학적 성’인 섹스와 ‘사회적 성’인 젠더를 구분하는 것을 넘어 예리하게 분리하고 대립시켰다. 그들은 현 사회를 남성이 지배하고 여성이 종속된 가부장제로 규정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회적 성’인 젠더는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여성 차별적인 일련의 규범과 사회적 역할로 인식됐고, 결국 젠더는 “인정돼야 할 것이 아니라 싸워 없애야 하는 것”(줄리 빈델)이 됐다.

하지만 젠더는 사회적 요소를 포함하지만 그것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젠더에는 사회가 외부에서 사람들에게 강제하는 성역할과 규범뿐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을 남성·여성·논바이너리 등으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정체성의 측면도 포함한다. 즉, 젠더는 ‘성별 정체성’이기도 하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보면, 생물학적 층위와 사회적 층위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얽혀 상호작용하는 관계다. 마르크스주의 생물학자 스티븐 로즈, 리처드 르원틴, 리언 카민은 이렇게 말했다. “유기체와 환경의 관계는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상호작용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유기체와 그 주변 환경은 서로 반응하며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 모든 인간 현상은 사회적인 동시에 생물학적이다.”(《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요컨대 “젠더는 두 가지 요소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외부에서 개인에게 적용되는 사회적 요소(즉, 성별 역할)이며, 동시에 개인 내부의 자아감, 즉 젠더 정체성이기도 하다.”(로라 마일스, 《Transgender Resistance》)

오늘날 더 많이 가시화되고 있는 트랜스젠더와 그 운동은 젠더의 이런 측면을 잘 드러낸다.

트랜스젠더는 출생 시 지정된 성별과 자기 자신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기존의 성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래서 이름 또는 (성별) 대명사를 바꾸거나, 복장 등 외모 표현을 바꾸고, 일부는 호르몬 치료나 성전환 수술을 받기도 한다. 이로써 자신의 현실을 설명해 줄 새로운 젠더로 전환을 시도한다. 오롯이 “나답게 살기” 위해서 말이다.

수많은 트랜스젠더가 차별과 적대 속에서도 출생 시 지정받은 성을 바꾸기 위해 분투한다. 즉, 이들에게는 생물학적 성보다 젠더가 중요한 것이다.

많은 트랜스젠더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성별 불일치를 느낀다. 국내에서 성별확정의료를 받으려 병원을 찾은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 337명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성별 불일치를 처음 경험한 평균 연령은 10.6세였다.

트랜스젠더 변호사 박한희 씨는 저서 《무지개를 변호하다》의 1장에서 자신의 경험을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전한다. 그는 성별 정체성을 받아들이기까지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 단계를 거쳤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 뒤에도 커밍아웃을 하기 전까지는 깊은 허무감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내가 누구와 관계를 맺더라도, 무엇을 성취를 하더라도, 어떠한 취미 생활을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은 진정한 내가 아닌 상태에서 하는 것이기에 그저 허무할 뿐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 성별을 결정할 권리를 지지해야 한다. 성별 불일치를 경험하지 못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권리는 생소할 수 있지만, 성별 불일치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실존과 관련된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다.

성별 자기결정권과 관련해 한국에서 제기되는 요구는 법적 성별 정정 요건 완화, 성별정정특별법 제정, 주민등록번호에서 성별 표기 삭제, 의료적 성전환에 건강보험 적용, 성중립 화장실 도입 등이다. 이러한 개혁을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

성별 이분법이 자연적 귀결이 아니다

젠더 이분법에서 벗어난 존재는 언제나 있었다

젠더 정체성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생물학적인 성만 실재하며 젠더(정체성)는 순전히 문화적이거나 심지어 허구라고 주장한다.

대표 주자인 트럼프는 “성별은 여자와 남자뿐”이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극우만의 주장은 아니다. 영국 대법원은 지난해 평등법에서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영국 노동당 정부는 올해 그 판결을 공식 승인해 제도화했다.

