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파병은 팔레스타인 억압에 가담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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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연대 지지자들은 한국군 파병에도 반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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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은 곧 참전이다
이재명 정부는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방부 실사단은 이미 중동 출장을 다녀왔고, 청와대는 ‘비전투 수색·구조 부대’ 같은 선택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말은 조심스럽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트럼프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채, 파병의 명분과 형식을 찾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 눈속임이 시작된다. ‘비전투’라는 수식어다. 그러나 전쟁 중인 해역에 군함을 보내 미군 주도의 작전 체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그 부대가 총을 먼저 쏘든 쏘지 않든 참전이다. 이란 정부는 작전의 성격과 무관하게 호르무즈 해협 내 모든 외국군의 군사적 개입을 침략 가담으로 간주하겠다고 이미 못 박았다. 전쟁의 한쪽 당사자가 적대 행위로 규정하는 행동을 우리가 ‘비전투’라고 부른다고 해서 비전투가 되지는 않는다. 2020년 청해부대의 작전 범위를 슬그머니 호르무즈까지 넓힌 전례가 보여 주듯, 파병의 문을 일단 열면 그 성격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필요에 따라 언제든 바뀐다.
게다가 이 파병은 단순한 해상 경비가 아니다.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군사적 통제는 이란을 상대로 한 미국의 전쟁 계획에서 핵심 고리다. 해협을 ‘열어 둔다’는 것은 곧 이란이 가진 거의 유일한 대응 수단을 무력화하는 것이며, 그것은 이란에 대한 봉쇄와 압박을 완성하는 행위다. 한국군은 그 봉쇄망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미국의 전쟁과 이스라엘
“우리는 미국의 요청을 받은 것이지 이스라엘을 돕는 게 아니다.” 이 항변은 두 번째 쟁점으로, 흔히 건너뛰기 쉬운 고리다. 그러나 이란을 상대로 한 이 전쟁은 처음부터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동 전쟁이다. 이란의 핵 시설과 군 지휘부를 타격한 것은 이스라엘이었고, 미국은 그 뒤를 받치다 직접 앞장섰다. 두 국가의 전쟁 목표는 동일하다.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군사적 우위에 도전할 수 있는 마지막 국가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오래전부터 이란을 ‘존재론적 위협’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이란이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과 레바논, 예멘의 후티 세력을 지원하며 이스라엘의 행동 반경을 제약해 왔기 때문이다. 이란이 무력화되면 그 제약이 사라진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미국을 끌어들여 이란을 치려 했고, 미국은 동맹국들을 끌어들여 그 부담을 분담하려 한다. 한국군 파병은 그 사슬의 맨 끝에 놓인다. 한국이 이란을 봉쇄하는 데 손을 보태면, 그 이득은 곧바로 이스라엘에 돌아간다. 트럼프의 요청에 응하는 것이 곧 네타냐후에게 제공하는 지원인 이유다.
이란 억압과 팔레스타인의 참상
세 번째 쟁점은 이런 질문이다. “이란 정권은 억압적이다. 이란을 옹호하는 것이 왜 팔레스타인 연대인가?” 이 질문은 그럴듯하지만 과녁이 잘못됐다. 파병 반대는 이란 정권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이란 노동자와 여성, 소수민족을 억압하는 정권을 옹호할 이유는 없다. 파병 반대는 이스라엘과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우리가 가담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그 전쟁이 가져올 결과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명백하다. 이스라엘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자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굶기고, 폭격하고, 몰아내고 있다. 국제 기구의 어떤 압력도 이스라엘을 멈추지 못했다. 그나마 이스라엘이 계산해야 했던 유일한 변수는 지역 내 군사적 대항 세력과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운동이었다. 이란 전쟁은 그 변수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이다. 이란이 꺾이면 이스라엘은 가자에서, 서안지구에서, 레바논에서 더 마음껏 행동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란 전쟁의 승리는 곧 다음 학살의 예고다.
따라서 한국군의 호르무즈 파병은, 명분이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 억압의 측면 지원이다. 가자의 아이들을 위해 거리에 나섰던 사람들이 이 파병에 침묵한다면, 그것은 앞문에서 학살을 규탄하면서 뒷문으로 학살자에게 배를 보내 주는 것과 같다.
파병은 한국 대중의 이익과 무관하다
팔레스타인 연대의 논리에 더해, 파병은 한국의 억압받는 대중 자신에게도 재앙이다. 이재명 정부는 ‘에너지 수송로 보호’를 말한다. 그러나 호르무즈 해협을 위험하게 만든 것은 이란이 아니라 이란을 상대로 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이다. 전쟁을 확대하는 데 가담하면서 수송로가 안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불에 기름을 부으며 불이 꺼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이란은 파병 시 사우디아라비아, UAE, 카타르 등 걸프 지역의 한국 자산과 노동자를 공격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곳에는 수만 명의 한국인이 일하고 있다. 파병은 그들을 인질로 내주는 일이다.
파병은 또한 한국군 군복을 입은 노동계급 청년을 무관한 전장에 내보내는 일이다. 이 전쟁에서 한국 대중이 얻을 것은 없다.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얻는 것은 동맹국들의 참전이 주는 정당성이고, 이스라엘 아류 제국주의자들이 얻는 것은 자유로운 손이다. 한국인이 얻는 것은 중동에서 ‘미국의 용병’이라는 낙인과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을 원한이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과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지난 3년 동안 가자 학살과 서안지구 폭력에 맞서 거리로 나섰다. 그 운동의 힘은 도덕적 분노에서 나왔지만, 그 분노를 실제 결과로 바꾸려면 학살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를 겨눠야 한다. 그 장치는 이스라엘 정부 하나가 아니다. 이스라엘에 무기를 대는 미국, 미국의 전쟁을 뒷받침하는 동맹국들, 그리고 그 동맹의 요청에 군함을 보내려는 우리나라 정부다.
호르무즈 파병 반대는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외연 확장’이 아니라 그 운동의 본령이다. 학살에 반대한다면 학살자를 강화하는 전쟁에 반대해야 하고, 그 전쟁에 우리 정부가 가담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국회 동의 절차가 남아 있고, 부대 지정에 몇 주가 걸린다. 그 시간은 우리가 파병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다.
한국군은 이란과 오만의 바다에 가서는 안 된다. 이란 정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자와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란의 보통 사람들, 걸프의 한국 노동자들과 군복 입은 우리 노동계급 청년들을 위해서다. 미국의 전쟁에 우리의 이름을 빌려주지 말자. 그리고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 지지자들과 함께 외치자. “Not in Our Name!”
이 기사를 읽은 후에 “이란 약화와 팔레스타인의 자유”를 읽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