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약화와 팔레스타인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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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읽기 전에 “한국군 파병은 팔레스타인 억압에 가담하는 짓이다 — 팔레스타인 연대 지지자들은 한국군 파병에도 반대해야 한다”를 읽으시오.
이란 정권을 옹호하지 않고도 이란 전쟁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과의 전쟁에서 이기면 팔레스타인인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는다. 더 나빠진다. 그러나 한국군 파병 반대 논리에서 가장 약해 보이는 고리가 바로 ‘이란 약화가 곧 팔레스타인 억압 강화’라는 인과관계다. 파병 찬성론자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내부에서도 이런 반론이 나온다. “이란 정권은 팔레스타인을 이용해 왔을 뿐이다. 이란의 대리 세력 지원은 팔레스타인인에게 해방이 아니라 더 긴 고통을 안겨줬다. 그런 이란이 꺾인다고 팔레스타인이 더 나빠질 이유가 무엇인가?”
이 반론은 진지하게 다룰 가치가 있다. 그 안에 부분적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은 틀렸다. 이란 정권에 대한 평가가 어느 만큼 냉혹하든, 그 평가만으로 전쟁의 효과가 도출되지는 않는다. 부분적 진실이 어디까지이고 어디서부터 오류가 시작되는지를 짚어야 한다.
반론들
반론을 가장 강한 형태로 정리하면 다음 네 가지다.
첫째, 이란 정권에 팔레스타인은 대의가 아니라 도구다. 국내에서는 노동자 파업을 탄압하고 히잡 시위에 나선 여성을 죽이면서 대외적으로는 ‘저항의 축’을 자처하는 것은 정권의 정당성을 팔레스타인의 비극에서 빌려오는 것이다.
둘째, 이란의 무장 세력 지원은 팔레스타인의 투쟁을 지역 패권 경쟁의 하위 변수로 만들었다. 2023년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은 가자 학살을 ‘이란과의 전쟁’으로 포장할 수 있었고, 미국 등 서방 정부는 그 포장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란과의 연결 고리가 팔레스타인 투쟁의 정당성을 잠식한 것이다.
셋째, 이란은 정작 가자가 불탈 때 나서지 않았다. ‘저항의 축’은 헤즈볼라를 소모품으로 썼고, 시리아에서는 민중 봉기를 짓밟는 데 그 무력을 썼다. 팔레스타인인이 이란 덕분에 얻은 것은 무엇인가?
넷째, 아랍 정권은 ‘이란의 위협’을 핑계로 이스라엘과 손잡았다. 이란이라는 변수가 사라지면 아랍 정권이 이스라엘에 붙을 명분도 사라진다.
이 네 가지 가운데 앞의 세 가지는 참말이다. 이란 정권이 냉소적이고, 위선적이며, 팔레스타인인의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첫째 오류: 두 주장의 혼재
첫째 반론은 ‘이란은 팔레스타인의 좋은 동맹이다’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그러나 노동자연대의 파병 반대론이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장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팔레스타인인의 처지는 더 나빠진다’는 것이다. 이 둘은 다른 명제다.
이란이 팔레스타인의 친구가 아니라는 것과, 이란을 굴복시키는 전쟁이 팔레스타인의 적을 강화한다는 것은 동시에 참일 수 있다. 실제로 그렇다. 반론은 이란 정권의 도덕적 결함을 근거로 전쟁의 효과를 예측하려 하지만, 전쟁의 효과는 정권의 도덕성이 아니라 힘의 관계가 결정한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이 전쟁에서 이기면 누가 강해지는가? 이란 민중이 아니다. 팔레스타인인이 아니다. 강해지는 것은 이스라엘과 미국이다. 이 단순한 사실 앞에서 이란 정권의 위선은 아무런 논리적 가치도 갖지 못한다.
둘째 오류: 억압의 원인을 저항에서 찾음
‘이란의 대리 세력 지원이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연장했다’는 주장은 그 안에 숨은 전제를 갖고 있다. 무장 저항이 없었다면, 또는 이란의 지원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의 억압이 완화됐으리라는 전제다. 이 전제는 역사적 사실로 반박된다.
오슬로 협정 이후 1990년대와 2000년대, 팔레스타인 당국(소위 ‘자치정부’)은 이스라엘과 ‘안보 협력’을 했고 무장 저항을 억눌렀다. 그 시기에 서안 식민 정착자는 갑절 이상으로 늘었고, 이스라엘은 2008년, 2012년, 2014년 가자를 폭격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을 말살하려 하며 밀어내는 이유는 이란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인이 그 땅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온주의 정착민 식민주의의 논리는 저항이 있든 없든 작동한다. 저항이 없으면 더 조용히 작동할 뿐이다.