그러나 이런 공세 자체가 성별 이분법이 자연적 귀결이 아님을 시사한다. 성별 이분법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단속되고 강제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젠더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역사상 다양한 문화권에서 관찰돼 왔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들에 있었던 존재들로, 오늘날 ‘두 영혼의 사람’이라고 통칭된다. 유럽인들은 이들을 성적 일탈자나 남성 동성애자로 간주해 ‘버다치’(berdache, 남성 동성애자나 남창을 뜻함)라는 멸칭을 붙였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제3, 제4의 젠더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지역에도 유사한 사례가 존재했다. 스페인 정복 이전 필리핀에는 ‘아속’(asog)이나 ‘바욕’(bayok) 등으로 불린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성 신체를 가졌지만 여성적 복장을 입고 역할을 수행했고 일부는 중요한 종교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지역의 부기스족은 젠더를 5개로 구분했다고 알려졌다. 남아시아의 히즈라 역시 오랫동안 독자적인 젠더로 인정돼 왔다.

이들 상당수는 당시 사회에서 존중받고 일부는 중요한 종교적·사회적 역할을 맡았으나 식민 통치기와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에서 ‘비정상’으로 낙인 찍히고 박해받으며 위상이 크게 약화됐다. 최근 각국의 민속학, 여성학, 퀴어 연구 등에서 이런 존재들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이것은 이분법적 젠더가 자연적이지 않으며, 무엇보다 젠더가 그 사회의 사회관계 속에서 서로 다르게 조직돼 왔음을 보여 준다.

극우의 젠더 공격

미국의 트럼프, 러시아의 푸틴,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헝가리의 오르반,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모두 “젠더 이데올로기”를 격렬히 반대한다. 매년 퀴어퍼레이드 반대 집회와 행진을 개최하는 한국의 개신교 극우도 자신을 “젠더 이데올로기”에 맞선 ‘거룩한 방파제’라고 지칭한다.

“젠더 이데올로기”라는 말에서 보듯, 그들은 젠더를 실재하지 않는 인위적이고 사악한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본다.

그들은 젠더를 인정하면 성이 “50여 가지”로 늘어나고, 남녀 두 성별의 경계가 흐려져 결국 성별이 해체된다고 주장한다. 젠더 지지자들(성소수자 활동가, 페미니스트, 좌파, 유엔과 같은 국제 엘리트 집단)은 젠더를 제도화하고 생물학적 성을 부정함으로써 전통적 규범인 결혼과 가정, 사회 제도, 기독교적 가치, 나아가 인류까지도 파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극우는 젠더를 ‘인구 감소, 성적 방종, 가족 해체, 임신중지, 성소수자 권리, 도덕적 타락’ 등과 동일시하며, 사회 문제들의 원인이자 비난의 표적으로 만들었다. 주디스 버틀러는 저서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에서 젠더가 오늘날 다양한 사회적 불안과 두려움이 투사된 “판타즘(phantasm, 환상)”이 됐다고 분석한다. 실제로는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음에도 상상 속에서 실재처럼 작동해 심리적·정서적 영향을 발휘한다는 의미다.

극우의 이런 데마고기는 합리주의적으로 보면 종종 터무니없고 논리적 일관성도 없어 보이지만, 극우의 젠더 반대는 그 내부의 서로 다른 일련의 주장과 캠페인을 하나의 운동으로 묶어 내는 접착제 구실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반동적 의제로 대중을 동원하고 어떤 나라에서는 ‘반젠더’ 의제를 정부 정책이나 법률로 확립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매년 서울 퀴어퍼레이드에 반대해 열리는 ‘거룩한 방파제’ 집회는 수만 명을 동원하는데, 올해 그 집회의 요구는 “차별금지법 반대, 성(젠더) 평등 반대, 성전환 수술 없는 성별 변경 반대, 낙태 전면 허용 반대, 약물 낙태 허용 반대” 등이었다. 서울과 충남에서는 반젠더 운동으로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된 것도 극우의 반젠더 운동이 거둔 이득이었다.

현재 한국 극우의 주된 초점은 친미·반북·혐중·반민주당에 맞춰져 있지만, ‘반젠더’도 그들의 주요 강령 중 하나로 기층 동원에 사용되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언제든 전면에 부각될 수 있다.

