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병 반대:
지배계급을 설득할 수 있다는 발상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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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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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파병 반대 운동들 가운데 반미자주파와 주류 엔지오가 시작한 운동은 무게중심이 대정부 호소와 민주당 설득에 있다. 정부를 향해 ‘국민을 믿고 파병을 거부하라’고 촉구하고, 파병은 ‘진정한 국익’이 아니라며 설득을 시도한다.
정부가 미국의 파병 요구를 직접 거부하기 어려우니, 여당이 국회에서 파병 반대 결의안 채택이나 정부 파병안 부결 등을 통해 힘을 발휘해야 한다는 주장도 흔하다.
9월 11일 진보당·조국혁신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민주당과 함께 민중전선 정당들)은 국회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국회는 파병 반대 결의안을 조속히 통과시켜 정부의 위험한 선택을 막고, 대한민국이 이 전쟁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이란 전쟁 파병 문제에서 민주당 정부를 설득·견인한다는 전술은 명백한 한계가 있다.
파병, 한국 지배계급의 중대한 이익이 걸린 사안
이재명 정부는 이란 전쟁 참전을 지렛대 삼아 원유 수송로 안정, 한미 통상 협상, 핵잠수함 도입 등 한국 자본주의의 핵심 이익이 걸린 사안들을 해결하려 한다.
특히, 지배계급은 한국을 소제국주의 강국으로 도약시키고자 한다. 대미 협상력뿐 아니라 국제적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키우려는 생각이 있다.
이렇듯 중대한 ‘국익’이 걸린 문제에서 정부와 여당을 설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공상이다.
지금도 자본가들과 우파는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친기업 언론들은 국익을 위해 파병이 불가피하다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간보기 외교”, “늑장 대응” 운운하며 파병 결정을 독촉한다.
민주당은 벌써 네 차례 집권한 정당이다. 그동안 자본가, 군부, 비선출 국가 관료와 민주당 사이에 거의 국힘 못지않은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이재명 정부도 한국의 자본 축적과 국가 위상 제고를 국정 수행의 중심에 놓고 있다. 왼쪽을 달래는 일도 하지만(지배계급 입장에서는 그것이 민주당 정부의 핵심적 유용성이다), 지배계급 전체의 이익을 지키고 관료와 군부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그러기 위해 우파와 타협을 한다.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 김영훈을 노동부 장관에 앉혀 놓고 노란봉투법을 후퇴시키는 것이나, 군부 출신이자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을 지낸 강신철을 국방장관에 임명한 것이 이런 모순의 사례다.
역대 모든 민주당 정부는 지지층의 여론과 좌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익”을 이유로 파병을 강행했다. 그 경험들에서 얻은 노하우가 현재 이란 전쟁 파병을 추진하는 데 활용되고 있을 것이다.
가령 이라크 전쟁 파병으로 위기에 빠진 노무현 정부가 파병 직후 국가보안법 폐지론을 이용해 반미자주파를 포섭했듯(실제로는 보안법에 전혀 손대지 않았다), 이재명 정부도 좌파들의 반발을 무마할 기만책을 무기고에서 꺼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가령 개헌 카드).
지난 9월 4일 이재명이 진보 단체 지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연 간담회도 기만책이었다. 당시 이재명은 진보 단체 지도자들에게 파병에 관해 “진척된 게 없다”고 말했지만, 다음 날 국방부 파병 실사단이 중동으로 날아갔다.
그런 이재명 정부를 설득·견인하려는 전술은 성공하지 못한다. 좌파가 정부에 끌려다니게 되고, 파병 반대 대중에게 헛된 기대와 혼란을 안겨 줄 뿐이다.
정부를 겁먹게 해야 한다
현재 주요 좌파들은 파병 반대 운동에 충분히 동원하지 않고 있다. 지난 12일 파병반대 평화행동 시민대행진에 주최 측 추산으로도 겨우 1,000명이 참가했다. 진보당의 조직력만 생각하더라도 턱없이 작은 규모다. 규모뿐 아니라 메시지도 정부를 향한 응원과 촉구에 머물렀다.
그 정도로는 정부·여당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파병 반대 운동의 무게중심을 대정부 호소와 국회 대응에 놓게 되면 자기 제한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결과 파병을 저지할 유일한 동력인 대중 투쟁을 크게 건설하기는커녕 그 반대의 역학이 생겨난다.
게다가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응원을 보내는 파병 반대 운동은 파병이 결정될 경우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우리 편이라고 믿었던 정부가 배신했을 때 사람들은 상실감과 환멸을 느끼고 사기가 급락할 것이다.
지배계급을 설득하려는 책략의 문제점
파병 문제에서 드러나는 주요 좌파들의 약점은 더 일반적인 정치 책략의 문제와 연결돼 있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는 자본가와 정부를 설득하려는 책략을 여러 차례 비판했다.
물론 트로츠키는 자본가와 정부에 압력을 가해 일부 개혁과 양보를 얻을 수 있고 흔히 그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일반화해 지배자들의 중대한 계급적 이익이 걸린 문제에서도 압력과 설득으로 정책을 바꾸게 하려는 책략에는 그 위험성을 이유로 반대했다. “부르주아지의 운명 전체가 걸린 문제에서는 ‘압력’으로 그들이 정책을 바꾸게 할 수 없다.”
민중전선 전략을 비판하면서 트로츠키는 좌파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정당을 견인할 수 있다는 생각이 공상이라고 강조했다. 오히려 좌파가 자유주의자들에게 끌려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지배계급의 통치 노하우
또한 트로츠키는 지배계급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경고했다. “지배계급은 방대한 세계적 경험, 세련된 계급 본능, 다양한 정보 수집 기관을 갖고 있다.”
지배계급은 수세기 동안 국가를 운영하고, 의회를 이용하고, 무력으로 대중 저항을 탄압하고,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포섭해 대중의 불만을 달래고, 온갖 수단으로 대중을 기만하는 등 지배와 통치의 노하우를 축적해 왔다.
좌파가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과 기업주 등 지배자들이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전혀 대칭적인 관계가 아니다. 선출된 정부와 국가 기구는 계급들 사이에 중립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정부는 자본 축적과 자국 자본의 경쟁력 유지에 이해관계를 갖기 때문에, 개별 자본가들과 충돌할 때조차 자본주의 체제와 자본가 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특히 전쟁과 같은 결정적 문제에서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정부의 판단을 믿거나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데 자신의 전술을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지배계급을 설득하려는 책략을 비판했다. 그 책략에 따르면, “사회의 상층부, 또는 그 가운데 선의를 가진 사람들만이라도 설득하려 한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을 겁먹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결국 “단호한 정치적 반대 대신 일반적인 중재, 정부와 부르주아지에 맞선 투쟁 대신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설득하려는 시도”가 중시된다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적했다. 즉, 계급투쟁을 약화시키는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다.