이스라엘이 가자 학살을 ‘이란과의 전쟁’으로 포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포장지를 문제 삼아 내용물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란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다른 포장지를 찾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 전에는 ‘테러와의 전쟁’이, 그 전에는 ‘안전 보장’이 포장지였다. 억압의 명분을 제거하면 억압이 사라지리라는 생각은 억압자의 말을 너무 믿는 것이다.
셋째 오류: 이미 입증된 결과를 간과함
이 논쟁은 순전한 가설이 아니다. 지난 2년은 ‘이란의 지역 영향력이 약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실시간으로 보여 줬다.
2024년 가을 이스라엘은 헤즈볼라 지도부를 제거하고 레바논 남부를 초토화했다. 그해 겨울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면서 이란과 헤즈볼라를 잇는 보급선이 끊겼다. 반론의 논리대로라면 이 시기 팔레스타인인의 처지는 나아졌어야 했다.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영토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고, 서안에서는 병합을 향한 조치들이 가속됐으며, 가자에서는 기아가 무기로 사용됐다. 이스라엘 정치인들은 “중동을 다시 그린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제약이 사라지자 이스라엘은 자유로워졌고, 그 자유는 팔레스타인인을 향했다.
이것은 예측이 아니라 관찰이다. 이란이 완전히 꺾인 뒤 팔레스타인이 나아지리라고 기대한다면 지난 2년의 경험을 무시하는 것이다.
넷째 오류: ‘이란의 위협’이 사라지면 아랍 정권이 돌아서리라는 환상
아랍 정권이 이란을 이유로 이스라엘과 손잡았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이유가 (핑계일 뿐이지만) 사라지면 아랍 정권이 팔레스타인 편에 서리라는 생각은 틀렸다. 걸프 왕정이 이스라엘과 손잡은 진짜 이유는 이란이 아니라 미국이다. 그들의 안전 보장은 미국에 달려 있고, 미국은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그들에게 요구한다. 이란이 사라지면 그 요구는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커진다. 저항할 명분이 하나 더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패배가 가져올 지역 질서는 미국·이스라엘·걸프 왕정의 삼각 동맹이 확고해진 질서다. 그 질서 안에서 팔레스타인의 자리는 없다. 이미 그 질서의 밑그림에는 가자를 부동산 개발 부지로 보는 접근과 팔레스타인인을 다른 나라로 ‘이주’시키는 구상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이란 정권을 옹호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여기에 이 논쟁의 핵심이 있다. 반론은 파병 반대론자를 ‘이란 옹호자’로 몰아넣으려 한다. 비록 그런 자들도 있긴 하지만, 이러한 규정을 거부해야 한다.
이란 정권은 이란 민중의 적이다. 이란 정권은 팔레스타인의 친구도 아니다. 그러나 이란 정권을 굴복시키거나 무너뜨리는 것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폭격과 전쟁이라면, 그 결과는 이란의 민주화가 아니라 이라크식 파국이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을 지지한 사람들도 “사담 후세인은 독재자”라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그 사실은 참이었지만, 그로부터 “침공은 이라크인에게 좋다”는 결론을 끌어낸 것은 오류였다. 지금 반론은 같은 구조를 반복한다. ‘이란 정권은 팔레스타인을 이용한다’는 사실에서 ‘이란을 꺾는 전쟁은 팔레스타인에 나쁘지 않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진정한 동맹은 이란 정권이 아니다. 그것은 2011년 광장에 나왔던 이집트 청년과 노동계급 대중이고, 2019년 거리를 메웠던 이라크와 레바논의 청년이며, 히잡 자유화를 외친 이란 여성이다. 이 모든 대중 저항을 이란 정권은 두려워하고 탄압했다. 그리고 미국과 이스라엘도 똑같이 두려워하고 탄압했다. 이 지역에서 억압적 정권과 제국주의 열강은 대중 저항 앞에서 한편이다. 이란 정권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이란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그 두 세력 모두에 반대하는 유일하게 일관된 입장이다.
결론
‘이란 약화가 곧 팔레스타인 억압 강화’라는 명제는 논쟁적이다. 그러나 논쟁적이라는 것은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이 명제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이란 정권의 위선을 근거로 삼지만, 정권의 위선은 전쟁의 효과를 바꾸지 못한다. 제약에서 풀려난 이스라엘이 무엇을 하는지는 지난 2년이 이미 보여 줬다. 레바논과 시리아에서 실증된 그 결과는 이란을 어떻게 평가하든 달라지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이란 정권의 변호인이 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란 정권을 경멸한다는 이유로 그 정권을 폭격하는 제국주의 전쟁에 눈감는다면, 그것은 팔레스타인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억압자를 위한 것이다. 한국군 파병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서도 바뀌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