한편, 국제적으로 극우의 반젠더 운동은 세계가족회의, CitizenGO, ADF 인터내셔널 같은 국제 조직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또한 유럽의 부유한 기업인과 귀족, 보수 종교재단,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억만장자들, 러시아 올리가르히 등으로부터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아 왔다.

한국의 극우도 그런 네트워크와 연결돼 있다. 예컨대 2024년 ADF 인터내셔널은 동성 파트너의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사건이 대법원에 계류 중일 때, “국제법은 결혼의 재정의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직접 법원에 제출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운동이 힘을 얻는 배경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하면서 사람들의 삶의 조건이 악화하고 미래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이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 침체로 복지가 삭감되고 불평등이 확대되면 사람들은 궁지에 몰리고 가족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된다. 심화하는 위기는 가족 구성원을 압박하고 옥죄고 때로는 해체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준다.

극우는 바로 그 틈을 파고들어,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과 고통의 원인을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애먼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페미니스트, 좌파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한편, 중도 정부들의 실패와 개혁 배신은 극우가 ‘가족 보호’ 등을 내세우며 고통받는 사람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위선이 먹히게 만들어 줬다.

극우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집단적 투쟁과 연대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래서 극우 자체에 맞서고 나아가 극우가 성장하는 토양과 삶의 조건 악화에 맞설 수 있는 자신감과 희망을 북돋아야 한다.

자본주의와 가족제도

극우의 젠더 이데올로기 반대 데마고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력하게 자리잡은 상식과 편견에 기대고 있다. 극우가 젠더를 정조준하는 목적은 이성애를 규범으로 하는 전통적 핵가족을 복원하려는 것이다. 이는 생물학적 남성과 생물학적 여성, 그리고 그들이 낳은 자녀들로 이뤄진 가족 모델이다.

자본주의에서 가족 제도는 현재와 다음 세대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그 과제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특히, 가족 안에서 주로 여성이 양육, 가사, 간병 등을 무상으로 수행한다. 실업, 빈곤, 돌봄의 실패는 일차적으로 가족 구성원의 책임으로 여겨지고, 지배계급은 가족제도로부터 경제적·이데올로기적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는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이성애적 핵가족을 정당화하는 관념을 과학, 법률, 정치 등을 동원해 체계적으로 퍼뜨린다. 아빠는 생계 부양자이고 엄마는 돌봄 제공자이며,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자연스러운 역할이라고 말이다. 또한 전통적 가족에 도전이 되는 성소수자들은 이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간주되고 천대받는다.

이런 관념은 19세기 중엽부터 산업 자본주의가 발전한 서구 나라들에서 재생산 위기에 처한 노동계급의 가족을 재건하면서 발전하기 시작됐고,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장하면서 함께 세계로 퍼져 나갔다. 여러 문화권에 있었던 젠더 이분법에 벗어나는 존재들이 식민 지배하에 박해받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관념이 언제나 공고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1960년대 말~1970년대 이후 여성과 성소수자들의 투쟁에 의해 크게 도전받았다. 또, 안전한 피임법과 임신중지가 보편화되고 자본주의가 여성에게 출산과 육아뿐 아니라 임금 노동까지 요구하게 됨에 따라 더 다양한 생활 방식이 가능해졌고, 이것 역시 ‘전통적’ 핵가족만이 자연스럽다는 관념에 균열을 일으켰다.

극우 반젠더 운동은 이런 도전들에 재반격을 가해서 전통적 가족을 강화하고 사람들을 다시 젠더 고정관념 안에 가두려는 것이다.

젠더 비판적 페미니즘

젠더에 대한 반대는 극우만의 것은 아니다. 오늘날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도 첨예한 분열 쟁점 중 하나가 바로 트랜스젠더 권리 지지 여부를 둘러싼 것이다.

젠더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젠더 정체성’ 인정을 요구하는 트랜스젠더의 권리가 여성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보고, 그런 논리로 가령 2020년에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 여성의 입학을 좌절시켰다.

오늘날 젠더 비판적인 입장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적지 않다. 지난해 말 〈이대학보〉가 이화여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학생 10명 중 6명이 트랜스 여성의 이화여대 입학에 반대했다.

앞서 말한 대로 젠더 비판적 페미니즘 전통은 일찍이 1970년대 서구 여성해방운동에서부터 등장했다. 당시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생물학적인 성과 젠더를 날카롭게 맞세워 젠더를 “싸워서 없애야 하는” 이데올로기로 규정했다.

더 나아가 일부는 여성 억압의 물질적 기초를 생물학적 성에 뒀다. 특히, 일부는 남성 신체와 남성성을 여성 억압의 원인으로 보고 폭력성을 지닌 위험 표지로 인식했다. 여성에게 강제되는 보수적 성 규범과 역할에 반대하면서는 생물학적 결정론을 비판했지만, 여성 차별을 설명하는 데에서는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늘날 이들이 내세우는 주요 주장 하나는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 정정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일부는 성전환 수술 자체를 반대한다). 이들은 또한 ‘여성 안전’을 이유로 트랜스젠더가 여성 전용 공간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난해 법원조차 이렇게 판결한 바 있다. “성전환 수술 강요는 신청자 스스로 자신의 신체에 대한 침해, 훼손 행위를 하도록 몰아가 건강 위험에 대한 공포와 거액의 수술비 부담으로 인한 경제적 곤궁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외과적 수술을 받지 않았다고 해도 다른 자료를 검토해 사회통념상 전환된 성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면 그로써 족하다.”

트랜스젠더가 여성 전용 공간에 들어가 여성의 안전을 해친다는 그들의 주장도 경험적 근거가 없다. 미국에서 실제 범죄 자료를 이용한 연구들은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젠더에 맞는 화장실이나 탈의실 등을 이용할 수 있게 된 후 성범죄나 폭력 범죄가 증가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오히려 미국 전국 범죄피해조사에서 트랜스 여성의 폭력범죄 피해율은 시스젠더 여성의 약 3.6배에 달했다. 무엇보다 성폭력은 생물학적 특성에서 비롯한 문제가 아니라 여성을 억압하는 계급 사회의 산물이다.(이과 관련해서는 ‘강간 등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 ― 마르크스주의의 분석과 대안’을 참고하라.)

차별의 원인을 생물학적 특성으로 환원하면 여성 차별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극복할 수 없는 숙명이 된다는 점도 짚고자 한다. 이런 비관주의는 차별을 낳는 사회구조 전반을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을 지향하기보다는 체제가 허용하는 몇몇 제한적 양보 조처를 얻는 데 매달리게 하고, 차별받는 다른 집단에 대한 배타성을 키울 수 있다. “트랜스젠더가 여성 몫을 빼앗아 간다”는 말은 젠더 비판적 페미니스트들의 단골 논리이다.

이러한 젠더 비판적 입장은 주로 급진 페미니즘에 기초하고 있지만,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일부 지지자들도 공유한다. 영국 노동당 내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트랜스젠더를 혐오하거나 트랜스젠더 권리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물학적 성을 여성 억압의 기초로 보고, 트랜스 여성을 여성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는 데 반대한다. 이런 관점에서 노동조합이나 노동당 내부의 여성 할당제 같은 제도에서도 자격을 ‘생물학적 여성’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젠더를 공격하는 극우는 이런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차용하고 있다. 극우는 여성 차별 개선 요구와 정책에 반대하면서 그것이 “남성 역차별”을 부른다고 하더니, 이제는 트랜스젠더 인정이 “여성 역차별”을 부른다고 한다. 임신중지 권리를 공격하는 극우가 “여성 인권” 운운하는 것은 위선적이지만, 이는 한편으로 페미니즘 운동 내부의 분열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성 차별과 트랜스젠더 차별은 둘 다 계급 사회(자본주의)가 차별의 원천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 제도가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체제를 수호하려는 지배계급과 극우가 강화하려는 전통적 가족과 젠더 고정관념은 보통 여성과 트랜스젠더 모두에게 그리고 보통 남성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여성과 트랜스젠더의 권리가 상호배타적이기는커녕 이들은 공통의 적에 맞서 싸우는 것이 이익이다.

더 일반적으로, 차별 강화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킨다. 노동계급의 한 쪽의 조건이 침해받으면 다른 쪽의 조건도 결국 침해받게 된다. 트랜스젠더 해방을 위한 투쟁은 우리 모두의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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